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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눈 뜨고 레벨업-63화 (63/326)
  • < 쪼개지다 3 >

    양세희는 녹초가 되어 바닥에 널브러졌다. 이제는 때려죽인다고 해도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않을 작정이었다. 아니,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그런 양세희의 귓가에 지옥의 사자가 속삭이는 듯한 말이 들려왔다.

    “이제 한 번만 더 하고 오늘은 끝내야겠군. 그런 저질 체력으로 잘도 지금까지 버텨왔네.”

    현석의 말에 양세희는 눈을 감아버렸다. 뭐라고 대꾸할 기운도 없었고, 기분도 아니었다.

    ‘날 죽여라, 죽여…….’

    문득 그냥 이쯤에서 포기할까? 하는 생각이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그 생각을 지웠다.

    ‘아니면…… 조금만 쉬엄쉬엄 가자고 해볼까?’

    양세희는 실눈을 뜨고 현석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녀의 눈에는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아 보였다.

    이보다 조금만 더 약하게 해준다면 무슨 대가라도 치를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어떤 대가를 제시해도 현석은 그걸 거절할 것이다.

    최소한 양세희가 보기에는 그랬다.

    “저…… 진짜 손가락 하나 못 움직이겠거든요? 근데 정말로 저걸 하나 더 잡아요?”

    현석은 그 질문에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 근처 바위로 가서 앉았다.

    그리고 어디서 꺼냈는지 캔맥주 하나를 찰칵 따서는 벌컥벌컥 마셨다.

    그걸 본 양세희의 입가에 침이 고였다. 딱 한 모금만 마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굴뚝같았다.

    “얼른 잡고 맥주나 한 잔 하지.”

    현석의 말에 양세희는 자신도 모르게 일어났다. 정말 한 톨의 힘도 남아있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일어나니 또 싸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심호흡을 하며 최대한 빨리 체력을 회복시키려 애썼다.

    그리고 군체지렁이가 나타나자, 그쪽으로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또 힘겨운 싸움이 시작되었다.

    현석은 뒤에서 그걸 지켜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성장 가능성을 확인했다.

    * * *

    양세희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해냈어!’

    절대 불가능할 것 같은 일을 해냈다. 결국 또 한 마리의 군체지렁이를 잡아낸 것이다.

    그녀는 거의 기다시피 현석이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 넓은 바위 위에 캔맥주가 쫙 깔려 있었다.

    “마셔도 되는 거죠?”

    양세희는 대답도 듣지 않고 일단 하나를 집었다. 그리고 깜짝 놀랐다. 정말로 시원했다. 이 안에 냉장고가 있는 것도 아닐 텐데 말이다.

    그녀가 놀란 눈으로 바라보자, 현석은 어서 마시라는 듯 눈짓을 했다. 그러면서 바위 위에 커다란 접시 하나를 내려 놓았다.

    ‘정말 신기하네. 대체 언제 저런 걸 준비해 온 거야?’

    접시 위에는 잘게 자른 육포처럼 보이는 안주가 가득 담겨 있었다.

    하지만 자세히 보니 육포는 아니었다.

    “이게 뭐죠?”

    “안주.”

    현석은 더 대답해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리고 양세희도 더 얘기나 나눌 생각이 없었다. 그녀는 단숨에 캔맥주 하나를 벌컥벌컥 비워 버렸다.

    “캬아! 진짜 좋다.”

    양세희는 접시에 수북이 담긴 안주에 손을 뻗었다. 그리고 그 중 하나를 집어 입에 넣고 씹었다.

    그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우와! 이거 대체 뭐예요? 그냥 육포 같지는 않은데?”

    정말로 맛있었다. 이렇게 맛있는 음식 자체를 거의 먹어본 적이 없는 듯했다.

    특히 맥주와 너무나 잘 어울렸다.

    그녀는 당장 맥주 하나를 더 따서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 안주를 열심히 집어 먹었다.

    양세희는 워낙 육체적 정신적으로 힘든 상황에서 시원한 맥주를 보고 나니 그냥 눈이 돌아가 버려 주변을 살피지 못했다.

    아마 조금이라도 정신을 차리고 있었다면 주변에서 자신이 안주를 집어 먹을 때마다 표정이 점점 더 오묘하게 변해간다는 걸 분명히 확인했을 것이다.

    결국 양세희는 열 개가 넘는 캔맥주를 싸우듯 마시고, 접시에 수북이 담긴 안주도 몽땅 먹어치웠다.

    “하아. 살 것 같다.”

    양세희는 바위에 등을 기대고 앉아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현석을 바라봤다. 그리고 현석 근처에 모여 있는 사람들도 하나하나 확인했다.

    문득 현석을 뺀 나머지 사람들의 표정이 그리 좋지 않다는 걸 발견했다.

    “무슨 일 있었어요? 다들 왜 그래?”

    양세희는 자신이 사냥하는 동안 현석이 일행에게 무슨 짓이라도 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아니라면 현석만 그대로고 나머지 모두의 표정이 안 좋을 리 없지 않은가.

    아무도 그녀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현석을 바라봤다.

    “아무 일 없었다.”

    그 말에 나머지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석의 말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표정이 그런 건 다른 이유였다.

    양세희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일행을 보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라는데 괜히 더 추궁해서 뭐 하겠는가.

    ‘다른 사람도 아니고 둘째 오빠가 눈치 볼 것 같지도 않고.’

    양동욱은 강압적으로 나가면 나갈수록 더 튀어 오르는 사람이었다. 아마 현석이 협박이라도 했다면 당장 일이 터졌을 것이다.

    그렇게 대충 생각을 접은 양세희의 눈이 다시 반짝였다. 방금 자신이 먹은 그 맛있는 음식이 뭔지 알아내고 싶었다.

    나가서 깨끗이 샤워를 한 다음 좀 더 여유롭게 술과 음식을 즐기고 싶었다. 오늘의 자신은 충분히 그럴 자격이 있었다.

    “아까 제가 먹은 안주, 그거 뭔가요?”

    양세희가 눈을 반짝이며 묻자, 현석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담했다.

    “지렁이 껍질.”

    순간 양세희가 멈칫 했다. 그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하지만 이내 억지로 웃으며 말했다.

    “에이, 장난하지 말고요. 진짜 맛있어서 그래요. 나도 해먹고 싶어서요.”

    “내가 장난이나 하는 사람이었나?”

    “오늘 처음 봤는데 그걸 어떻게 알아요? 마수를 먹는다는 게 말이 안 되잖아요. 장난 그만 하고 알려주세요.”

    현석은 마치 증거를 내밀기라도 하듯 넓적한 지렁이 껍데기를 보여줬다. 그리고 그걸 즉석에서 칼로 슥슥 썰어 다듬었다.

    아까 접시에 담긴 것과 거의 비슷한 모양이 되었다. 하지만 똑같지는 않았다.

    “다, 다르잖아요!”

    현석은 양세희의 외침에 불을 준비해 그걸 가볍게 구웠다. 드디어 아까와 똑같은 모양이 되었다.

    양세희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우웨엑!”

    그녀는 결국 먹었던 걸 모조리 게워내야했다.

    “이해할 수가 없군. 아깐 그렇게 맛있게 먹어 놓고서.”

    현석은 그렇게 중얼거린 다음 일행을 돌아왔다.

    “체력 회복이나 상처 회복에 도움이 되는 음식이다. 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가져가도 좋아.”

    다들 대답하지 않았다. 절대 가져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 현석이 주는 음식은 무조건 몇 번이고 확인하겠다고 다짐에 다짐을 거듭했다.

    * * *

    던전에서 밖으로 나온 현석은 주머니에서 울리는 소리에 핸드폰을 꺼냈다. 문자가 와 있었다.

    던전 안으로는 전파가 가지 않기에 그 사이에는 전화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플레이어들 간에는 문자로 연락을 주고받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오명국이 보낸 문자였다.

    -상황 끝났습니다.

    아주 간단한 한 마디였다. 하지만 그거 하나면 충분했다. 구구절절한 설명이 없다는 건 정확히 예상했던 대로 끝났다는 뜻일 테니까.

    ‘드디어…… 본격적인 길드전이 시작되겠군.’

    본래 레드드래곤 길드는 오랫동안 버티긴 하지만 끝까지 K나이츠 길드에 휘둘리기만 하다가 몰락한다.

    덩치만 잔뜩 부풀리고 실속은 거의 없는 쭉정이 같은 길드가 되어 끊임없이 내리막길을 걷는 길드가 바로 레드드래곤 길드였다.

    하지만 이젠 다를 것이다.

    현석은 오명국에게 문자를 남겼다.

    -만납시다.

    아마 오명국은 한 시간 안에 달려올 것이다.

    현석이 문자를 확인하고 보내는 걸 마무리 하자, 그것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던 양동욱이 현석 옆으로 다가왔다.

    “저…… 이제 어디로 출근하면 됩니까?”

    현석은 잠시 고민했다. 이대로 양동욱을 집 지하실과 연결된 장교숙소로 데려가도 좋을지 따져본 것이다. 결론은 금방 내려졌다. 좀 더 두고 보기로 말이다.

    결국 그곳이 현석이 앞으로 꾸릴 팀의 본부가 되겠지만, 사람을 받는 족족 거기에 넣을 수는 없었다.

    더구나 그곳은 던전이다. 외부와 연락수단이 전혀 없었다. 그러니 결국 다른 사무실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오늘 만난 커피숍으로.”

    “예?”

    전혀 생각지도 못한 답에 양동욱이 멍하니 현석을 바라봤다. 이 무슨 어처구니없는 답이란 말인가.

    “커, 커피숍에서 일을 하는 겁니까?”

    양동욱은 순간 자신이 너무 성급한 결정을 내린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건 아주 짧았다.

    “적당한 사무실을 구하는 게 첫 번째 일이다.”

    양동욱은 그제야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맡겨주십시오. 길드를 설립하는 거 맞습니까?”

    현석이 고개를 저었다. 길드처럼 거창한 걸 만들어 이끌 생각은 없었다.

    “인원이 많지 않은 팀을 꾸린다고 생각하면 될 거다.”

    “티, 팀이요? 설마 달랑 사냥 파티 하나 운영하실 생각은 아니죠?”

    “파티는 아니고…… 아주 작은 소규모 길드라고 보고 진행하면 되겠군.”

    양동욱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소규모 길드라면 사실 큰 사무실이 필요치는 않다.

    “필요하면 건물을 매입해도 돼. 새로 짓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현석의 말에 양동욱의 눈이 번득였다. 돈 냄새를 맡은 것이다. 이러면 얘기가 전혀 달라진다.

    ‘아무래도…… 제법 풍족한 팀이 될 것 같군.’

    양동욱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맺혔다.

    * * *

    오명국은 현석의 문자를 받자마자 달려왔다. 한중현과 같이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한중현은 누군가와 함께 뭔가를 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그는 언제나 혼자였다. 물론 사냥할 때는 파티를 꾸려서 가지만 말이다.

    어쨌든 오명국은 현석보다 먼저 도착했다. 항상 만나던 커피숍이었다.

    ‘여긴 올 때마다 텅텅 비어있군. 아무래도 조만간…… 망하겠는데?’

    하긴, 이런 외진 곳에 커피숍을 차렸으니 장사가 잘 되면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어쨌든 손님이 없으니 조용해서 좋았다. 대화를 나누기에도 좋았고 말이다.

    알바생만 좀 신경 쓰면 되는데, 그나마도 항상 안에 들어가 있기에 크게 거슬리지 않았다.

    오명국은 여기가 망하면 인수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가 사라지면 현석을 만날 만한 장소가 마땅치 않았다.

    ‘이 정도쯤이야 뭐…….’

    오명국은 현석에게 고개를 숙이고 밑으로 들어가면서 막대한 보수를 받게 되었다.

    그걸 생각하면 이 정도 투자는 일도 아니었다.

    그런 계획을 대충 세우고 있을 때, 현석 일행이 나타났다. 오명국은 현석과 함께 있는 사람들을 한순간에 훑어보며 눈을 빛냈다.

    현석을 제법 여러 번 만났지만 그가 이렇게 다른 사람들을 함께 데리고 온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그러니 관심이 생기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남자 하나에 여자가 둘…… 게다가 둘 다 굉장한 미인.’

    하지만 현석은 그들과 함께 들어오지 않았다. 나머지 일행은 다른 곳으로 가고 현석 혼자 커피숍으로 들어왔다.

    오명국은 살짝 아쉬웠지만 다음에는 함께 얘기라도 나눌 기회가 있을 거라 믿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현석에게 정중히 인사부터 했다.

    “이쪽으로 앉으시지요.”

    현석은 자리에 앉자마자 단도직입적으로 본론부터 꺼냈다.

    “진대호 쪽 상황은 알아봤습니까?”

    그 질문에 오명국이 씨익 웃었다.

    “아주 길길이 날뛰고 있습니다. 계획대로 된 게 하나도 없이 반쪽짜리 결과를 받아 들었으니 열 좀 받을 겁니다.”

    현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럴 것이다.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하다. 앞으로는 더더욱 힘들어질 테니까.

    “비자금으로 준비한 자금도 막아버렸고, 몰래 빼돌리려고 숨겨둔 장비들도 싹 수거했습니다.”

    어차피 레드드래곤 길드의 돈과 장비다. 그걸 빼돌려 K나이츠 길드의 초기 자금에 보태려던 진대호의 계획이 어그러진 것이다.

    ‘어차피 뒤에 있는 조직으로부터 자금을 받긴 하겠지만…….’

    그래도 예전과 달라졌다는 게 중요했다. 예전보다 훨씬 쪼들리게 시작할 테니 이후의 성장세도 확연히 다를 것이다.

    “그리고 진대호 쪽이 포섭하던 플레이어들 중 절반 이상을 다시 회유했습니다.”

    현석이 잘 했다는 듯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플레이어의 수를 줄이면 길드의 힘과 영향력이 줄어든다.

    “앞으로 진대호가 어떻게 나올 것 같습니까?”

    현석이 아는 진대호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뭔가 수를 쓸 것이다. 오명국이 그걸 파악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한 질문이었다.

    “움츠리거나 독한 수를 쓰거나 둘 중 하나인데…… 제가 보기에는 독한 수를 쓸 것 같습니다. 진대호 그 인간…… 목표를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놈 같습니다.”

    현석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잘 보셨습니다. 그러니 조심해야 합니다. 아직은 드러날 때가 아니라는 거, 명심하시고요.”

    “예. 염려 마십시오. 충분히 조심하고 있습니다.”

    지금 이 상황에서 진대호가 쓸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오명국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 모든 일의 중심에 오명국이 있다는 사실을 당분간은 숨겨야 한다.

    진대호가 손 쓸 수 없을 정도까지 성장하기 전엔 드러나선 안 된다.

    현석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걸 본 오명국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말 나온 김에 던전이나 다녀오죠. 아무래도 성장세가 예상보다 더뎌서 안되겠습니다.”

    오명국의 얼굴이 울상으로 변해갔다.

    ‘날 위해서 저런다는 건 알지만…… 진짜 울고 싶다.’

    오늘은 또 얼마나 지독한 꼴을 당해야 할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토가 나올 것만 같았다.

    어쨌든 오늘은 레드드래곤 길드가 둘로 쪼개진 날이었다. 그리고 오명국의 새 인생이 시작되는 날이기도 했다.

    그 모든 상황과 마음을 가슴에 품은 오명국은 현석의 뒤를 마치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엉금엉금 따라갔다.

    < 쪼개지다 3 > 끝

    ⓒ 김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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