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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눈 뜨고 레벨업-89화 (89/326)
  • < 과거의 은인 1 >

    현석은 산을 벗어나기 위해 빠르게 달렸다. 지하묘지를 소탕하면서 레벨을 또 몇 단계 올렸다.

    힘, 체력, 민첩 위주로 스탯이 올랐기에 미국에 가기 전에 비해 훨씬 빠르게 오랫동안 달려도 별로 지치지 않았다.

    무엇보다 패시브 스킬인 자연회복의 숙련도가 많이 오르면서 회복력이 좋아졌다.

    그뿐 아니라, 진마안의 드러나지 않은 기능인 체력과 마력 회복의 영향까지 더해져 좀처럼 지칠 일 자체가 별로 없었다.

    어쨌든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험한 산을 타고 내려가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그래도 하루면 벗어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어찌나 깊은 산으로 들어왔는지 밤이 되었는데도 산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첩첩산중이라는 말이 참으로 잘 어울리는 곳이었다.

    산의 밤은 엄청나게 어둡다. 밤이 빨리 찾아오기도 하지만 일단 밤이 되면 코앞에 있는 것도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현석은 그런 어둠에 구애받는 사람이 아니었다.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잠을 청해도 되지만, 그보다는 밤 새 달려 산에서 벗어나는 쪽을 택했다.

    그리고 새벽이 밝아올 무렵, 결국 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현석이 도착한 곳은 도로였다. 산과 산 사이에 난 도로였는데, 이걸 따라가면 어쨌든 마을이나 도시가 나올 것이 분명했다.

    “그나마 다행이군.”

    현석은 도로를 따라서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새벽이라 그런지, 아니면 한적한 곳이라 그런지 지나가는 차가 한 대도 없었다.

    현석은 지나가는 차를 만나면 히치하이킹이라도 할 생각이었다. 한데 아무리 새벽이라도 정말 너무할 정도로 차가 안 지나갔다.

    현석이 달리는 속도는 고속도로를 질주하는 차 정도까지는 아니어도 굉장한 속도였다.

    최소한 자전거보다는 훨씬 빨랐다.

    어쨌든 그렇게 빠른 속도로 달리다보니 중간 중간 있는 표지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놀랍게도 여긴 한국이었다.

    미국 뉴욕의 고가도로에서 한국 강원도 쪽으로 넘어온 것이다.

    어느새 오르막길이 나타났다. 현석은 빠르게 달려 오르막의 끝에 도착했다.

    저 아래에 집들이 옹기종기 모인 곳이 보였다.

    도시 까지는 아니고 읍내 정도 되는 마을인 듯했다. 현석은 그곳을 향해 바람같이 내달렸다.

    고생은 이제 끝났다.

    * * *

    양동욱은 현석을 보며 좀 당황했다.

    “아니…… 비행기 타기 전에 미리 연락을 좀 주시지 그랬습니까.”

    “비행기에 탈 수가 없어서.”

    “예?”

    “아직 뉴스에 안 떴나?”

    그 순간 양동욱의 뇌리에 최근 미국을 떠들썩하게 만든 사건 하나가 퍼뜩 떠올랐다.

    “서, 설마…… 렉스턴 에너지…….”

    현석은 즉시 고개를 끄덕였다. 더 말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양동욱은 그 신호를 바로 알아차리고 입을 꾹 다물었다.

    아무리 집에 있다고 하지만 이런 일은 두 번 세 번 조심해도 모자랐다.

    양동욱은 존경스러운 눈으로 현석을 바라봤다.

    ‘아니, 대체 정체가 뭐야?’

    미국에 볼일이 있어서 간다고 했을 때, 합법적인 일을 할 거라고 믿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런 사고를 칠 거라고는 요만큼도 생각하지 못했다.

    변장하고 위장 여권을 쓰긴 했지만, 그게 정체를 가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여권과 비자 문제 때문이었다.

    그러니 설마 신분을 감췄다는 사실을 이용해 이런 대형사고를 칠 거라고 어떻게 예상하겠는가.

    사실 그 사건은 뉴스에서 대대적으로 보도한 건 아니었다. 솔직히 좀 대충 지나간 경향이 있었다.

    하지만 정보 쪽에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정보를 다루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지금 가장 뜨거운 감자가 바로 그것이었다.

    렉스턴 에너지가 신기술을 연이어 발표하면서 플레이어 세상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기업으로 자리매김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렉스턴 에너지에 테러를 가하고 회장실을 박살 낸 데다가 금고까지 털어간 사람이 있다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한데 그게 바로 현석이라니.

    양동욱은 갑자기 몸이 부르르 떨렸다. 희열이 일었다. 자신이 지금 어떤 사람과 일하고 있는지 똑똑히 깨달았다.

    ‘아마…… 앞으로 상상도 못할 일이 펼쳐질지 몰라.’

    아니, 아마 분명히 그럴 것이다.

    양동욱은 평소보다 더욱 공손한 태도로 말했다.

    “일단 이쪽으로 오시죠. 미국에 가기 전에 말씀하셨던 사안, 해결했습니다.”

    그 말에 현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까지 워낙 정신이 없어서 양동욱에게 일을 맡겼다는 것도 잊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현석에게 있어서 상당히 중요한 일 중 하나였다.

    이번 생은 아니지만, 지난 생에서 현석에게 은인과도 같은 사람을 찾는 일이었으니까.

    “생각보다 어렵지는 않았습니다. 임형석이라는 이름으로 도장을 운영하는 분이 딱 한 분밖에 없었거든요.”

    양동욱은 그렇게 말하며 서류 몇 장을 현석에게 내밀었다.

    현석은 그것을 받아 쭉 읽어보았다.

    “일단…… 얼마나 강한 분인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도장에 사람이 없더군요. 곧 체육관 문을 닫을 모양입니다.”

    서류에 담긴 내용은 임형석의 과거 기록이었다.

    젊은 시절부터 무술을 익혔고, 잠깐 폭력의 세계에 몸을 담았다가 빠져나온 다음부터 계속 도장을 운영해 왔다.

    그게 전부였다. 정말 별 거 없었다.

    그가 얼마나 강한지에 대한 조사는 그저 소문을 취합하는 수밖에 없었는데, 그 소문들이 하나같이 황당했다.

    주먹으로 집채만 한 바위를 깨뜨렸다느니, 100명을 상대로 싸워 이겼다느니, 5층 건물 옥상에서 뛰어내렸는데 멀쩡했다느니 하는 것들이었다.

    그 소문들을 읽으며 현석이 피식 웃었다.

    “황당하긴 하지만 다들 그걸 진짜로 믿고 있더군요. 그걸 보면 인망은 괜찮은 분 같습니다.”

    양동욱의 말에 현석이 고개를 저었다.

    “사실이다.”

    “예?”

    “이 소문 다 사실이라고.”

    양동욱이 잠시 멍하니 현석을 바라봤다. 그러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물었다.

    “이분 혹시 플레이어입니까?”

    “아니. 플레이어 쪽으로는 아예 재능이 없는 분이다.”

    “그런데 이게 진짜라고요?”

    현석이 확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양동욱의 얼굴에 떠오른 황당한 표정이 더욱 짙어졌다.

    “주먹으로 바위를 깨뜨렸다고요?”

    “정확히는 박살을 내셨지.”

    “100대1로 싸워 이기고요?”

    “정확히는 127대1이었고.”

    양동욱이 점점 더 가관이라는 듯 살짝 빈정대며 물었다.

    “5층 옥상에서 뛰어내렸는데 멀쩡했고요?”

    “6층이고, 그냥 멀쩡한 게 아니라 도망가던 강간범을 쫓아가 잡으셨지.”

    “이야, 이분 아주 소설 속 주인공이시네.”

    현석은 양동욱의 반응을 충분히 이해했다. 자신도 처음에는 플레이어도 아닌 사람이 그 정도로 강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사실이다. 그리고 그는 실전 무술의 달인이기도 했다.

    심지어 눈을 감고 감각에 의지해 싸우는 법까지 터득한 분이었다.

    그리고 그걸 현석에게 전수해 주었다.

    물론 지금으로부터 몇 년 후의 일이긴 하고, 이번 생에서는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지만 말이다.

    “어쨌든 주소는 거기 적힌 대로인데…… 서두르시는 게 나을 겁니다. 조사할 때만 해도 당장 도장 문을 닫을 기세였거든요.”

    “DM케미칼 쪽은 요즘 분위기가 어떻지?”

    “아주 난리도 아니죠. 뭐…… 그래도 어쩌겠습니까? 렉스턴 에너지가 아주 대놓고 공격적으로 나오는데. 아마…… 몇 달 못 버틸 겁니다. 투자자들만 병신 됐죠, 뭐.”

    “다른 움직임은 없고?”

    양동욱은 그 물음에 잠시 고민했다. 그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그놈들…… K나이츠 길드랑 뭔가 관계가 있는 모양입니다. 요즘 자주 만나더라고요. 물론 아주 비밀리에.”

    웬만한 정보기관 쪽에서는 아예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종로 쪽에서만 간신히 잡은 정보였다.

    K나이츠 길드와 현석의 관계가 좋지 않다는 걸 알고 황노인이 양동욱에게 보내준 정보였다. 순수한 호의로 말이다.

    “그리고 K나이츠 길드의 진대호가 뭔가 수작을 부릴 준비를 하는 것 같답니다.”

    양동욱은 그 말을 하며 살짝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현석을 바라봤다.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지는 몰라도 그 수작의 목표가 현석이 될 확률이 높았다.

    “알았다. 참고하지.”

    현석은 그 말을 끝으로 돌아섰다. 서두르지 않으면 임형석을 다시 만나기 쉽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임형석이 현석을 만나기 전까지의 행적이 참으로 묘연했다. 그때의 일은 임형석도 굳이 말해주지 않았기에 어디서 뭘 했는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체육관이 망하고 은거에 들어가신 모양이군.’

    마음 먹고 산에 들어가 수련한답시고 숨어 버리면 정말 찾기 곤란해진다. 임형석은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었다.

    현석은 서둘러 방을 나섰다.

    그런 현석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양동욱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런데 대체 그 황당한 소문이 사실인지 아닌지는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양동욱이 알기로 현석과 임형석의 접점은 아예 없었다.

    임형석은 최근 20년 동안 지금 있는 도장을 떠난 적이 아예 없었다.

    서울에 볼일이 있어서 간다거나 한 적도 없었다.

    당연히 현석이 그의 도장 근처로 간 적도 없었다. 한데 어떻게 그리 잘 알까?

    그렇게 생각하니 의심스러운 부분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하여간…… 진짜 알 수 없는 사람이야.”

    양동욱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현석에 대해서는 그저 포기하는 편이 나았다.

    그러면 마음이라도 편하니까.

    * * *

    “요즘 산에 자주 오는 것 같네.”

    현석은 울창한 나무가 우거진 길을 걸으며 중얼거렸다.

    DM케미칼에서 일을 벌일 때도 산에 갔고, 미국에서 이쪽으로 넘어올 때도 산에 떨어져서 헤맸다.

    그리고 오늘도 또 산에 가고 있으니.

    임형석의 체육관은 읍내에 있었지만 이미 도장 문을 닫은 뒤라서 집으로 찾아가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의 집은 산기슭에 있었다.

    말이 산기슭이지 사실상 산속에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지금 현석이 지나는 곳이 바로 산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어쨌든 임형석은 산기슭에 대충 집을 짓고 거기에서 살았다.

    겨울에 엄청나게 춥겠지만, 그는 추위 따위 아무렇지도 않은 사람이었다.

    “체육관 근처에 집을 아는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야.”

    정말 열심히 물어보고 다녔다. 회귀 후 지금까지 중에 가장 많은 말을 한 날이 바로 오늘일 것이다.

    그 정도로 많은 사람에게 임형석의 집을 물어보고 다녔다.

    울창한 나무들이 있는 곳을 지나니 작은 공터가 나왔다. 군데군데 바위가 있었고, 그 바위들 틈에 작은 집 한 채가 서 있었다.

    아니, 집이라고 하기에도 좀 민망한 곳이었다.

    그저 대충 판자를 세운다음 방수천을 덮은 게 전부였으니까.

    “아무도 없나?”

    현석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집으로 다가갈수록 안에 아무도 없다는 사실이 점점 확실해졌다. 숨소리도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상대가 플레이어라면 마력을 통해 위치라도 알아보겠지만, 그게 아니니 그럴 수도 없었다.

    현석은 난감한 표정으로 집앞을 서성였다. 지금은 그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아직 임형석이 딴 데 가지 않고 여기 살고 있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슬슬 해가 지기 시작했다.

    “벌써 떠난 건가?”

    현석은 정말로 아쉬웠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임형석만큼은 꼭 만나고 싶었다.

    그에게 해주고 싶은 것도 있었고, 함께 하고 싶은 일도 있었다.

    막 포기하고 돌아가려는 찰나,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누구지?”

    임형석의 목소리였다. 회귀 전의 기억 속에 있던 목소리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현석은 반가운 눈으로 고개를 돌려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쳐다봤다.

    거대한 근육질의 남자가 거기에 서 있었다.

    < 과거의 은인 1 > 끝

    ⓒ 김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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