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눈 뜨고 레벨업-88화 (88/326)
  • < 아르포르 기사단 >

    [케틀러]

    [아르포르 기사단의 단장. 반역의 누명을 쓰고 어둠의 감옥에 갇혀 육체를 잃었다. 영혼만 남아 강력하게 속박된 상태라 진실만을 말할 수 있다. 생전의 마력이 영혼에 응축되어 있다. 봉인중.]

    사람을 확인하는데 마치 아티팩트를 확인하는 듯한 설명이 나왔다.

    사실 현석이 원했던 정보는 레벨과 타이틀, 스탯, 스킬 등이었다.

    어쨌든 저 설명으로 한 가지 확실해진 것이 있었다. 저들은 거짓을 말하지 못한다는 사실이었다.

    또 한 가지 눈이 가는 점은 생전의 마력이 영혼에 응축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어때? 확인이 가능한가?”

    현석은 왠지 저렇게 묻는 케틀러의 눈이 기대감을 한껏 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사실 케틀러의 눈은 칭칭 감긴 붕대에 구멍 두 개가 뚫려 있는 것뿐이었다. 거기에서 가끔 붉은 빛이 나는 것이 전부였다.

    그런데도 왠지 그의 감정이나 표정이 눈빛을 통해 보이는 것 같아서 좀 신기한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과연 자신의 감이 뛰어나서인지 아니면 케틀러가 의도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건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일단…… 거짓을 말하지 못한다는 건 맞군.”

    “내가 얘기했잖아. 자, 그럼 이제 날 저 위로 데려다줄 텐가?”

    현석은 허락하기 전에 한 가지를 확인했다. 이럴 때는 조심해서 나쁠 게 없었으니까.

    “나한테 그 어떤 피해도 없다고 확신하나?”

    “물론이지.”

    케틀러가 단호히 대답했다. 현석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케틀러에게 다가갔다.

    “기대되는군. 내가 하늘을 본 지 얼마나 되었더라? 크흐흐흐.”

    현석은 케틀러의 말을 들으며 그를 번쩍 들었다. 놀랍게도 상당히 무거웠다.

    “육체가 없다고 하지 않았나? 뭐 이렇게 무거워?”

    “크흐흐. 엄살은.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잖아?”

    그건 그렇다. 그저 궁금했을 뿐이었다. 육체도 없다는데 이 무게감은 대체 뭔지 말이다.

    봉인의 천이 이렇게 무거울 리는 없으니까.

    현석은 케틀러를 들고 일단 철창에서 나갔다. 사방에서 신음소리가 울렸다.

    “흐으으으으.”

    “크흐흐흐. 난리가 났군. 다들 날 부러워하고 있어.”

    현석은 대꾸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다 꺼내줄 생각이었다. 어쨌든 불쌍한 놈들임은 분명했으니까.

    물론 그 전에 반드시 확인은 거칠 것이다. 현석 자신에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그나저나…… 여기가 원래부터 던전이었던 건 아니겠지?’

    던전이나 제국에 대한 궁금증이 상당히 많았지만 왠지 케틀러가 아는 건 별로 없을 듯했다.

    ‘아니, 제국에 대해서는 좀 알고 있으려나?’

    그래도 명색이 황제 직속 기사단이었으니 제법 깊숙한 부분까지 알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현석은 그런 생각을 하며 계단을 올라갔다.

    암흑석이 모두 제거된 뒤인데다가 입구까지 활짝 열려 있으니 안으로 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오오. 빛이다.”

    케틀러가 기대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빛이 더욱 강렬해졌다.

    이내 현석이 입구를 나서 밖으로 나왔다.

    “어때? 오랜만에 보는 하늘이.”

    현석은 그렇게 물으며 케틀러를 공터에 내려놓았다.

    가만히 선 채 한동안 말없이 눈에서 붉은 빛만 깜빡거리던 케틀러는 이내 말을 꺼냈다.

    “저 하늘은…… 진짜지만 가짜군.”

    현석이 의아한 눈으로 케틀러를 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대단한데? 한 번 보고 그 차이를 파악한 건가?’

    역시 케틀러는 이곳이 투명던전으로 변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된 거지? 여긴 어디야?”

    “여기가 어디인지는 네가 더 잘 알지 않나?”

    “알지. 잘 알지. 여기가 바로 어둠의 감옥이라는 건 내가 제일 잘 알지. 그런데…… 그런데 여긴 거기가 아니야. 대체 내가 갇혀 있는 동안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나도 그게 궁금해.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이런 것들이 생겨난 건지.”

    케틀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뭔가 생각을 하는 건지 아니면 실망과 절망에 휩싸여 있는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이내 그가 눈을 빛내며 말했다.

    “내 동료들도 이리로 데려다주지 않겠나? 그들에게도 이 광경을 보여주고 싶군. 어쨌든…… 그래도 진실이 섞인 하늘이니까.”

    거기까지 말한 케틀러는 뭔가가 생각났다는 듯 급히 말을 덧붙였다.

    “자네에겐 그 어떤 피해도 없을 거라고 장담하지.”

    현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안에 들어가 나머지 아르포르 기사단을 모두 밖으로 날랐다.

    제법 시간이 오래 걸렸지만 다 하고 나니 제법 볼 만했다.

    새하얀 붕대로 칭칭 감긴 미라 같은 사람이 무려 101명이나 되었다.

    그들이 질서정연하게 서 있는 광경은 제법 그림 같았다. 좀 기괴하긴 했지만 말이다.

    현석은 그들을 밖으로 데려오면서 아직 미처 회수하지 못한 암흑석들도 모두 챙겼다.

    이런 건 챙겨두면 다 쓸 일이 있다. 정 안되면 수련에 써먹어도 되고 말이다.

    ‘나도 감옥이나 하나 만들어볼까?’

    진짜 미치도록 나쁜 놈을 가둘 만한 감옥이라면 하나쯤 갖고 있어도 괜찮지 않을까?

    “그럼 다들 하늘 구경이나 하고 있으라고. 난 안에 혹시 남은 게 있나 확인 좀 하고 올 테니까.”

    그 말을 들은 케틀러가 현석을 불렀다.

    “기다려.”

    현석이 계단을 내려가려다 말고 멈춰서 케틀러를 돌아봤다.

    “어둠의 감옥에는 비밀이 있다.”

    “비밀?”

    “정확히 말하면 비밀통로지.”

    “비밀통로?”

    현석은 눈을 빛냈다. 비밀통로라니. 그런데 왜 아까 마력으로 확인했을 때는 그걸 발견하지 못했을까?

    처음 암흑석을 뜯어내기 위해서 현석이 한 일이 바로 마력을 통해 감옥의 구조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한데 그때는 그저 감옥뿐이었다. 구조적으로 비밀통로 같은 건 없었다.

    ‘그럼…… 감옥이 던전으로 떨어져 나오면서 비밀통로도 같이 사라져 버린 건가?’

    잠깐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랬다면 감옥의 구조 자체가 잘린 모양이었어야 한다. 한데 감옥 자체는 아주 멀쩡했다.

    즉, 구조만으로 파악할 수 없는 비밀통로가 존재한다는 뜻이었다.

    “표정을 보니 이미 감옥의 구조 정도는 파악한 모양이지?”

    케틀러의 물음에 현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마력패턴을 분석해서 암흑석을 다 떼어내려면 구조를 파악하는 건 필수지. 하여튼 대단해.”

    현석은 쓸데없는 말에는 대꾸할 생각도 없다는 듯이 케틀러를 쳐다봤다.

    “하여간 빡빡하기는. 잘 들어. 어둠의 감옥에 있는 비밀통로는 도시 밖 지하묘지로 이어져 있어.”

    “지하묘지?”

    “어둠의 감옥을 만든 사람이 만에 하나를 대비해 만들어 놓은 탈출구지.”

    현석의 눈에 이채가 맴돌았다. 감옥을 만든 사람이 탈출구를 마련하다니 아이러니한 상황 아닌가.

    “자기 미래를 예감한 모양이지? 아니면 뭔가 딴 맘이라도 품고 있었거나. 어쨌든 그 비밀통로는 물리적인 통로가 아니야.”

    “물리적인 게 아니라면…… 공간이동이라도 한다는 건가?”

    “정확해. 공간이동 포탈을 통해 이동할 수 있게 되어있지.”

    “그래?”

    현석의 머릿속이 팽팽 돌아갔다. 만일 그렇다면…… 어쩌면 그걸 통해 다른 투명던전으로 들어갈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다면 그건 지하묘지라는 이름을 가진 투명던전이 될 것이다.

    ‘아니, 투명던전이 아니라 화이트홀일 수도 있지.’

    던전 생성지역 내에 모여 있는 어설픈 화이트홀이 아닌 진짜 화이트홀 말이다.

    ‘위험성도 고려해야 돼.’

    만일 투명던전으로 나뉘는 바람에 공간이 조각조각 나뉜 거라면 제대로 공간이동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중간에 공간의 미아가 된다거나 아니면 신체가 분리되는 참사를 겪으면 큰일 아닌가.

    “걱정할 건 없어. 보아하니 이곳이 공간적으로 분리된 모양이지? 그냥 공간이동이 아니라 포탈을 통한 거라서 주변 상황이 어떻든 양쪽이 이어질 테니까.”

    케틀러의 말에는 확신이 가득했다.

    “비슷한 상황을 겪어본 적이 있나?”

    현석의 물음에 케틀러가 웃었다.

    “크흐흐흐. 많이 겪어봤지. 지금 세상은 어떤지 몰라도 우리 때는 말이야, 아주 치열하게 싸웠어. 별 희한한 방법을 다 동원했지. 공간을 잘라서 적진을 가르는 정도는 다반사였으니까.”

    현석이 관심을 갖자 캐틀러가 신이 나서 말을 이었다.

    “함정 중에는 공간을 분리시키는 것들도 제법 있었지. 하지만 아무리 그렇게 공간을 분리해 봤자, 포탈을 열면 끝이야. 포탈은 좌표를 이용하는 공간이동이 아니라 그저 양 끝을 이어주기만 하는 이동법이거든.”

    정확한 원리는 몰라도 안전하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현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그래서 그 포탈이 어디 있지?”

    “약속의 말을 읊으면 나타나지.”

    현석은 약속의 말을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케틀러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현석이 의아한 표정을 짓자 케틀러가 그제야 말을 꺼냈다.

    “크흐흐흐. 나도 그건 몰라. 그저 내가 아는 사실을 말해줬을 뿐이지.”

    현석이 눈살을 찌푸리자, 케틀러가 웃으며 말을 덧붙였다.

    “너 잘하는 거 있잖아? 말 따위 몰라도 그만 아닌가?”

    그 말에 현석의 표정이 굳었다. 그리고 가만히 케틀러를 쳐다봤다.

    “왜? 내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나?”

    모를 리가 있는가. 지금까지 현석이 모든 상황을 돌파해온 원동력이 바로 그것인데.

    “아마 쉽지는 않을 거야. 그래도 길은 있으니까 힘내라고. 아, 참고로 우리가 바라는 건 아주 소박해.”

    현석은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바라는 거라니. 지금 누가 누구에게 뭘 요구하고 있단 말인가.

    “황제폐하의 사면령.”

    케틀러의 진지한 말투에 현석은 그저 가만히 그를 쳐다보기만 했다.

    “아마…… 네게도 나쁘지 않을 거야. 부디…… 부디 그걸 찾아서 우리에게 자유를…….”

    케틀러의 말은 더 이상 이어지지 않았다.

    현석은 돌아서서 계단 아래로 내려갔다. 아주 잠깐이지만 마음이 움직이긴 했다. 케틀러의 절박한 말투에 살짝 마음이 흔들렸다.

    ‘혹시라도…… 기회가 된다면 찾아보긴 하지.’

    물론 그걸 찾기 위해 따로 힘을 들일 생각은 없었다. 아직은 거기까지 신경을 쓰기엔 시간이 모자랐다.

    계단에서 내려간 현석은 감옥의 중앙에 섰다.

    ‘비밀통로…… 공간이동의 포탈…… 약속의 말…….’

    현석은 아까 케틀러가 해준 말을 떠올리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지금까지 수도 없이 해온 일일 뿐이었다. 그걸 좀 더 깊이 파고들면 된다.

    현석은 자신의 감각에 사방에서 흐르고 있는 마력을 차근차근 담기 시작했다.

    * * *

    우우우웅.

    허공에 나직한 진동음이 울렸다. 아니, 실제로 공기가 요동치고 있었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그곳에 모여든 마력이 움직이는 중이었다.

    이내 마력이 한군데로 응축되었다.

    그러더니 새하얀 소용돌이가 하나 나타났다.

    하얀 던전, 화이트홀이었다.

    화이트홀 안에서 사람 하나가 툭 튀어나왔다.

    현석이었다.

    “후우. 진짜 쉽지 않네.”

    현석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주위를 둘러봤다. 일단 여기가 어디인지를 확인해야 했다.

    “산꼭대기 같은데?”

    사방이 뻥 뚫린 산 정상이었다. 다행히 주변에 인적은 없었다.

    “여기가 어디인지가 중요한데…… 왠지 느낌이 익숙한데?”

    보이는 광경도 그렇고 분위기도 그랬다.

    현석은 뒤로 돌아 화이트홀을 쳐다봤다. 화이트홀이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진짜 특이하네.”

    이런 화이트홀은 처음이었다. 이런 게 있다는 얘기도 들어본 적 없었다.

    숨겨진 화이트홀이라니.

    저 화이트홀을 여는 방법은 간단했다. 그저 정확한 위치에 서면 된다.

    그래서 오히려 발견하기가 어렵다. 정확한 위치를 찾아 서지 않으면 아예 열리질 않으니 말이다.

    던전 안에 있는 출구도 마찬가지 방식이었기에 처음엔 좀 당황했다.

    출구가 생기는 자리야 마력을 감지하면 되니 찾을 수 있었다. 잔여 마력이 워낙 희미해 금방 찾지는 못했지만 아예 찾을 수 없게 숨겨진 건 아니었다.

    문제는 그걸 찾아도 소용이 없다는 점이었다. 화이트홀이 나타나게 만들려면 던전 입구가 있는 위치가 아니라, 미리 정해진 자리에 서야 했으니까.

    어쨌든 그것까지 찾아서 이렇게 나올 수 있었다.

    현석은 일단 자리에 앉아서 좀 쉬었다. 물도 마시고 바닥 난 체력도 좀 보충하고 자연회복의 힘을 빌어 상처도 치료했다.

    지하묘지는 정말 지독한 곳이었다.

    원래는 그런 곳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안에는 이제 무시무시한 언데드들이 가득했다.

    그곳에 있는 모든 언데드를 소멸시켰다.

    그저 좀비나 스켈레톤만 있었다면 이렇게 힘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곳에 있는 언데드는 그런 어설픈 것들이 아니었다.

    무려 듀라한이었다.

    헤아릴 수조차 없을 정도로 많은 듀라한이 지하묘지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악전고투 끝에 그들과의 싸움에서 이기고 이렇게 나올 수 있었다.

    어쨌든 이제 투명 던전 입구 근처에 누가 지키고 감시하든 상관이 없어졌다.

    거기로 통하는 다른 길이 있으니까.

    현석은 일단 넝마로 변한 옷을 모두 벗었다. 그리고 새 옷을 꺼내 갈아입었다.

    “자, 그럼 일단 아래로 내려가볼까?”

    이 산에서 벗어나는 것도 그리 쉬울 것 같지 않았다. 사방에 보이는 거라고는 산밖에 없었으니까.

    < 아르포르 기사단 > 끝

    ⓒ 김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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