< K나이츠 길드 4 >
진대호는 굳었던 표정을 풀었다. 그리고 최대한 부드럽게 웃으며 말했다.
“동료를 아끼는 마음이 전혀 없는 모양이네. 아니면 상황 파악이 잘 안 되나?”
현석은 슬쩍 뒤를 돌아봤다. 저 멀리에서 백여 명의 플레이어들이 포위망을 구축하며 일행에게 다가가는 모습이 보였다.
항상 발동되는 심안을 통해 확인해보니 50레벨에서 60레벨 사이의 플레이어들이었다.
레벨 격차가 큰 것도 아닌데 저렇게 수가 많이 차이나면 이쪽이 압도적으로 불리한 게 사실이었다.
게다가 아직 자세히 확인해보지는 않았지만 저들 중 스킬을 보유한 자들도 있을 것이다.
어떤 스킬을 가졌느냐에 따라 다르긴 하겠지만 어쨌든 스킬이라는 것 자체가 싸움을 상당히 까다롭게 만든다.
그러니 겉으로 보이는 상황 자체는 현석 쪽이 불리한 정도가 아니라 그냥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현석은 그걸 보고도 전혀 동요하지 않았다.
이쪽은 잘 짜여진 파티였다. 압도적인 탱커가 있었고, 뛰어난 힐러가 있다. 거기에 날카로운 딜러까지.
하지만 그것만이라면 현석도 이렇게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쪽에는 잘 짜여진 파티만 있는 게 아니었다.
플레이어가 아니면서도 플레이어보다 더 강한 임형석이라는 존재가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임형석이 참지 못하고 그대로 뛰쳐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걸 본 현석이 피식 웃고는 그쪽으로 향한 신경을 뚝 끊어 버렸다.
현석은 이제 오로지 진대호 쪽만 신경 썼다.
진대호의 표정이 점점 변하는 모습을 보는 것도 제법 재미 있었다.
처음에는 자신만만함이 가득했고, 임형석이 뛰쳐나가 돌진하는 걸 볼 때는 그것이 비웃음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지금 진대호의 얼굴은 경악으로 가득 차 있었다.
“뭐, 뭐야!”
그 말 밖에는 할 말이 없었다. 이 황당함을 어찌 말로 설명할 수 있으랴.
몸이 완벽하게 치료된 데다가 현석과의 싸움을 통해 한 단계 진보한 임형석의 힘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했다.
포위망 중 가장 플레이어가 많이 밀집된 곳으로 돌진한 임형석은 어깨로 한 명의 가슴을 들이받았다.
콰직!
그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기절한 채 뒤로 날아갔다.
그 자리를 차지한 임형석은 사방으로 주먹과 발을 뻗었다.
뻐버버버버벅!
그 위력이 어찌나 강한지 한 사람당 한 방이면 충분했다. 맞은 자리의 뼈가 부러지면서 다들 나가 떨어졌다.
“크아아악!”
“으아악!”
비명이 난무했다. 부러진 자리를 붙들고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는 플레이어들이 수두룩했다.
그리고 정신을 잃은 채 널브러진 플레이어들도 계속 늘어났다.
임형석은 양 떼 사이를 헤집고 다니는 한 마리 맹수 같았다.
사나운 기세를 풀풀 풍기며 플레이어들을 때려눕혔다.
플레이어들이 제대로 대응하기 시작한 건 임형석에게 서른 명이 넘게 당한 뒤였다.
남은 사람 중 절반은 포위망을 유지하며 전투태세에 들어간 세 여인을 향해 조금씩 다가갔다.
그리고 나머지 절반이 조금 흩어진 채 조직적으로 임형석을 상대하기 시작했다.
물론 아무 소용없었다.
임형석은 자신에게 달려드는 자들을 보자마자 환하게 웃으며 더욱 빠르고 강하게 움직였다.
빠악! 빠악! 빠악!
여전히 한 방에 한 명씩 나가 떨어졌다. 이번에 나가 떨어진 자들은 더 큰 부상을 입어야만 했다.
뼈가 아예 박살이 났고, 고통 때문에 기절도 못하고 신음하며 바닥을 굴러다녔다.
플레이어들은 다들 무기로 싸웠는데도 임형석의 옷자락 하나 건드리지 못했다.
임형석과 싸우지 않는 나머지도 상황이 그리 좋지만은 않았다.
그들은 포위망을 구축한 채 집요하게 공격을 했는데, 어떤 방식으로 다가가도 양세희의 방패에 모조리 막혀 버렸다.
양세희의 방패는 마치 모든 공격을 튕겨내 버리는 철벽 같았다.
그 와중에 은밀하게 파고드는 류지혜의 날카로운 단검은 그들에게 공포를 선사하기 충분했다.
다만 워낙 수의 차이가 많이 나는 데다가 이쪽은 임형석 같은 파괴력은 없기에 싸움이 좀 길어질 뿐이었다.
포위망을 구축한 플레이어들은 싸움이 길어지면 결국 세 여인이 지쳐 제풀에 나가 떨어질 거라 여겼다.
하지만 아무리 싸움이 길어지고 조금씩 격렬해져도 세 여인은 전혀 지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녀들의 체력은 류혜연이 꾸준히 채워주고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시간 역시 그들의 편이 아니었다.
임형석이 플레이어들을 쓰러뜨리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이대로 조금만 더 있으면 자신이 상대하던 플레이어들을 몽땅 쓰러뜨린 임형석이 이쪽으로 올 것이다.
임형석의 싸움을 지켜보던 진대호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이쪽이 더 불리해질 수도 있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그는 순간적으로 고민을 했다. 이대로 현석을 제압하는 게 나을지 아니면 저쪽으로 흑기사단을 보내 현석의 일행을 제압하는 게 나을지 말이다.
고민은 짧았다. 어쨌든 지금 필요한 사람은 현석이었다. 어차피 인질을 잡을 생각도 없었다. 사로잡기만 하면 써먹을 수 있는 방법이야 얼마든지 있었으니까.
진대호는 가볍게 손짓했다.
그리고 그 신호를 받은 50명의 플레이어, 흑기사단이 일제히 움직였다.
현석은 그때까지 가만히 서서 사방으로 마력만 뿌려뒀다. 이건 아주 중요한 작업이었다.
빠르게 다가온 흑기사단을 향해 현석이 손가락총을 만들어 겨눴다.
그리고 입으로 총소리를 냈다.
“빵!”
장난 같지만, 장난이 아니었다. 현석은 입으로 소리를 내며 거기에 특별한 패턴의 마력을 담아 날렸다.
그 마력이 주변에 깔린 다른 마력과 만나 폭발하듯 퍼져 나갔다.
화아아악!
마치 현석을 중심으로 바람이 부는 듯했다. 사방으로 쏟아져나간 바람이 주변 풀들을 미친 듯이 흔들었다.
그리고 달려들던 흑기사단이 일제히 멈췄다.
“뭐, 뭐야! 뭣들 하는 거야! 장난할 시간 없어!”
진대호가 발작하듯 외쳤다. 하지만 그도 지금 상황이 상당히 심각하다는 건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는 것이 그 증거였다.
물론 그는 이 자리에서 도망칠 수 없었다. 어느새 다가온 현석이 그의 목을 쥐고 있었으니까.
“커억!”
진대호가 두 손으로 현석의 손과 손목을 붙잡았다. 현석의 손은 그의 목을 꽉 움켜쥐고 있었다.
“커, 커억! 수, 숨이……!”
현석은 진대호의 몸으로 마력을 흘려 넣었다. 나중에는 플레이어들간의 싸움에서 상당히 보편적으로 쓰는 수법이지만 지금은 아무도 모르는 수법 하나가 펼쳐졌다.
“크어어억!”
진대호는 고통에 몸부림쳤다. 아니, 몸부림치려고 했다. 하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다.
털썩.
현석이 손을 놓자 진대호가 바닥에 쓰러졌다.
진대호는 두려움과 분노가 뒤섞인 눈으로 현석을 노려봤다.
하지만 현석은 더 이상 진대호에게는 신경도 쓰지 않고 몸을 돌렸다.
지금 현석이 진대호에게 한 것은 몸에 흐르는 마력을 동결시킨 것이다.
유효시간이 1시간 남짓이라는 것만 빼면 아주 효과적인 제압법이었다.
바늘호랑이의 털과는 달리 정신은 멀쩡하게 두고 몸만 마비시킬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물론 플레이어에게만 쓸 수 있는 수법이었다.
현석은 여전히 서 있기만 한 50명의 흑기사단을 보며 손뼉을 쳤다.
짜악!
그냥 손뼉 치기가 아니었다. 마력과 마력을 각 손에 담아 부딪치게 만드는 방식이었다.
거대한 마력 파동이 주변을 휩쓸고 지나갔다.
그러자 50명의 흑기사단이 몸을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의 눈빛은 죽어 있었다. 마치 정신이 나가 몸만 움직이는 사람들 같았다.
현석은 저 멀리 산을 쳐다보며 명령했다.
“잡아.”
현석의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흑기사단이 산을 향해 달려갔다.
그걸 지켜보던 진대호가 멍한 표정을 지었다.
“대체, 대체 이게…… 설마 배, 배신?”
그럴 리가 없었다. 흑기사단이 배신하다니. 그들은 절대 자신을 배신할 수 없는 놈들이었다. 그런 사람만 골라서 자신의 심복으로 삼았다.
현석은 굳이 진대호의 의문을 풀어주지 않았다.
저들은 배신한 게 아니라 힐링포션 때문에 이렇게 된 것이다.
중요한 건 힐링포션의 재료가 되는 마력수였다.
진대호가 알아낸 힐링포션의 레시피는 사실 진짜 레시피에서 살짝 변형된 것이었다.
그건 회귀 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15년 후에 일어나게 될 엄청난 사건 덕분에 알려진 힐링포션 레시피이기도 했다.
일명 꼭두각시 폭동이라 불리는 사건이었다.
어쨌든 이 레시피에 의해 만들어진 힐링포션을 많이 먹으면 힐링포션의 주재료가 되는 마력수에 포함된 마력에 따라 그를 꼭두각시로 만들 수 있었다.
요점은 마력수를 누구의 마력을 담아 만들었느냐와 얼마나 많은 힐링포션을 마셔서 자신의 마력에 마력수의 마력이 밀접하게 간섭을 했느냐였다.
지금 흑기사단은 그 두 가지를 아주 충분히 충족했기에 현석의 꼭두각시가 된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아주 큰 단점이 존재한다.
꼭두각시가 된 자들이 자신의 한계를 모른다는 점이었다.
마력을 마구 퍼 쓰게 되어 평소보다 엄청나게 강력한 힘을 발휘하지만 당연히 금세 마력이 말라비틀어지게 된다.
그리고 이지가 상실되기 때문에 복잡한 명령에 따르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하지만 장점도 있었다. 명령을 꼭 말로 내릴 필요가 없었다.
마력간섭에 의해 조종하는 것이기 때문에 의지만 마력에 담아 날려도 죽을 때까지 그걸 수행하게 된다.
흑기사단은 그동안 빠르게 성장했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어마어마한 속도로 산을 타고 올라갔다.
그리고 거기에 숨어서 이쪽을 지켜보고 있던 세 명의 플레이어들과 치열하게 싸웠다.
‘쉽게 결판이 나진 않겠군.’
현석은 저들이 쉽게 여기서 몸을 빼지 못할 거라고 판단했다. 그래도 지금 상황은 서둘러서 나쁠 것 없었다.
“일단…… 하나씩 정리해 볼까?”
현석은 우선 세 여인을 거칠게 몰아붙이고 있는 플레이어들을 향해 몸을 날렸다.
* * *
“후욱! 후욱! 이거…… 하도 오랜만이라 그런지 숨이 좀 차네.”
임형석은 그렇게 말하며 쓰러진 플레이어 한 명의 등에 걸터앉아 주변을 둘러봤다.
한 명도 제대로 서 있는 사람이 없었다.
절반 이상을 임형석이 처리했다. 아니, 대부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임형석은 살짝 아쉬운 마음으로 좀 떨어진 곳에서 앉아 쉬고 있는 세 여인을 바라봤다.
‘쯧, 기분에 취해서 너무 날뛰었어. 때려 부수는 것보다 지키는 게 우선인데.’
결과적으로는 그게 일행을 지키는 셈이 되었다. 임형석이 워낙 야수처럼 날뛰는 바람에 K나이츠 길드의 플레이어들이 제대로 싸우질 못했으니까.
하지만 임형석은 자신의 마음에 있는 야수를 좀 더 길들일 필요가 있다고 느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오늘 한 것보다 훨씬 위험하고 치열한 싸움에 뛰어들고 싶은 마음이 굴뚝처럼 쭉쭉 자라났다.
“그나저나…… 저긴 어떻게 되어 가고 있으려나…….”
임형석은 고개를 돌려 산 위를 바라봤다.
멀어서 정확히 보이진 않았지만 산중턱에서 치열하게 싸우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중심에 있는 사람이 바로 현석이었다.
현석은 임형석과의 싸움에 난입해 십여 명의 플레이어를 단숨에 박살 낸 다음 곧장 산으로 달려갔다.
임형석도 함께 가고 싶었지만 초인적인 인내력을 발휘해 참아냈다.
그에게는 싸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임무가 있었으니까.
임형석이 힐끗 고개를 돌려 류혜연을 바라봤다.
가만히 앉아 쉬고 있는 그녀의 자태는 마치 신이 빚어 놓은 듯 아름다웠다.
임형석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맺혔다.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그의 시선은 계속 류혜연에게 머물러 있었다. 다만 그가 가는 방향에 있는 사람은 진대호였다.
진대호의 몸이 꿈틀꿈틀 움직이고 있었다.
그 역시 뛰어난 플레이어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임형석의 힘을 당해낼 수는 없었다.
임형석은 진대호에게 다가가 그의 머리를 주먹으로 콱 내리쳤다.
“컥!”
외마디 비명과 함께 진대호가 축 늘어졌다.
그 무시무시한 일을 하는 순간에도 임형석의 시선은 여전히 류혜연에게서 떨어지질 않았다.
임형석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맺혀 있었다.
그리고 아래에서 그러고 있는 동안 위의 싸움도 막바지에 도달했다.
< K나이츠 길드 4 > 끝
ⓒ 김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