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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눈 뜨고 레벨업-91화 (91/326)
  • < 과거의 은인 3 >

    임형석은 집으로 가지 않았다. 아니, 갈 수가 없었다. 현석이 제법 간곡히 부탁했기 때문이다.

    이미 한 번 손속을 나누면서 현석을 마음속으로 크게 인정하고 있었기에 현석의 부탁을 듣고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크게 무리한 부탁만 아니라면 얼마든지 들어줄 수 있었다.

    두 사람은 읍내에 있는 유일한 커피숍에 마주 앉았다.

    문 닫을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알바생이 살짝 눈치를 주긴 했지만 임형석이나 현석이나 그런 것에 눈치를 보고 신경을 쓰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 진짜 날 찾아온 목적이 뭔가?”

    임형석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도 산전수전 다 겪어온 사람이었다.

    현석에게 수련 외에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것 정도는 얼마든지 눈치챌 수 있었다.

    “어르신의 목표가 뭡니까?”

    “내 목표?”

    임형석은 갑자기 말을 돌리기라도 하듯 묻는 현석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이내 그의 입에서 강한 힘을 담은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세계최강.”

    현석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이 저 말을 했다면 코웃음부터 쳤을지 모른다. 하지만 임형석이 저 말을 하니 다가오는 무게감 자체가 달랐다.

    “이미 세계최강 아닙니까?”

    현석이 슬쩍 웃으며 물었다. 오늘 일만 해도 그렇다. 만일 그곳이 어둠 속이 아니었다면 현석이 이렇게 그와 팽팽히 맞설 수 있을 리 없었다.

    아마 현석이 지금보다 20레벨쯤 더 올리면 상대가 될까?

    하지만 임형석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오늘 싸움은 내 패배야.”

    “비겼죠.”

    임형석은 다시 고개를 저었다.

    “타격 순간, 난 그저 서있기만 했고 넌 뒤로 물러나며 충격을 흘렸지. 내 패배다.”

    현석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임형석을 쳐다봤다.

    충격을 해소했지만 받은 타격 자체는 서로 비슷했다. 그 정도로 임형석의 타격은 순간 임팩트가 강하다는 뜻이다.

    모든 타격이 그랬다. 임형석은 무수한 실전경험을 쌓은 현석보다도 타격 시 임팩트를 넣는 법이나 기술이 훨씬 뛰어났다.

    하지만 굳이 자기가 졌다고 우기는데 같이 우길 생각은 없었다. 현석은 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제가 이긴 걸로 하죠.”

    현석의 말에 임형석의 잠시 현석을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의 눈빛에 떠오른 감정은 분명히 어이없음이었다. 물론 현석은 그것까지 지적하지는 않았다.

    “용건이나 말해.”

    임형석의 말에 현석이 빙긋 웃었다.

    “어떻습니까? 여기서 썩고 계시지 말고 저랑 같이 가시는 건.”

    임형석은 잠시 굳은 표정으로 현석을 바라봤다. 사실 지금까지 그를 탐내던 사람은 무수히 많았다.

    그리고 그런 자들에게는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왜? 실전훈련이라도 시켜주려고? 아니면 그럴듯한 제자들이라도 던져주게? 아니면 거칠고 험악한 동생들 좀 소개시켜주게?”

    현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대충 전부 맞긴 한데…… 아마 생각하시는 거랑은 많이 다를 겁니다.”

    “흥. 다르긴 개뿔. 너도 딴 놈들이랑 똑같아. 결국은 내 힘을 맘대로 써먹겠다는 거잖아.”

    현석은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임형석을 쳐다봤다.

    “어르신 힘을 제가 왜 써먹습니까? 아무래도 연세가 있으셔서 기억이 깜빡깜빡 하시는 모양인데…… 오늘 분명히 제가 이겼다고 하셨습니다만…….”

    임형석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그는 호랑이처럼 번쩍이는 눈빛으로 현석을 노려보며 고개를 슬며시 모로 꺾었다.

    “한 판 더 붙자. 이번엔 환한 데서.”

    현석이 씨익 웃었다.

    “싫은데요?”

    임형석이 답답하다는 듯 자신의 가슴을 주먹으로 팡팡 두드렸다.

    쾅! 쾅! 쾅!

    마치 뭔가를 박살 내는 듯한 소리가 연달아 울렸다.

    지금까지 못마땅하게 이쪽을 훔쳐보고 있던 알바생이 깜짝 놀라 시선을 휙 돌려버렸다.

    아마 시간이 좀 늦어지더라도 당분간 나가달라는 얘기를 들을 걱정은 없어진 듯했다.

    “이 자리에서 그냥 한 판 할까?”

    임형석이 으르렁대듯 말하자, 현석이 고개를 저으며 주위를 슥 둘러봤다.

    “왜 남의 재산을 다 부수려고 하십니까. 대화로 풀어 가시죠.”

    “말로 주절주절 하는 건 내 스타일이 아니라서 그래.”

    “얘기나 마저 들어보시고 싸우든 말든 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적어도 전 순수한 호의로 찾아왔습니다.”

    현석의 말에 임형석이 부리부리한 눈으로 노려봤다. 두 사람의 눈빛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옆에서 지켜보기엔 금방이라도 싸울 것 같았는지 알바생이 슬그머니 전화를 들었다. 일이 터지는 즉시 경찰에 연락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알바생의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다. 임형석이 눈에서 힘을 빼며 의자에 등을 기대고 편히 앉았다.

    “뭐…… 거짓말 하는 것 같지는 않네. 아니면…… 내 눈을 속일 정도로 거짓말을 잘 하거나.”

    현석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아마 둘 다일 겁니다.”

    “속이든 말든 맘대로 해. 단, 걸리지 마라. 날 속이다 걸린 놈들이 어떻게 됐는지 알고 싶으면 한 번 해봐도 좋고.”

    임형석은 그렇게 말하면서 현석과의 싸움에 대한 기대감을 한껏 드러냈다.

    현석은 빙긋 웃었다. 역시 이 사람은 한결같았다.

    “던전에 들어가보신 적 있으십니까?”

    임형석이 뚱한 얼굴로 말했다.

    “나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온 것 같지도 않은데…… 내가 플레이어로 보여? 설마 마력을 얻어서 내가 이렇게 강해졌을 거라고 여기는 건 아니겠지?”

    “그런 거 같습니까?”

    임형석이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건 절대 아니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현석은 자신이 플레이어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자신 역시 마력을 전혀 쓰지 않고 싸웠으니까.

    그래서 더 큰 열망이 생겼다. 제대로 모든 능력을 다 발휘하는 현석과 목숨을 걸고 한 판 붙어보고 싶었다.

    “그럼 대체 왜 그런 말 같지도 않은 걸 물어본 거야? 플레이어가 아니면 던전에 못 들어간다는 건 상식 아닌가?”

    현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 말을 받았다.

    “그렇죠. 그게 상식이죠. 하지만 때로는 상식에서 벗어난 일도 있는 법 아니겠습니까?”

    임형석의 눈이 번득였다.

    상식에서 벗어난 일에 대해서야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일단 본인이 상식에서 벗어난 존재였으니까.

    그저 수련만으로 여기까지 강해질 수 있다는 건 말이 되지 않는다.

    임형석 자체가 상식에서 벗어난 인물이었기에 수련을 통해서이든 목숨을 걸어서든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이다.

    “어떻습니까? 저랑 같이 가시겠습니까?”

    임형석이 눈살을 찌푸리고 현석을 노려봤다. 그 어떤 확답도 없이 그저 따라오라니.

    ‘장난하는 건 아닌 것 같고…….’

    지금은 선택할 때였다.

    임형석의 입가에 미소가 맴돌았다. 자신이 언제 선택을 눈앞에 두고 몸을 사린 적이 있단 말인가.

    저놈과 함께 간 곳에 죽음이 도사리고 있다면 오히려 더 반가워해야 할 일 아닌가.

    그게 무엇이든 자신이 더 강해질 기회를 제공할 테니 말이다.

    “좋아. 일단 가자. 가서 죽이든 죽든 결정해보지.”

    현석이 피식 웃었다.

    “죽이긴 누굴 죽입니까? 허름한 곳에서 살고 계시는 게 안쓰러워서 집이나 제공해 드리려고 그러는 겁니다.”

    “뭐라고?”

    “그리고 체육관 문도 닫았잖습니까. 할 줄 아는 게 남 때리는 것밖에 없는 분이 체육관도 안 하면 그냥 백수 아닙니까. 늙어서 서러우실까봐 할 일도 마련해 드리려고 그러는 겁니다.”

    임형석이 어처구니없는 눈으로 현석을 바라봤다.

    “어떻습니까? 고맙죠?”

    임형석은 한동안 과연 저놈을 따라가도 될까에 대해 고민했다.

    물론 결국은 현석의 차를 타고 서울로 향했지만 말이다.

    * * *

    “허! 운전기사까지 있었어? 너 그렇게 안 봤는데, 무슨 재벌 같은 그런 거냐?”

    “그런 거 아닙니다.”

    현석은 단호히 대답했다. 하지만 거기에 대한 부연설명이 운전석 쪽에서 나왔다.

    “그래도 웬만한 재벌보다 돈은 많을 걸요? 안 그렇습니까?”

    지금 현석의 차를 운전해주는 사람은 양동욱이 정말 믿을 만한 동생이라고 소개시켜준 자였다.

    “너 무슨 조직의 보스, 그런 건 아니지?”

    현석은 임형석이 조폭들을 얼마나 혐오하는지 알고 있기에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거 아닙니다. 원래 플레이어가 되면 돈 잘 법니다.”

    이번에도 운전석 쪽에서 부연설명이 나왔다.

    “플레이어라고 다 잘 버는 거 아닙니다. 그리고 우리 대표님은 꼭 던전에서만 돈을 번 게 아닙니다. 엄청난 주식의 강자시거든요.”

    “주식?”

    임형석이 살짝 게슴츠레한 눈으로 현석을 힐끗 쳐다봤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거 잘 할 놈으로는 안 보이는데…….”

    “맞습니다. 그런 거 잘 모릅니다.”

    “에이, 모르시는 분이 어떻게 주식으로 돈을 그렇게 많이 법니까?”

    현석은 자신이 주워들은 내용을 열심히 떠드는 운전수를 보며 이번에는 억지로 시간을 내서라도 운전면허를 따야겠다고 결심했다.

    * * *

    “여기냐? 앞으로 내가 살 집이.”

    현석은 대답하지 않고 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겉보기에는 그저 평범한 3층집이었지만, 이 집의 진짜는 지하에 있었다.

    암흑석으로 어둠을 유지하는 지하 계단 중간에 있는 투명 던전이 진짜 집이었으니까.

    “뭐…… 그럭저럭…… 공기 나쁜 거 빼면 좋구나.”

    현석은 그 말에 안으로 들어가며 가볍게 대꾸했다.

    “공기도 나쁘지 않을 겁니다.”

    “도시 한가운데에서 공기가 나쁘지 않다고?”

    임형석은 처음에는 그렇게 말하며 비웃었지만 집안으로 들어간 다음에는 그 소리가 쏙 들어갔다.

    자신이 원래 살던 산기슭보다 오히려 더 공기가 맑고 쾌적했다. 게다가 기운도 훨씬 풍부했다.

    임형석이 당황하며 현석을 바라봤다.

    “이게 뭐냐?”

    “그냥 단순한 공기 정화장치 같은 겁니다.”

    임형석은 감탄했다.

    “내가 모르는 사이에 기술이 이렇게나 발전했구나. 이래서야 수련한답시고 산에 들어간 사람만 바보 되는 세상 아닌가!”

    물론 과학기술이 아니라 던전에서 나온 기술이었지만 현석은 굳이 거기에 대해 자세히 말해주지 않았다.

    어쨌든 안으로 데려가 적당한 방을 정해주었다.

    “일단 이 방에서 지내시면 됩니다.”

    “내가 살던 집보다 넓은 방이구나.”

    말은 그렇게 해도 임형석은 별로 방이 어떻든 관심도 없는 눈치였다.

    현석도 충분히 예상하던 바였다.

    “수련실을 보시겠습니까?”

    그제야 임형석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기다리던 바다.”

    임형석은 앞장서서 걷는 현석을 보며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집에 들어온 순간부터 왠지 모를 기대감과 예감에 마음을 가라앉힐 수가 없었다.

    “지하에도 뭐가 있는 모양이군.”

    현석이 먼저 지하실로 내려가자, 임형석도 따라서 지하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그 순간 정말 깜짝 놀랐다. 예상을 초월할 정도로 어두웠기 때문이다.

    아무리 한밤중의 산 속이라 해도, 또 동굴 속이라고 해도 이렇게 어두울 수는 없었다.

    눈을 감고 있는 것보다 더한 어둠이 지하실에 가득했다.

    그런 임형석의 귓가로 현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떻습니까? 이 정도면 목표를 이루는 데 좀 도움이 될 것 같습니까?”

    임형석이 환하게 웃었다.

    “도움이 되다마다. 하루에 한 번씩만 싸우자.”

    임형석의 입가에 맺힌 미소는 사납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그것과 아주 비슷한 미소가 현석의 입가에도 맺혔다.

    “바라던 바입니다.”

    현석의 대답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은 임형석이 현석이 있는 쪽을 바라봤다.

    보이진 않았지만 거기 현석이 있는 게 확실했다.

    “지금 한 판?”

    대답은 필요 없었다. 벌써 몸을 날리며 주먹을 내지르고 있었으니까.

    후웅!

    거칠게 공기를 찢는 소리가 지하실에 가득 울렸다.

    < 과거의 은인 3 > 끝

    ⓒ 김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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