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두눈 뜨고 레벨업-56화 (56/326)
  • < 확장 1 >

    한중현은 좀처럼 오르지 않는 레벨 때문에 스트레스가 쌓이기 시작했다.

    아무리 힐링포션의 힘을 빌린다 해도 엄연히 한계가 존재했다. 특히 100레벨의 벽은 정말이지 너무나 높았다.

    “후우. 정말…… 요즘 같아선 다 때려 치고 싶군.”

    한중현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던전생성지역을 나섰다.

    얻은 게 거의 없는 사냥이었다. 아티팩트는커녕 쓸 만한 재료도 못 얻었다. 게다가 레벨도 제자리이니 그야말로 시간만 낭비한 꼴이었다.

    “아니, 시간뿐 아니라 약도 낭비했군.”

    슬슬 힐링포션이 다 떨어져간다. 다시 구입할 때가 되었다.

    한중현은 던전 생성지역 근처 주차장으로 들어가 차에 올라탔다.

    재벌3세이자 가장 잘 나가는 레드드래곤 길드의 마스터답게 엄청나게 좋은 차였다.

    한중현은 차에 오르자마자 품에서 구슬 하나를 꺼냈다. 그리고 라이터 형태의 전자장비도 하나 꺼냈다. 오늘을 위해 미리 준비한 아티팩트와 장비였다.

    그는 구슬에 마력을 흘려 넣었다. 그러자 구슬에서 붉은 빛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한중현은 신중하게 구슬에서 나오는 빛이 강해지는 방향을 파악했다.

    그리고 시트 아래에 손을 쑥 넣었다. 그곳에서 작은 팬던트 하나를 꺼냈다.

    어디든 붙일 수 있는 부착형 팬던트였다.

    한중현은 그걸 원래 자리에 부착한 다음 라이터 모양의 장비를 작동시켰다. 뚜껑을 열고 안에 든 버튼만 누르면 작동하는 간단한 장비였다.

    삐이이이!

    삐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한중현은 그 장비를 차 안에서 이리저리 움직였다.

    삐삐삐삐삐!

    경보음이 짧게 여러 번 울렸다. 트렁크에 장치된 모양이었다.

    한중현은 트렁크에서 위치추적기와 도청기를 발견했다.

    한숨도 나오지 않았다. 한중현은 바로 옆에 주차된 똑같은 차를 바라봤다. 그러자 운전석에서 누군가가 내렸다. 한중현이 미리 준비한 사람이었다.

    조심에 조심을 더하고 신중에 신중을 더해 구한 사람이었기에 누구에게도 드러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한중현의 차에 올라타 차를 출발시켰다.

    부우우웅.

    우렁찬 배기음과 함께 차가 주차장을 떠났다. 한중현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자신의 차와 똑같이 생겼지만 사실은 다른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천천히 차를 출발시켰다.

    “정말…… 기가 차고 어이가 없군.”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건 딱 이럴 때 쓰는 말이리라. 어떻게 진대호가 자신을 배신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한중현은 아직도 일말의 의구심을 안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설마 진대호가 자신을 배신할 거라고 믿기가 너무나 어려웠다.

    지금 그는 그걸 확인하러 가는 중이었다.

    한중현은 교외의 한적한 곳으로 이동했다. 한참을 더 가니 까페가 길 양옆으로 쭉 늘어서 있는 곳에 도착했다.

    하나하나가 예쁘게 포장된 까페였다. 연인과 함께 올 법한 곳이었는데, 한중현은 그 중 미리 약속된 곳에 차를 대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가 들어가자마자 기다리고 있던 사람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허리를 꾸벅 숙였다.

    오명국이었다.

    “오래 기다렸습니까?”

    “아닙니다. 저도 금방 왔습니다.”

    당연히 오래 기다렸다.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오늘 아침 일찍부터 나와서 하루 종일 기다렸지만 오명국은 전혀 그런 티를 내지 않았다.

    한중현은 오명국 앞에 털썩 앉았다. 그러자 오명국도 조심스럽게 자리에 앉았다.

    오명국을 바라보던 한중현의 눈빛이 살짝 달라졌다.

    “왠지…… 많이 달라진 것 같군요. 그동안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오명국은 쓴웃음을 지었다. 과연 이걸 좋은 일이라고 해야 할까? 하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플레이어에게 강해지는 것보다 더 좋은 일이 뭐가 있겠는가.

    “예. 맞습니다. 좋은 일이 좀 있었습니다. 운이 많이 따랐지요.”

    “그 운, 정말 부럽군요. 자, 이제 슬슬 본론으로 들어갈까요? 지난번에 보내주신 메일은 잘 받았습니다. 일단…… 제게 의심을 심는 데는 성공하신 셈이로군요.”

    한중현의 어조에서 조급함이 묻어났다. 그는 자신의 속내를 숨길 수 있을 정도로 능숙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 뒤로 나름대로 조심스럽게 알아봤습니다만…… 몇 가지 의심스러운 구석은 있어도 딱히 이렇다 할 건 없더군요. 제 의심을 확신으로 바꾸기 위해선 다른 특별한 것이 필요할 것 같습니다만.”

    단도직입적으로 증거를 요구하는 한중현의 말에 오명국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애초에 이런 사람이라는 건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충분히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저도 구하느라 정말 힘들었습니다.”

    오명국은 그렇게 말하며 스마트 패드 하나를 꺼내 테이블에 올리고 한중현 앞으로 슥 밀었다.

    한중현은 말없이 패드를 켜고 미리 준비된 동영상을 클릭했다.

    진대호의 일거수일투족을 근접해서 촬영한 영상이었다.

    영상이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한중현의 입가가 점점 심하게 비틀렸다.

    정말 믿을 사람이 세상에 하나도 없다는 걸 또 한 번 실감했다.

    영상을 모두 본 한중현이 억눌린 목소리로 물었다.

    “그래서…… 진 실장의 목적이 뭡니까? 그리고 오명국 씨는 내게서 뭘 원하는 겁니까?”

    이제부터가 중요했다. 오명국은 억지로 긴장을 죽이려 마른침을 삼키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 레드드래곤 길드의 중심에 서고 싶습니다.”

    “길드의 중심이라…….”

    한중현의 입매가 더 심하게 비틀렸다.

    “제가 그 말을 믿을 거라 생각하셨습니까?”

    오명국은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믿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진심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진심으로 한중현의 마음을 꿰뚫는 것이 이번에 주어진 가장 중요한 임무였다.

    그는 레드드래곤 길드에 속해 있지만 사실 현석에게 속한 사람이었으니까. 그에게는 레드드래곤보다 그 점이 훨씬 중요했다.

    “전 그동안 길드에서 겉돌기만 했습니다. 능력이 없으니 어쩔 수 없었지요.”

    “그 점은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길드의 시스템을 바꿀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오명국이 빙긋 웃었다.

    “그러시겠지요. 하지만 이미 바뀌었다는 건 혹시 알고 계십니까?”

    한중현의 눈매가 매섭게 변했다.

    “그게…… 무슨 말이지요?”

    “진대호 실장이 길드 시스템을 바꾸고 있습니다. 아주 은밀하게요.”

    한중현이 오명국을 노려보며 말했다.

    “그 말…… 책임질 수 있습니까?”

    “물론입니다. 증거도 갖고 있으니까요. 사실 전…… 야망이 있는 놈입니다. 이번 일로 레드드래곤 길드에 큰 공을 세우고 싶습니다. 그럼 원하던 걸 자연스럽게 얻을 수 있을 테니까요.”

    한중현은 한동안 오명국을 노려보기만 했다. 하지만 아무리 봐도 오명국의 표정이나 태도는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당신이 진짜 원하는 게 뭡니까?”

    오명국은 그제야 빙긋 웃었다.

    “지금의 진대호 실장과 같은 위치와 권한을 원합니다. 조금만 밀어주면 한국 최고의 길드가 될 텐데, 그런 길드의 2인자라면 남자로서 한 번쯤 질러볼 만한 일 아닙니까?”

    한중현의 표정이 좀 풀어졌다.

    “그런 걸 원하는 것치고는 너무 많이 드러낸 것 같지 않습니까?”

    “감추는 것보다는 훨씬 믿음직스럽지 않습니까? 다 내보일 테니 철저히 믿어달라는 뜻이지요.”

    한중현은 그렇게 말하는 오명국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바라봤다.

    ‘이 사람이…… 원래 이런 사람이었나? 그런데도 내가 그동안 몰라봤다고?’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뭔가 계기가 있어 사람 자체가 달라진 듯했다.

    그리고 힘은 그런 계기를 만들기에 너무나도 충분한 이유가 될 수 있었다.

    한중현이 손을 내밀었다.

    “잘해봅시다.”

    오명국이 환하게 웃으며 그 손을 맞잡았다.

    “아마 절대 실망하지 않으실 겁니다.”

    * * *

    현석은 집 근처 커피숍에 앉아 오명국을 기다렸다. 이제 집 공사도 마무리 중이었으니 굵직굵직한 일은 대충 다 끝나가는 셈이었다.

    잠시 후, 오명국이 안으로 들어왔다.

    “벌써 나오셨습니까? 천천히 오셔도 되는데.”

    오명국이 만면에 미소를 가득 안고서 현석 앞에 앉았다. 그리고 다짜고짜 용건부터 꺼냈다.

    “잘 해결됐습니다.”

    “어려운 점은 없었습니까?”

    “그럴 리가요. 얼마나 철저히 준비해서 갔는데요.”

    “이제부터가 중요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사실 이번 협상이 시작되기도 전부터 일은 진행 중이었습니다.”

    현석은 오명국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런 쪽으로는 능력이 제법 대단한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에 대해 어떻게 한 번도 듣지 못했는지 이상할 정도였다.

    ‘아마…… 레드드래곤과 K나이츠 길드가 갈라질 때 희생되었겠지.’

    그랬을 공산이 컸다. 아마 그때는 이런 능력이 채 피어나지도 않았을 테니까.

    어쨌든 한중현과 협상을 시작하기도 전에 벌써부터 그 다음 일을 진행 중이었다니 확실히 보통은 아니었다.

    “애초에 그쪽에 소속된 놈들이 자리 잡고 있는 경우도 있을 겁니다.”

    “그래서 진행이 더딘 편입니다. 철저히 조사한 다음 조심스럽게 접근하지 않으면 판단하기가 워낙 어려워서 말입니다.”

    그 부분까지 신경을 쓰고 있다니 거기에 대해서는 더 말할 필요가 없었다.

    오명국은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그래도 그쪽이 워낙 대단해서 아무리 제가 준비를 철저히 한다고 해도 기반이 좀 흔들리는 건 어쩔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현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충분히 예상하고 있던 바였고, 또 대비책도 다 마련되어 있었다.

    애초에 진대호가 얽히지 않았다면 벌써 제공했을 아이템이 있었으니까.

    ‘문제는…… 그 아이템을 만들 재료를 수급하는 일인데…….’

    재료 수급이야 어렵지 않았다. 한데 그걸 모을 시간이 없는 게 문제였다.

    재료만 따로 모을 사람들이 필요했다. 믿을 만한 자들로 말이다.

    “그 점에 대해서는 이미 대비책이 있으니 걱정 안 해도 됩니다. 다만 믿을 만한 사람이 필요한데, 구할 수 있습니까?”

    “믿을 만한 사람…… 당연히 플레이어라야 하겠죠?”

    “물론입니다.”

    재료를 구해야 하니 말이다. 게다가 변종 천둥잠자리를 사냥해야 한다. 어중간한 레벨의 플레이어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물론 현석이 도움을 준다면 얘기가 좀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사람이야 항상 넘쳐납니다. 믿을 만한 자들로 구해보겠습니다.”

    오명국이 시원시원하게 대답했다. 현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생각했다.

    ‘그럼…… 종로 쪽에도 부탁을 해야겠군.’

    오명국 쪽에만 모든 일을 맡길 생각은 없었다. 재료는 따로 구해야 한다. 세 개 정도의 팀을 꾸려 서로 모르게 일을 나눠 분산할 계획이었다.

    나중에야 초보를 위한 보편적인 아이템이 되겠지만 지금 당장은 판도를 뒤흔들 정도로 굉장한 물건이다.

    ‘돈이……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쌓이겠군.’

    그럼 그 돈을 관리할 사람도 필요하고, 그걸 이용해 현석이 계획한 일을 벌일 사람도 필요하다.

    현석은 내심 쓴웃음을 지었다.

    자신에게 단 하나 없는 것이 바로 사람 아닌가. 한데 어떤 일을 하건 사람이 필요했다.

    ‘역시 세상에 쉬운 일은 하나도 없어.’

    아무리 시대를 앞서나가는 지식과 아티팩트로 무장해도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이 있다.

    현석은 믿을 만한 사람에 대한 정보를 머릿속으로 떠올려봤다.

    당장 떠오르는 사람이 몇 명 있었다. 그들은 마음만 얻는다면 충분히 믿을 만했다.

    하지만 일부는 아직 플레이어가 되려면 먼 어린아이였고, 몇몇은 지금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결국…… 남는 건 두 명이네.’

    현석의 눈이 반짝였다. 어차피 그 중 한 명은 슬슬 만나러 갈 생각이었다.

    갚아야 할 빚이 아주 많은 사람이었으니까.

    ‘이번 생에서라도 은혜를 갚을 수 있어서 다행이야.’

    현석은 그 사람을 떠올리며 더할 나위 없이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 확장 1 > 끝

    ⓒ 김강현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