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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눈 뜨고 레벨업-27화 (27/326)
  • < 던전 속의 던전 >

    화이트홀은 블랙홀과는 여러모로 많이 다르다.

    화이트홀에 대한 연구는 현석이 죽을 무렵의 미래에서도 꾸준히 이뤄지고 있었다.

    사실 현 시점에서는 화이트홀에 대한 관심 자체가 높지 않아서 연구가 지지부진한 상태이긴 했다.

    화이트홀은 블랙홀과 달리 보상이 주어지지 않는다.

    마수를 잡아 마정석을 뽑아낼 수 있고, 마수의 사체를 가져와 이용하거나 연구할 수 있는 건 블랙홀과 똑같았지만, 던전을 클리어한다는 개념이 없었다.

    그리고 블랙홀과는 달리 한 번 죽은 마수가 다시 생겨나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그리고 당연히 클리어가 없으니 아티팩트를 보상으로 얻을 수도 없었다.

    가장 큰 문제는 화이트홀에서 등장하는 마수들이 블랙홀에서 나오는 마수보다 훨씬 강하다는 사실이다.

    같은 마수라 해도 힘과 스피드가 좀 더 빨랐고, 머리도 더 영리했다. 마수 특유의 난폭함도 훨씬 더했다.

    또한 무리지어 생활하는 경우도 많아서 사냥 자체가 정말 까다로웠다.

    사냥은 까다롭고 위험한데 얻는 건 별로 없으니 당연히 화이트홀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화이트홀에 대한 현재의 인식이었다.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지.’

    현석은 눈앞에서 소용돌이치는 화이트홀을 보며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았다.

    어쩌면 이건 미친 짓인지도 모른다. 지금 눈앞에 있는 화이트홀은 다른 보통의 화이트홀과는 좀 달랐다.

    기본적으로 던전으로 이동하면 다른 세상에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 든다.

    현석은 다른 플레이어에 비해 마력을 비롯한 여러 가지 감각이 예민하기 때문에 더더욱 그 부분에 대한 느낌이 남달랐다.

    블랙홀은 화이트홀에 비해 마력조차 훨씬 정제되고 고요한 느낌을 준다.

    더 정확히 얘기하면 블랙홀보다 화이트홀이 훨씬 자연스러웠다. 그곳이 더 진짜 세상 같다는 뜻이다.

    그리고 지금 눈앞에 둔 화이트홀은 그런 다른 세상과도 또 달랐다.

    그곳은 마치 전혀 새로운 세상, 더 난폭하고 위험하며 피와 어둠으로 점철된 세상 같은 곳이었다.

    원래 레벨업을 하려면 목숨을 거는 것이 정석이었다.

    안전하게 레벨을 올릴 수 있는 것은 30까지가 한계라는 것이 정설이었다.

    물론 안전한 사냥을 통해 더 높은 레벨로 올라갈 수 있긴 하다. 어쨌든 레벨업이라는 것은 전투 시 겪는 강렬한 마력 파동에 기반하니까.

    물론 단순히 그것만으로 레벨업이 결정되는 건 아니었지만 이론적으로는 안전한 방식으로 얼마든지 레벨을 올릴 수 있었다.

    하지만 현실은 이론과는 달랐다.

    실제로는 목숨 걸로 전투를 벌인 사람의 레벨업이 훨씬 빨랐다. 또한 같은 레벨이라도 가진 바 힘 자체가 달랐다.

    레벨이 같은 사람이 같은 건 마력 총량뿐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레벨이 높으면 높을수록 그런 경향이 더 심했다.

    어쨌든 과거 현석의 레벨은 무려 178레벨이었다. 당시 열 손가락은 몰라도 위에서 서른 명 안에 드는 플레이어였으니 얼마나 많은 위기를 헤쳐 나왔겠는가.

    그래서 그런지 이번 생에는 아직까지 위기감 자체를 느껴본 일이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레벨업 속도 저하라는 심각한 문제를 가져왔다.

    사실 여기까지도 현석은 미리 예상했던 부분이었다. 그래서 좀 더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애초에 처음 과거로 회귀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계획한 것은 이 투명 던전에 들어와 아공간과 장비만 싹 빼먹고 나가는 것이었다.

    사실 그것만으로도 앞으로 충분히 빠른 성장이 가능했다. 최소한 남들보다 훨씬 앞서갈 준비는 끝난 것이다.

    최초의 플레이어가 나타난 지 이제 고작 3년 남짓이다. 3년이면 긴 시간 같지만, 사실 꼭 그렇지도 않았다.

    처음이야 레벨업이 쉽지만 레벨이 50만 넘어가도 몇 달 동안 죽을 똥을 싸야 하나 올릴 수 있을까 말까할 정도로 어려워진다.

    물론 거기에도 복불복은 적용된다. 남들보다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훨씬 간단하고 빠르게 레벨을 올릴 수 있다.

    그리고 남들보다 뛰어난 장비를 가진 사람도 마찬가지다.

    현석은 이곳의 장비를 이용해 최초의 플레이어를 아득히 뛰어넘을 자신이 있었다.

    한데 회귀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생각처럼 일이 쉽게 풀리지만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깨달았다.

    “위기가 꼭 필요하긴 한데…… 굳이 이래야 하나?”

    현석은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생각하고 망설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 들어가려는 화이트홀은 정말 위험한 곳이었으니까.

    예전에 몸담았던 길드가 무너진 계기가 바로 이 화이트홀이었다면 말 다했지 않은가.

    준비가 전혀 안 된 길드의 주요인물들이 무더기로 들어갔다가 몰살당하는 바람에 그렇게 되었다.

    물론 그 이후 탐사팀을 결성해 생존자 구출작업과 내부 조사에 나섰다.

    그리고 이곳은 다른 화이트홀과 달리 수익성이 제법 높고, 던전의 비밀을 파헤칠 기회라고 판단되어 길드의 역량을 집중했다.

    현석도 그때 합류해 이곳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 결과는 길드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그 뒤 이 화이트홀에는 지옥, 혹은 마계로 가는 입구라는 이름이 붙었다.

    “하지만 난 준비가 제대로 되어 있지.”

    현석은 아공간에 넣어놓은 커다란 상자를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거기에는 지금까지 열심히 만들어 모은 파워업 키트가 가득 담겨 있었다.

    만일 이곳을 공략할 때, 파워업 키트가 있었다면 역사가 좀 달라졌을 것이다.

    “후욱!”

    숨을 훅 내뱉은 현석은 문득 아직까지 화이트홀의 이름을 확인하지 않았다는 것이 떠올랐다.

    눈에 마력을 담아 이름을 확인한 현석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마계19지역]

    “마계? 진짜 마계였어? 게다가 19지역? 그럼 다른 지역도 있다는 뜻인가?”

    점점 뭐가 뭔지 알 수 없어지지만, 어쨌든 그런 건 나중에 생각해도 된다.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온몸에 마력을 한 차례 휘돌린 현석은 이를 악물로 화이트홀로 뛰어들었다.

    화아악!

    화이트홀에서 잠깐 눈부신 빛이 쏟아져 나왔다.

    빛이 사라진 자리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홀로 고고히 회전하는 새하얀 소용돌이 외에는.

    * * *

    칠성파의 보스인 강중태는 심각한 표정으로 김상우의 보고를 듣고 있었다. 이내 보고가 끝나자 김상우가 죽을 죄를 지었다는 듯 고개를 푹 숙였다.

    강중태는 그런 김상우에게 부드럽게 말했다.

    “됐다. 보기 안 좋다. 고개 들어라.”

    김상우는 그 말에 눈이 번쩍 뜨였다. 그의 머릿속에 이제 살았다는 생각이 가득 들어찼다.

    고개를 든 김상우의 눈에 평소와 전혀 다름없는 강중태의 얼굴이 들어왔다. 다시 예전의 강중태로 돌아온 것이다.

    “형님…….”

    “네가 처리하기 버거운 일이었다. 그러니 자책할 거 없다.”

    강중태는 그렇게 말하며 서류 몇 장을 건넸다. 김상우는 조심스럽게 그걸 받아 확인했다.

    서류를 확인하는 김상우의 눈이 번득였다.

    “종로 영감이 개입한 겁니까?”

    “그래. 그러니 당연히 알아낼 수가 없지.”

    “하지만…… 이 서류를 보면 이 영감이 우리 쪽에 직접적으로 개입한 흔적은 없습니다.”

    강중태가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그 점이야. 우리 쪽에 개입한 건 없지만 묘하게 겹치는 구석이 있어서 자연스럽게 은폐가 된 거지.”

    김상우가 눈을 빛냈다.

    “그 부분을 파고들면 되겠군요. 종로 영감이 누굴 위해 이것들을 정리했는지.”

    “그렇지.”

    김상우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하는 강중태를 두려운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가 보기에 강중태의 가장 무서운 점은 저 준비성이다. 한 가지 패만 갖고 있는 게 아니라 몇 개의 패를 미리 준비했다가 적절하게 써먹는다.

    아마 이번에도 김상우만 믿고 있었다면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헛힘만 들였을 것이다.

    ‘아마…… 이거 말고도 최소 두 가지 대책은 더 세워두셨겠지.’

    강중태의 명령이 김상우의 상념을 깨트렸다.

    “이 정도는 찾아낼 수 있겠지?”

    “맡겨 주십시오. 몇 놈이든 샅샅이 캐내겠습니다.”

    김상우가 정중히 허리를 숙이고 밖으로 나가자, 강중태가 섬뜩한 눈으로 중얼거렸다.

    “이번 일도 상우 혼자서는 힘들겠지.”

    무려 종로 암시장의 주인이 개입된 일이다. 다른 암시장과 달리 종로 암시장은 상당한 힘을 갖고 있다. 배경도 남다르고 말이다.

    칠성파쯤 되는 거대 조직을 이끌다보면 좋든 싫든 종로 영감과는 몇 번 얽히게 되어 있었다.

    그 때마다 그 영감의 힘이 얼마나 끝내주는지 뼈저리게 느낄 수밖에 없었다.

    강중태의 입가가 슬쩍 올라갔다.

    종로 영감을 만날 때마다 마음을 다잡고 이를 악물게 된다. 그는 강중태가 가진 향상심의 원천이었다.

    그래서 이렇게 발전했다. 그리고 이런 힘도 준비를 했고 말이다.

    “가서 힘쓸 일 생기면 도와.”

    강중태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천장에서 그림자 세 개가 뚝뚝 떨어졌다.

    떨어진 것은 검은 옷을 입은 세 명의 사내였다.

    살이 없어 딱딱하게 각진 얼굴에 시커멓게 탄 피부를 가진 사내들이었는데, 그들은 그저 고개만 한 번 꾸벅 숙이고는 순식간에 사라져버렸다.

    “내가 키운 놈들이지만…… 볼 때마다 소름 끼친단 말이야.”

    강중태의 입가에 섬뜩한 미소가 맺혔다.

    * * *

    칠성파의 움직임은 종로 암시장의 주인, 황노인의 귀에도 들어갔다.

    황노인은 보고를 마친 사내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강중태 이놈은 만만치 않을 텐데 고생 좀 했겠어.”

    “아닙니다. 어르신께서 미리 준비하라 당부하신 덕에 별 일 없이 끝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이 상황이라면 칠성파가 어디까지 알아낼 수 있을 것 같나?”

    “채현석이라는 이름만 얻게 될 것 같습니다.”

    “이름이라…….”

    이름을 알아낸다는 건 상당히 많은 정보를 추가로 뽑아낼 수 있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아마 이름을 알아낸 다음 시간과 돈과 노력을 더 쏟아 넣다 보면 점점 새로운 정보를 하나씩 뽑아낼 수 있을 것이다.

    황노인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는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꾹 누르며 다른 손으로는 의자 팔걸이를 톡톡 두드렸다.

    모든 촉과 감을 총동원해 깊은 생각에 빠질 때의 버릇이었다.

    사내도 그걸 알기에 숨조차 조심해서 쉬었다.

    이내 황노인이 자세를 바로 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이쯤에서 발을 빼야 하는데…… 이번에 촉이 너무 제대로 와서 문제야.”

    사내는 거기까지만 듣고도 황노인이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 알 수 있었다.

    만일 황노인이 여기서 발을 빼기로 했다면 저런 말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더 고민하던 황노인이 눈을 빛내며 말을 이었다.

    “좀 더 제대로 도와주게나.”

    사내의 눈이 커다래졌다.

    “제대로 말입니까?”

    황노인이 잠시 뜸을 들이다가 입을 열었다.

    “이름 외에 다른 것들을 최대한 감추는 게 좋을 것 같아. 어차피 한 번 세탁했으니 크게 어려운 건 없지?”

    “어렵지는 않습니다만…….”

    “알아. 위험한 일이지. 하지만 이번엔 정말로 투자할 가치가 있을 거야.”

    사내는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황노인을 바라봤다.

    어느새 황노인이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눈빛만은 그 어느 때보다 밝게 반짝였다.

    “내 감이 틀렸다면 여기까지인 거지.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겠다, 은퇴하고 유유자적 살아야지.”

    사내는 황노인의 말에 속으로 웃었다. 말은 저렇게 해도 절대 그럴 생각이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강중태가 채현석의 이름 이상 알아낼 수 있는 건 없을 겁니다.”

    황노인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 던전 속의 던전 > 끝

    ⓒ 김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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