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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눈 뜨고 레벨업-62화 (62/326)
  • < 쪼개지다 2 >

    한중현은 레드드래곤 길드 건물의 6층에 마련된 트레이닝 룸 한가운데 서 있었다.

    레드드래곤 길드에는 총 세 개의 트레이닝 룸이 있었는데, 다들 건물의 한 층을 통째로 사용해, 규모가 상당했다.

    그 중, 6층에 있는 트레이닝 룸은 아무 장비도 없이 바닥에 매트만 깔려 있었다.

    자유로운 훈련을 위한 공간이기도 했고, 또 전투 훈련에 쓰는 트레이닝 룸이기도 했다.

    당연히 사방 벽과 유리는 물론이고 바닥과 천장에까지 상당한 강화 작업이 이뤄져 있었다.

    그뿐 아니라 건물 자체에 충격 흡수재로 떡칠을 해 놓았다. 덕분에 이 안에서는 웬만한 충격이 가해져도 건물에 영향을 미치는 일이 거의 없었다.

    한중현은 그 안에서 자신이 가진 가장 좋은 장비를 모두 착용한 채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내 트레이닝 룸과 연결된 엘리베이터 문이 활짝 열렸다. 그리고 그 안에서 진대호가 저벅저벅 걸어 나왔다.

    그는 만면에 환한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드디어 이런 날이 왔구나.”

    진대호의 말에 의문이라도 가질 법하지만 한중현은 그저 차분히 가라앉은 눈빛으로 그를 지켜보기만 했다.

    진대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이 예상한 반응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가 아는 한중현은 이런 일이 생기면 일단 의문부터 풀고 봐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진대호의 뒤로 열 명의 플레이어가 줄줄이 따라 들어왔다. 나머지 40명은 1층에서 대기 중이었다.

    어차피 오늘은 싸우러 온 것도 아니고 그저 통보 몇 마디 하러 온 게 전부였기 때문에 이러든 저러든 상관은 없었지만 그래도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이놈이 왜 이러지?’

    그러고 보니 장비를 모두 착용하고 있지 않은가. 마치 싸움에 대비하기라도 한 것처럼.

    진대호가 잠시 멈칫거리자, 한중현이 서늘한 눈으로 그를 노려봤다.

    “왜? 내가 장소를 여기로 고른 게 의외인가?”

    “솔직히 그렇긴 한데, 뭐 상관없지.”

    상대가 힘으로 나오겠다면 얼마든지 오케이다. 한중현이 상당한 레벨의 플레이어라는 건 알지만, 진대호도 만만치 않았고, 그가 데려온 플레이어들도 수준이 아주 높았으니까.

    차라리 먼저 덤벼준다면 오히려 고맙다. 제대로 꺾어서 멘탈을 갈기갈기 찢어 버릴 수 있을 테니까.

    진대호는 그 생각을 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사실 오늘 일에는 중요한 목표가 한 가지 있었다. 그게 바로 한중현의 멘탈을 흔드는 것이었다.

    레드드래곤 길드는 아무리 진대호가 알맹이를 쏙 뽑아간다고 해도 그리 쉽게 무너질 만한 조직이 아니었다.

    애초에 한중현의 힘과 재력을 중심으로 만들어진 길드이기 때문에 한중현이 건재한 이상, 흔들기가 그리 쉽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 중심인 한중현을 직접 흔드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렇기에 그동안 충분히 준비를 했고, 오늘 그걸 터트리면서 한중현의 멘탈을 산산조각 내버릴 계획이었다.

    한데 시작부터 뭔가가 삐걱거리는 느낌이었다.

    한중현은 여전히 머뭇거리며 움직이지 못하는 진대호를 보며 피식 웃었다.

    “이럴 줄 알고 있긴 했는데…… 그래도 막상 진짜로 이런 일을 겪으니 기분이 아주 더럽긴 하군.”

    “그동안 네 잘난 비위 맞춰주느라 더러워진 내 기분에 비하면 그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지.”

    한중현은 의외로 그 말에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틀린 말은 아니야. 내가 좀 평범치는 않지. 그래도…….”

    한중현은 말을 끌며 진대호를 노려봤다. 그의 눈에서 번갯불이 번쩍이는 듯했다.

    “그래도 일을 벌이기엔 위에 나 같은 놈이 있는 게 훨씬 편하지 않아?”

    “확실히.”

    진대호는 그렇게 대답하고는 주위를 둘러봤다. 대체 한중현이 무슨 준비를 했기에 이렇게 자신만만한지 궁금했다.

    ‘정말 별 것 없는데…….’

    진대호의 반응에 한중현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시간 질질 끌지 말고 용건이나 말해. 뭐…… 어차피 대충 예상은 하고 있지만.”

    진대호는 한중현의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그 말이 맞다. 어차피 이러려고 왔으니 계획대로 하면 된다.

    만일 그걸로도 한중현을 흔들 수 없다면 다른 수를 강구하면 되니까.

    “예상하고 있었다니 얘기하긴 편하겠군. 일단 난 오늘부로 여길 그만두기로 했어.”

    “퇴직금 잘 챙겨가도록. 너도 알다시피 우리 길드가 또 그런 건 잘 챙겨주는 편이잖아?”

    진대호는 한중현이 그런 말을 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리고 여기 함께 온 사람들도 같이 나가기로 했다.”

    한중현은 그제야 진대호 뒤에 나란히 서 있는 열 명의 플레이어들을 슥 둘러봤다.

    “보아하니 A팀인 것 같군. 그럼 총 50명이 한꺼번에 나가겠다는 뜻인가?”

    진대호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것 역시 일부만 보여주고 나중에 나머지를 공개해서 심적 타격을 주려 했는데, 저렇게 훤히 꿰뚫고 있으니 허탈하기까지 했다.

    “고작 그걸로 끝일 것 같지 않으니 계속 얘기해 봐.”

    A팀은 사실 레드드래곤 길드의 핵심이라 할 수 있었다. 진대호가 의도적으로 하나씩 길드에 심어 막대한 지원을 통해 성장시킨 플레이어들이었다.

    사실 이들이 빠져나가는 것만으로도 레드드래곤 길드의 전력이 절반으로 줄어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그런데도 한중현은 너무나 담담했다.

    진대호는 그 점이 너무나 마음에 안 들었다. 그래서 한중현을 가만히 노려봤다.

    “이제야 좀 마음에 드는 표정이 나오는군. A팀 말고도 데려가기로 한 사람이 50명쯤 더 있지?”

    그 말에 진대호가 흠칫 놀랐다. 50명이라는 숫자까지 알고 있다는 건 그 부분에 대한 자세한 조사가 끝났다는 뜻이었다.

    ‘이런 놈이 아니었는데?’

    진대호가 아는 한중현은 자기 강해지는 것 외에는 거의 관심이 없는 놈이었다.

    세심함이나 꼼꼼함, 치밀함은 한중현과 가장 관계없는 성격이라 할 수 있었다.

    한데 지금 이 상황은 그동안 자신이 한중현에게 속고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니면…… 그런 조력자가 있거나.’

    자신과 비슷한 능력을 가진 조력자 말이다.

    진대호의 생각은 그쪽으로 흘러갔다. 그게 아니고서야 지금 이런 상황 자체가 말이 안 되니까.

    더불어 그러려면 내부에 배신자가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정보가 유출되지 않고서야 어찌 이런 일이 벌어진단 말인가.

    ‘얼마나 조심해서 진행했는데.’

    그래서 이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그걸 한순간에 박살 내버린 배신자를 용서할 수 없었다.

    ‘그놈이 누구든…… 잡히기만 하면 절대 가만두지 않는다.’

    진대호가 속으로 이를 갈고 있을 때, 한중현이 비웃음을 머금은 표정으로 말했다.

    “이제 통보는 다 끝났나? 혹시 더 할 말 있으면 해. 그 정도 기다리고 들어줄 아량은 있으니까.”

    진대호는 마지막으로 준비한 말을 꺼냈다.

    “삼현그룹이 우릴 도와주기로 한 건 알고 있나?”

    이것이야말로 진대호가 준비한 회심의 한 수였다. 하지만 한중현은 너무도 간단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지. 그놈들이 날 계속 가만히 내버려 둔다는 건 말이 안 되거든. 슬슬 어떤 식으로든 움직일 거라고 예상하긴 했는데…….”

    한중현이 진대호를 보며 씨익 웃었다.

    “그게 고작 너라면 굳이 앞으로 신경 쓸 필요도 없겠어.”

    진대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한중현을 흔들러 와서 되려 자신이 흔들려 버렸다.

    상대를 너무 얕봤다. 그야말로 허를 찔린 기분이었다.

    “준비한 건 그게 끝인가?”

    한중현의 물음에 진대호는 굳은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문 채 그를 노려보기만 했다.

    “이거야 원…… 별로 재미가 없는데?”

    한중현은 그대로 돌아서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데려갈 사람 다 데리고 그만 가봐. 아, 너를 제외한 나머지 길드원들은 계약서 잘 확인해야 할 거야. 임의 탈퇴니 불이익이 있는 건 당연하지 않겠어?”

    “흥. 레드드래곤 길드의 계약서에는 그런 조항 따위 없다.”

    진대호가 코웃음을 치자, 한중현이 빙긋 웃었다. 그 웃음을 보는 진대호의 마음에 불안감이 차올랐다.

    “너 사내 메일 확인 안 하지? 얼마 전에 내규가 바뀌었거든. 계약서에 아주 애매한 조항이 하나 있더라고. 그걸 좀 이용해봤지.”

    진대호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의 눈빛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여기서 확 저질러 버려?’

    원래는 도발해서 한중현이 덤벼들면 정당방위를 성립시켜 제압할 생각이었다.

    그걸 이용해 육체적, 정신적 타격을 입힐 계획이었는데, 지금은 계획이고 뭐고 당장 달려들어 죽여 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고민됐다.

    하지만 진대호는 이내 고개를 젓고 뒤로 물러났다.

    차갑게 가라앉아 빛나고 있는 한중현의 눈빛을 봤기 때문이다. 분명 거기에 대한 대비도 세워뒀다.

    이럴 때는 그냥 조용히 물러나는 게 나았다. 어차피 기회는 앞으로도 또 온다.

    ‘그때는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 날 위해 쓰게 될 거야.’

    진대호는 이를 갈며 뒤로 물러선 다음 동료들에게 눈짓했다.

    다들 엘리베이터에 올라탔고, 마지막으로 진대호가 탔다. 진대호는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전까지 한중현을 끊임없이 노려봤다.

    이내 문이 닫히고 엘리베이터가 내려갔다.

    잠시 후, 뒤쪽에서 누군가가 나타나 걸어왔다. 숨길 곳 없는 트레이닝 룸이었지만 숨고자 마음먹으면 못 숨을 것도 없었다.

    지금껏 숨어 있던 사람은 오명국이었다. 그는 한중현 옆으로 가서 나란히 섰다.

    “흥분하실 필요 없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했고, 저쪽도 그랬을 뿐이니까요.”

    한중현이 빙긋 웃으며 오명국을 바라봤다.

    “흥분 안 합니다. 아니, 다른 의미로 흥분되는군요. 저들, K나이츠 길드라고 했나요? 그놈들을 바닥까지 끌어내릴 일을 생각하니 심장이 뜁니다.”

    그 말에 오명국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됐다. 진대호 덕분에 훨씬 빠르게 레드드래곤 길드 내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분의 도움이 있었으니 가능한 거였지만.’

    현석을 떠올리니 감탄을 넘어 존경심이 절로 솟아났다.

    이 모든 일을 계획하고 지원한 건 현석이었다. 아마 현석이 아니었다면 오명국은 중간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무너져버렸을 것이다.

    어쨌든 지금은 더없이 좋은 상황이었다.

    “배신자들 정리는 끝났습니까?”

    “예.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는지 저쪽에서 과하게 나서는 바람에 이쪽에 심은 스파이들을 싹 걸러낼 수 있었습니다.”

    물론 종로 암시장의 정보력을 이용했기에 가능했다. 오명국 혼자서는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이래저래 현석의 도움을 또 받은 것이다.

    그래도 덕분에 쭉정이만 남게 될 레드드래곤 길드 대신 좀 더 알차고 탄탄한 레드드래곤 길드의 중심에 설 수 있게 되었다.

    “우리 목표는 K나이츠 길드만이 아닙니다.”

    한중현은 독기 어린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삼현그룹도 우리가 먹을 겁니다. 거기에 대한 준비도 함께 해 주세요. 원한다면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겁니다. 알고 계시겠지만, 전 한 번 믿으면 끝까지 갑니다.”

    오명국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잘 알고 있습니다. 결코 실망시켜 드리지 않을 겁니다.”

    한중현이 씨익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오명국이 그것을 굳게 잡았다.

    레드드래곤 길드는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었다.

    * * *

    다들 현석의 손을 힐끔거리며 훔쳐보고 있었다.

    현석은 새하얀 달걀 하나를 들고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아니, 달걀이 아니라 달걀 모양의 알이었다.

    모양이 같다고 내용도 같은 건 아니지 않은가. 저 달걀은 군체지렁이 안에서 나온 것이었다.

    휴식 시간이 끝나가는 게 아쉬웠는지 양세희가 입술을 삐죽이며 한 마디 던졌다.

    “사냥은 제가 했는데 그건 왜 당신이 가져가는 거죠?”

    현석은 당당하게 말했다.

    “사냥이 아니라 훈련이니까. 이건 훈련 중 나온 부산물 같은 거고.”

    양세희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현석을 바라봤다.

    하지만 현석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억울하면 훈련이 아니라 사냥으로 바꾸든가. 다 내보내고 나 혼자 잡으면 되니까.”

    그 말에 양세희가 얼른 시선을 피했다.

    “누가 뭐라고 했어요? 그냥 그렇다는 거지. 아…… 저게 뭔지만 알았으면 좋겠다.”

    “토룡란.”

    “예?”

    양세희는 놀란 눈으로 현석을 바라봤다. 설마 얘기해줄 줄은 몰랐다.

    물론 현석도 이름 이상 알려줄 생각은 없었다.

    “슬슬 하나 더 나올 때가 됐군.”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들판 끝에서 군체지렁이 한 마리가 불쑥 솟아나왔다.

    양세희의 얼굴이 다시 창백해졌다. 아무래도 익숙해지려면 시간에 제법 오래 걸릴 것 같았다.

    현석이 그녀를 빤히 쳐다보자, 양세희는 억지로 일어나 힘없이 터벅터벅 걸어갔다.

    ‘진짜는 아직 시작도 안 했다는 건…… 때가 되면 말해줘야겠군.’

    현석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양세희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의 시선은 토룡란으로 향해 있었다.

    ‘이게 첫 번째에 나올 줄이야.’

    아무래도 회귀 뒤에 정말 운이 좋아진 것 같았다. 대부분의 일이 자신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이뤄지고 있으니 말이다.

    현석은 토룡란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정말 운이 좋으면 이걸 몇 개 더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토룡란의 진짜 효용은 이것이 엘릭서의 주재료가 된다는 점이었다.

    요즘 나도는 짝퉁 힐링포션 비슷한 가짜 엘릭서가 아닌 진짜 엘릭서 말이다.

    < 쪼개지다 2 > 끝

    ⓒ 김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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