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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눈 뜨고 레벨업-61화 (61/326)
  • < 쪼개지다 1 >

    양세희는 언제부터인가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버텨냈다.

    새하얘진 머릿속 한구석에 비참한 꼴로 쓰러져 지렁이들에게 덮쳐지는 자신의 모습이 남아 있어서 몸에서 힘을 풀 수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쿠웅!

    양세희는 쿵소리와 함께 몸이 크게 뒤흔들리는 걸 느끼고는 양 다리에 힘을 꽉 주고 자세를 더욱 낮췄다.

    그동안 수많은 사냥 덕분에 몸에 익은 경험적 자세가 자동으로 나온 것이다.

    그녀는 앞으로 중심을 이동시키며 있는 힘껏 방패를 밀어 붙였다.

    하지만 지렁이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흐으윽!”

    양세희는 갑자기 울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울 수는 없었다.

    죽을 정도로 힘들었다.

    지렁이에 대한 공포는 솔직히 죽음의 공포와 맞먹었다. 아니, 이번에 그녀가 느낀 감정은 그 두 가지가 뒤섞여 훨씬 격렬하고 무서웠다.

    게다가 온몸의 힘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다 짜낸 다음에도 어디에선가 또 힘을 끌어내 써야만 했다.

    육체적으로도 죽을 만큼 힘들었다. 아니, 거의 죽음에 닿았다가 떨어졌다고 봐야 한다.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녀는 더욱 힘을 줬다.

    그런 그녀의 어깨를 누군가가 툭툭 두드렸다.

    화들짝 놀랐지만 힘을 풀지 않고 고개만 슬쩍 돌려 확인했다. 현석이 특유의 담담한 얼굴로 서 있었다.

    “거기서 뭐…….”

    거기서 뭐 하고 있느냐고 말하려는데 현석이 중간에 말을 끊었다.

    “끝났다. 못 느꼈나?”

    양세희는 잠시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내 그 내용을 받아들이고는 무너지듯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지만 약하게 보이기 싫어서 꾹 눌러 참았다.

    사실 양세희가 조금만 더 정신이 있었다면 군체지렁이가 쓰러지는 순간 강력한 마력파동을 느꼈을 것이다.

    그건 그녀가 그동안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을 정도로 압도적으로 강력한 파동이었다.

    현석은 지렁이를 해체하기 전에 양세희의 상태를 심안으로 확인해 봤다.

    [이름-양세희]

    [레벨-63]

    [마력-630]

    [힘-53 ,민첩-21 ,체력-37 ,지능-22 ,정신력-30]

    레벨이 무려 두 단계나 뛰어올랐다. 확실히 이 정도로 목숨을 내놓았으면 그 정도 보상은 받는 것이 당연하다.

    게다가 힘과 정신력이 2 오르고 체력이 무려 6이나 올랐다. 레벨업 두 번에 스탯이 8이나 오르는 건 보통 던전에서는 거의 일어나기 힘든 일이었다.

    물론 이렇게 많은 스탯이 오르는 건 앞으로는 어려울 것이다.

    죽을 만큼 힘든 건 같지만 익숙함이 방금 겪었던 그 간절함과 절박함을 희석시킬 테니까.

    하지만 체력 위주로 스탯이 상승한다는 건 확실하다. 그리고 당분간은 보통 다른 던전에서 사냥하는 것보다 스탯 상승이 더 많을 것이다.

    물론 오늘처럼은 안 되겠지만 말이다.

    ‘마력도 늘었고…… 나중에 스킬 숙련도 훈련까지 병행하면 제법 쓸만하겠는데?’

    대충 견적을 내린 현석은 다시 군체지렁이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제부터 수확의 시간이다.

    사냥은 양세희가 했지만, 지렁이 속에서 나오는 마정석을 그냥 내줄 생각은 없었다.

    현석은 지렁이의 중심으로 가서 마정석의 위치를 확인했다.

    군체지렁이의 마정석을 뽑을 때 칼을 써서 잘라내면 마적석이 흩어져버린다.

    군체지렁이의 마정석은 몸 내부에 마치 던전 입구 같은 상태로 존재한다.

    마력의 응집체가 결정화되지 않은 상태로 빈 공간에서 서서히 회전하고 있다.

    군체지렁이가 평온하게 죽으면 안에 빈공간이 생기면서 몸의 마력이 그곳에 모여드는 것이다.

    그걸 밖으로 빼내기 위해서는 원래 특별한 아티팩트가 필요했다.

    응집된 마력을 결정화 시키는 능력을 품은 아티팩트가 있어야 비로소 마정석을 만들어 뽑아낼 수 있다.

    하지만 현석은 굳이 그게 없어도 같은 일을 해낼 수 있었다.

    기본적으로 던전 입구를 이동시키는 방식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현석은 손바닥에서 마력을 뽑아내 지렁이 내부에서 회전하는 마력 응집체에 그걸 섞었다.

    그리고 천천히 마력을 움직여 그걸 결정화시켜 마정석으로 만들어갔다.

    ‘이거…… 나름대로 나도 훈련이 되는데?’

    그냥 마력 컨트롤 훈련만 되는 게 아니라 이걸 통해 마정석의 구조를 파악할 수 있었다.

    물론 한 번 한다고 단숨에 파악할 수 있을 정도로 마정석이 단순한 물건은 아니었다.

    하지만 양세희가 훈련을 통해 체력을 50으로 만들 때까지 함께 훈련할 수 있으니 그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결정화 되어 단단한 마정석으로 변한 군체지렁이의 마력응집체는 바로 현석의 아공간 안으로 들어갔다.

    현석이 다음으로 한 일은 토룡란을 확인하는 거였다. 사실 이건 마정석을 뽑아내는 것보다 훨씬 중요했다.

    그리고 마정석을 뽑아내지 않으면 토룡란은 생겨나지 않는다. 즉, 마정석을 뽑아낸 이후, 차츰 토룡란이 자라난다는 뜻이다.

    그걸 알아내기 전까지 회귀 전의 플레이어들은 무수한 군체지렁이를 낭비해야만 했다.

    어쨌든 이제 그 지식은 고스란히 현석에게 이어졌고, 현석은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현석은 일행을 확인했다. 다들 멍하니 현석이 하는 일을 지켜보고 있었다.

    물론 그들은 현석이 마정석을 뽑아냈다는 사실은 모를 것이다. 그건 아주 은밀히 아공간 안으로 들어갔으니까.

    현석은 이들에게도 적절한 보상을 할 생각이었다. 군체지렁이의 마정석이야 현석이 없었다면 아예 꺼내지도 못할 물건이니 그걸 줄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적당한 크기의 다른 마정석이라면 하나쯤 내줄 용의도 있었다.

    ‘어차피 잘 되면 나중에 한 팀이 될 사이니까.’

    현석은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빛냈다. 그의 시선은 양동욱에게 향해 있었다.

    양세희는 탱커로서의 자질이 아주 뛰어나다. 하지만 그녀를 써먹으려면 오랫동안 훈련도 시켜야 하고, 또 성장도 시켜야 한다.

    그러니 시간이 제법 오래 걸릴 것이다. 하지만 양동욱은 다르다. 그는 당장에라도 써먹을 수 있었다. 그는 거의 완성된 능력자였으니까.

    현석은 일행이 있는 곳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어느새 양세희도 어느 정도 안정을 찾고 미리 바위 위에 내려놓은 캔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현석은 그쪽으로 다가가 물었다.

    “어때? 할만 해?”

    양세희가 몸을 부르르 떨었다. 치가 떨린다는 듯한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이 짓을 일주일이나 한다고? 과연 그걸 견딜 수 있을까?

    문득 아까 지렁이 떼가 꿈틀거리며 자신의 몸을 밀어내던 광경이 떠올랐다.

    “우웨엑!”

    지금까지 잘 버티다가 갑자기 구역질을 했다. 정말 하기 싫었다. 하지만 그럴수록 오기가 치밀었다.

    ‘이래서 일주일 얘기를 한 거였군?’

    확실히 지금까지 겪었던 죽음의 공포와는 차원이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는 그저 위험한 싸움에서의 죽음이었다면 이번에는 순수하게 육체적 고통에 의해 죽을 것 같았으니까.

    솔직히 이쪽이 훨씬 힘들었다.

    ‘그쪽은 엄밀히 따지면…… 스릴이 넘쳤으니까.’

    양세희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하아. 정말…… 지겹고 힘들고 고통스러운 훈련이 될 것 같지만…… 할게요. 해야지 어쩌겠어요.”

    양세희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현석이 말했다.

    “그럼 30분 후에 두 번째 놈을 사냥할 테니 푹 쉬도록.”

    양세희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그리고 입이 절로 벌어졌다. 지금 뭐라고? 30분?

    “자, 자, 잠깐만요! 저 아직 팔다리가 후들거리고 힘도 잘 안 들어가는데요?”

    “그래? 그거 참 안 됐군. 지렁이가 몸에 들어가는 기분이 그리 좋지 않을 거 같은데.”

    양세희는 현석이 방금 한 말을 번복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그대로 바닥에 뻗듯이 누웠다. 그리고 눈을 감고 체력 회복에 최선을 다했다.

    지금 이걸 안 하면 정말 지독한 꼴을 당할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현석은 그런 양세희를 힐끗 쳐다본 다음, 양동욱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지켜본 소감은?”

    양동욱은 현석의 말이 짧아졌다는 걸 알고 있지만 굳이 그걸 지적하지 않았다. 어차피 앞으로 그런 관계가 될 테니까.

    ‘게다가…… 묘하게 사람 위에 서 있는 듯한 느낌이 있단 말이야. 꼭…… 무서운 형님이나 상급자를 대하는 것처럼 말이야.’

    그래서 현석의 나이가 어린데도 거부감이나 위화감이 거의 들지 않았다.

    “인상 깊었습니다. 앞으로도 같이 일하고 싶습니다. 미리 자리를 잡아놔야 나중에 목소리도 높일 수 있을 테니까요.”

    양동욱은 그 말로 자신의 목표와 야망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현석의 팀을 앞으로 훨씬 더 크게 키워 보겠다고 선언한 셈이었으니까.

    “좋을 대로.”

    현석의 말에 양동욱의 입가가 씨익 올라갔다. 아주 만족스러웠다.

    ‘어쩌면…… 형보다 내가 더 제대로 된 줄을 잡은 걸지 모르겠는데?’

    양동욱은 현석에게 슬쩍 슬쩍 드러나는 면면을 볼 때마다 깜짝깜짝 놀랐다.

    그가 보기에 현석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 같지가 않았다. 꼭 외계인 같았다.

    ‘물론 그럴 리는 없지만.’

    어쨌든 당장 기반은 부족하지만, 앞으로의 성장 가능성은 그야말로 무궁무진했다. 양동욱이 집에서 뒹굴 거리며 기다리던 게 바로 이런 곳이었다.

    ‘모조리 씹어 먹어주겠어.’

    양동욱은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현석 옆에 서 있는 류지혜를 힐끗 쳐다봤다.

    현석을 선택한 이유 중 아주 큰 부분이 류지혜라는 건 속으로라도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이런 선택은 순수해야만 한다고 믿었으니까.

    물론 이미 늦었지만.

    현석은 류지혜 쪽을 슬쩍 쳐다봤다. 류지혜의 얼굴은 흥분으로 살짝 달아올라 있었다.

    이런 무지막지한 사냥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류지혜는 플레이어로서의 재능은 동생을 제외한 그 누구보다 뛰어날 거라고 믿고 있었다.

    그렇기에 꾸준히 던전을 돌며 사냥을 하다보면 언젠가는 그 누구보다 높은 곳에 설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그 믿음이 오늘 산산이 부서졌다.

    ‘이대로는…… 저런 식으로 사냥하는 사람들을 절대 이길 수 없을 거야.’

    처음으로 위기감이라는 것이 들었다.

    현석은 류지혜의 표정이 복잡해지는 걸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이번에도 데려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좋은 자극이 되었을 것이다.

    ‘자…… 그럼 토룡란을 확인하러 가볼까?’

    현석은 기대어린 눈빛으로 군체지렁이를 보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군체지렁이에 다가간 현석은 심호흡을 한 다음 방금 마정석을 빼낸 자리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지그시 눈을 감고 내부의 마력을 파악했다.

    토룡란은 마정석이 빠져나온 공간에 생긴다. 만일 생긴다면 말이다.

    그곳을 확인한 현석의 눈이 번쩍 뜨였다.

    * * *

    진대호는 뿌듯한 표정으로 눈앞에 도열한 50명의 플레이어들을 슥 둘러봤다.

    그들은 진대호가 제공한 힐링포션을 이용해 급격한 성장을 이뤄낸 자들이었다.

    “슬슬…… 때가 된 것 같군.”

    이제 이 지긋지긋한 레드드래곤 길드에서 나갈 때가 되었다. 이제 그는 K나이츠 길드의 마스터로 다시 태어나게 될 것이다.

    그는 자신이 플레이어라는 사실을 그동안 철저히 숨겨왔다. 그건 정말 어마어마한 스트레스였다.

    하지만 이제 그 스트레스를 말끔히 풀어버릴 기회가 찾아왔다.

    레드드래곤 길드는 그동안 급격한 성장을 이뤄냈다. 가입된 플레이어의 수가 무려 500명에 육박했다.

    하지만 그 중 진짜 쓸 만한 놈들은 100명 정도였다. 나머지는 그저 길드의 덩치만 키울 어중이떠중이였다.

    진대호가 특별한 의도를 가지고 길드를 그렇게 운영한 것이다.

    “이래서 신임을 받는 게 중요해. 하고 싶은 걸 다 할 수 있잖아?”

    그래서 더 열심히 했다. 자신이 세울 K나이츠 길드는 사실 훨씬 더 거대한 조직의 하부길드에 불과했다.

    앞으로 더 성장하려면 그들의 신임을 받아야만 했다. 지금까지 한중현의 신임을 받아온 것처럼 말이다.

    “자…… 그럼 기록적인 성과를 올리러 가 볼까?”

    진대호가 기세등등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50명의 정예 플레이어들이 그 뒤를 질서정연하게 따랐다.

    싸한 긴장감이 그들을 사정없이 휘어 감고 있었다.

    < 쪼개지다 1 > 끝

    ⓒ 김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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