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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눈 뜨고 레벨업-34화 (34/326)
  • < 정리 2 >

    황노인의 능력은 현석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대단했다.

    칠성파와 레드독이 궤멸에 가까운 타격을 받았다는 얘기를 듣자마자 발 빠르게 움직였는데, 순식간이라는 말이 어울릴 정도로 빠르게 모든 걸 정리해 나갔다.

    칠성파도 레드독도 아직 완벽하게 무너진 건 아니었지만 이미 이빨과 발톱은 물론이고 근육까지 찢어진 호랑이는 아무 위협이 되지 않았다.

    황노인이 가진 자체적인 힘만으로도 칠성파와 레드독을 지워버리는 데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가졌던 돈과 권리는 차근차근 황노인의 조직으로 흡수되었다.

    칠성파나 레드독이 무너진 속도가 워낙 빨랐고, 또 황노인이 개입한 시기도 워낙 일렀기 때문에 다른 맹수들이 이빨과 발톱을 들이댔을 때는 이미 알짜는 몽땅 빼먹고 쭉정이만 남은 상태였다.

    물론 그렇게 남은 것도 상당한 양이었지만, 황노인은 과감하게 거기서 발을 뺐다. 물론 현석의 동의하에 벌인 일이었다.

    그 남은 쭉정이를 두고 아귀다툼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현석은 모든 과정을 옆에서 아주 자세하고 세밀하게 지켜볼 수 있었다. 그 자체가 계약에 있는 내용이었다.

    대신 이번에 얻은 대가 중 상당히 많은 부분을 황노인에게 양보했다.

    솔직히 현석에게는 칠성파나 레드독에서 얻는 돈이나 권리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

    권리를 써먹으려면 세력이 있어야 하는데 현석은 혈혈단신이었고, 돈은 이거 말고도 썩어 문드러질 만큼 많이 벌 수 있었다.

    이번에 마계에서 나오자마자 정리한 주식 덕분에 현석의 통장 잔고는 0을 세기가 어려울 정도로 빵빵해졌다.

    그리고도 아직 남은 주식이 어마어마했다. 아마 그걸 다 정리할 시점이 되면 돈은 아무리 퍼 써도 바닷물처럼 마르지 않게 될 것이다.

    물론 돈이야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나중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니 말이다.

    “분배에 불만이 있으면 언제든 얘기해. 괜히 나중에 말 나오는 건 질색이니까.”

    황노인이 퉁명스럽게 말했다.

    현석은 빙긋 웃었다. 말투와 달리 양보의 뜻을 밝힌 거나 다름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돈이 필요치 않았다.

    “분배는 됐습니다. 그 정도만 해도 충분히 많습니다. 대신 컨테이너 박스나 몇 개 구해주십시오.”

    “컨테이너 박스? 그건 또 어따쓰게?”

    “물건 좀 보관하려고요.”

    “물건?”

    황노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현석에게 보관할 만한 물건이 있던가? 지금까지 그와 함께 하면서 지켜본 바에 따르면 진짜 몸뚱이 하나 달랑 갖고 있었다.

    심지어 재산도 몽땅 통장에 있는 놈이었다. 한데 대체 뭘 보관한단 말인가.

    황노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몇 개나?”

    현석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이것 역시 많으면 많을수록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손가락 열 개를 활짝 폈다.

    “열 개 정도만 부탁합니다. 제일 큰 걸로.”

    “어려울 거 없지.”

    “혹시…… 규격 외로 제작도 가능합니까?”

    “그것 역시 어려울 것 없지. 한데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박스를 차곡차곡 쌓는 게 제일 편할 텐데?”

    “튼튼하고 최대한 커다란 크기로 제작 부탁합니다. 열 개. 돈을 얼마가 들어도 상관없습니다.”

    황노인이 피식 웃었다.

    “돈 걱정은 마라. 내가 그 정도로 야박한 놈은 아니니까. 네놈 덕분에 번 돈이 얼만데 고작 그 돈을 네놈에게 뜯어내겠느냐?”

    현석의 눈이 빛났다. 현석이 가진 아공간은 참으로 특이했다. 물건의 크기에는 상관없이 개수만 제한받을 뿐이었으니까.

    아마 이런 식이면 거대한 배도 보관할 수 있을 것이다. 통짜로 만든 집이나.

    물론 아공간에서 빼는 과정에서 받는 충격 때문에 아주 잘 지어야겠지만 말이다.

    그래서 병 종류를 보관할 때는 완충제를 잘 써야 한다. 아공간에서 나오는 순간 허공에 살짝 뜬 상태에서 바닥에 쿵 떨어진다.

    들어갈 때는 손에 닿은 물건이 그대로 빨려들어가듯 사라져 버리고 말이다.

    그 과정에서 이음새가 약하면 다 부서져 버린다. 그런 것들을 감안해도 아공간이라는 건 그야말로 사기에 가까운 능력이었다.

    “돈은 어떻게 주랴? 계좌로 쏴 줄까?”

    현석이 고개를 저었다.

    “몽땅 금으로 부탁합니다.”

    “뭐?”

    황노인이 황당한 눈으로 현석을 바라봤다. 현석이 받을 돈이 얼만데 그걸 다 금으로 바꾼단 말인가.

    “그거 제법 무겁고 양도 많을 텐데?”

    “컨테이너 박스 안에 넣어주십시오.”

    “설마 금 보관하려고 컨테이너 제작해 달라고 했던 거냐?”

    현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금뿐 아니라 보관해야 할 만한 것들이 쌓였으니까.

    지금 현석의 아공간은 포화상태였다. 마계에서 아공간 아티팩트를 얻어 개수를 130개로 늘렸음에도 모든 공간이 꽉꽉 차 있었다.

    그나마 마수의 가죽으로 커다란 주머니를 만들어 보관하지 않았다면 아마 아까운 것들을 다 버리고 와야 했을 것이다.

    가죽 주머니를 만들어 보관하는 것도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완성된 것이었다.

    처음에는 주머니가 풀리는 바람에 진짜 달랑 주머니만 남고 나머지는 공간의 미아가 되어 사라져 버린 경우도 여러 번이었다.

    어쨌든 현석은 가장 필요한 일 중 하나를 이렇게 쉽게 해결해 버렸다. 황노인을 이용해서.

    대충 얘기가 마무리되자, 황노인이 현석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한데…… 예전에 네가 구해준 그 자매는 어떻게 할 셈이냐?”

    “자매? 아…… 걔들 말이군요.”

    조금 전까지 까맣게 잊고 있다가 황노인의 말을 듣고서야 류지혜, 혜연 자매가 떠올랐다.

    사실 그녀들에 대해서는 별 생각이 없었다.

    처음이야 미래의 한국지부장이 될 정도로 능력과 잠재력이 뛰어난 류지혜를 나중에 팀으로 데려오면 좋겠다는 생각이 있긴 했다.

    그리고 그녀의 동생인 류혜연을 봤을 때 상당한 재능을 느끼긴 했다. 류지혜보다 류혜연이 훨씬 뛰어난 플레이어가 될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지금 그녀들이 얼마나 강해졌고, 경험을 쌓았는지 모르지만, 현석과 함께하기엔 차이가 너무 많이 벌어졌다.

    ‘그래도 확인이나 한 번 해볼까?’

    물론 확인해서 저들이 대폭 성장했다고 해도 당장 함께할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얼마나 성장했는지 궁금하긴 했다.

    현석이 던전에 들어가기 전 류지혜의 레벨은 40대 초반이었다. 그리고 류혜연은 막 마력중독을 고치고 플레이어로 각성한 상태였다.

    현석이 마계에 있었던 시간은 고작 6개월,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기간이었다.

    ‘류혜연은 초보니까 상대적으로 성장을 많이 했겠지. 하지만 류지혜는…….’

    류지혜는 류혜연의 성장을 돕기까지 해야 하니 더 힘들었을 것이다.

    성장을 빠르게 하려면 길드에 가입하면 되는데, 그 둘이 길드에 들어갈 것 같지는 않았다.

    현석이 그렇게 잠시 생각에 잠기자, 황노인은 의미심장한 눈으로 그걸 바라보다가 또 입을 열었다.

    “그 아이들이 널 찾고 있다.”

    현석은 그 말에 상념에서 벗어나 황노인을 쳐다봤다.

    황노인은 그런 현석의 시선을 즐기듯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사실 진짜 찾는 건 언니 쪽이 아니라 동생 쪽이긴 하지. 당돌한 녀석이더구나.”

    그 말은 류혜연이 직접 황노인에게 의뢰를 넣었다는 뜻이다. 아니, 의뢰라기보다는 그저 부탁이었을 것이다.

    “아직 얘기 안 했는데, 네 판단에 맡기마. 감추고 싶으면 감춰도 된다.”

    현석은 고개를 저었다. 굳이 감출 이유가 뭐 있겠는가. 이제 위협이 될 만한 놈들도 사라졌는데.

    “말해줘도 됩니다. 아, 그리고 날 쫓던 놈들이 또 있던데…….”

    “레드드래곤?”

    황노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냥 무시하고 넘어갔으면 아무 일 없었을 텐데 네놈이 괜히 들쑤셔서 일을 키우지 않았더냐.”

    애초에 현석에 대한 정보 세탁이 제대로 되었기에 수뇌부의 관심은 이미 끊어진 상태였다.

    그저 중지가 안 되어서 애꿎은 놈 하나가 개고생 중이었는데, 그놈이 우연히 현석을 발견하는 바람에 일이 이렇게 꼬였다.

    “그놈들 평판이 어떻습니까?”

    현석이 말하는 평판이라는 게 겉으로 드러난 걸 의미하지는 않을 터, 황노인은 의외라는 듯 눈을 크게 뜨고 현석을 바라봤다.

    “왜? 괜찮으면 들어가게?”

    “들어갈 이유는 없지만 손은 잡을 수 있으니까요.”

    “손을 잡는다고?”

    황노인이 묘한 눈으로 현석을 바라봤다.

    지금 현석이 한 말을 잘 뜯어보면 레드드래곤 길드와 자신을 거의 동급에 놓고 있었다.

    “너, 레드드래곤 길드가 어떤 데인 줄은 알아?”

    “삼현 그룹에서 만든 길드 아닙니까?”

    “그걸 아는 놈이 그딴 말을 해? 거기가 애들 게임하다 만든 길드인 줄 알아?”

    현석은 그 말에 피식 웃었다. 그건 아니지만 또 딱히 아니라고 하기도 뭐하지 않은가.

    “근데 거기 삼현 그룹에서 지원을 좀 해주긴 합니까?”

    “뭐?”

    “반쯤 내놓은 거 아니에요? 내가 듣기론 그랬는데?”

    황노인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너…… 너, 그걸 어떻게 알아!”

    현석이 황노인을 향해 씨익 회심의 미소를 날렸다.

    “전 뭐 귀도 없고 눈도 없는 줄 아셨습니까? 어쩌면 영감님이 모르는 거, 몇 개 더 알고 있을 걸요?”

    황노인이 황당한 눈으로 현석을 바라봤다. 정말 상대하기 어려운 놈이었다. 이렇게 피곤하면서도 또 흥미가 가는 놈은 처음이었다.

    ‘역시…… 내 감이 아직 쓸 만하단 말이지.’

    황노인은 다시 한 번 자신의 감에 대한 확신을 가졌다.

    “뭐, 알고 있으니 그냥 얘기해도 되겠네. 거기 마스터가 삼현 그룹 회장 손자야.”

    “그거야 유명한 얘기 아닙니까.”

    “근데 그놈이 서자라는 거지.”

    “서자?”

    “삼현 그룹쯤 되면 그런 놈들이 몇 놈 있기 마련이거든. 아무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그놈이 참…… 천덕꾸러기야.”

    황노인은 슬슬 흥미를 보이는 현석의 얼굴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능력은 쥐뿔도 없는 게 자존심만 세고…… 뭐 그렇거든. 가문에서도 거의 내놓다시피 했지. 한데 덜컥 플레이어로 각성을 해 버렸네?”

    그 뒤의 이야기는 안 들어도 뻔하다. 뭐, 현석도 거기에 대해서는 제법 많이 알고 있기도 했고.

    나중에 레드드래곤 길드가 몰락하면서 거기에 대한 가십거리가 어마어마하게 쏟아졌다.

    그 중에는 진실도 있었고, 만들어진 소설도 있었다. 하지만 현석은 당시 비교적 진실에 가까운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그때 레드드래곤 길드를 무너뜨린 것이 바로 현석이 속한 길드였으니까.

    “삼현 그룹에서는 길드를 처음 만들 때 지원해주고 딱 관계를 끊다시피 했어. 물론 그놈이 개인적으로 가진 돈은 제법 많지.”

    그걸로 길드를 운영하고 있다는 뜻이다. 다른 곳도 아닌 삼현 그룹 회장의 손자다. 가진 돈이 적을 리 없었다.

    그러니 이렇게 운영이 점점 방만해지는 것이고 말이다.

    “그래도 삼현 그룹 던전 연구실 쪽이랑은 제법 연계가 잘 되어 있죠?”

    현석의 물음에 황노인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다 알면서 뭘 물어, 이놈아! 그래. 잘 연계되어 있다. 그룹 회장님이 손자를 그냥 길가에 내던지겠어? 그 정도 편의는 봐줘야지.”

    그렇게 말한 황노인이 의아한 눈으로 현석에게 물었다.

    “한데 왜 그놈들한테 관심을 두는데?”

    “평판은 어떠냐니까요?”

    “평판이랄 게 있나? 뭐…… 남의 눈에서 피눈물 뽑는 짓은 안하는 모양이더라. 돈지랄을 해서 눈꼴은 좀 사납다만.”

    황노인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래선 오래 못가지. 벌써 질투하는 놈에 어떻게든 뜯어먹으려는 놈에…… 결국 그놈들 다 적으로 만들 텐데, 쯧쯧쯧. 애송이 티가 확 나는 거지. 플레이어가 레벨만 높다고 다가 아닌데 말이야.”

    황노인은 그렇게 말하며 현석을 힐끗 쳐다봤다. 현석의 레벨이 궁금해진 모양이었다.

    현석은 황노인의 눈빛을 무시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본 황노인이 기겁을 했다.

    “뭐야, 설마 정말로 그놈들이랑 손잡으려고?”

    “뒤통수 맞을 염려 없어서 좋잖아요.”

    그 말에 황노인은 입을 다물어 버렸다. 확실히 그건 그렇다. 레드드래곤 길드의 마스터인 한중현은 절대 뒤통수를 칠 놈이 아니다.

    그럴 주변머리도 없고, 또 그런 짓을 하기엔 자존심이 너무 셌다.

    황노인이 정말로 묘한 표정으로 현석을 바라봤다. 세상에 손잡을 놈의 기준을 그런 식으로 정하는 놈은 진짜 처음 봤다.

    “너…… 솔직히 말해. 대체 무슨 꿍꿍이야?”

    황노인의 물음에 현석이 그를 보며 씨익 웃었다. 정말로 의미심장한 미소였다.

    < 정리 2 > 끝

    ⓒ 김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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