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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눈 뜨고 레벨업-92화 (92/326)

< K나이츠 길드 1 >

“끄응. 인정머리 없는 놈.”

임형석은 투덜거리면서도 기분 좋은 표정을 지었다.

이번엔 진짜 형편없이 깨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현석의 집 지하실은 그냥 어둡기만 한 게 아니었다.

그곳의 어둠은 모든 감각을 짓눌렀다. 참으로 기이했다.

반면 현석은 그런 어둠에도 더없이 익숙하게 임형석을 상대했다.

손발이 묶인 거나 다름없었으니 거기서 현석을 이길 수 있을 리 없었다.

그야말로 정신없이 당했다. 온몸의 뼈가 가루가 되는 게 이런 거구나 할 정도로 극심한 고통 속에서 싸움이 끝났다.

“이놈 딱 기다려라. 하루만 쉬면 이까짓 거 싹 나을 테니 그때 또 한 판 붙자.”

현석은 그런 임형석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어둠에 익숙해지시는 게 먼저인 것 같습니다만…….”

“원래 싸우면서 크는 거지. 뒈지게 맞다보면 익숙해지기 싫어도 익숙해질 수밖에 없는 법이야.”

그 말을 들으니 예전 자신이 어떻게 그 특별한 감각을 전수받았는지 떠올랐다.

생각해보면 참으로 고통스러운 나날이었다. 물론 아주 멋지게 극복해서 특별한 힘을 얻었다.

현석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임형석을 쳐다봤다.

그것을 자기 자신에게도 적용해서 말할 줄은 몰랐다. 진짜 한결같은 사람이었다.

현석은 살짝 걱정을 담아 말해주었다.

“제대로 치료받고 푹 쉬지 않으면 후유증이 남을지도 모릅니다.”

현석은 싸울 때만큼은 인정사정 두지 않았다. 아니, 사정을 봐줄 수가 없었다. 현석도 죽을힘을 다하지 않았으면 절대 이길 수 없었을 테니까.

임형석은 그런 현석의 말을 코웃음으로 넘겨 버렸다.

“지금까지 하루 이상 걸린 상처는 어릴 때 칼 맞은 거 빼고는 없다.”

잠깐 조직에 몸담았을 때 칼 든 놈 127명을 상대로 싸우면서 얻은 상처를 말하는 모양이었다.

예전에 임형석과 가장 가까워졌을 때 들은 말이었다. 임형석은 그걸 자랑하듯 말한 게 아니라 자조적으로 말했다.

그게 그의 인생에서 유일하게 후회하는 일이라고 말이다.

그때 얻은 상처가 끝내 그의 발목을 잡았고, 또 그때 일이 계속 그의 마음에 후회로 남아 마음을 무겁게 했다.

현석이 다시 한 번 임형석을 설득하려다가 멈칫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한쪽을 쳐다봤다.

현석의 시선 끝에는 대문이 있었다. 누군가가 찾아온 것이다.

안 그래도 양동욱으로부터 진대호에 대한 얘기를 들었는지라 K나이츠 길드와 관계된 놈들이 찾아온 줄 알았다.

한데 대문 앞을 서성이는 자들의 기척이, 아니 마력이 너무나 익숙했다.

“류혜연?”

현석의 중얼거림에 임형석이 뚱한 표정으로 물었다.

“그게 누군데? 갑자기 왜 여자 얘기를 하고 난리야?”

현석은 대문과 임형석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의 입가가 슬며시 올라갔다.

“기다리시죠. 같이 사는 애들이 온 거 같으니까.”

“같이 살아? 여기 너 혼자 사는 집 아니었어? 이렇게 썰렁한데? 같이 사는 애들이면 하숙이라도 하는 거야?”

현석은 밖으로 나가려다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임형석을 쳐다봤다. 그렇게 잠시 뜸을 들이다가 이내 입을 열었다.

“가족입니다.”

현석은 그렇게 말하고는 밖으로 나갔다.

임형석은 그런 현석의 뒷모습을 잠시 보다가 피식 웃었다.

“저런 표정도 지을 줄 아는 놈이었어? 내가 사람을 잘못 봐도 한참 잘못 봤네.”

잠시 후, 현석이 류지혜와 류혜연, 그리고 양세희를 데리고 나타났다.

임형석은 그녀들을 보자마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런 예쁜 아가씨들이랑 같이 살고 있었어? 허어. 이놈 다시 봐야겠는데?”

현석의 표정은 담담했다.

임형석은 그런 현석을 보며 답답한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튼 앞으로 계속 같이 살게 될 텐데 인사나 합시다. 난 임형석이라고 하고, 나이도 얼마 안 되니 호칭은…….”

“59.”

호칭 얘기를 하려는 순간 현석이 임형석의 나이를 얘기했다. 그러자 생각도 못했다는 듯 세 여인의 눈이 동그래졌다.

“하, 이 자식 진짜 분위기 깨는 건 아주 끝내주네.”

임형석은 그렇게 투덜거리고는 다시 세 여인을 보며 빙긋 웃어 주었다.

어쨌든 덕분에 분위기가 좀 풀렸다.

양세희가 가장 먼저 나서서 인사를 했고, 그 다음으로 류지혜가 마지막에 류혜연이 나섰다.

류혜연은 처음부터 계속 임형석을 관찰하듯 살피고 있었는데, 인사가 끝나자마자 얼른 임형석에게 물었다.

“할아버지, 어디 편찮으신 데 있으시죠?”

“하, 할아버지?”

임형석이 살짝 충격 받은 표정으로 류혜연을 바라봤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현석을 노려봤다.

하지만 이미 그렇게 결정이 된 걸 어쩌겠는가. 임형석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몸이 좀 욱신거리고 쑤시긴 하지만 이 정도야 자고 일어나면 금방…….”

류혜연이 금방이라도 눈물이 떨어질 것 같은 눈빛으로 임형석의 손을 덥석 잡고 고개를 살며시 저었다.

“그러시면 안 돼요. 아픈 건 방치하면 정말 큰일 날 수도 있어요.”

그 모습을 본 임형석은 자신이 뭔가 큰 죄라도 지은 것 같은 기분에 찜찜한 표정을 지었다.

‘이거 뭔가…… 기분이 묘하네.’

누군가 자신을 걱정해준다는 건 정말로 기분 좋은 일이었다. 하지만 왠지 그럴 필요 없는데 애써서 강요하는 느낌이 들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이런 경험이 없기에 뭔가 온몸이 간지러운 것 같기도 하고 말이다.

“어차피 같이 지내실 거라면서요? 괜찮죠?”

류혜연이 이번엔 현석을 바라보며 물었다.

임형석은 지금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이해하려 애썼다. 갑자기 왜 현석에게 그런 걸 묻는단 말인가.

하지만 그 궁금증은 즉시 풀렸다. 현석이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류혜연의 손이 뜨거워졌기 때문이다.

임형석은 깜짝 놀라 류혜연을 바라봤다. 그녀의 몸에서 마력이 움직이는 것 같았다.

사실 임형석은 플레이어가 아니기 때문에 마력을 정확히 감지할 수는 없었다.

그저 뭔가 요상한 느낌이 들 뿐이었다. 무시무시하게 단련된 그의 육감이 마력을 잡아내는 것이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현석처럼 정확한 흐름을 파악할 수는 없었다. 그저 마력을 쓰고 있구나, 마력을 그냥 갖고 있구나 정도만 알아낼 수 있을 뿐이었다.

류혜연의 손에서 일어난 뜨거운 열기가 임형석의 손으로 옮겨붙었다.

임형석의 눈이 커다래졌다. 그 뜨거운 열기가 팔을 타고 올라와 온몸을 휘젓기 시작한 것이다.

하마터면 당황해서 소리칠 뻔했다.

하지만 방안에 있는 누구도 동요하지 않는 걸 보고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말을 다시 꿀꺽 삼켰다.

그는 온몸을 돌아다니는 뜨거운 열기를 가만히 들여다봤다.

특이하게도 고통이 있는 부위를 지날 때 그곳이 아주 차갑게 식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몇 차례 열기가 지나가자, 그곳도 서서히 뜨겁게 달아올랐다.

임형석은 그제야 류혜연이 자신에게 뭘 하고 있는 건지 깨달을 수 있었다.

‘날 치료하는 거로구나!’

플레이어 중에서 치료 스킬을 가진 사람이 있다는 얘기는 들어봤다.

하지만 그걸 곧이곧대로 다 믿지는 않았다.

소문이라는 것은 대개 전달될 때 과장되기 마련이었다. 한 번 건널 때마다 살이 붙는 것이 당연한 일이니까.

한데 이렇게 직접 그런 사람을 눈앞에서 보게 될 줄이야.

임형석은 자신을 치료하는 류혜연을 가만히 바라봤다.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집중하는 그녀의 모습은 아름다운 걸 넘어서 성스럽기까지 했다.

그녀의 이마에 흐르는 땀방울은 지금 그녀가 얼마나 집중하고 있으며, 이 일이 그리 쉽지 않다는 걸 말해주고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을 위해 이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몇이나 있을까?’

어쩌면 그런 마음씨 때문에 이런 치료 스킬을 갖게 되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분명히 그럴 것이다.

류혜연의 치료는 생각보다 길게 이어졌다.

그건 치료하는 걸 지켜보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치료를 처음 받는 입장인 임형석도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로 분명했다.

임형석은 자신의 온몸이 뜨거워졌음에도 치료를 멈추지 않는 류혜연을 지그시 바라봤다.

자신의 손을 잡은 그녀의 손과 팔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점점 더 힘들어지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그녀가 왜 이러는지 누구보다 임형석 본인이 잘 알고 있었다.

예전 127명의 칼잡이와 싸울 때 얻은 상처 때문이었다.

그때 입은 상처가 정말 많았지만 치명적일 정도로 큰 상처는 몇 개 없었다.

한데 그 치명적인 몇 개의 상처가 문제였다.

아직도 그 후유증이 완벽히 사라지지 않았다. 이미 평생을 가져가야 할 거라고 받아들인지 오래였다.

한데 지금 그 부위에 류혜연이 보낸 뜨거운 열기가 맴돌고 있었다.

물론 거기는 아직도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하지만 아주 조금씩 뎁혀지고 있는 중이었다.

이대로 치료를 계속 받으면 완벽하게 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임형석은 고개를 저었다.

“이제 다 나은 것 같으니 그만 해도 될 것 같구나.”

임형석은 그렇게 말하며 류혜연의 손을 밀어내려고 했다.

하지만 류혜연이 손에 힘을 꽉 주며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아직 안 끝났어요. 할아버지도 아시잖아요.”

할아버지라는 말에 임형석이 점잖게 말을 정정해 주었다.

“아저씨라고 해주면 고맙겠는데…….”

“그럼 끝까지 치료를 받으세요.”

임형석은 난감한 표정으로 류혜연을 바라봤다. 그리고 도움을 요청하는 눈으로 주변에서 구경하는 사람들을 둘러봤다.

하지만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다들 응원하는 표정으로 류혜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현석만 빼고 말이다.

현석은 임형석을 보고 있었다.

그걸 본 임형석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 어디 마음대로 해 봐라. 이 고집불통 같으니.”

류혜연이 그런 임형석을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고마워요, 아저씨.”

“누가 누구한테 고맙다고 하는 건지…… 원.”

류혜연은 창백해진 얼굴로 더욱 환하게 미소 지었다.

임형석은 그 미소가 정말 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 더 아름다워보였다.

그렇게 치료는 계속되었다.

류혜연이 탈진해 쓰러질 때까지.

* * *

K나이츠 길드는 승승장구했다.

그 중심에는 진대호의 친위부대가 있었다. 일명 흑기사단이라 불리는 자들이었다.

그들이 착용한 아티팩트들이 대체적으로 검은색이었기에 얼핏 보면 검은 갑옷을 차려 입은 것 같았다.

하지만 그들의 수는 고작 50명에 불과했다. 나머지 플레이어에 대한 지원도 확실하긴 했지만 흑기사단만큼 빠른 성장을 바랄 수는 없었다.

물론 그렇다 해도 여타 길드의 플레이어들 보다는 훨씬 빠르게 성장했다.

하지만 그건 진대호의 목표치에 한참 미치지 못했다.

진대호는 자신의 사무실 책상에 앉아 손가락으로 탁자를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일을 타개할 방법은 딱 하나뿐이었다.

“힐링포션의 생산량을 대폭 늘리는 수밖에 없어.”

그리고 그러려면 힐링포션의 메인 재료인 마력수의 확보가 가장 중요했다.

“대체 이놈들은 뭘 하고 있는 거야?”

진대호가 짜증을 확 쏟아낸 순간 노크도 없이 사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그걸 본 진대호가 화를 내려는 순간 사무실로 들이닥친 사내가 소리쳤다.

“돌아왔습니다! 그놈이 돌아왔습니다!”

“누구? 설마 채현석?”

“네. 맞습니다. 채현석이 지금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래? 감시 철저히 하고 있지? 지난번처럼 놓치면 이제 말로 끝낼 일은 없을 거야.”

“물론입니다. 근처에 애들 쫙 깔았습니다.”

“가자. 일단 한 번 만나는 봐야지. 되도록 대화로 풀었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흑기사단 준비시킬까요?”

“뭘 물어? 당연한 걸. 생각보다 말이 통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는 거 너도 잘 알잖아.”

“예. 즉시 연락하겠습니다.”

흑기사단은 지금 단체로 던전을 휩쓸고 있는 중이었다. 힐링포션의 힘을 믿고 몸을 혹사시키며 레벨을 올리느라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러니 그들을 모으는 데도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그동안 현석을 낚기 위한 준비를 아주 착실히 해뒀다.

“양동욱은 어쩌고 있어?”

“집에서 한 발짝도 안 나오고 있답니다.”

진대호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서둘러.”

진대호의 단순한 명령에 사내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 밖으로 튀어나갔다.

“부디 우리 길드로 끌어들일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중얼거리는 진대호의 입가가 위로 비틀려 올라갔다.

< K나이츠 길드 1 > 끝

ⓒ 김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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