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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눈 뜨고 레벨업-90화 (90/326)
  • < 과거의 은인 2 >

    임형석의 지금 나이는 환갑에 살짝 못 미친다. 그런데도 겉으로 보기엔 40대 초반 정도로 보였다.

    아니, 마음먹고 속이면 30대라고 우겨도 할 말이 없어 보였다.

    얼굴은 주름살 하나 없이 팽팽했고, 온몸의 터질 듯한 근육은 보기만 해도 기가 질릴 정도였다.

    임형석의 근육은 그저 덩치를 부풀리기 위한 근육이 아니었다. 실전을 통해 다져진 근육이었다.

    그는 훈련조차 실전처럼 격렬하고 위험하게 하는 사람이었다.

    “내가 아는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임형석이 의아한 표정으로 현석을 유심히 살피며 말했다.

    적의를 보이진 않았다. 현석이 자신을 본 순간 어찌나 반가운 표정과 눈빛을 보이는지 순간 자신이 원래 아는 사람이 아닐까 하는 착각이 들었을 정도니까.

    하지만 아무리 기억을 떠올려봐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임형석은 그리 평탄한 삶을 살아오지 않았다. 그렇기에 주변에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만일 자신은 모르는데 상대만 자신을 알고 있다면, 그 사람은 적일 확률이 높았다.

    현석은 임형석의 생각이 길어지기 전에 얼른 나섰다.

    “채현석이라고 합니다.”

    임형석은 가느다랗게 뜬 눈으로 자신에게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하는 현석을 바라봤다.

    “건성인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공손한데? 난 진짜 생각이 안 나서 그러니 설명 좀 해주시겠나?”

    “아마 모르실 겁니다. 오늘 처음 뵙는 거니까요.”

    “그렇게 여기기엔…… 당신 태도가 걸려. 날 아주 잘 아는 눈치인데? 그런 사람이라면…… 내 주변엔 날 죽이려는 사람밖에 없는데?”

    임형석의 몸에서 스멀스멀 기세가 흘러나왔다. 난폭하지는 않지만 잘 벼린 칼날 같은 섬뜩한 기세였다.

    그걸 본 현석의 눈에 살짝 감탄이 어렸다.

    현석이 알기로 이때의 임형석은 아직 자신을 제대로 완성시키지 못한 때였다.

    무예의 길에 완성이 어디 있겠느냐만, 임형석이 스스로 세운 목표 같은 것이 있었다.

    현석이 회귀 전에 만난 임형석은 그 목표를 달성한 후였다. 물론 그 다음 목표를 잡고 여전히 수련에 매진 중이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그때의 임형석은 정말로 무시무시했다.

    양동욱이 알아온 소문은 사실 임형석에 대해서 제대로 모르는 사람들이나 하는 말일 뿐이었다.

    ‘어쨌든 우리나라 제일이라고 하는 추광열을 맨손으로 박살 내신 분이니까.’

    그러니 아직 완성이 안 되었다고 하더라도 그 강함이 어디 가겠는가.

    ‘하긴, 감각 하나 모자라는 상태일 테니, 이 정도로 강한 게 당연한 건가?’

    임형석의 목표 중 가장 마지막에 위치한 것이 바로 감각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깨달은 감각을 아낌없이 현석에게 전수해 준 것이고 말이다.

    그러니 이번엔 자신이 그것을 되돌려 갚을 차례였다.

    “진정하십시오. 소문 듣고 찾아왔을 뿐입니다.”

    “소문?”

    “눈을 감고 수련하신다고요?”

    임형석의 기세가 더욱 거대해졌다. 자신이 수련하는 모습을 타인에게 보여준 적이 없는데 그걸 아는 사람이 나타났다면 어떤 반응을 보여야겠는가.

    “진정하시라니까요? 같은 길을 걷는 사람이라 반가워서 찾아왔습니다.”

    “같은 길을 걷는다고?”

    임형석의 기세가 살짝 누그러졌다. 하지만 완전히 의심을 접은 건 아니었다.

    “보아하니 그쪽은…… 플레이어 같은데? 아닌가?”

    현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역시 그럴 줄 알았지. 한데…… 다른 플레이어들이랑은 좀 다른 것 같네? 알아차리기 쉽지 않았어.”

    현석은 본능적으로 마력을 갈무리해 깊이 품고 다닌다. 외부로 마력을 줄줄 흘리고 다니는 다른 플레이어들과는 전혀 달랐다.

    그래서 임형석도 잠시 긴가민가했던 것이다.

    하지만 특별한 수련을 거친 그의 감각이 어디 가겠는가. 더구나 지금 현석이 마력을 다루는 수법의 근원이 임형석으로부터 나온 거나 다름없는데 말이다.

    “아무튼…… 그래서 그쪽도 눈을 감고 수련하신다고?”

    “예. 저도 비슷합니다.”

    임형석이 여전히 가느다랗게 뜬 눈으로 현석의 위아래를 훑어봤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말 놔도 되지? 내가 이래 보여도 나이를 제법 먹은 편이거든.”

    “예. 편하신 대로 하십시오.”

    임형석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돌아섰다.

    “따라와.”

    그가 성큼성큼 걸어 어딘가로 향했다.

    현석은 잠시 그의 단단한 등을 지켜보다가 이내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 * *

    임형석은 점점 더 깊은 산으로 들어갔다. 사는 곳은 산기슭이었는데, 수련하는 곳은 훨씬 높고 험한 곳이었다.

    거의 절벽을 기어 올라가는 수준이었다. 아마 보통 사람이라면 보기만 해도 질려서 돌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현석은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현석은 되도록 마력을 쓰지 않고 육체적인 힘만을 이용해서 임형석을 따라가려 애썼다.

    하지만 할 수는 있어도 임형석과 같은 속도를 내는 건 불가능했다.

    현석은 절벽에 매달린 채 위를 슬쩍 올려다봤다. 어느새 임형석이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현석은 놀라지 않았다. 애초에 이 절벽 중간쯤 동굴 하나가 뚫려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현석의 감각은 아주 특별하다. 다른 건 몰라도 감각 쪽으로는 아직 임형석이 현석을 앞지를 수 없었다.

    “여긴가?”

    현석은 중간에 있는 동굴을 발견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애초에 임형석이 집에 도착한 시점이 해질 무렵이었다. 그렇기에 지금은 이미 해가 졌고, 산이라서 그런지 아주 깜깜했다.

    한데 동굴 안으로 들어가면 또 얼마나 어둡겠는가.

    물론 현석에게는 아무 문제도 되지 않았다. 현석은 굳이 마력을 이용하지 않고도 마치 눈을 뜬 것처럼 행동할 수 있었다.

    동굴로 들어간 현석은 성큼성큼 안으로 들어갔다. 조금 더 걸어가다 보니 임형석이 가만히 서서 현석을 기다리고 있었다.

    동굴 안쪽은 제법 넓은 공터였다.

    “안쪽을 파내서 수련장을 만든 겁니까?”

    “용케 알아봤군.”

    “애초에 동굴 자체가 인위적인 느낌이 많이 들더군요.”

    임형석이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런 것도 알 수 있나?”

    “그저 느낌입니다.”

    물론 그냥 알 수 있는 게 아니라 오랜 경험이 쌓여야 간신히 구분할 수 있는 정도겠지만 말이다.

    “거짓이 아니라는 건 대충 짐작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군.”

    임형석의 말에 현석이 씨익 웃었다.

    “플레이어들은 특별한 능력을 가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아십니까?”

    “모를 것 같나? 하지만…… 자넨 그런 게 아니야. 그렇지?”

    ‘역시.’

    현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임형석은 수련을 통해 본능적으로 마력에 대해 이해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능력을 발휘하려면 마력을 움직여야 하고, 그걸 감지해 특별한 능력, 스킬을 쓰는지 아닌지 파악하는 것이다.

    그런데도 마력을 받아들이지 못해 플레이어가 될 수 없다니 참으로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별한 능력 중에는 굳이 애쓰지 않아도 계속 작용하는 것들도 있습니다.”

    “그것도 알고 있네. 의지로 다스리지도 못할 능력이라니. 어설픈 것들.”

    그 말에 현석의 눈이 커다래졌다.

    확실히 패시브 스킬은 그런 면이 컸다. 의지로 그걸 다스릴 수 없는 것이다. 아니, 그럴 생각 자체가 없었다.

    ‘그럼 내가 플레이어라는 걸 알아본 것도…… 그런 건가?’

    현석은 자신의 패시브 스킬인 자연회복을 떠올렸다. 자연회복을 위해 아마 온몸에 마력이 퍼져 있을 것이다. 스스로는 알아차릴 수도 없을 정도로 미미하게 말이다.

    임형석은 자신의 말 때문에 현석이 뭔가를 깨달았다는 걸 알아차렸다.

    “얼마든지 기다려주지.”

    임형석은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에 앉아 현석의 모습을 유심히 지켜봤다.

    그리고 이내 놀란 표정을 지었다.

    현석이 플레이어라는 사실을 알게 해줬던 그 미묘한 마력의 흐름이 점차 사라져가고 있었다.

    그 말을 한 지 불과 몇 분 되지도 않았다. 한데 벌써 저렇게 적용을 하다니.

    “허어. 이제 진짜 플레이어인지 아닌지도 모르겠군.”

    처음에 플레이어라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아마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고 여겼을 것 같았다. 그 정도로 감쪽같이 마력이 사라졌다.

    임형석이 눈을 빛냈다.

    마력이 사라지고 나니 비로소 상대가 제대로 보였다. 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더없이 즐거운 미소였다.

    “이거…… 내가 아주 실례를 했군.”

    임형석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상대는 사선을 넘나들며 실력을 쌓아온 사람이 분명했다.

    마력이 사라지고 그 사람 자체가 보이니 그런 것들이 아주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어디…… 한 번 어울려볼 텐가?”

    일단 실력을 가늠해 보면 임형석 자신이 분명한 우위에 있었다. 하지만 이곳은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깜깜한 장소였다.

    그러니 결과는 해보지 않고 알 수 없었다.

    현석이 대답도 하지 않고 미끄러지듯 임형석에게 다가갔다.

    임형석은 흠칫 놀라며 반사적으로 팔을 들었다.

    뻐억!

    살과 살이 부딪히며 난 소리가 동굴 벽에 반사되어 메아리치며 울렸다.

    그때부터 임형석과 현석의 손발이 분주히 움직였다.

    뻐버버버버벅!

    거의 호각이었다. 힘도 민첩도 임형석이 위였다. 하지만 놀랍게도 전투경험은 현석이 더 많았다.

    그리고 현석이 훨씬 더 암흑에 익숙했다.

    임형석은 매번 현석의 움직임을 놓치기 일쑤였고, 그 때마다 멈칫거리는 바람에 민첩성과 파워를 살리지 못했다.

    현석은 현석대로 임형석의 엄청난 힘과 속도에 잠시도 긴장을 풀 수 없었다.

    그렇게 얼마나 싸웠을까.

    꽈앙!

    두 사람의 주먹이 서로의 가슴을 정확히 가격했다. 강렬한 충격에 두 사람이 동시에 나가 떨어졌다.

    그리고 다시 벌떡 일어났다. 일어선 것도 동시였다.

    “여기까지만 하지.”

    임형석의 말에 현석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세를 풀었다. 오랜만에 모든 긴장감을 끌어내 싸웠더니 기력이 쭉 빠졌다.

    현석은 잠시 묶어놨던 패시브스킬, 자연회복을 풀어주었다.

    빠르게 몸의 체력이 돌아왔다. 그리고 방금 충격 때문에 받은 타격이 서서히 사라져갔다.

    “대체 눈을 감고 수련을 얼마나 한 건가? 짧은 시간에 이룰 수 없는 성취인데? 그보다 너 나이가 몇이지? 아무래도 겉으로 보는 거랑은 많이 다른 것 같아.”

    현석은 임형석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답하지 못했다.

    “일단 내려가지. 오늘은 더 수련하기도 쉽지 않을 것 같으니.”

    임형석도 많이 지쳐 있었다. 이런 박진감 넘치는 싸움은 그로서도 오랜만이었다.

    “그러시죠.”

    현석은 먼저 동굴에서 나가 절벽을 타고 내려갔다. 올라갈 때와는 달리 툭툭 뛰어서 벽을 발로 디디며 떨어지듯 내려갔기에 금세 아래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임형석은 현석과 달리 그냥 뛰어내렸다.

    쿠웅!

    임형석은 바닥에 착지하며 땅을 한 바퀴 굴러 충격을 해소하고 일어나 몸에 뭍은 흙을 툭툭 털어냈다.

    현석은 그런 임형석과 그가 뛰어내린 절벽 동굴을 번갈아 쳐다봤다.

    ‘나도…… 가능하긴 할 텐데.’

    높이가 상당했지만 굳이 하려고 하면 못 할 것도 없어 보였다.

    ‘항상 저렇게 뛰어내렸다는 뜻이겠지?’

    임형석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뛰어내렸다. 매번 그렇게 해오지 않았다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현석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임형석을 쳐다봤다.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그의 강인함에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강자였다.

    ‘게다가 이제 시작이야.’

    현석이 알기로 임형석은 감각 수련을 마무리한 다음부터 더 빠른 속도로 강해진다.

    그 어떤 플레이어보다 임형석이 더 강해질 거라고 현석은 장담할 수 있었다.

    ‘앞으로의 일이 기대되는군.’

    갑자기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저 임형석과 진짜로 함께 할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니 그 기대감에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두 사람은 그렇게 산에서 내려갔다.

    < 과거의 은인 2 > 끝

    ⓒ 김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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