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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눈 뜨고 레벨업-28화 (28/326)
  • < 현석을 찾는 사람들 >

    “후우. 진짜 죽을 뻔했네.”

    류지혜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그녀 옆에 류혜연이 생글생글 웃으며 나란히 앉았다.

    류혜연은 언니와 함께 이렇게 활기차게 움직일 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행복하기 그지없었다.

    설사 그것이 지금처럼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라 해도 말이다.

    “언니, 나 또 레벨 오른 거 같아. 느낌이 팍 왔어.”

    “벌써?”

    류지혜가 질린 눈으로 동생을 바라봤다. 류혜연의 재능은 기절할 정도로 대단했다.

    플레이어로 각성한 지 이제 고작 6개월인데, 벌써 자신을 거의 따라잡다시피 했다.

    류지혜도 그동안 열심히 해서 50레벨을 넘겼다는 걸 생각하면 그야말로 어마어마하다는 말만으로는 부족한 천재적 재능이었다.

    이런 재능이 침대에 누워서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었다니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어쩌면…… 그래서 더 뛰어난 건지도…….’

    죽음과 죄책감을 항상 곁에 두고 살아왔기 때문에 마음가짐 자체가 더 절박한 건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절박함이 재능이라는 꽃에 계속 물과 비료를 주는 것이고 말이다.

    한순간 달라진 류지혜의 눈빛에 류혜연이 얼른 그녀의 팔을 휘감으며 애교섞인 말을 꺼냈다.

    “아이, 또 그런 눈으로 본다. 나 이제 진짜 튼튼하다니까? 이번에 레벨테스트 하면 아마 43레벨은 될 걸? 나 이제 그런 안쓰러운 눈으로 봐도 되는 사람 아니야.”

    류혜연은 그렇게 말하며 배시시 웃었다. 안 그래도 예쁜데 저런 미소까지 머금으니 같은 여자에다가 자매인 류지혜조차 잠깐이나마 넋이 나갈 정도였다.

    “알았어. 안쓰럽게 본 거 아니야. 이 눈이 그런 걸로 보여? 이건 질투야, 질투.”

    질투라는 말에 류혜연이 밝게 웃었다.

    “아하하하! 질투는 얼마든지 해도 돼. 나도 이제 누군가에게 부러움을 주는 사람이 되었구나. 그동안은 항상 부러워만 하면서 살았는데.”

    류지혜는 그 말에 잠깐 또 안쓰러운 표정이 될 뻔했다. 하지만 꾹 눌러 참았다. 그리고 동생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어 주었다.

    “우리 동생 이제 정말 많이 컸네. 언니 손이 더 필요 없을 정도로.”

    “에이, 그건 아니다. 아직 10년은 더 필요하거든?”

    “내가 보기에 3년 안에 좋은 남자 만나서 이 언니는 거들떠도 안 볼 거 같은데?”

    류혜연이 빙긋 웃으며 류지혜의 가슴에 뺨을 부비부비 비볐다.

    “아니거든요? 난 평생 언니랑 같이 살 거거든요?”

    “내가 싫어! 나도 좋은 남자 만나서 알콩달콩 살 거야!”

    류지혜는 그 말을 내뱉고 나니 문득 한 사람이 떠올랐다. 그 사람 때문에 던전 관리센터를 박차고 나왔고, 또 그 사람 덕분에 이렇게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한데 지난 6개월 동안 그 사람은 연락조차 없었다.

    ‘살았는지 죽었는지 정도는 알려줘도 되잖아.’

    류지혜의 얼굴이 살짝 시무룩해졌는지 류혜연이 환하게 웃으려 애쓰며 그녀의 팔을 더욱 꽉 안았다.

    “언니, 그분 생각해?”

    “아니, 내가 왜 그 자식 생각을 해야 하는데?”

    “그래? 난 요즘 매일 생각나는데.”

    “뭐?”

    류지혜가 깜짝 놀라 동생을 바라봤다. 류혜연이 장난기 어린 미소를 머금은 걸 보고는 꿀밤을 살짝 먹였다.

    “요 녀석이 언니를 놀려?”

    “아야! 놀리는 거 아닌데? 나 정말로 매일 생각나. 그래서…….”

    “그래서?”

    “좀 알아봐달라고 했어.”

    그 말에 류지혜의 표정이 그대로 굳었다.

    “그게 무슨 뜻이야? 정확하고 자세하게 말해봐.”

    갑자기 달라진 언니의 태도에 류혜연이 당황했다.

    “어, 언니…….”

    류지혜가 고개를 저었다.

    “화내는 거 아니야. 중요한 일이라서 그래. 뭘 어떻게 한 거야?”

    류혜연은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까…… 그때 그 할아버지 있잖아.”

    “할아버지?”

    “그…… 종로에서 만났던…….”

    류지혜의 눈이 커다래졌다. 류혜연이 누구를 만난 건지 알아차린 것이다.

    ‘황노인? 그분이 왜? 아니, 그보다 어떻게?’

    류지혜의 의문을 안다는 듯 류혜연이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그때 번호 알려주셨거든. 궁금한 거 있으면 연락하라고.”

    류지혜가 어이없는 눈으로 동생을 바라봤다.

    그 시선에 류혜연이 목을 움츠렸다.

    “원래는 누군지도 잘 몰라서 그냥 그런가보다 했는데…… 그분 이쪽에서는 굉장히 유명하신 분이라며. 언니가 그랬잖아. 그래서…….”

    류지혜는 어이가 없었지만 어쩌겠는가. 이미 벌어진 일을.

    “그래서 그분이 뭐라고 하셨어?”

    그 질문을 하는 류지혜의 눈에 작은 기대감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뭐라고 하셨느냐 하면…….”

    * * *

    “정말 제대로 꽁꽁 숨었구나. 외국으로 튄 건 아니겠지?”

    “아닐 겁니다. 밀입국 조직 쪽에 연락을 해 뒀는데, 그쪽으로 넘어간 흔적은 없습니다.”

    당연히 정상적인 통로로 넘어간 흔적도 없었다. 그러니 국내에 있다는 뜻인데 이렇게까지 흔적 없이 오랫동안 사라지는 건 불가능했다.

    “우리 정보력에 좀 문제가 생겼나?”

    “아닙니다. 오히려 최근 급격히 성장해서 이제 정보 쪽으로는 저희를 따라올 놈들이 없습니다.”

    황노인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 모든 정보를 하나로 모으면 딱 한 가지 결론으로 귀결된다.

    “설마…… 던전에서 죽은 건 아니겠지?”

    “아무래도…… 그 가능성이 제일 큰 거 같습니다.”

    “그럴 리가…… 절대 그렇게 쉽게 갈 놈이 아닌데…….”

    잠시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황노인은 눈을 번득이며 사내를 바라봤다.

    “칠성파 쪽은 요즘 어떻게들 지내고 있나?”

    “확실히 끈질긴 놈들이긴 합니다. 저희 쪽과 미묘한 각을 유지하면서 계속 추적 중입니다.”

    “그래? 하긴 강중태가 그리 호락호락한 놈은 절대 아니지. 계속 감시하면서 정리해. 조심하는 거 잊지 말고.”

    사내가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쓴웃음이 지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칠성파는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다. 그런 칠성파와 대립각을 세우는 것이 쉬울 리 없었다.

    6개월 동안 채현석의 정보를 정리하고 감추고 지우고 하면서 칠성파와 알게 모르게 엮여 피해를 입은 정보원의 수가 상당했다.

    그 피해를 돈으로 환산하면 계산이 안 될 정도였다.

    ‘어르신…… 아무래도 이번에는 어르신의 촉이 잘못된 거 같습니다.’

    물론 아무리 조직이 잘못된 방향을 향해 치닫는다 해도 황노인의 명령을 어길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언젠가 적당한 시점이 오면 이 일을 중단해야만 할 것이다. 그때가 오면 자신이 누구보다 먼저 나서고, 누구보다 강력하게 주장해서 일을 접을 것이다.

    ‘어르신께서도 이해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그것이 사내가 황노인을 20년 넘게 따르는 이유 중 하나였으니까.

    * * *

    “새로 키우는 놈들은 좀 어때?”

    강중태의 물음에 김상우가 긴장한 눈으로 대답했다.

    “썩 대단치 않습니다.”

    “쯧, 역시 레드독 놈들이 진국이었는데.”

    레드독이 대단한 게 아니라 레드독의 마스터인 주경철이 대단했다.

    레드독 길드는 주경철이 거의 혼자서 만들어 키우다시피 했다. 한데 그가 사라졌으니 구심점 역할을 할 사람이 없었다.

    막대한 돈을 들여 새로운 플레이어를 영입하고 있긴 하지만 썩 신통치 않아 지지부진한 상태였다.

    “시간이 많지 않아. 돈 냄새는 지독하게 나는데, 언제 터질지 알 수가 없어. 그러니 미리 준비하고 있어야 돼.”

    “명심하겠습니다, 형님.”

    “그래. 그건 그렇고…… 그놈은 어떻게 됐어? 아직도 못 찾았나?”

    “예. 면목 없습니다, 형님.”

    “흐음. 너무 오래 걸리긴 한데…… 종로 쪽은 좀 어때? 아직도 그 상태야?”

    “예. 좀 더 알아봤는데, 그놈이 종로 쪽에 이 일 관련해서 의뢰를 한 모양입니다.”

    “의뢰? 대체 얼마나 돈을 처발라서 의뢰를 넣었기에 여섯 달이나 우리를 애먹여? 그쪽도 피해가 만만치 않을 텐데, 안 그래?”

    “예. 맞습니다. 그쪽도 우리보다 피해가 크면 컸지 작지는 않습니다. 아마 손해 많이 봤을 겁니다.”

    “그런데도 끝까지 쥐고 있는 걸 보면 뭔가가 있긴 있다는 건데…….”

    강중태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쪽도 그놈 찾고 있는 거 같다고 했지?”

    “예. 드러내 놓지 않고, 은밀히 움직이고 있긴 하지만, 정황을 보면 확실합니다.”

    종로의 정보조직과 6개월이나 치열하게 정보를 놓고 싸우다보니, 이젠 칠성파의 정보력도 상당히 올라갔다.

    그러니 예전 같으면 짐작도 못할 일인데 이렇게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하는 것도 가능했다.

    “종로의 그 영감이 그래도 정보 쪽 계통에선 알아주거든? 국내 제일이라고 보면 돼. 한데 그런 놈들도 여섯 달이나 못 찾았어. 이게 뭘 뜻하는 거 같아?”

    김상우는 즉시 대답했다. 예전부터 생각하던 것이었지만 따로 명령이 없어서 속으로만 끙끙 앓고 있었다.

    “던전에서 죽으면 딱 이럴 거 같긴 합니다, 형님.”

    “아니면 여섯 달 동안 던전에서 살았거나. 그게 가능할 거 같아?”

    김상우는 잠시 생각하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게…… 듣기로 화이트홀이라면…… 아예 불가능하지는 않을 거 같습니다.”

    “화이트홀이라…… 센터가 관리하는 던전에 들어간 흔적은 없다고 했지?”

    “예, 형님.”

    “그렇다는 건…… 따로 떨어진 던전에 들어갔다는 건데, 그게 화이트홀이다 이거네? 따로 떨어진 화이트홀에 대해 들어본 적 있어?”

    “없습니다.”

    “접어.”

    “예?”

    “이제 채현석인지 뭔지 찾는 거 그만 두라고.”

    “그, 그래도 되겠습니까, 형님?”

    “대신, 드러내놓지 마.”

    김상우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듯 바라보자, 강중태가 인상을 쓰며 말했다.

    “종로 쪽에 들키지 말라고. 그쪽에는 여전히 우리가 그놈 찾고 있는 것처럼 보여야 돼.”

    “아! 무슨 말인지 알겠습니다. 그럼 즉시 시행하겠습니다, 형님.”

    강중태가 귀찮은 얼굴로 손을 휘휘 내저었다.

    김상우가 인사하고 사라지자, 귀찮은 듯하던 그의 표정이 대번에 사라지고 차갑고 섬뜩한 얼굴로 변했다.

    “날 이렇게 엿 먹였으면 대가를 치러야지. 그 영감탱이 조만간 목을 따버려야겠어.”

    * * *

    빛 한 점 들어오지 않는 어둡고 긴 복도. 만일 누군가 이 복도 한가운데 서 있었다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 정도로 어두운 복도 끝에서 미약한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 빛이 나오는 곳은 하얀 소용돌이였다.

    하얀 던전의 입구이기도 한 소용돌이에서 빛이 나온다는 건 입구가 열린다는 신호이기도 했다.

    누군가 나오거나, 혹은 들어갈 때 이렇게 빛이 난다.

    빛이 점점 더 강해졌다.

    그리고 누군가 소용돌이에서 툭 튀어나왔다.

    파바바바박!

    복도 천장에 빛 덩어리들이 쭉 생겨났다. 복도 전체가 환해졌다.

    소용돌이에서 나온 사내, 현석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봤다.

    현석의 모습은 초췌하기 그지없었다. 입고 있던 옷은 넝마나 다름없게 변했다.

    파스스스.

    옷이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그러자 현석이 머리를 긁적였다.

    “여기 나가면 강남인가? 이러고 나갈 수는 없을 거 같은데…….”

    현석의 얼굴에 난감함이 어렸다. 아마 알몸으로 강남에 나가면 제대로 유명세를 치를 수 있을 것이다.

    그건 곤란했다.

    “어디 입을 만한 옷이 없나…….”

    현석은 아공간 목록을 열심히 뒤져봤다. 하지만 딱히 쓸 만한 걸 찾을 수 없었다.

    그의 얼굴에 떠오른 난감함이 더욱 짙어졌다.

    어쨌든 6개월 만에 현석이 돌아왔다. 마계에서.

    < 현석을 찾는 사람들 > 끝

    ⓒ 김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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