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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눈 뜨고 레벨업-30화 (30/326)
  • < 칠성파 1 >

    현석은 호텔에서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자신을 미행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감각이 남들보다 훨씬 예민한 현석을 미행하려면 이보다 훨씬 조심스럽게 해야 한다.

    ‘이런 어설픈 미행을 붙일 곳은 딱 하나뿐이지.’

    그동안 마계에서 정신없이 싸우느라 잠시 잊고 있었던 것들이 우후죽순처럼 떠올랐다.

    마계에 가기 전, 류혜연의 마력중독을 치료해 주고 그녀를 플레이어로 각성시켰다.

    언니를 능가하는 재능을 가졌으니 아마 지금쯤 엄청나게 성장했을 것이다.

    또한 그녀에게 자극을 받았을 테니 류지혜 역시 원래 예정되었던 미래보다는 훨씬 더 발전했을 것이다.

    ‘그나저나 관리센터에서 발을 뺐는지 궁금하군.’

    류지혜는 원래 관리센터에서 계속 구르다가 나중에는 한국 지부장이 된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금은 그 계기가 바로 동생의 죽음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아마 동생을 살리려 계속 애쓰다가 점점 관리센터의 깊은 곳까지 파고들게 되었으리라.

    하지만 이젠 현석이 그 미래를 바꾸었다. 어쩌면 관리센터에서 나왔을 수도 있었다.

    ‘그럼 어떻게 되는 거지?’

    미래를 아는 현석의 존재는 끊임없이 다가올 역사에 자극을 주게 될 것이다.

    벌써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꿔 버렸다.

    아니, 따지고 보면 한 사람이 아니다. 레드독을 무너뜨렸다. 그리고 자신을 염탐하기 위해 온 놈도 하나 죽였다.

    최창수 일행은 잘 모르겠다. 그쪽은 원래 그 시기쯤 죽을 예정이었는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레드독은 그렇지 않았다. 특히 레드독의 주경철은 제법 오랫동안 살아남아 악명을 떨친다.

    그런 놈들을 더 크기도 전에 미리 죽여 버렸으니 미래가 바뀌는 게 당연하다.

    물론 상관없었다. 나중에 시간이 오래 지나면 이 작은 날갯짓이 큰 태풍을 몰고 올지도 모르지만, 당장은 별 의미가 없을 테니까.

    그리고 현석의 입장에서 나중은 아무 의미가 없다.

    지금 당장 강해지는 것이 중요하다. 지금보다 훨씬 더 강해질 것이다.

    현석의 진짜 적은 고작 레드독 길드나 칠성파가 아니었다. 제대로 응징을 해줘야 할 쪽은 훨씬 위쪽에 있었다.

    그들을 응징하려면 고작 이 정도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압도적이라는 말이 뭔지 보여주지.”

    현석은 결연한 표정으로 그렇게 중얼거린 후, 걸음을 옮겼다.

    칠성파에서 붙인 떨거지들이 여전히 그런 현석을 어설픈 미행실력으로 따라가고 있었다.

    * * *

    칠성파에서도 발견한 현석을 종로 암시장과 정보를 지배하는 황노인의 귀에 들어가지 않았을 리가 없다.

    “그래? 드디어 나타났다고? 처음 나타난 곳이 호텔? 그럼 호텔에 들어가기 전까지의 행적은 아예 모르고?”

    황노인은 놀란 눈으로 눈앞의 사내, 양진욱을 바라봤다.

    양진욱은 평소와 다름없는 공손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예. 갑자기 호텔에 나타났습니다. 거기서 사흘 동안 머물면서 잠만 잔 모양입니다. 지금은 아무래도 백화점 쪽으로 향하고 있는 듯합니다.”

    “백화점?”

    “예. 제가 보기엔 옷을 사러 가는 것 같습니다만…….”

    “옷?”

    황노인이 묘한 눈으로 양진욱을 바라봤다.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20년 넘게 양진욱을 봐 온 황노인이 그의 표정에 나타난 미묘한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할 리 없었다.

    “왜? 좀 놀랐느냐?”

    양진욱은 잠시 입을 다물고 굳은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수긍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많이 놀랐습니다. 이렇게 갑자기 나타날 줄은 몰랐습니다.”

    “지금 이 상황이 뭘 뜻하는 것 같으냐?”

    “던전입니다.”

    황노인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양진욱을 바라보는 그의 미소는 인자하기 그지없었다.

    “자, 그럼 우린 거기에서 또 뭘 생각해야 하겠느냐?”

    “일단 서울 도심 한복판 어딘가에 개별 던전이 있다는 점입니다. 제가 보기에 그곳은…… 강남 쪽 같습니다.”

    “강남?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는?”

    “호텔에서 채현석을 발견한 다음 그 주변을 샅샅이 뒤졌습니다.”

    “확신하느냐?”

    “100% 장담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70%는 넘습니다.”

    황노인은 더없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자신이 원하는 곳에 거의 근접했다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여기서 만족하면 안 되지.’

    황노인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양진욱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리고 두 번째는…… 던전에서 6개월이나 버틸 수 있는 기술에 관한 것입니다. 채현석은 분명히 그걸 확실히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갖고 있습니다.”

    “좋아. 그 방법에 대한 가치는?”

    “무궁무진합니다. 최소한 화이트홀에 대한 연구가 더 깊어지는 계기로 삼을 수 있을 테니까요.”

    그리고 더불어 상위 등급 던전을 클리어 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상위 등급으로 올라갈수록 던전을 클리어 하는 데 필요한 시간이 어마어마하게 늘어난다.

    게다가 넓이는 어찌나 넓은지 꾸준한 보급선을 확보하지 않으면 클리어 자체가 불가능했다.

    문제는 블랙홀의 경우 한 번 죽었던 마수가 다시 나타난다는 점이었다.

    그 때문에 보급선을 유지하는 것이 엄청나게 어려웠다.

    한데 만일 던전에서 오랫동안 생존할 수 있는 기술이 있다면 어찌 되겠는가. 굳이 보급선을 길게 늘어뜨릴 이유가 사라지는 것이다.

    “진욱아.”

    노인이 자상하게 부르자, 양진욱이 흠칫 놀라 노인을 바라봤다. 하지만 이내 표정을 풀고는 그 역시 부드럽게 대답했다.

    “예. 할아버지.”

    친조손 관계는 아니었지만 두 사람이 서로에게 느끼는 감정은 그 이상이었다.

    양진욱은 그 누구보다 황노인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또한 황노인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말이다.

    세상에 일방적인 관계는 없다. 양진욱 또한 황노인에게 그 정도로 지극한 정을 보여줬기 때문에 황노인이 그런 마음을 갖게 된 것이기도 했다.

    “내가 감으로 일을 처리할 때마다 네가 무슨 불만을 갖고 있는지 잘 알고 있다.”

    양진욱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게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딱히 불만을 표출하거나 황노인의 명령을 거부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만일 그게 조직을 위험하게 만들었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다. 현재 조직은 황노인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거기 속한 모든 조직원의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던 건 지금까지 황노인의 감이 언제나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이번 채현석의 경우가 좀 애매했었는데, 또 이렇게 결론이 나 버렸다.

    “사실 나도 가끔은 내가 이래도 되나 싶을 때가 있으니 오죽하겠느냐. 허허허허.”

    황노인의 말에 양진욱은 잠깐 황당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하지만 이내 풀썩 웃고 말았다.

    “그런데 말이다. 요즘은 또 생각이 좀 달라지더구나. 정확히 말하면…… 던전이 나왔을 때부터 그랬다. 마정석, 마력, 플레이어…… 예전에는 없던 것들 아니더냐.”

    양진욱이 진지한 자세로 황노인의 말을 경청했다. 그의 표정도 달라져 있었다.

    “그래서 난 요즘 이런 생각이 들더구나, 내 감…… 어쩌면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을까, 하고 말이다.”

    양진욱은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신기할 정도로 잘 들어맞는 황노인의 감은 확실히 그냥 보통 사람 수준이 아니라 초능력에 가까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감이라는 놈이 채현석을 본 순간 맹렬히 요동치더구나. 절대 적으로 삼아선 안 된다고.”

    양진욱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예. 명심하겠습니다. 그리고…….”

    잠시 말을 끌며 생각을 정리한 양진욱이 다시 입을 열었다.

    “세상이나 사람을 좀 더 넓게 보도록 하겠습니다.”

    황노인이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거면 됐다. 자, 바쁠 텐데 나가 보거라.”

    양진욱이 고개를 꾸벅 숙이고 밖으로 나가자, 황노인의 눈빛이 달라졌다. 과거 젊을 때나 가끔 나왔던 승부사의 눈빛이었다.

    “자, 어서어서 오너라. 과연 날 몰락시킬 패인지, 아니면 부흥시켜줄 패인지 확인이나 좀 하자꾸나.”

    황노인의 입가에 즐거운 미소가 맴돌았다.

    * * *

    현석은 미행하는 자들에게서 신경을 껐다. 물론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그들의 행동 하나하나가 뇌리에 남았기 때문에 만일 허튼 짓이라도 하려고 하면 즉시 반응할 수 있었다.

    지난 6개월 동안 마계에서 얻은 건 검과 레벨뿐만이 아니었다. 과거의 전투경험을 모조리 되살린 걸로도 모자라 한 발 더 나가 버렸다.

    일대 다수의 전투는 물론이고 일대일의 전투도 무수히 겪었다. 마계는 그야말로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당시에 왜 다들 거기를 지옥이라고 표현했는지 6개월 동안 뼈저리게 느끼고 왔다.

    어쨌든 현석은 일단 백화점으로 향했다. 카드는 예전 은행에 계좌를 개설할 때 만들어 뒀기에 다시 은행에 갈 필요는 없었다.

    현석은 백화점에 가서 일단 입은 옷부터 싹 바꿨다. 돈이 워낙 많았기에 가격에 신경 쓰지 않고 당장 입을 옷을 구했다.

    나중에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르니 미리 옷가지를 준비해 둬야겠다는 생각에 여러 벌을 구입했다.

    감시하는 눈이 있어서 아공간에 넣지는 못했지만 나중에 적당히 정리가 되면 아공간에 따로 칸을 마련해 보관할 생각이었다.

    간단히 쇼핑을 하고 머리까지 다듬은 다음, 밥까지 해결하고 나서야 백화점에서 나온 현석은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감시자가 더 늘어났네.’

    가장 어설픈 놈들이 칠성파였고, 그나마 좀 나은 놈들이 세 명 정도 붙어 있었다.

    그리고 가장 은밀하면서 미행 실력이 뛰어난 자들이 두 명 있었다.

    현석은 대번에 그들의 정체를 알아차렸다.

    ‘황노인이로군.’

    가장 실력이 뛰어난 자들은 황노인의 조직에서 보낸 자들이 분명했다.

    물론 짐작일 뿐이지만 아마 틀리지 않을 것이다. 그들의 성향은 정말 오랫동안 겪어서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저 어중간한 놈들은 누구지?’

    칠성파나 황노인이야 자신과 제대로 엮여 있으니 이렇게 일찍 찾아냈다는 사실이 이상하지 않았다.

    한데 저 어중간한 것들과는 어떻게 엮인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짐작할 만한 곳이 아예 없는 건 아닌데…….’

    대충 예상키로 가능성이 높은 하나는 관리센터였다. 관리센터의 경기지부장인 추경훈이 아직 관심을 갖고 있다면 움직였을 수도 있다.

    ‘그 사람은 아닐 거야.’

    추경훈은 이미 떨어져 나갔을 거라 예상했다. 자신에 대한 정보를 기업체에 팔아먹은 다음 신경을 끊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면 남은 건 하나다. 추경훈에게 자신의 정보를 산 기업체 말이다.

    ‘대충…… 레드드래곤 길드쯤 되려나?’

    현석은 그렇게 따라오는 자들을 하나하나 파악하며 걸음을 조금씩 빨리했다.

    과연 자신이 칠성파와 충돌하는 모습을 저들에게 보여줘도 괜찮을까에 대한 계산을 해봤다.

    ‘일단…… 감추는 걸로.’

    결론은 아주 간단했다. 그리고 감추는 방법도 아주 간단했다. 미리 떼어내면 된다. 칠성파만 빼고 말이다.

    짐작이야 하겠지만 어떤 방식으로 칠성파를 박살 내는지는 모를 것이다.

    일단 그 정도면 충분했다.

    ‘자, 그럼 조금만 흔들어볼까?’

    생각과 동시에 현석의 몸이 앞으로 빠르게 튀어 나갔다.

    어마어마한 속도였다.

    사방에서 당황한 기척이 쏟아져 나왔다.

    현석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맺혔다. 그리고 그는 더욱 빠르게 앞으로 내달렸다.

    < 칠성파 1 > 끝

    ⓒ 김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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