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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눈 뜨고 레벨업-57화 (57/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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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노인은 의자에 앉아 지그시 눈을 감고 있었다. 얼핏 보기엔 앉아서 조는 것 같았지만, 그를 잘 아는 사람이라면 지금 상당한 고민 중이라는 걸 대번에 알아차릴 것이다.

    그리고 그를 잘 아는 사람이 바로 앞에서 초조한 표정으로 황노인이 눈을 뜰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사내, 양진욱은 황노인이 고민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최근 다시 나타난 현석에 대해 생각했다.

    그가 생각하기에 현석은 정말로 신기한 사람이었다.

    황노인의 감이 처음으로 틀렸다고 여겼는데, 그게 아니라는 걸 확실히 증명해준 사람이기도 했다.

    그 때문에 황노인에 대한 존경심이 한 층 더 올라갔다.

    양진욱은 황노인이 과연 어떤 결정을 내릴지 흥미로웠다. 사실 그는 속으로 어느 정도 답을 내린 상태였다.

    황노인이 어떤 결정을 내릴지 이미 짐작했다. 그리고 그렇게 내릴 결정에 자신은 찬성이었다.

    6개월 전이라면 다른 답을 내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그가 보기에 현석은 절대 의심을 품고 대해선 안 되는 사람이었다. 또, 현석이 이쪽에 의심을 품게 만들어서도 안 된다.

    ‘어쩌면…… 어르신보다 더 감이 뛰어난 자일 수도 있어.’

    그것이 양진욱이 현석에 대해 내린 결론이었다.

    그러니 허튼 수작을 부리는 것보다는 정공법으로 상대하는 쪽이 훨씬 나은 상대였다.

    양진욱이 보기에 현석은 진심에는 진심으로 응하는 타입이 분명했다.

    이내 황노인이 눈을 떴다. 양진욱이 긴장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어찌할까요?”

    양진욱의 물음에 황노인이 빙긋 웃었다.

    “답을 알면서 뭘 묻느냐?”

    양진욱은 역시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럼 그 부분은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황노인은 그런 양진욱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한 마디 툭 던졌다.

    “네 동생은 요즘 뭐 하고 있느냐?”

    양진욱은 흠칫 놀랐다가 이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집에서 밥이나 축내고 있습니다.”

    황노인은 묘한 눈으로 양진욱을 바라봤다. 양진욱의 동생인 양동욱은 대단히 뛰어난 인재였다. 그건 지금도 변함이 없었다.

    “어쩐지 요즘 소식이 뜸하다 했더니…….”

    양진욱은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황노인을 바라봤다. 그의 동생이 지금 뭘 하고 있으며 어떤 상태인지 황노인이 모를 리 없었다.

    한데도 이렇게 근황을 묻듯이 얘기를 꺼냈다는 건, 다른 의중이 있다는 뜻이었다.

    “그 녀석을 그놈에게 한 번 보내보는 건 어떻겠느냐?”

    양진욱은 쓴웃음을 지었다.

    “일단 말이나 한 번 해보겠습니다.”

    만일 양동욱이 현석 아래에서 일하게 된다면 종로 암시장과 현석 사이에는 더욱 끈끈한 관계가 형성될 것이다.

    하지만 양동욱이 과연 그렇게 할 것인가가 문제였다.

    “방법은 네가 더 잘 알고 있지 않느냐.”

    그 말에 양진욱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물론 가장 확실한 방법을 알고 있긴 하다.

    여동생인 양세희를 이용하는 방법이다.

    그리고 양세희에게 그 얘기를 하면 그녀는 대번에 받아들일 것이다.

    양동욱이 다시 날개를 펼치게 하려면 무슨 일이든 마다하지 않을 녀석이니 말이다.

    “왜? 행여 그놈이 무슨 짓이라도 할까봐 걱정되느냐?”

    양진욱은 그 말에 멈칫했다. 하지만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고자인지 아닌지 먼저 확인해야 할 놈이랑 같이 일하는데 무슨 걱정을 하겠습니까.”

    양진욱은 저번에 찾아온 류지혜, 류혜연 자매를 보고 정말 깜짝 놀랐다. 특히 류혜연의 미모는 엄청나다는 말만으로는 모자랄 정도였다.

    병을 앓고 있을 때는 남자를 끌어들이는 매력이 그보다 훨씬 대단했다니 믿기지가 않았다.

    한데 현석은 그런 류혜연을 보고도 아무 감정이 없는 듯하다고 했다.

    아니, 그 두 여자가 애타게 찾고 있다는데도 소 닭 보듯 하니 답답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 놈이 고자가 아니면 뭐가 고자란 말인가.

    그러니 양세희와 현석 사이에서 뭔가 사고가 터질 가능성은 지극히 낮았다.

    다만 양세희가 그 고자 같은 놈에게 일말의 감정이라도 생길까봐 좀 걱정되긴 했다.

    ‘그래도 우리 세희가 사람 보는 눈은 제법 있으니…….’

    아마 그 부분도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세희가 고자 놈에게 관심을 줄 리 없었다.

    “아직도 고민이야? 동생을 이용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리는 게냐?”

    양진욱은 고개를 저었다.

    “그걸 이용한다고 할 수 있습니까? 다 저 잘되라고 하는 일 아닙니까. 알겠습니다. 세희한테도 말이나 꺼내보겠습니다.”

    양진욱은 말이나 꺼내보겠다고 했지만, 일단 말을 꺼낸 이상 일이 성사될 확률이 거의 100%에 가까웠다.

    그건 양진욱도 알고 황노인도 안다.

    황노인은 그제야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내 감, 알지? 아마 큰 도움이 될 게야. 그리고 동욱이 정도면 그놈한테도 큰 힘이 될 테고.”

    양진욱이 쓴웃음을 지었다. 확실히 그건 그렇다.

    양동욱은 양진욱과 같은 방식으로 키워진 인재였다. 양진욱과 경쟁하듯 자라왔다.

    그리고 황노인 직속으로 선택된 사람이 바로 양진욱이었다.

    양동욱은 그때부터 방향을 잃고 방황해왔다.

    물론 아무리 방황한다고 해도 모든 걸 놓진 않았다. 혹시라도 기회가 왔을 때 그걸 놓쳐선 안 되니 말이다.

    그걸 위해 여러 경험도 다양하게 쌓았다. 그 와중에 자신이 몸담을 곳을 찾아보기도 했지만 아직 그의 마음을 빼앗아간 곳은 없었다.

    ‘어쩌면…….’

    양진욱은 어쩌면 이번에야말로 동생의 미래가 결정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놈이 어리다고 무시하지만 않으면 말이야.’

    양진욱은 어느새 입가에 즐거운 미소를 매달고 있었다. 과연 양동욱과 현석의 만남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재미있어 미칠 것 같았다.

    그리고 그런 양진욱을 황노인이 흐뭇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 * *

    현석은 슬슬 다음 사냥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일단 보통 던전에 가는 건 의미가 없었다. 지금까지 발견된 던전에는 더더욱 그랬다.

    앞으로 던전 생성지역이 더 나타나고, 더 발견될 것이다. 그때가 되어야 그쪽으로 가서 사냥하는 것에도 그나마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게 된다.

    일단 현석이 의미를 두고 사냥하려면 최소한 다이아 등급은 되어야 한다.

    하지만 국내에는 아직 마음껏 드나들 수 있는 다이아 등급 던전이 존재하지 않는다.

    기껏해야 플래티넘 등급인데, 거기에서 레벨업을 하는 건 정말 쉽지 않은 일이었다. 더구나 현석 같은 스타일을 더더욱 힘들었다.

    그러니 이런 현실에도 불구하고 108레벨까지 성장한 추광열이 얼마나 대단한 재능을 가졌는지 알 수 있다.

    사실 현석에게는 다이아 등급 던전도 그리 큰 의미가 없었다. 현석이 제대로 사냥다운 사냥을 하려면 킹이나 퀸 등급이 되어야 한다.

    물론 아직 퀸 등급은 발견되지 않았다. 아니, 명명되지도 않았다. 하지만 조만간 등장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킹 등급 던전이 현재 플래티넘 등급 던전 만큼이나 많이 나타나게 될 것이다.

    그때부터가 진짜 던전시대의 시작이라 할 수 있었다.

    킹을 넘어서는 엠페러 등급 던전도 나타나기 시작할 테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때가 되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화이트홀도 등장하게 될 것이다.

    그걸 대비하려면 지금 충분히 성장해야 한다.

    현석이 지금 제대로 성장할 수 있는 방법은 딱 하나뿐이었다.

    ‘다음 투명 던전은 어디로 할까…….’

    예전 그의 길드에서 제대로 클리어한 투명 던전은 총 아홉 개였다. 그리고 그저 발견만 한 채로 내버려 둔 곳은 다섯 군데였다.

    하지만 현석은 투명 던전이 그보다 훨씬 많이 존재할 거라 믿었다.

    지금 현석의 집 지하실에 연결한 장교숙소 같은 경우도 하나만 있을 리 없었다. 거기에는 23장교숙소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그러니 세계를 다 뒤져보면 최소 22개는 더 있다는 뜻이다. 어쩌면 그보다 훨씬 많을 수도 있고 말이다.

    어쨌든 현석이 바라는 건 그런 투명던전이 아니라 투명던전과 이어진 화이트홀이었다.

    왜 그런지는 모르지만 투명던전과 이어진 화이트홀은 마계로 가는 통로 역할을 한다.

    물론 모든 투명 던전이 화이트홀을 갖고 있는 건 아니었다. 예를 들어 장교숙소 같은 경우는 완벽하게 분리된 공간이었다.

    그 안에 있는 마수들만 정리하면 더 이상 신경 쓰지 않고 숙소로 쓸 수 있었다.

    물론 그걸 제대로 쓰려면 마력에 대한 컨트롤 능력이 대단히 뛰어나야 한다는 전제가 붙지만 말이다.

    그래서 예전 현석의 길드도 그걸 숙소나 다른 걸로 이용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입구가 위치한 곳이 써먹기 좋지도 않았고 말이다.

    아마 그때 현석이 던전 입구를 이동시킬 수 있었다면 현석의 길드가 갖는 위상이 전혀 달라졌을 것이다. 그리고 현석의 쓰임새도 많이 달라졌을 것이고 말이다.

    ‘뭐…… 그래도 죽는 건 똑같았겠지만.’

    현석은 그때 투명 던전 안에서 죽었다. 그 투명 던전은 정말로 위험한 곳이었다.

    ‘이상하긴 해.’

    그때 일만 생각하면 계속 고개를 갸웃거리게 된다. 기억이 묘하게 뒤틀리고 뒤섞여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당시의 기억이 왠지 조작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또, 아무리 떠올리려 애써도 흐릿한 안개 속을 헤매는 기분만 들고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어쨌든 그건 나중 일이다. 지금은 지금의 일에 충실해야만 했다.

    현석은 다음 목표로 수원 근방에 위치한 던전을 찍었다.

    그곳은 정말 아무것도 없는 던전이었다. 그저 마계와 이어져 있다는 점만 다를 뿐이었다.

    게다가 그 던전과 이어진 마계는 상당히 좁았다.

    그러니 지금 같은 상황에 도전하기 딱 좋은 장소라 할 수 있었다.

    이제 곧 K나이츠 길드가 문을 연다. 그리고 그때부터 레드드래곤 길드와의 싸움이 시작될 것이다.

    최소한 그 전에는 돌아와야 한다. 그래야 상황을 현석이 원하는 대로 이끌어 나갈 수 있을 테니까.

    현석은 계획이 정해지자마자 바로 움직이려 했다. 한데 그 순간 집에서 아직도 마력 컨트롤에 애먹고 있을 두 사람이 떠올랐다.

    “일단…… 어디 다녀온다고 얘기는 해주고 가야겠지?”

    하루이틀 걸릴 일도 아니고 최소한 2주 이상 걸릴 텐데 그 동안 자신이 보이지 않으면 얼마나 걱정하겠는가.

    문득 현석은 자신이 그동안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깨닫고 쓴웃음을 지었다.

    “이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모르겠군.”

    그렇게 중얼거린 현석의 발걸음은 어느새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

    * * *

    양진욱의 동생인 양동욱은 침대에서 뒹굴거리며 만화책 삼매경에 빠져 있었다.

    한창 그러고 있는데, 방문이 벌컥 열리고 그의 여동생인 양세희가 들어왔다.

    “잔소리할 거면 나가라.”

    양동욱은 양세희 쪽은 보지도 않고 말했다. 하지만 들려온 여동생의 말은 그의 예상에서 한참이나 벗어나 있었다.

    “오빠! 나 취직하기로 했어!”

    양동욱은 눈살을 찌푸리며 보던 만화책을 탁 덮었다. 새삼스럽게 취직에 대해 말할 이유가 없었다.

    양세희는 그가 보기에 인물이면 인물 능력이면 능력, 그리고 친화력이면 친화력, 어느 하나 빠지는 구석이 없었다.

    얼마든지 원하는 곳에 들어갈 능력이 있었다. 실제로 그녀에게 오라고 손을 내민 회사가 한둘이 아니었다.

    슬그머니 불안한 생각이 치밀었다.

    “어디 취직하는데? 설마 길드나 관리센터는 아니지? 아니면 종로 쪽으로 가려고?”

    양세희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채현석이라는 사람 밑으로 가기로 했어. 일단은…… 비서나 잡무부터 해보려고.”

    “뭐?”

    양동욱이 어이없는 눈으로 양세희를 바라봤다. 이게 대체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란 말인가.

    “너…… 제정신이야?”

    양세희가 허리춤에 손을 척 얹으며 턱을 위로 올렸다.

    “얘기 들어보니 장래성이 충분하겠더라고. 어설픈 회사나 길드에 들어가느니 그게 나아. 뭐…… 아직 혼자라는 점이 좀 걱정이긴 하지만, 그거야 어떻게든 되겠지.”

    양동욱의 얼굴이 사정없이 일그러졌다.

    ‘누구 짓인지 알겠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양동욱이 당장에라도 달려 나갈 것처럼 씩씩거렸다.

    그러자 양세희가 배시시 웃었다.

    “왜? 같이 가주려고? 안 그래도 나 지금 면접 가기로 했는데.”

    “뭐? 그걸 왜 지금 말해!”

    이래서야 양진욱에게 따지러 갈 시간도 없지 않은가.

    양동욱은 고민에 휩싸인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비비다기 이내 이를 갈며 말했다.

    “같이 가자. 어떤 놈인지 얼굴이나 봐야겠다.”

    < 확장 2 > 끝

    ⓒ 김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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