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리 1 >
“역시…… 미리 준비한 함정이었나?”
강중태가 최대한 담담한 말투로 물었다. 하지만 그러려고 애쓸 뿐, 그의 눈빛이나 목소리가 미약하게 떨리고 있어 지금 그가 얼마나 두려운지 말해주고 있었다.
현석은 그의 물음에 대답하지 않고 강중태 앞까지 걸어간 다음 그를 내려다봤다.
가만히 현석을 올려다보던 강중태는 주위를 슥 둘러봤다. 다들 사방에 널브러진 채 쓰러져 있었다.
“다들…… 죽은 건가?”
현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강중태는 그걸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였다.
“건물에 들어간 놈들도…… 몽땅?”
역시 현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강중태가 어금니를 악물었다.
“대체…… 대체 내가 뭘 어쨌다고!”
그의 발작적인 외침에도 현석은 그저 담담했다. 이런 일은 예전에 비일비재하게 겪었다. 심지어 자신이 저 강중태와 비슷한 꼴이 된 적도 있었다.
현석은 담담히 말했다.
“그저 응징일 뿐이야.”
“응징? 이게…… 이게 응징이라고?”
현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슬슬 이 응징을 마무리할 때가 되었다.
“내가 대체 뭘 잘못했다고 응징이야! 내가 너한테 뭘 했는데?”
현석은 피식 웃었다.
지금까지 자신이 어떤 일을 벌여왔고, 남들 눈에서 얼마나 피눈물을 뽑아냈는지에 대해서는 아무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하여간…… 세상에는 쓰레기가 너무 많아.”
현석은 그렇게 말하며 강중태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툭 쳤다.
강중태의 눈이 위로 휙 돌아갔다. 그리고 의자 째로 넘어가 쓰러졌다.
쿵!
그걸로 끝이었다.
수없이 많은 악행을 일삼아온 악인이자, 앞으로 수많은 플레이어들을 노예처럼 부리며 더 지독한 악인으로 성장하게 될 강중태의 말로는 이렇게 보잘 것 없었다.
현석은 주위를 슥 둘러봤다. 그리고 자신이 벌인 참상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정리하려면…… 시간 좀 걸리겠군.”
그냥 시체만 처리한다고 끝이 아니었다. 칠성파와 레드독이 박살 났다.
박살 낸 걸로만 끝내선 안 된다. 철저하게 정리해서 얻을 건 얻고 버릴 건 버려야 한다. 그리고 감출 건 감추고 말이다.
“컨테이너 박스 구하는 걸 좀 서둘러야겠어.”
미리 구했으면 좋았겠지만 그럴 시간이 없었다. 마계에서 나오자마자 이놈들이 따라붙었으니 말이다.
현석은 아공간에서 차곡차곡 접은 무언가를 꺼냈다. 가죽으로 만든 주머니를 잘 접어놓은 것이었다.
마계의 마수들을 잡으며 현석이 만든 거대한 주머니 중 하나였다.
이럴 때 써먹으려고 만든 건데 아무래도 하나로는 모든 걸 정리하기 어려워 보였다.
현석은 일단 장비부터 챙겼다.
“시체는…… 당분간 묻어둬야겠군.”
너무 많아서 처리하기가 쉽지 않았다. 현석의 뇌리에 종로암시장의 황노인이 잠시 떠올랐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이런 일은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다. 기껏 아무도 도망치지 못하게 잘 처리했는데 이 일을 외부에 알리는 멍청한 짓을 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현석은 묵묵히 땅을 파기 시작했다. 인적이 드문 곳이고 슬슬 어두워지기 시작해 다행이었다.
* * *
칠성파를 모조리 파묻고 난 다음 현석이 한 일은 옥상에 재워 놓은 다섯 사람을 깨우는 것이었다.
먼저 종로에서 온 게 확실한 두 사람을 따로 으슥한 곳으로 데려간 다음, 바늘호랑이의 털을 뽑았다.
“크으으.”
두 사람이 신음을 흘리며 서서히 눈을 떴다. 그리고 정신이 돌아오자마자 후다닥 일어나 주위를 살폈다.
그들은 앞에 가만히 서 있는 현석을 발견하고는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종로에서 왔습니까?”
현석의 물음에 두 사람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이미 황노인으로부터 만일 현석을 만나면 최대한 호의적으로 대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러니 괜히 들킨 마당에 정체를 숨기네 어쩌네 하면서 밉보일 이유가 없었다.
“왜 절 뒤쫓은 겁니까?”
현석의 물음에 두 사람은 즉시 대답했다.
“지시를 받았습니다. 사실 그동안 계속 찾고 있었습니다. 한데 갑자기 나타나셨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왔는데 날파리들이 꼬이는 바람에…….”
그러니까 적당한 시점에 모습을 드러내려 했다는 뜻이다. 물론 진위여부야 알 수 없지만 말이다.
하지만 현석은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다. 어차피 도움을 주고받아야 할 처지이니 굳이 얼굴 붉힐 필요는 없었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주시죠. 간단한 일 하나 처리하고 올 테니.”
“예?”
두 사람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현석을 바라봤다. 현석은 씨익 웃으며 말했다.
“얼른 다녀와서 종로에 같이 가잔 뜻입니다. 거래를 제안할 게 있어서요.”
현석은 말을 마치자마자 대답도 듣지 않고 모습을 감췄다.
두 사람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어디로 어떻게 사라졌는지 보지도 못하고 기척도 못 느꼈다. 그제야 상대가 자신이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위험한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일단…… 어르신께 보고부터 하자.”
두 사람은 전화기를 꺼냈다.
* * *
“크윽.”
오명국은 깨질 듯한 두통을 느끼며 눈을 떴다. 깜깜한 밤하늘이 보였다.
잠시 눈을 깜빡이며 기억을 더듬었다. 한데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놈을 쫓던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뒤에 어떻게 됐지?’
오명국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리고 앞에 누군가 서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누, 누구냐!”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상대의 얼굴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너무 어두웠다.
옆에 있던 두 동료도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동시에 깨어난 모양이었다.
“날 왜 쫓았지?”
오명국은 앞에 선 사람의 입에서 나온 질문에 그가 누군지 알아차렸다.
‘채현석! 그럼…… 저놈한테 당한 건가?’
그제야 당시 상황이 떠올랐다. 갑자기 현석이 빠르게 이동하기 시작하면서 쫓는 데 애를 먹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현석을 쫓던 칠성파 놈들의 수가 점점 많아졌던 기억도 함께 떠올랐다.
“빠르고 정확한 대답을 위해 본의 아닌 수를 쓸 수도 있어.”
현석의 말에 오명국은 얼른 대답했다. 어차피 감추고 자시고 할 일도 아니었다. 그리고 고문을 당하는 건 사양이었다.
“영입하려고 왔습니다.”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눈앞에 선 자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고문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이다.
‘딴 건 몰라도 사람 보는 눈 하나는 자신 있으니까.’
오명국은 대답을 한 다음 현석의 표정을 살폈다. 슬슬 표정이 보일 정도로 어둠에 눈이 익숙해졌다.
‘어라? 이게 아닌가?’
현석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그제야 오명국은 자신이 한 말이 상대에게 얼마나 얼토당토않게 들릴까 떠올렸다.
“못 믿으시겠다는 거 잘 압니다. 하지만 설명할 시간을 조금만 주십시오. 저희도 벌써 여섯 달 째 채현석 씨를 찾아다녔습니다.”
현석은 그런 오명국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마음이 불안해진 오명국이 알아서 자신의 내력을 술술 불었다.
“저희는 레드드레곤 길드에서 나왔습니다.”
“레드드레곤 길드?”
레드드레곤 길드는 삼현그룹과 연결된 곳이다. 그곳 길드마스터가 그룹 회장의 손자라는 건 유명한 사실 중 하나였으니까. 물론 유명해지는 건 미래의 일이지만 말이다.
“내가 6개월이나 찾아다닐 정도로 탐나는 인재는 아닌 것 같은데?”
“그게…….”
현석이 제시한 이유가 너무 타당해서 오명국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하지만 그도 정확한 이유를 알지 못하는데 어쩌란 말인가.
“이유도 모르고 날 찾아다녔나? 레드드래곤 길드가 그렇게 허술한 곳인 줄은 몰랐군.”
그 말에 오명국이 쓴웃음을 지었다.
“허술하다기보다는…… 인력이 남아도는 거죠. 솔직히 말하면 제가 길드 내에서 별 쓸모가 없는 놈이기도 하고…….”
오명국이 사냥에 도움이 되는 자였다면 정신없이 던전을 돌아다녔을 것이다.
현재 레드드래곤 길드는 한국에서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길드였으니까.
“아마…… 길드마스터는 이 지시를 내렸는지 아닌지도 기억하지 못할 겁니다.”
현석에 대한 정보는 일단 황노인이 제대로 세탁을 했기에 그 뒤로 별다른 일이 없었다면 아무리 레드드래곤 길드라 할지라도 신경을 껐을 것이다.
“재미있군.”
오히려 신경을 안 썼기에 현석을 찾아낸 셈이다.
“그래서 이제 위에 보고할 생각인가?”
오명국은 긴장한 눈으로 머뭇거렸다. 섣불리 대답했다가 목숨을 잃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괜찮으니까 보고 해. 예상이랑은 좀 다르지만…… 제법 쓸 만한 생각이 떠올랐으니까.”
현석은 그렇게 말하고는 돌아섰다. 그리고 건물 옥상에서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오명국이 깜짝 놀라 옥상 난간까지 달려가 아래를 내려다봤다.
“헉!”
정말 깜짝 놀랐다. 설마 이렇게 높은 빌딩인 줄은 몰랐다. 그들은 까마득하게 높은 곳에 있었다.
그리고 그 까마득한 높이에서 뛰어내린 현석이 저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다.
“진짜…… 잘못 건드릴 뻔했다.”
사뿐히 바닥에 내려서서 빠르게 어딘가로 달려가는 현석의 모습을 보며 오명국은 몸을 한 차례 부르르 떨었다.
아무리 플레이어라고 해도 이 정도 높이에서 뛰어내려 저렇게 가볍게 착지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연히 오명국은 못 하는 일이었다. 오명국뿐 아니라 레드드래곤 길드 내에서도 저게 가능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오명국은 현석의 모습이 순식간에 안 보이자, 나직이 한숨을 내쉬며 품을 뒤졌다.
다행히 전화기는 그대로 있었다. 잠시 망설이던 오명국은 결국 전화번호를 꾹꾹 눌렀다.
* * *
황노인은 신기한 눈으로 앞에 앉은 현석을 바라봤다. 자신의 눈을 6개월이나 피한 사람은 지금까지 아무도 없었다.
심지어 대단한 지위나 힘을 가진 사람이라도 황노인으로부터 자신의 위치를 감추는 건 하지 못했다.
한데 현석은 그걸 해낸 것이다.
현석이 몰래 숨어 있었건, 아니면 던전에 들어가서 6개월을 버텼건, 어느 쪽이든 대단한 건 마찬가지였다.
그래도 일단 확인은 하고 싶었다. 만일 정말 그냥 단순히 숨어 있었던 거라면 조직의 능력을 차근차근 재정비해야 할 테니까.
“대체 그동안 어디 있었나?”
“아시면서 왜 묻습니까?”
황노인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정말 던전에서 여섯 달을 버틴 건가? 그게 가능해?”
현석이 황노인을 보며 씨익 웃었다.
“거래부터 하죠.”
“거래?”
황노인은 그 거래가 칠성파와 관계되어 있다는 것만 짐작할 뿐 정확히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다.
아무리 황노인이라도 설마 현석이 혼자서 칠성파와 레드독 길드를 거의 궤멸에 가깝게 박살 냈다는 건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아까도 듣긴 했다만…… 대체 뭘 거래하려는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받을 만한 게 없을 것 같은데?”
황노인은 그렇게 말하며 눈을 빛냈다. 거래 조건에 현석이 던전에서 6개월이나 버틴 노하우를 포함시킬 계획이었다.
“칠성파랑 레드독을 정리하려고 합니다.”
황노인이 눈을 빛냈다.
“그놈들…… 생각보다 강하고 끈질기다는 거 알고 있나?”
현석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압니다. 그래서 거래를 하려는 거고요.”
“좋아. 들어나 보지. 대체 뭘 원하는 건가? 그리고 내게 뭘 줄 수 있나?”
“일단…… 칠성파와 레드독은 이미 끝장났습니다.”
“뭐?”
황노인이 자신도 모르게 멍청한 표정과 눈으로 현석을 멍하니 바라봤다.
현석은 그런 황노인을 보며 씨익 웃었다.
< 정리 1 > 끝
ⓒ 김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