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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눈 뜨고 레벨업-87화 (87/326)
  • < 지하감옥 4 >

    “흐으으으으.”

    검은 붕대를 둘둘 감은 사람은 간헐적으로 신음을 흘렸다. 고통 때문에 흘리는 신음이 아니라 신음에 가까운 이상한 소리였다.

    현석은 잠시 그를 살폈다. 검은 붕대 인간은 가만히 선 채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의 모습이 군데군데 어둠에 잠겨 있었다. 현석은 근처에 있는 암흑석을 조금씩 치웠다. 일단 이 안에 채워진 어둠을 조금이라도 없애야 할 듯했다.

    현석이 철창 근처의 암흑석을 싹 치울 때까지도 검은 붕대 인간은 움직이지 않고 가끔 신음만 흘렸다.

    “흐으으으.”

    현석은 조금씩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암흑석들을 치웠다. 이내 검은 붕대 인간 주위를 제외한 모든 암흑석을 컨테이너 박스 안에 넣을 수 있었다.

    현석은 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갔다. 심안으로 이름을 확인해 봤지만 아무것도 뜨지 않았다.

    아직 현석의 수준으로는 볼 수 없다는 뜻이리라.

    “흐으으으. 여긴 어떻게 들어왔지?”

    현석은 놀란 눈으로 그를 쳐다봤다. 검은 붕대 인간의 눈에서 붉은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가 한 말은 한국어도 영어도 아니었다. 굉장히 특이한 언어였다. 이 세상 언어가 아닌 듯했다.

    한데 놀랍게도 현석은 그 말을 알고 있었다. 언제 들어온 건지 모르지만 그 언어에 대한 지식이 이미 현석의 머릿속에 있었다.

    생각해보면 현석은 지금까지 언어 문제로 곤란을 겪은 적이 없었다.

    미국에 가서도 아주 자연스럽게 영어를 썼다. 심지어 영어로 된 서류를 읽는데도 별 문제가 없었다.

    그때는 별 생각이 없었는데, 지금 다시 그걸 떠올려보니 확실히 이상한 일이었다.

    자신은 지금까지 외국어 공부를 한 번도 한 적이 없었으니까.

    이상한 일이긴 해도 지금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는 아니었다. 지금은 당장 닥친 일부터 처리해야 한다.

    “넌 누구지?”

    현석이 같은 언어로 물었다. 이 언어의 이름이 제국어라는 것이 떠올랐다.

    ‘제국어라니. 그런 게 어디 있어?’

    무슨 제국인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지금 저 붕대 인간과 자신이 쓰는 말은 제국어였다.

    “내가 먼저 물었다. 여긴 어떻게 들어왔지?”

    “문을 열고 들어왔지 어떻게 들어왔겠어?”

    “문을 열었다고? 잠겨있었을 텐데?”

    현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잠겨 있었다. 투명 던전도 지하감옥 입구도, 그리고 이 철창도.

    하지만 다 열었다. 이런 걸 여는 건 전혀 어렵지 않았다.

    “잠겨있는 걸 열었다. 이제 내 질문에 대답할 차례야. 넌 누구지?”

    하지만 붕대 인간은 현석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말투에 놀람이 어렸다.

    “잠겨있는 걸 열었다고? 설마 마력패턴을 푼 건가? 감옥이라서 굉장히 복잡한 보안이 설정되어 있을 텐데?”

    “어쩐지 좀 복잡하다 했지. 그래도 별로 어렵지는 않던데?”

    그보다 훨씬 어려운 아공간의 마력패턴까지 풀고 있는 중인데 고작 그 정도가 어려울 리 없었다.

    아직 아공간을 푸는 건 성공하지 못했지만 그것도 시간 문제였다. 조만간 반드시 풀린다.

    현석은 문득 자신이 레벨업보다는 다른 데 더 치중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게 뭐 어쨌단 말인가. 의미 없이 단순 사냥에 의한 레벨업보다는 이런 식으로 특별한 능력을 키우는 게 낫다.

    ‘어차피 레벨은 나중에 레인보우 엘릭서로 올리면 돼.’

    현석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붕대 인간을 쳐다봤다. 그의 눈에서 흘러나오는 붉은빛이 거칠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게 놀람의 감정을 표현하고 있다는 걸 현석은 그냥 알 수 있었다.

    “이 철창도 그렇게 푼 건가? 그보다 이 안에 있던 어둠을 어떻게 걷어갔지?”

    붕대 인간은 참으로 궁금한 것도 많았다. 현석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내가 암흑석을 다 떼어냈거든. 마력패턴을 풀면 되는 거라서 별로 어렵지 않았지.”

    사실은 어려웠지만 현석은 약간 허세를 부렸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그리고 저 붕대 인간이 계속 놀라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암흑석을 떼어냈다고?”

    붕대 인간은 주위를 둘러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이 주변이 이 모양이군. 내 근처에 있는 암흑석들을 좀 치워주지 않겠나? 어둠의 힘이 계속 스며들어서 기분이 좋지 않군.”

    현석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저놈이 서 있는 근처로 가서 허리를 숙여 암흑석을 줍는 것이 왠지 꺼림칙했다.

    “나중에 필요하면 가져가지.”

    “야박하군.”

    “서로 믿고 등을 맡기는 사이는 아니잖아? 그리고 감옥에 갇혀 있던 사람이 순수할 거라고 생각할 사람이 몇이나 있겠어?”

    “감옥에 갇혔다고 해서 꼭 죄를 지은 사람은 아니라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군.”

    “하지만 네가 그럴지 아닐지는 알 수 없잖아?”

    “확실히. 그럼 슬슬 내 소개를 해야겠군.”

    현석은 눈을 빛내며 심안을 최대한으로 발동시켰다. 상대의 정보를 읽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최소한 그가 거짓을 말하는지 아닌지는 파악해야 하지 않겠는가.

    현석의 마력이 붕대 인간을 슬그머니 감쌌다.

    현석은 심안에 마력에 전신의 감각까지 다 동원해서 붕대 인간을 살폈다.

    “특이한 인간이군. 그렇게 애쓸 필요 없다. 난 진실만을 말하니까. 아니, 그럴 수밖에 없다고 해야 하나? 난 존재 자체가 거짓이니까.”

    현석이 눈살을 찌푸렸다. 저게 대체 무슨 말인가. 존재 자체가 거짓이라니. 그리고 존재가 거짓인 자가 무슨 진실을 말한단 말인가.

    “반작용이라고 생각하면 돼. 존재가 거짓이기에 진실만을 말하게 된다고 말이야. 뭐…… 믿지 않아도 상관은 없지만.”

    현석은 속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안 믿기로 했다.

    “다시 내 소개를 하지. 난 아르포르 기사단의 단장이었던 케틀러라고 하네.”

    “아르포르?”

    현석은 얼마 전에 아르포르라는 단어를 봤던 기억이 났다. 아르포르의 눈이라는 아티팩트를 얻었을 때 그 설명에 나왔던 새 이름이었다.

    “아르포르를 아나?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에 존재하는 전설에나 나오는 새의 이름이지.”

    “역시 전설이었군.”

    “당연하지. 아르포르는 하늘에 떠 있는 채로 수천 년을 살아가는 새인데 그게 진짜로 존재하겠나? 있다면 신뿐이겠지.”

    어쨌든 아르포르 기사단은 그런 신의 이름을 따서 만든만큼 아주 강력하거나 권력의 핵심에 있을 확률이 높았다.

    ‘그나저나 기사단?’

    투명 던전을 하나하나 확인하면서 좀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긴 했다. 한데 정말로 제국이라고 부르는 곳을 조각조각 나눠놓은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저들이 일부러 그렇게 해 놓은 건가? 대체 어떤 기술을 갖고 있으면 그게 가능하지?’

    아마 그것은 마력에 기반을 둔 기술일 것이다.

    “우리 아르포르 기사단은 황제 폐하의 명령에만 따른다네.”

    황제라는 말에 현석이 눈을 빛냈다.

    제국이 등장했으니 당연히 황제도 나와야 한다. 그리고 그 황제 직속 기사단이 바로 여기 있었다.

    “이 감옥에 갇힌 자들은 모두 내 부하들이었지. 지금은 모두 이 꼴이지만.”

    현석은 갑자기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강렬한 예감 하나가 뇌리를 강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하고 싶은 얘기가 있으면 속 시원하게 해봐. 다 들어줄 테니까.”

    현석의 말에 붕대 인간, 케틀러의 눈빛이 몇 번 깜빡였다.

    현석은 그의 얼굴이 분명히 미소 짓고 있다고 생각했다. 붕대에 감겨 있어 표정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확연하게 그것이 느껴졌다.

    어쩌면 그건 현석이 남다른 감각을 갖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말을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기다려왔는지, 또 얼마나 하고 싶었는지 너는 상상도 못 할 거야.”

    붕대 인간의 얼굴에 어린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아니, 현석의 눈에 그렇게 보였다.

    * * *

    현석은 질린 눈으로 붕대 인간, 케틀러를 쳐다봤다. 잠깐 후회가 될 정도로 말이 많은 놈이었다.

    말은 엄청나게 많이 했지만 정리하면 단순했다.

    이들은 아르포르 기사단이었고, 누명을 쓰고 이 감옥에 갇혔다.

    여기는 제국에서도 지은 죄가 엄청나게 깊은 자들만 갇히는 곳이었다.

    웬만한 중범죄자들조차 몇 번이나 심사숙고한 후에 가둘 정도로 극악한 감옥이었다.

    그런 감옥에 무려 황제 직속 기사단이 갇힌 것이다.

    당연했다. 이들의 죄목이 바로 반역이었으니까.

    이들은 이곳에 갇히는 대신 가족을 살렸다. 이들의 가족에게는 절대 죄를 묻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여기에 갇히게 된 것이다.

    이들이 여기에서 나갈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 황제의 사면령뿐이었다.

    “그 붕대는 뭐야?”

    “붕대? 아, 이 봉인의 천을 말하는 건가?”

    “봉인의 천?”

    “영혼을 봉인해 두는 거지. 영원히 갇혀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섬뜩한 말이었다.

    “그럼 몸은?”

    현석의 물음에 케틀러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어떻게 됐겠어?”

    현석이 대답하지 않자, 케틀러가 웃으며 말했다.

    “큭큭큭. 썩어 문드러졌지. 아니, 그조차 남지 않았지. 아까 내가 얘기한 거 기억나나? 난 존재 자체가 거짓이라고. 내 몸은 봉인의 천으로 모양만 남아있을 뿐이야.”

    그러니 저 붕대 안에 아무것도 없이 그저 영혼만 남아 있다는 뜻이다.

    “정말…… 지독한 감옥이군.”

    몸이 다 썩어 사라질 때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까? 케틀러를 비롯한 아르포르 기사단은 그 오랜 시간을 여기 갇힌 채 버티고 있었다는 얘기다.

    이 얼마나 지독한 형벌인가. 게다가 이들은 누명을 쓰고 들어왔다고 했다.

    “억울하진 않나?”

    “억울? 그런 감정은 이제 남아있지 않아. 사실…… 우리가 원하는 건 딱 하나야.”

    현석이 케틀러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케틀러는 잠시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사면령.”

    현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사면령은 이들에게 자유를 되찾아줄 것이다.

    죽을 수 있는 자유 말이다.

    “이제 어쩔 셈이지? 나머지 감옥도 다 털어갈 건가?”

    케틀러의 물음에 현석이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할 수 있는데 굳이 내버려 둘 필요는 없었다. 이 안에 있는 모든 암흑석을 가져갈 것이다.

    “그럼 부탁 하나만 하지. 다 끝나면 우릴 밖으로 데려가 주겠나?”

    “밖? 감옥 밖을 말하는 건가?”

    “맞아. 어차피 감옥 자체가 의미 없지 않아?”

    현석은 대답하지 않고 주위를 둘러봤다. 이 감옥에는 정말 아무것도 없었다.

    ‘일단…… 저 차단의 기둥은 수거해 가야겠군.’

    암흑석들과 같이 보관하면 될 듯했다.

    현석은 차단의 기둥들을 분리해서 컨테이너 박스 안에 넣었다.

    그 다음 옆 감방으로 가서 암흑석을 분리해 수거하고 차단의 기둥을 뽑아가는 일을 반복했다.

    감옥의 수는 엄청나게 많았다. 그래서 모든 감옥을 다 도는 데 걸린 시간도 굉장히 길었다.

    어쨌든 모든 일을 마무리한 현석은 다시 케틀러에게 돌아갔다.

    “날 위로 데려다주러 왔나?”

    현석은 그를 가만히 보다가 말했다.

    “일단 널 믿기가 어려워서 안 될 것 같아.”

    “난 진실만을 말한다는 사실을 얘기해 준 걸로 기억하는데?”

    “그 말 자체를 믿기 어려우니까.”

    의외로 케틀러는 현석의 말에 쉽게 수긍했다.

    “확실히 인간은 믿기 어려운 존재지. 그럼 우릴 그냥 이렇게 방치해 놓을 생각인가?”

    현석이 눈을 빛내며 케틀러를 유심히 살폈다. 여전히 심안이 발동하지 않았다.

    “내가 널 파악할 수 있게 해줄 수 있나?”

    케틀러의 눈에서 흘러나오는 붉은 빛이 더욱 환하고 강해졌다.

    “날 파악한다고? 실력 차가 너무 많이 나서 쉽지 않을 텐데?”

    현석은 그제야 한 가지 가설을 세울 수 있었다. 너무 레벨 차이가 많이 나면 심안을 쓸 수 없는 게 분명했다.

    “그러니까 그게 가능하게 해 달라는 거지. 그거 되나?”

    “뭐…… 불가능하진 않을 거야. 어디 해볼까?”

    케틀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의 눈에서 뿜어져 나오는 붉은 빛이 엄청난 속도로 깜빡였다.

    “자, 이제 됐으니 한 번 시도해봐. 한데 내 육체가 없는데 과연 파악이 될지 모르겠군. 영혼의 격이 다른 건 확실한데 말이야.”

    ‘영혼의 격?’

    현석은 어렴풋이 그게 바로 레벨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심안에 대해 알고 있는지 모르는지 가늠이 안 되는군.’

    어쨌든 현석은 일단 다시 심안을 시도했다. 역시 쉽게는 되지 않았다.

    하지만 왠지 집중하면 집중할수록 가능성이 느껴졌다.

    그렇게 얼마나 집중했을까. 이내 이름이 떠올랐다.

    [케틀러]

    ‘됐다!’

    현석은 내심 환호했다. 드디어 성공한 것이다. 그리고 새삼스러운 눈으로 케틀러를 쳐다봤다.

    심안이 통하게 했는데도 이렇게 힘들면 대체 그게 아닐 때는 얼마나 대단한 수준이 되어야 한단 말인가.

    ‘어쨌든 이제 자세한 정보를 읽어볼까?’

    현석은 두근두근한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쓰며 케틀러의 이름에 집중했다.

    이내 정보가 쫙 펼쳐졌다.

    < 지하감옥 4 > 끝

    ⓒ 김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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