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던전관리센터 1 >
류지혜는 경탄어린 시선으로 그녀의 동생인 류혜연을 바라봤다.
그저 놀랍다는 말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성장이 빨랐다.
마력중독에 걸렸던 일에 대한 보상이라도 되는 것처럼 각성 이후 줄기차게 레벨을 올려왔다.
방금도 류혜연이 레벨이 또 올라간 것 같다고 해서 레벨측정을 마쳤다.
무려 4레벨이 더 올랐다.
“아무래도…… 괜한 짓을 한 거 같아.”
류지혜의 말에 류혜연이 고개를 갸웃거려다.
“괜한 짓이라니? 뭘 했는데?”
“레벨측정 말이야.”
“그게 왜? 헤헷. 나 이제 드디어 50레벨이 됐어. 이제부터는 내가 언니를 지켜줄 거야.”
류혜연은 레벨만 빨리 오른 게 아니었다. 아주 특별한 능력까지 갖고 있었다.
아직 그 능력은 감추고 있지만, 만일 그게 알려지면 아마 편안한 생활과는 이별해야 할 것이다.
한데 이번 레벨 측정에서 이변에 가까운 일이 벌어졌다. 한 번에 4레벨이 오른 것이다.
래벨측정에서 한 번에 여러 레벨이 오르는 경우가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건 대부분 레벨측정을 오랜만에 할 때 벌어지는 일이었다. 혹은 10레벨 이하이거나.
이렇게 짧은 주기에 4레벨이나 오른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 그것도 46레벨에서 50레벨이 되었으니 이건 사건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아마 위로 보고가 올라갔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몇 달 전부터 우릴 주시하고 있었을지도 몰라.’
만일 그랬다면 이제부터 본격적인 접근이 시작될 것이다. 그리고 이럴 때 먼저 나서서 움직일 사람은 아주 뻔하다.
‘추경훈 지부장이겠지?’
류지혜는 관리센터에서 나오긴 했지만 그쪽 소식을 아예 닫아두고 있었던 건 아니었다.
조심스럽게 끈을 연결해두고 주기적으로 소문이나 정보를 전해 듣고 있었다.
추경훈은 슬슬 관리센터에서 나올 준비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챙길 수 있는 건 다 챙겨올 모양이었다.
그 중 그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바로 사람이었다.
추경훈은 처음 던전이 열렸을 때부터 과할 정도로 플레이어들에게 집착했다.
그리고 던전관리센터의 경기지부장이 되고 나서부터는 그 탐욕을 감추지도 않고 마구 발산했다.
플레이어를 확보하기 위해서라면 그 어떤 짓도 마다하지 않았다.
류지혜를 엘릭서로 묶어놓은 것도 그 일환 중 하나였다.
류지혜는 추경훈이 자신을 그렇게 쉽게 놔주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항상 그쪽으로는 긴장을 늦추지 않았다.
관리센터를 나서는 류지혜는 동생인 류혜연을 바라봤다. 정말로 예뻤다. 하지만 예전과는 뭔가가 좀 달랐다.
‘아마…… 각성이 뭔가 변화를 준 것 같아.’
각성하기 전의 류혜연은 밖에 내놓기 무서울 정도였다. 남자건 여자건 가릴 것 없이 끌어들이는 마력을 가지고 있었다.
한데 각성 이후에는 그런 마력같은 매력이 사라져 버렸다.
물론 그걸 빼고도 엄청나게 아름다웠다. 아마 국내를 통틀어 류혜연보다 예쁜 사람을 찾으라면 다들 고개를 내저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당장 시커먼 사내들이 이성을 잃고 달려들 정도는 아니었다.
그 말인즉슨, 예전에는 그런 놈들도 종종 있었다는 뜻이다.
‘어쩌면…… 그 사람이 뭔가 조치를 해준 걸지도…….’
류혜연의 변화는 각성 전후로 기준을 세울 수도 있지만, 현석을 만난 순간을 기준으로 잡을 수도 있었다.
사실 류혜연의 지금을 만들어준 사람은 현석이었으니까.
어쨌든 아무리 류혜연이 예전 같지는 않아졌다고 해도 충분히 매력적이고 아름다운 여자임은 분명했다.
또한 능력도 출중하다. 그러니 추경훈이 눈독을 들이지 않을 리 없었다.
그동안 쭉 지켜봤겠지만, 아마 오늘 일로 인해서 그의 접근이 훨씬 빨라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니, 무슨 일 있어?”
류혜연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류지혜를 보며 물었다. 류지혜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냐. 얼른 돌아가자. 이제 며칠 푹 쉬고 본격적인 사냥을 시작해야지.”
류혜연의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그럼 우리…… 이제 골드 등급 도전하는 거야?”
류지혜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각오 단단히 해두는 게 좋아. 골드 등급부터는 차원이 다른 세상이 열리니까.”
류혜연은 차렷 자세로 손을 이마에 착 갖다 대 경례를 했다.
“명심하겠습니다!”
류지혜는 그런 동생의 모습이 귀여워서 빙긋 웃으려다가 표정이 그대로 굳었다.
뒤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녀는 몸을 휙 돌려 뒤를 바라봤다.
언제 다가왔는지 검은 양복을 입은 남자가 가만히 서 있었다. 그는 류지혜와 눈이 마주치자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지부장님께서 보내서 왔습니다. 두 분을 정중히 모셔오라 하셨습니다.”
말과 태도가 더없이 정중했다. 하지만 겉모습만으로 모든 걸 판단할 수는 없었다.
“거절한다면요?”
류지혜가 남자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그러자 그 남자는 빙긋 웃었다.
한데 그 웃음이 어찌나 섬뜩한지 류지혜는 순간 온몸을 송곳으로 쿡쿡 찌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건 명백한 살기였다.
“강요하라는 말씀은 없으셨습니다. 하지만…… 거절당하면 반드시 그냥 돌아오라고도 말씀하지 않으셨지요.”
남자의 눈이 불그스름하게 물들어갔다. 그의 눈빛에서 피에 대한 갈망이 보였다.
‘대체…… 뭐 하는 사람이야?’
척 봐도 제대로 미친놈이었다. 그것도 그냥 미친 게 아니라 피에 미친놈이었다.
남자가 흐느적거리며 류지혜에게 훅 다가갔다. 류지혜는 깜짝 놀랐지만 남자가 워낙 빨라 피할 수가 없었다.
남자의 손이 류지혜의 팔뚝을 꽉 잡았다. 아니, 잡으려 했다.
후웅!
남자의 눈빛이 더욱 섬뜩하게 빛났다. 그의 시선이 류지혜 옆에 서 있는 사내에게 꽂혔다.
“넌 뭐지? 뭔데 내 일을 방해해?”
“아는 사람이 곤경에 처한 거 같아서.”
현석이 그렇게 말하며 류지혜 앞을 가로막았다. 류지혜 뒤에는 류혜연이 몸을 움츠린 채 숨어 있었다. 그녀는 어깨너머로 고개만 살짝 내밀어 현석의 뒷모습을 정신없이 살펴보고 있었다.
“그리고 볼일도 좀 있고.”
현석은 그렇게 말하며 좀 떨어진 곳에 웅장하게 서 있는 던전관리센터 건물을 슬쩍 쳐다봤다.
“말로 할 때 비키지? 목숨 걸 거 아니면.”
남자가 이젠 마치 피가 뚝뚝 떨어질 것 같은 눈으로 현석을 노려보며 말했다.
현석은 심안을 통해 남자의 상태를 슬쩍 확인해 봤다.
이름이나 레벨, 스탯은 별 관심 없었다. 남자가 저 상태가 된다는 건 타이틀이나 스킬의 효과일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남자에게는 특별한 스킬이 있었다.
[버닝블러드-피를 태워 3분간 폭발적인 능력을 얻는다. 힘, 민첩, 체력이 두 배로 증가한다. 쿨타임 30분. 쿨타임 동안에는 힘, 민첩, 체력이 절반으로 줄어든다. 스킬을 잃지 않기 위해선 주기적인 피의 공급이 필요하다.]
현석은 남자가 지금 버닝블러드라는 스킬을 준비 중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저 스킬은 그냥 마음만 먹는다고 펼쳐지는 게 아니라 펼치기 위한 준비과정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저렇게 눈이 붉게 물드는 것이고 말이다.
아마 스킬 발동과 동시에 눈이 다시 원래 색으로 돌아올 것이다.
현석이 그걸 확신할 수 있는 건, 지금 눈의 색을 변화시키는 건 핏줄이 아니라 마력이기 때문이었다.
눈에 덧씌워진 마력이 붉은 빛을 뿜어내고 있는 것이다.
슬슬 스킬을 가진 자들이 나타나고 있었다. 아마 고레벨 플레이어 중에는 여러 스킬을 보유하고 있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눈앞에 있는 남자의 레벨은 52였다. 낮은 레벨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위협적인 레벨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스킬을 발동하면 얘기가 좀 달라진다.
단숨에 수치적으로는 100레벨이 넘는 플레이어가 되는 것이다. 무려 3분 동안이나.
그렇다면 그런 자를 어떻게 제압해야 할까?
현석의 뇌리에 가장 간단한 두 가지 방법이 떠올랐다. 그리고 그 중에서 더 리스크가 적은 방법을 선택했다.
스윽.
소리도 없이 현석이 남자의 지척에 접근했다. 남자의 눈이 커다래졌다.
속도는 빠르지 않았다. 하지만 호흡과 호흡의 틈을 파고들어서 제대로 된 대응을 할 수가 없었다.
턱!
현석이 남자의 목을 콱 움켜쥐었다.
“컥!”
남자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뜨고 현석을 바라봤다. 그의 눈에서 붉은빛이 몽땅 사라져버렸다. 준비 중이던 스킬이 취소된 것이다.
머리가 터지기 직전까지 올라왔던 충만한 마력이 현석에게 목을 잡힌 순간 급격히 아래로 쑥 내려가 버렸다.
그리고 요지부동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이이익!”
남자가 몸부림을 쳤다. 하지만 고작 52레벨의, 그것도 아무 추가 스탯도 없이 기본적인 스탯만 가진 그의 힘으로는 현석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는 건 불가능했다.
현석은 사내가 몸부림을 치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손에 힘을 준 채 고개를 돌려 류지혜와 류혜연을 쳐다봤다.
“오랜만이야.”
현석의 말에 류지혜가 고개를 푹 숙였다. 갑자기 눈물이 날 것 같아서였다. 그에게 눈물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반면 류혜연은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현석을 똑바로 바라봤다.
그녀는 마치 칭찬을 기다리는 꼬마아이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현석은 잠시 손에 힘을 더 줘서 이놈의 목을 부러뜨릴까 말까 고민했다. 하지만 이내 손에 힘을 풀었다. 물론 남자의 몸속에 밀어 넣은 자신의 마력은 회수하지 않았다.
그 마력은 힘을 다할 때까지 남자가 스킬을 쓸 때마다 흐르는 마력의 통로를 꽉 틀어막고 있을 것이다.
스킬을 봉인한 것이다.
현석이 손을 휙 떨쳤다. 그러자 남자가 힘없이 허공을 날아가더니 꼴사납게 바닥을 굴렀다.
쿠당탕탕!
“크으윽!”
남자가 억눌린 신음을 흘렸다. 솔직히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왠지 그래선 안 될 것 같은 기분에 억지로 삼켜버렸다.
남자는 두려운 눈으로 현석을 바라봤다.
현석은 남자에게 손을 휘휘 내저었다.
“가 봐. 하는 거 봐서 봉인을 풀어주든 말든 결정할 테니까.”
“보, 봉인?”
현석은 대답할 필요도 없다는 듯 다시 고개를 돌렸다. 그의 앞에 어느새 표정을 정리한 류지혜가 서 있었다. 그리고 류지혜의 뒤에 고개만 빼꼼 내민 류혜연도 보였다.
남자가 주저앉은 채 뒤로 슬금슬금 물러났다. 그러더니 벌떡 일어나 후다닥 도망쳤다.
그걸 본 류지혜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저렇게 그냥 보내도 될까요?”
“그럼, 죽일까?”
죽인다는 말에 류지혜와 류혜연이 화들짝 놀랐다. 아무리 마수와 치열하게 싸우고 있다지만 아직 사람을 죽이고 다치게 하는 것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뭐…… 나중에는 결국 익숙해질 수밖에 없겠지만…….’
현석의 눈에 잠시 씁쓸한 빛이 맴돌았다. 일단 플레이어의 길에 들어선 이상, 그건 피할 수 없는 숙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물론 아직은 괜찮다. 좀 더 오랜 시간이 지난 후의 일이니까.
“어차피 추경훈이 보낸 놈이잖아. 안 그래도 그놈한테 볼일이 좀 있으니까 괜찮아.”
사실 추경훈은 벌써 현석에게 접근을 시도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추경훈은 삼현그룹에 끈이 닿아 있었으니까.
그리고 삼현그룹은 이래저래 레드드래곤 길드와 밀접하게 붙어 있었고 말이다.
추경훈은 이미 현석이 힐링포션이라는 신기술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파악한 상태였다.
어쨌든 그 모든 것까지 현석의 계획 범위 안에 들어 있었다.
현석의 말은 사실 참 별 거 없었다. 그런데도 그 말을 들으니 류지혜의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았다.
그녀는 신기한 눈으로 현석을 바라봤다. 그러다가 퍼뜩 뭔가를 깨닫고는 눈을 새치름하게 떴다.
“근데 왜 반말이에요?”
현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너무 오랜만에 봐서 긴장이 좀 풀렸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얘기할 수는 없었다.
긴장이 풀려서 류지헤가 자기보다 한참이나 어려보였다고 어떻게 말할 수 있겠는가.
“일단 자리부터 옮기지.”
물론 한 번 놓은 말을 다시 올려줄 생각도 없었다.
얼른 돌아서서 걸음을 옮기는 현석의 뒷모습을 류지혜가 어이없는 눈으로 바라보다가 이내 살며시 웃었다.
그리고 그 옆에 있던 류혜연은 커다래질 대로 커다래진 눈으로 언니와 현석을 번갈아 바라봤다.
< 던전관리센터 1 > 끝
ⓒ 김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