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족의 알 1 >
현석은 몸이 굳어버린 듯 움직이지 못하는 사람들을 한 차례 슥 둘러봤다.
다들 눈에 초점이 사라져가고 있었다. 하지만 추경훈만은 아직 멀쩡했다. 다만 아무리 정신은 또렷해도 말은 안 나오는 모양이었다.
‘대체 나한테 뭘 한 거야! 이거 당장 풀지 못해!’
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그저 머릿속에서만 맴돌 뿐, 소리가 되어 입 밖으로 튀어나오지 않았다.
“사실…… 너한테 쓰긴 좀 아까운 아이템이긴 하지만 지금은 중요한 시기니 어쩔 수 없지. 앞으로 하기에 따라선 충분히 본전 이상을 뽑을 수도 있고.”
추경훈은 현석이 하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전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가 말한 아이템이 아까 깨뜨린 두 개의 구슬이라는 건 알아차릴 수 있었다.
‘대체 그게 뭔데?’
너무나 궁금했지만 현석이 더 이상 얘기해주지 않으니 알 방법은 없었다. 아니, 지금은 그런 걸 아는 것보다는 이 상황을 벗어나는 게 먼저였다.
추경훈이 이를 악물었다. 아니, 그러려고 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이미 몸의 통제권은 알 수 없는 무언가에게 넘어간 지 오래였다.
지금 그의 몸에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보는 것과 듣는 것, 그리고 생각하는 것뿐이었다.
심지어 코도 제 역할을 못하고 있었다. 아까부터 굉장히 달콤하면서도 먹음직스러운 냄새가 나고 있었다.
그런 게 이 근처에 있을 리 없으니 후각이 잘못된 게 분명했다.
“식욕이 막 돌지?”
현석의 물음에 추경훈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조금 전까지 냄새에 집중하느라 정신이 딴 데 가 있었다.
그는 억지로 정신을 붙잡으며 현석을 노려봤다. 뭐라고 한 마디 해주고 싶었지만 말을 할 수 없으니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식욕 얘기를 하니 정말로 식욕이 마구 돌았다. 달콤하고 먹음직스러운 냄새 때문에 더 그러는 거 같았다.
그런 그의 눈앞에 현석이 뭔가를 내밀었다.
물컹물컹한 젤리 같은 덩어리였는데, 그걸 본 순간 추경훈의 눈이 휙 돌아갔다. 아까부터 풍기던 달콤하고 맛있는 냄새의 주인이 바로 그것이었다.
“정신 차려. 고작 그거밖에 안 되는 놈이었나?”
현석의 차가운 말에 추경훈이 또 정신을 차렸다. 그의 입에서 침이 주르륵 흘렀다. 눈의 초점이 흐려졌다가 또렸해지는 걸 반복했다.
“이걸 먹고 싶으면 정신 차려!”
현석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갔다. 그러자 추경훈의 눈에 초점이 또렷하게 잡혔다.
말은 못하지만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간절함과 욕망이 현석의 손에 들린 덩어리에 집중되어 있었다.
현석은 잠시 상황을 살피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 덩어리를 추경훈의 입에 갖다 댔다.
스르륵.
마치 벌레가 기어들어가듯 젤리같은 덩어리가 그의 꾸물꾸물 그의 입으로 들어갔다.
추경훈의 얼굴에 더없는 만족감이 떠올랐다.
그리고 마치 실 끊어진 꼭두각시 인형처럼 바닥에 그대로 무너졌다.
털썩! 털썩! 털썩!
방에 있던 50명의 플레이어들도 일제히 무너졌다.
현석은 그제야 고개를 이리저리 꺾으며 몸과 긴장을 동시에 풀었다.
“가자.”
현석이 돌아서며 류지혜, 류혜연 자매를 보며 말했다. 두 여인은 놀라 동그래진 눈으로 현석을 바라보다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석은 아주 능숙하게 방 한가운데로 걸어갔다. 현석이 던진 수류탄 때문에 바닥은 엉망진창이었다.
“이렇게 술술 풀릴 줄 알았으면 이걸 그냥 내버려둘걸 그랬군.”
무너진 비상탈출 통로를 내려다보며 그렇게 중얼거린 현석은 천장을 올려다봤다.
원래는 그리 높지 않았는데, 활짝 열리는 바람에 원래보다 1.5미터 이상 높아진 상태였다.
현석이 본 건 천장 한가운데 매달린 손잡이였다. 아주 작았지만 현석의 눈에서 벗어날 순 없었다.
애초에 이 방의 구조를 아주 잘 알고 있었으니 그걸 찾느라 헤맬 일도 없었다.
현석은 무릎을 살짝 굽혔다가 바닥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순식간에 천장에 닿을 정도로 뛰어오른 현석은 손잡이를 잡고 옆으로 휙 돌렸다.
키릭!
뭔가가 맞물리는 소리가 나며 천장이 덜컹 열렸다. 현석은 손잡이를 잡은 채 허리를 튕겨 열린 천장 안으로 쏙 들어갔다.
그곳은 이곳 4응접실의 제어기가 있는 곳이었다.
“가만있자…….”
제어기에는 색이 다른 버튼 세 개와 레버가 하나 달려 있었다.
사용법은 몰랐지만 거기 붙어 있는 이름을 통해 대충 유추해낼 수 있었다.
일단 이곳을 원래대로 되돌릴 필요가 있었다.
버튼을 딸깍딸깍 눌러봤지만 작동하지 않았다. 현석은 당황하지 않고 복구라고 써 있는 버튼을 누른 채 레버를 쭉 내렸다.
텅! 텅! 텅! 텅! 텅!
순식간에 4응접실이 원래대로 돌아갔다. 열렸던 천장과 벽이 닫혔고, 봉쇄되었던 문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현석은 천장이 닫히기 직전에 아래로 뛰어내려 아슬아슬하게 빠져나올 수 있었다.
물론 거기 그냥 있었어도 따로 빠져나갈 길이 있었겠지만, 굳이 그런 걸 찾느라 헤매고, 또 나가다가 누군가를 마주쳐 이상한 낌새를 느끼게 할 필요는 없었다.
아래로 내려온 현석은 추경훈을 먼저 멀쩡한 소파에 앉혔다. 그리고 쓰러진 플레이어들을 근처에 나란히 앉혔다.
워낙 힘과 체력이 좋아 그 정도 일을 하는 데에는 별로 시간도 걸리지 않았다.
일을 모두 마무리한 현석은 류지혜와 류혜연을 한 번씩 돌아본 다음 턱짓으로 문을 가리켰다.
세 사람은 그렇게 유유히 4응접실을 빠져나갔다.
밖으로 나온 세 사람은 한동안 말없이 걷기만 했다. 던전관리센터를 나온 다음 집을 향해 빠르게 걸어갔는데, 그렇게 20분쯤 걷고 난 다음에야 류지혜가 먼저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괜찮을까요?”
현석은 그녀를 힐끗 쳐다본 다음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하지만…….”
불안한 것이 당연했다. 눈앞에서 그런 일을 목격했으니까. 현석은 수류탄까지 던졌다.
그런데도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자신하는 것이 오히려 이해하기 어려웠다.
현석은 걸음을 멈췄다. 그러자 두 여인도 따라서 멈췄다.
류지혜는 불안한 눈으로 현석을 바라봤다. 하지만 류혜연의 눈빛은 조금 달랐다. 그녀는 선망과 열망이 뒤섞인 눈빛으로 현석을 정신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까지 내가 틀렸던 적이 한 번이라도 있었나?”
현석의 물음에 류혜연이 즉시 고개를 저었다.
“아뇨! 오라버니는 언제나 옳습니다!”
류혜연의 지나칠 정도로 씩씩한 대답에 현석의 표정이 살짝 묘해졌다.
사실 씩씩함보다는 호칭 때문에 지은 표정이었다.
‘오라버니라…….’
나쁘지 않았다. 자신이 언제 그런 호칭으로 불려본 적이 있던가. 과거에도 미래에도 없던 일이었다.
현석은 그 묘한 감정을 음미하다가 이내 고개를 돌려 류지혜를 쳐다봤다.
그녀는 여전히 불안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현석이 그녀에게 보여준 것들이 있으니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었다.
현석은 류지혜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인 류혜연 쪽이 오히려 더 이상한 것이다.
추경훈은 절대 만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큰 야심을 품고 있었고, 오래전부터 야심을 펼치기 위한 계획을 세워온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 사람이 이런 일이 벌어졌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넘어갈 수 있을 리 없지 않은가.
“아마 제게 또 접근할 거예요. 그때는 뭐라고 하죠?”
류지혜가 그렇게 묻자, 현석은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그게 핵심이지. 아마 더 이상 접근하지 않을 거야.”
“예?”
류지혜는 멍하니 현석을 바라봤다. 그녀는 혼란스러웠다. 뭔가 대화가 안 통하는 느낌이었다.
“아까 내가 더 이상 너희들에게 접근하지 말라고 강하게 말했잖아. 그게 핵심이야.”
류지혜는 멍하니 현석을 바라봤다. 그리고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젠 뭐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현석은 피식 웃으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류혜연이 냉큼 따라붙었고, 잠시 뒤에서 두 사람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류지혜가 힘없이 따라갔다.
“왠지…… 나만 이상한 거 같잖아.”
앞에 가는 두 사람을 보니 그런 생각이 더 강하게 들었다.
* * *
“끄응.”
추경훈은 힘겹게 눈을 떴다. 온몸이 부서질 것처럼 아팠다. 희미했던 시야가 밝아지니 주변 상황이 눈에 들어왔다.
그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4응접실?”
여긴 4응접실이었다. 대체 자신이 왜 여기 있단 말인가.
주위를 둘러보고 기겁을 했다. 자신이 부리는 플레이어들이 몽땅 여기 모여 있었다. 다들 정신을 잃은 채로 말이다.
추경훈은 깨질 것 같은 머리를 부여잡고 기억을 더듬었다. 하지만 쉽사리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니까…… 헉!”
추경훈은 기억을 떠올리다가 화들짝 놀랐다. 그리고 주위를 휙휙 둘러봤다.
바닥이 엉망진창인 것이 보였다. 탈출구를 폭발물로 박살 낸 것이다.
추경훈은 온몸을 덜덜 떨었다.
“내, 내가 그랬을 리가…….”
주위를 다시 살폈다. 바닥 곳곳에 핏자국이 보였다. 그것도 아주 많이.
사실 그건 핏자국이 아니라 현석이 처음에 깨뜨린 구슬 때문에 생긴 자국이었다. 하지만 추경훈의 눈에는 핏자국으로 보였다.
추경훈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을 때, 50명의 플레이어들이 하나둘 눈을 뜨기 시작했다.
그들 역시 추경훈과 마찬가지로 지독한 두통 때문에 머리를 부여잡고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기억을 떠올리다가 헉소리를 내며 주위를 휘휘 둘러봤다.
모두 공범이었으니 감추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다들 모였다.
“우리가 오늘 여기서 했던 일은…….”
추경훈은 그렇게 말하다가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리고 번득이는 눈으로 플레이어들을 둘러보며 힘있게 말했다.
“우린 오늘 여기 온 적이 없다. 다들 명심하도록. 그리고 오늘 있었던 일은 없는 거다.”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혼란스러웠지만 그 와중에도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는 너무나 명확했다.
“당분간 활동을 최소화한다. 너무 나대지 말고, 새 길드가 창설될 때까지 자중하고 되도록 숙소를 벗어나지 말도록. 알겠나?”
“예. 알겠습니다.”
일제히 대답하는 플레이어들의 눈빛은 결연히 빛나고 있었다. 지금 자신의 몸에 어떤 이상이 생겼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그게 밝은 대낮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는 자리에서 벌어지면 그야말로 끝장이었다.
그렇기에 다들 당분간 활동할 생각 자체가 없었다.
추경훈과 50플레이어들은 심각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겼다. 정신을 잃기 전의 일을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 확인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표정과 분위기만 봐도 충분했다. 기억이 잘못된 게 아니다. 모두의 기억이 조작된 게 아니라면 말이다.
‘내가…… 내가 어떻게…….’
다들 멍하니 생각에 잠긴 채였다. 가장 먼저 정신을 차린 사람은 추경훈이었다.
“일단 여기서 나가지. 오래 있어봐야 좋을 게 없을 테니까.”
그러자 플레이어 중 한 명이 얼른 물었다.
“그럼 오늘 이곳을 이용한 흔적은 어떻게 할까요?”
추경훈이 한숨을 내쉬며 방안을 둘러봤다.
“이모양 이꼴인데 감출 수 있을 것 같아? 그냥…… 사고 처리 해.”
“하지만…….”
그러다가 자신들이 한 일이 들통 나면 어떻게 하느냐는 말이 목구멍 끝까지 올라왔지만 차마 내뱉지 못했다.
“내가 다 알아서할 테니까…… 일단 지금은 다들 숙소로 돌아가. 그리고…… 되도록 다른 사람과 마주치지 마. 우리끼리만 뭉쳐 있으라고. 내말 알겠나?”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말라고 해도 그럴 것이다. 그들은 진저리를 치며 4응접실에서 나갔다.
추경훈은 마지막으로 방에서 나가며 뒤돌아 방안을 슥 둘러봤다.
기억 속 장면이 방안에 쫙 펼쳐지는 듯했다.
‘내가…… 내가 어떻게…… 사람을 뜯어 먹을 수 있지?’
그게 아니라고 믿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너무나 생생했으니까.
게다가 그의 머릿속에 너무나도 강렬하게 남은 기억은 더 치가 떨렸다.
‘심지어 맛있었어! 이런 미친!’
추경훈은 혼란스러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아무래도 당분간 모든 활동을 최소로 줄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 마족의 알 1 > 끝
ⓒ 김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