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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눈 뜨고 레벨업-37화 (37/326)
  • < 레드드래곤 길드 1 >

    현석은 일단 집부터 새로 구했다. 이제 당분간은 옮기지 않고 계속 살아야 할 곳이라서 신중하게 골랐다.

    돈이야 썩어 넘칠 만큼 있었기에 가격보다는 다른 조건들을 하나하나 맞춰갔다.

    아파트는 제외시켰다. 혼자만의 독립된 공간이 필요했다.

    나중에 집에 무슨 짓을 할지 생각해보면 고작 벽 하나로 옆집과 분리된 아파트는 곤란했다.

    그리고 지하실이 필요했다. 앞으로 특별한 실험을 많이 하게 될 텐데 그러려면 환기를 비롯한 연구 시설이 아주 제대로 갖춰진 깊은 지하실이 필요했다.

    그리고 되도록 서울 안쪽이어야 했다.

    던전에 관계된 중요한 시설은 대부분 서울에 있었다. 한군데 모여 있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무엇을 하든 서울에서 할 확률이 높았다.

    그런 시설들과의 적절한 거리도 중요했다.

    이래저래 다 따지고 나니 한강 근처에 있는 커다란 집 몇 개가 남았다.

    현석은 더 따지지 않고 그 중 하나와 계약했다. 일단 매물 자체가 드물었기 때문에 더 기다리는 건 시간 낭비였다.

    어차피 대대적인 공사가 필요했기에 집이 얼마나 낡았건, 또 구조가 어떻건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집을 구한 다음에는 대대적인 공사를 시작했다. 어차피 외관보다는 비밀스러운 공간이 더 중요한 장소이기에 부동산과 연결된 업체와 계약을 하고 공사를 진행했다.

    거의 부수다시피 하고 새로 짓는 거라서 시간이 오래 걸릴 거라고 했다.

    현석은 집 공사를 하는 동안 지낼 장소도 필요했다.

    그래서 강남 쪽 오피스텔을 계약해 당분간 머물기로 했다.

    그렇게 집 문제를 해결하자마자 오명국이 현석을 찾아왔다.

    “그때는 경황이 없어 제대로 소개도 못 드린 것 같습니다. 오명국이라고 합니다.”

    오명국은 허리를 90도로 숙이며 인사했다.

    현석은 오명국의 이름 정도야 처음 본 순간부터 알았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알려져서 좋을 게 없는 비밀이었으니까.

    오피스텔 문 앞에서 인사를 받은 현석은 문을 닫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엘리베이터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오명국은 잠시 당황하다가 그것이 따라오라는 뜻이라는 걸 알아차리고 얼른 현석의 뒤를 쫓았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커피숍에 마주 앉았다.

    현석은 오명국이 먼저 입을 열 때까지 그저 가만히 기다리기만 했다.

    지금은 어쩔 수 없는 휴식 기간이었다. 황노인이 컨테이너 박스들을 갖다 줘야, 아공간을 정리하고 다시 사냥이라도 시작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공간이 정리 되어야 마력의 정수를 구하러 곳곳에 있는 암시장도 둘러볼 것이고 말이다.

    현석은 딱 이 시기에 레드드래곤 길드와 접점을 만들어 볼 계획이었다.

    “저…… 그때 일은 다시 한 번 사과드리겠습니다.”

    오명국이 벌떡 일어나 또 90도로 허리를 꺾자, 현석이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됐습니다. 그때 일은 다 잊었으니까요.”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오명국은 몇 번이나 반복해서 허리를 숙였다. 커피숍에 있던 사람들이 그런 두 사람을 힐끗힐끗 훔쳐봤다.

    “그 얘기 하러 오신 겁니까?”

    보다 못한 현석이 그렇게 말하자 오명국이 얼른 앉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여기는 마스터의 명령을 받아서 왔습니다.”

    “레드드래곤 길드였죠?”

    “예. 맞습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길드라고 할 수 있습니다.”

    현석이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우리나라 제일은 레드드래곤이 아니라 임페리얼 아니면 칠봉황 아닌가?”

    오명국이 맹렬히 고개를 저었다.

    “임페리얼이나 칠봉황이 분명히 대단한 길드인 건 맞지만, 우리 레드드래곤도 만만치 않습니다. 최근 활동은 우리 쪽이 훨씬 활발합니다.”

    활동이 활발하니 영향력도 더 우위에 있지 않느냐는 뜻이었다.

    물론 현석은 동의하지 않았지만 거기에 대해 더 얘기할 필요도 이유도 없어 그저 입을 다물고 오명국을 가만히 쳐다봤다.

    오명국은 이러다가 본론도 못 꺼내보고 얘기가 마무리 될 것 같아 얼른 용건부터 말했다.

    “저희 마스터께서 꼭 좀 뵙고 싶어 하십니다.”

    “그냥 보기만 하면 됩니까?”

    “예?”

    “난 영입 제안을 하러 오신 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닌 모양입니다.”

    영입이라는 말에 오명국이 당황했다. 설마 이렇게 훅 앞질러서 얘기를 꺼낼 줄은 몰랐다.

    “그, 그 부분은 제 권한이 아닌지라…… 아마 마스터께서 직접 말씀해 주실 것 같습니다.”

    물론 확실치 않다. 관심을 가진 건 분명하지만 꼭 영입하리라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이런 사람을 영입하지 않으면 대체 누굴 영입한단 말인가.

    현석은 당황하는 오명국을 가만히 쳐다보다가 피식 웃었다. 그러자 오명국이 더 당황해 말을 더듬으며 물었다.

    “대, 대체 왜 그러십니까? 제가 뭔가 잘못하기라도…….”

    “그날 절 쫓아다녔으면 혼자서만 절 쫓아다니던 게 아니라는 거 아시고 있었을 텐데…… 맞죠?”

    “그, 그야…….”

    오명국의 이마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그건 위에 보고 안 했죠?”

    식은땀의 양이 더욱 많아지기 시작했다.

    “당신과 같이 날 쫓던 놈들, 누군지 압니까?”

    오명국은 고개를 끄덕였다.

    “칠성파 아닙니까. 레드독이랑.”

    “그놈들 박살 난 거 레드드래곤에서는 모릅니까?”

    “압니다.”

    현석이 그런 오명국을 보며 씨익 웃었다. 그리고 손을 내밀었다.

    “사람 좀 보시는군요. 앞으로 잘 해봅시다.”

    그제야 오명국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현석의 손을 덥석 잡았다.

    현석은 오명국의 정보를 펼쳐봤다. 레벨은 39. 보아하니 성장 한계에 부딪혔다. 아마 앞으로 레벨을 더 올리기가 그리 쉽지만은 않을 것이다.

    오명국은 현석을 보고 인생의 승부수를 던진 것이다. 어차피 레드드래곤에 있어봐야 미래는 깜깜하고, 언제 잘릴지 모를 두려움과 함께 살아가야 할 테니까.

    그는 일부러 현석이 칠성파와 레드독과 관계되었다는 사실을 누락시켰다. 현석이 그들을 박살 냈음이 분명한데 그걸 숨긴 것이다.

    오명국과 함께 있던 두 사람도 애초에 한 배를 탄 사이였기에 설득하는 건 별 문제가 없었다.

    만일 오늘 현석이 이 얘기를 꺼내지 않았다면 일의 진행 방향을 바꾸었을 것이다. 하지만 현석은 타이밍 좋게 그 얘기를 꺼냈다.

    “제가 뭘 어떻게 하길 원하십니까?”

    “레드드래곤을 제가 원하는 대로 핸들링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예? 그걸 제가 해야 한다고요?”

    오명국은 현석의 말에 기겁을 했다. 그게 된다면 왜 굳이 이런 위험한 선택을 한단 말인가. 그냥 레드드래곤 내에서 제대로 자리를 잡으면 되는데.

    오명국은 방금 현석이 한 말에 중요한 의미가 하나 더 담겨 있다는 걸 깨달았다.

    “헉! 설마…… 영입 제안을 거절하실 생각이십니까?”

    현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저 손만 잡을 생각입니다. 대등한 관계로.”

    오명국이 멍하니 그런 현석을 바라봤다.

    “그게…… 가능하리라 여기십니까?”

    현석은 오명국을 보며 씨익 웃었다.

    “불가능할 거면 내가 여기서 당신과 왜 이러고 있겠습니까?”

    오명국은 그 말을 들으니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얼굴도 달아올랐다.

    모르는 사람이 봤다면 마치 사랑에 빠진 거라고 착각할 만한 태도였다.

    오명국은 지금까지 마음 깊은 곳에 숨겨두기만 했던 야망에 불씨가 당겨지는 느낌이 들었다.

    ‘왠지…… 가능할 것 같아!’

    오명국은 자신이 오늘 일생일대의 기회를 잡았다는 걸 여실히 깨달았다.

    그리고 그 깨달음은 시간이 지날수록 증명되고 구체화될 것이다.

    오명국의 눈이 태양이라도 담은 것처럼 번득였다.

    * * *

    한중현은 빈손으로 돌아온 오명국을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봤다.

    “오늘 함께 올 줄 알았는데…… 고작 그게 답니까?”

    능력이 없음을 질책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오명국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예전 같았으면 주눅이 들어 어깨부터 움츠리고 변명하기 바빴겠지만, 오늘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의 눈에는 독기가 가득했다. 그리고 그 독기를 불어 넣은 존재는 바로 현석이었다.

    “마스터께서 협상에 여지를 주시지 않으셨습니까. 결국 그렇게 진행되었습니다.”

    “여지? 내가 무슨 여지를 줬단 말입니까? 오명국 대원?”

    “직접 움직이실 수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렇게 하기로 했습니다.”

    한중현은 눈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려 비서실장을 바라봤다.

    비서실장은 그런 한중현을 달래듯 부드러운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인재를 영입하는 일입니다. 한 번쯤 아량을 보여주시는 것도 나쁘지 않습니다.”

    “다른 플레이어들이나 길드들이 우습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강자의 아량은 여유로 받아들여지는 법입니다. 누구도 우습게 여기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한중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진 실장님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요. 좋습니다. 언제 어디로 가면 된다고 합니까?”

    한중현이 다시 오명국을 바라보며 묻자, 오명국이 차분히 대답했다.

    “저희 길드 앞 커피숍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했습니다.”

    그 말에 한중현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이게 무슨…… 개수작입니까?”

    그의 몸에서 살기가 넘실넘실 흘러나왔다. 하지만 어느새 비서실장이 그의 어깨에 손을 얹자, 언제 그랬냐는 듯 살기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오명국은 그걸 보며 속으로 상당히 놀랐다. 사실 플레이어들 사이에서는 한중현의 실력이 과장 되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한데 오늘 저 모습을 보고 나니 어쩌면 과장된 게 아니라 오히려 축소되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레벨도 알려진 것보다 높을지도 모르겠어. 이거…… 나도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안 되겠는걸?’

    한 꺼풀 껍질을 깨고 나온 오명국은 예전과 아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아니, 애초에 다른 사람이 될 준비는 모두 끝나 있었다. 기회만 엿보고 있었을 뿐. 물론 본인은 그걸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그 계기를 현석이 제공해준 것뿐이었다.

    오명국은 차분하게 한중현의 지시를 기다렸다.

    “안내하세요.”

    “예. 마스터.”

    오명국은 정중히 허리를 꺾어 인사하고는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그런 오명국의 뒷모습을 보며 한중현이 비서실장에게 말했다.

    “저 사람…… 뭔가 달라진 거 같지 않습니까?”

    비서실장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예. 달라졌습니다. 하지만…… 달라지지 않은 것이기도 합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애초에 저렇게 변할 자질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단지 어떻게 하면 될지 방법만 모르고 있었을 뿐이죠.”

    한중현은 그렇게 말하는 비서실장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진 실장님은…… 참 신기한 분이라는 생각이 새삼스럽게 들어서요.”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한중현의 입가에 자신만만한 미소가 맺혔다.

    이런 사람이 뒤에서 서포트를 해주고 있는데 뭐가 무서울까.

    ‘나에게는 돈과 인재가 있어. 그리고 능력도 있지. 다른 사람의 것이 아닌 나 스스로의 능력이.’

    이제 자신을 비웃는 그 모든 것들에게 한 방 먹여줄 날도 그리 멀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현석은 커피숍에 앉아 패드를 뒤적이고 있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확인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이었다.

    그렇게 잠시 앉아 있었을 때, 다가오는 마력의 기척이 느껴졌다.

    그 중 하나는 아주 익숙했다. 오명국이었으니까.

    한데 나머지 둘은 그렇지 않았다.

    ‘레드드래곤 길드 마스터인 한중현이야 만나본 적이 없으니까. 한데…….’

    현석은 묘한 느낌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막 커피숍 문을 열고 들어오는 세 사람을 쳐다봤다. 세 사람이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느낌이 점점 선명해졌다.

    그리고 기억도 선명해졌다.

    현석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뜨고 다가오는 세 사람 중 한 명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얼굴은 몰랐지만 특유의 마력패턴이 그의 기억을 헤집었다.

    ‘저 사람이 왜 여기 있는 거지?’

    현석은 반사적으로 눈에 마력을 담아 그의 이름을 확인했다.

    [진대호]

    ‘그놈이다!’

    현석은 이름을 보고 나서 확신할 수 있었다. 저놈은 현석이 몸담았던 길드의 마스터였다.

    < 레드드래곤 길드 1 > 끝

    ⓒ 김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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