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레드드래곤 길드 2 >
현석은 자리에서 일어나 다가오는 사람을 쳐다봤다. 속으로는 정말 놀랐지만 겉으로는 전혀 내색하지 않았다.
겉보기로는 20대 초반의 나이지만, 실제 속은 마흔이 넘었다. 속마음이 표정에 드러나지 않게 감추는 것쯤 일도 아니었다.
가장 먼저 다가온 사람은 오명국이었다.
오명국은 현석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는 그와 나란히 서 있는 두 사람을 소개해 주었다.
“저희 마스터와 비서실장님이십니다.”
“비서실장?”
현석이 눈을 빛내며 진대호를 쳐다보자, 한중현의 눈에 살짝 불쾌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이 자리의 주인공은 당연히 레드드래곤 길드의 마스터인 자신이 되어야 한다. 한데 시작하자마자 주인공 자리를 비서실장에게 빼앗긴 기분이 들었다.
“보통 길드에 비서실을 두진 않는 것 같은데 특이하군요.”
현석의 말에 한중현이 앞으로 나섰다.
“시작이 좀 특별한 길드라 그렇습니다. 자, 일단 앉아서 얘기하죠.”
네 사람이 자리에 앉았다.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그러자 마치 서로 눈치를 보고 있는 듯한 모양새가 되어 버렸다.
한중현은 이런 식의 분위기가 정말 싫었다. 집에서 나오기 전에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 겪던 분위기였으니까.
“레벨이 어떻게 됩니까?”
한중현은 돌려 말하지 않았다. 딱 봐서 레벨이 적당하면 무조건 영입할 생각이었다. 어차피 검증은 끝난 거나 다름없었다. 진대호의 마음에 들었으니까.
진대호가 사람 하나는 정말 기가 막히게 본다. 그가 괜찮다고 해서 영입한 사람은 하나같이 뛰어났다.
그러니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거라 여긴 것이다.
“제 레벨이 중요합니까?”
한중현이 황당한 눈으로 현석을 바라봤다. 그럼 길드에 가입하는데 플레이어의 레벨이 안 중요하면 대체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그럼…… 뭐가 중요합니까? 아, 조건? 하지만 우리도 조건을 제시하려면 나름대로의 기준이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현석이 피식 웃고는 고개를 돌려 이번엔 비서실장인 진대호를 쳐다봤다.
“그쪽은 어떻게 생각합니까?”
순간, 한중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는 슬쩍 고개를 돌려 방금 지목된 비서실장을 바라봤다.
“진 실장. 지금 내가 놓치고 있는 게 뭐지? 난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군.”
비서실장은 현석과 한중현을 번갈아 바라본 다음, 차분히 말했다.
“우리 길드에 들어올 생각이 없어 보입니다.”
그제야 한중현은 자신이 너무 앞서갔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이럴 때 화살을 돌릴 곳이 분명히 있었다. 그의 시선이 이번엔 오명국에게로 향했다.
“내 말 안 전했습니까?”
오명국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이럴 때는 그냥 사과하고 넘어가는 게 무난하다. 굳이 한중현과 각을 세울 필요가 없었다.
조만간 오명국은 레드드래곤 길드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게 될 테니까.
“죄송합니다.”
한중현은 오명국의 사과를 듣고도 기분이 풀리지 않았다. 사과하는 오명국의 태도에서 비굴함이 전혀 느껴지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그걸 가지고 뭐라 할 수는 없었다. 비굴하지 않다고 짜증을 내는 건 거대 길드를 이끄는 마스터답지 않은 행동이니까.
“자, 우리 다시 처음부터 얘기를 해봅시다. 원하는 게 뭡니까?”
한중현이 날카로운 눈으로 현석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는 현석이 레드드래곤 길드에 들어오지 않을 거란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저 조건 조율 때문에 저렇게 뻗대는 거라고 여겼다.
현석은 그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생각에 잠겼다.
사실 현석의 계획은 레드드래곤 길드를 키워서 나중에 진짜 적이 될 K나이츠 길드의 대항마로 삼을 생각이었다.
한데 그 계획을 몽땅 날려 버려야 할 상황에 처했다. 한중현 옆에 있는 진대호 때문이었다.
진대호가 바로 K나이츠 길드의 마스터였다.
그게 의문이었다. 레드드래곤 길드를 무너뜨린 건 바로 K나이츠 길드였다. 한데 그 길드의 마스터가 왜 여기서 비서실장 노릇을 하고 있단 말인가.
‘아무래도…… 여기에 대해서는 좀 알아볼 필요가 있겠는데?’
일단 저 비서실장, 진대호의 뒤를 캐지 않고서는 계획을 진행할 수도, 또 새로 세울 수도 없었다.
그러니 지금은 한 발 물러나야 할 때였다.
‘아니지. 그냥 물러날 필요가 있나? 차라리 미끼를 하나 던지자.’
원래 현석이 레드드래곤 길드와 거래하려고 생각했던 건 파워업 키트였다.
일정 수량의 파워업 키트를 제공해 돈도 벌고 레드드래곤 길드도 키우고, 그 와중에 안에 심어둔 오명국의 영향력도 키울 계획이었다.
그리고 아주 자연스럽게 자신의 힘으로 레드드래곤 길드를 좌지우지 할 수 있게 만들고 말이다.
그래서 나중에 K나이츠 길드를 견제할 수 있도록 준비하는 것이 최종 목표였다.
레드드래곤을 이용해 K나이츠를 무너뜨린다거나 할 생각은 없었다. 어디까지나 K나이츠를 무너뜨리는 것은 현석 자신의 손으로 직접 할 것이다.
마침 딱 알맞은 게 있긴 했다. 파워업 키트에 비해서는 턱없이 모자라지만, 그래도 있으면 사냥에서 정말 큰 효율을 발휘하는 것, 바로 포션이었다.
‘이건 원래 그냥 팔려고 했는데 여길 통해서 공급해야겠군.’
원래 포션은 그냥 대량생산을 통해 플레이어들에게 팔려고 했다.
사실 현석이 원하는 건 거대한 사설 시장, 즉, 암시장이었다. 던전관리센터가 엄두도 못 낼 정도로 거대한 시장 말이다.
그때 써먹기 위한 카드 중 하나가 바로 이 포션이었다.
현석은 테이블 밑에서 자루 하나를 꺼내 위에 올려놓았다.
다들 그걸 보며 눈을 빛냈다.
‘테이블 아래에 뭔가가 있었나? 신경을 안 써서 기억이 안 나는군.’
한중현도 진대호도 떨떠름한 기분을 지우지 못했다. 사실 자신들이 모든 상황을 주도해 나가야 하는데, 오늘은 한 번도 그러지 못한 것 같아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렇게 끌려다니기만 하는 건 정말이지 질색이었다.
특히 한중현은 더더욱 끌려 다니는 걸 싫어했다. 지금까지 끌려 다니면서 살아왔으니 얼마나 신물이 나겠는가.
이제야 나만의 삶을 살게 되었는데, 이런 일이 벌어지니 짜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그렇게 난 짜증을 살짝 담아 물었다.
“그게 뭡니까?”
현석은 대답 대신 자루 안에서 작은 병 하나를 꺼냈다. 붉은 액체가 가득 담긴 병이었다. 크기는 어른 가운데 손가락만 했다.
다들 의아한 표정으로 그걸 바라보자, 현석이 담담히 말했다.
“힐링포션입니다.”
“힐링포션?”
“그러니까…… 그 게임에 나오는 그런 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현석은 한중현과 진대호의 반응에 씨익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반응을 딱 보니 낚이기 일보직전이었다. 둘 다 어처구니가 없어 뭘 어떡할지 모를 표정이었으니까.
“그 마시면 상처 싹 낫고 피도 꽉 차고 그런 힐링포션?”
현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비슷합니다. 마시는 게 효과가 제일 좋긴 하지만 맛이 역해서 아마 쉽지는 않을 겁니다. 보통은 상처에 뿌리죠.”
한중현도 진대호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 말도 안 되는 장난인 것 같은데, 그렇게 생각하기엔 현석의 태도가 너무 진지했다.
그리고 대체 왜 이 자리에서 그런 장난을 친단 말인가. 그렇다면 저 힐링포션이라는 게 진짜란 말인가?
“그 비슷한 약은 내가 좀 아는 게 있는데…….”
한중현의 중얼거림에 현석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엘릭서 말입니까? 이건 엘릭서와는 좀 다릅니다. 확실히 상처 치료에만 특화되어 있죠.”
“테스트를 해 볼 수 있습니까?”
먼저 관심을 보인 건 진대호였다. 만일 이게 기대한 만큼 성능이 나오고 물량을 대량으로 확보할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을 하든 정말 유용할 테니까 말이다.
현석은 테스트라는 말에 팔을 걷었다. 그리고 어디서 꺼냈는지 칼 하나를 손에 쥐었다.
스윽!
칼이 현석의 팔뚝을 긋고 지나갔다. 근육까지 쩍 벌어지며 뼈가 드러났다. 어찌나 순간적으로 그었는지 말릴 새도 없었다.
피가 콸콸 쏟아졌다.
현석은 무표정하게 힐링포션의 뚜껑을 따고 상처에 쏟았다.
치이이이익!
액체가 닿는 곳에서 새하얀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놀랍게도 상처가 눈에 보일 정도로 빠르게 아물기 시작했다.
상처가 모두 아무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몇 초에 불과했다.
한중현과 진대호는 물론이고 옆에서 방관자처럼 지켜보고 있던 오명국의 눈까지 찢어지기 일보 직전이 되었다.
현석은 자리에서 일어나 커피숍 내에 비치된 티슈를 잔뜩 가져왔다. 그리고 팔과 핏자국을 깨끗이 닦아냈다.
“어떻습니까? 제법 쓸 만하죠?”
피를 닦으며 지나가듯 묻는 현석의 질문에 한중현과 진대호는 서로를 한 번 바라본 다음 현석을 향해 시선을 돌리고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마음에 듭니다. 대체 이걸 어떻게 구하셨습니까?”
진대호의 말에 현석이 피식 웃었다.
“그걸 내가 왜 얘기해줍니까? 그게 내 밑천인데.”
현석의 말에 진대호의 표정이 굳었다. 현석은 순간적으로 그의 눈이 탐욕으로 번들거리는 걸 분명히 확인했다.
한중현이 나섰다.
“자자, 우리 비서실장님 너무 괴롭히지 마십시오. 이런 시장성 있는 물건을 보면 못 참으시는 분이니까. 플레이어가 아니라 사업가라서 말입니다. 하하하.”
현석이 눈을 빛내며 진대호을 슬쩍 쳐다봤다.
“플레이어가…… 아니시라고요?”
“예. 그건 내가 보증합니다. 레벨테스트까지 해봤으니까요. 우리 비서실장님이 겉보기에는 인텔리 같아도 주먹 좀 쓰시거든요. 어설픈 플레이어들은 아마 꼼짝도 못할 겁니다. 하하하하.”
한중현이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웃으며 말했다. 그걸 보니 진짜 저 비서실장을 믿고 아끼는 것 같았다.
‘레벨테스트를 해봤다고? 그런데도 감지하지 못했어? 저렇게 대놓고 플레이어인데?’
진대호는 플레이어다. 그건 확실했다. 처음 그를 심안으로 봤을 때, 이름이 머리 위에 떠 있었으니까.
현석의 입가가 슬쩍 올라갔다.
‘이거…… 점점 더 재미있어지는데?’
한중현이 다시 나서서 현석의 상념을 깼다.
“자, 이제 거래 얘기나 합시다. 이거 얼마에 넘길 생각이고, 물량은 얼마나 됩니까?”
현석은 담담히 말했다.
“가격은 그쪽이 제시하시죠. 능력에 걸맞은 대우를 충분히 해주실 거라 믿습니다.”
한중현은 자존심 때문에라도 헐값에 후려치는 짓은 못한다. 진대호가 나선다면 모를까.
“아, 한 가지. 이 약은 플레이어한테만 쓸 수 있습니다. 일반인한테는 아무 소용이 없죠.”
“소용이 없다고요? 특이하군요.”
엘릭서는 좀 다르다. 엘릭서는 플레이어가 아닌 사람도 얼마든지 쓸 수 있었다.
한데 이건 그게 아니라니 오히려 더 특이한 느낌이 들었다.
“마력을 기반으로 쓰는 약이라서 그렇습니다. 그리고 쿨타임이 존재합니다.”
“쿨타임? 이거…… 진짜 세상을 게임처럼 만드는 물건이로군요?”
한중현이 흥미진진한 눈으로 현석과 힐링포션을 번갈아 바라봤다.
“마력 기반이라서 그렇습니다.”
현석은 더 이상의 설명은 생략했다. 괜히 이걸 만들 수 있는 힌트를 줄 필요는 없었으니까.
체내의 마력이 집중되면서 상처가 치료되는 방식이었다. 마력 기반이긴 하지만 정작 마력이 소모되지는 않는 획기적인 방식의 치료약이었다.
그렇게 집중된 마력이 다시 온몸으로 퍼질 때까지의 시간이 바로 쿨타임이었다.
같은 자리에 다시 쓰면 쿨타임이 필요치 않는다. 그저 이미 상처가 나았으니 다시 써도 의미가 없을 뿐이었다.
“아무튼 좋습니다. 이거 전부 제가 사죠. 값도 제대로 책정해 드리겠습니다.”
현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야 알아서 잘 해줄 문제고 진짜는 이제부터 할 말이었으니까.
“힐링포션은 레드드래곤 길드에 독점으로 공급하겠습니다.”
“예? 독점이요? 정말입니까?”
한중현은 물론이고 진대호의 눈도 휘둥그레졌다.
“다만 물량이 그리 많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제가 필요할 때 가끔 도움을 주셨으면 합니다.”
한중현은 더 잴 것도 없이 크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손을 내밀었다.
현석은 그걸 보며 씨익 웃고는 일어나 한중현의 손을 잡았다.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저야말로.”
굳게 잡은 두 사람의 손을 진대호가 심각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 레드드래곤 길드 2 > 끝
ⓒ 김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