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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눈 뜨고 레벨업-18화 (18/326)
  • < 류혜연 2 >

    현석과 류지혜는 암시장에서 나와 빠르게 이동했다. 암시장에 따라 들어갔던 감시자는 따돌렸는데, 또다른 감시자가 암시장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를 따돌리는 건 사실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번에도 황노인이 도와준 것이다.

    골목 몇 개를 돌아 인사동 쪽으로 이동해 구석진 곳에 있는 전통찻집에 들어간 현석은 주위를 슥 살펴보고는 적당한 자리에 앉았다.

    류지혜는 그 앞에 앉으며 놀란 표정을 감추지 않고 나직이 말했다.

    “밖에서까지 도와준 거예요? 그 할아버지 정말 능력자네요.”

    “그러니 그 정도 값을 지불한 거죠. 아마 며칠 지나면 감시자가 붙지도 않을 겁니다.”

    정보를 교란하고 흐리는 건 황노인이 가장 잘 하는 일이었다. 또한 다른 일을 터트리고 허위 정보를 이용해 적들을 정신없이 움직이게 만드는 것도 황노인의 특기 중 하나였다.

    그 몇 가지를 적절히 이용해 현석에게 향한 시선을 돌리고 세탁 작업을 시작할 것이다.

    “자, 이제 그 얘기는 그만하고 우리 볼일을 볼까요?”

    현석의 말에 류지혜가 긴장한 표정으로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다른 사람도 아닌 동생의 일이다. 긴장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정말…… 던전병에 대해 잘 알고 있는 거 맞죠?”

    현석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저 병에 대해 제대로 된 지식부터 넣어주는 게 순서일 듯했다.

    “정확히는 던전병이 아니라 마력중독이에요. 물론 내가 직접 확인해야 더 정확히 진단할 수 있겠지만.”

    “마, 마력 중독이요? 그런 것도 있어요?”

    류지혜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마력 중독이라니. 마력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마력의 양이 곧 플레이어가 가진 힘의 척도가 되니 말이다.

    한데 마력 중독이라니. 마치 마력을 너무 많이 받아들여서 생긴 병 같지 않은가. 과연 그게 말이 되는지 고민스러웠다.

    “마력이 꼭 좋은 거라는 고정관념은 버려요. 마력이 좋은 이유는 우리가 플레이어이기 때문이에요.”

    현석의 말에 류지혜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대체 마력이라는 게 뭐지? 그냥 기(氣) 같은 거 아니었나?’

    지금까지 대부분의 플레이어는 마력을 무협에 등장하는 내공이나 기의 개념으로 받아들였다.

    사실 크게 다를 것도 없었다. 적어도 플레이어들이 써먹기에는 그 개념이 딱 맞아 떨어졌으니까.

    게임에서 말하는 마나 같은 것도 마력의 일종으로 받아들이면 아주 편하게 모든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한데 지금 현석의 말을 들으니 자신이 지금까지 쌓아왔던 상식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만일 마력이 기 같은 것이 아니라면 그걸 플레이어가 아닌 일반인이 마구 받아들여도 될까?

    류지혜는 등줄기가 쫘자작 얼어붙는 것 같았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그녀는 불안한 눈으로 현석을 바라봤다.

    ‘만일…… 만일 그렇다면 내가 지금까지 무슨 짓을 한 거지?’

    그녀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그때 현석이 테이블 위에 올린 그녀의 손에 자신의 손을 가볍게 포갰다. 그리고 힘주어 꽉 쥐었다.

    “꺅!”

    류지혜는 깜짝 놀라 짧은 비명을 지르며 황당한 눈으로 현석을 바라봤다.

    그에게 잡힌 손이 어찌나 아팠는지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였다. 이거 뭐지? 위로해 주려고 잡은 거 아니었나?

    ‘정말…… 상식이고 상상이고 다 박살을 내 버리는구나.’

    그녀가 너무 아프고 황당해 멍하니 바라보자, 현석이 씨익 웃으며 말했다.

    “정신 차려요. 당신 잘못 아니니까.”

    “나도 알거든요? 그리고 정신 놓은 적도 없고요.”

    어느새 류지혜의 눈동자는 안정을 찾았다. 소름도 사라졌고, 몸도 떨리지 않았다.

    마음도 아주 차분히 가라앉았다.

    그녀는 현석에게 살짝 눈을 흘겼다. 뭐 이런 놈이 다 있냐는 듯한 표정을 조금 가미해서 말이다.

    “자, 이제 본격적인 얘기로 들어가 봅시다. 일단 성수를 먹이면 안 된다는 건 알겠죠?”

    류지혜는 고개를 끄덕였다.

    “만일 정말로 내 동생이 마력중독이라면요.”

    “그게 제일 중요하죠. 그러니 갑시다.”

    현석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류지혜가 멍하니 앉은 채, 그런 현석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어딜요?”

    “어디겠어요?”

    그녀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제 동생한테요?”

    아직 시킨 차도 안 나왔는데 가긴 어딜 간단 말인가. 아니, 그보다 자신의 동생을 남에게 보여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류지혜는 자기보다 동생을 더 아낀다. 그래서 동생이 플레이어들의 눈에 띄는 게 싫었다.

    류지혜가 지금까지 겪은 플레이어들은 대부분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었다.

    또한 욕망의 덩어리였다.

    그딴 놈들이 동생을 보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하기조차 싫었다.

    “안 돼요.”

    현석은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런 현석을 보는 류지혜의 눈이 살짝 흔들렸다. 진짜 종잡을 수 없는 사람이었다.

    “왜 안 되는지도 안 물어보시네요?”

    현석이 피식 웃었다.

    “내가 아쉬울 게 없으니까. 나 생각보다 냉정하고 계산적인 사람이에요. 솔직히 별로 궁금하지도 않고. 너무 뻔한 얘기잖아요.”

    류지헤의 표정이 더 황당하게 변했다.

    ‘무슨 말을 저따위로 해?’

    그래도 지금까지 함께한 정이 있지 꼭 저렇게 정나미 떨어지게 말을 해야 할까?

    류지혜는 속으로 뭔가 부글부글 끓어올랐지만 일단 꾹 눌러 참았다.

    마침 주문한 차가 나왔기에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 도움이 되었다.

    잠시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감돌았다. 현석은 정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차만 마셨다. 한 모금, 한 모금 차의 맛과 향을 음미하면서.

    그냥 아무데나 들어온 찻집이었는데, 제법 괜찮았다.

    잠시 고민하던 류지혜는 굳이 현석에게 동생을 보여주지 못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참에 이사 한 번 가지 뭐.’

    그렇게 가볍게 여기니 또 정말 별 거 아닌 일에 괜히 예민하게 굴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안해요.”

    류지혜의 말에 현석이 그녀를 쳐다봤다.

    “뭐가요?”

    “호의를 바로 받아들이지 못해서요.”

    그녀의 말에 현석이 빙긋 웃으며 남은 차를 입에 확 털어 넣었다. 조금 뜨거웠지만 참을 만했다.

    그런 현석을 류지혜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봤다.

    현석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류지혜에게 턱짓을 했다.

    “뭐해요? 갑시다.”

    “예?”

    류지혜는 현석의 얼굴과 자기 앞에 놓인 차를 번갈아 바라봤다. 아직 다 안 마셨다는 뜻이었다.

    현석은 류지혜 앞에 놓인 찻잔을 들어 입에 차를 단숨에 털어 넣었다.

    “크으. 이제 됐죠? 갑시다.”

    류지혜가 멍하니 그런 현석을 바라봤다.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어?’

    종잡을 수 없고 엉뚱하다. 하지만 그런 점이 또 재미있다. 어느새 류지혜의 입가에 미소가 슬며시 드리워졌다.

    * * *

    류지혜의 동생인 류혜연은 집에 있었다. 병원에 입원하는 것보다 차라리 집에 있는 편이 훨씬 나았다.

    현재 류혜연에게 병원에서 해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양방이건 한방이건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 해봤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그녀에게 유일하게 효과가 있었던 건 오직 엘릭서뿐이었다.

    류혜연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 힘겹게 눈을 뜨고 방에 들어오는 언니를 향해 온 힘을 다해 미소 지어주려 애쓰고 있었다.

    그러다가 언니인 류지혜와 함께 들어오는 남자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지금까지 한 번도 없던 일이었기 때문이다.

    불안감과 기대감이 류혜연의 머릿속을 마구 휘저었다.

    ‘그럼 저 사람이 형부가 되는 건가? 이렇게 아픈 날 보고 싫어하면 어쩌지?’

    “왜 보여주기 싫어하는지 알겠군.”

    현석은 방에 들어와 류혜연을 보자마자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게 말했다.

    일단 류혜연을 한 번 보고나니, 류지혜의 걱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류지혜도 굉장히 아름다웠지만, 류혜연은 류지혜를 반딧불로 만들어 버리는 달빛 같았다.

    게다가 몸이 약해 살짝 창백한 얼굴이 오히려 더 그녀를 매력적으로 포장해 주었다.

    정말 굉장한 미인이었다.

    류지혜는 사실 조마조마한 심정이었다. 그녀는 여기까지 오는 내내 자신의 결정을 후회했다가 말았다가를 수없이 반복했다.

    그리고 막상 함께 방에 들어온 다음에는 현석의 기색을 열심히 살폈다.

    ‘정말…… 어떻게 이렇게 한결같을 수 있지?’

    류혜연을 보고 이렇게 동요가 없는 남자는 처음이었다.

    ‘혹시 취향이 남다른가?’

    하지만 류혜연의 미모는 아무리 취향이 남다른 사람이라고 충분히 감탄하고 동요할 정도로 대단했다.

    딱 지금 상황만 놓고 보자면 현석의 평정심이 정말 대단하다는 결론만 나온다.

    그동안 걱정한 자신만 바보가 되는 순간이었다. 물론 그래서 다행이기도 했다.

    “좀 볼까?”

    현석은 류혜연에게 한 발 다가갔다. 그러자 류혜연이 살짝 겁먹은 눈으로 이불을 끌어 눈 아래까지를 가렸다.

    “저보고 나가 있으라느니 그딴 말은 하지 마세요.”

    류지혜의 말에 현석이 피식 웃었다. 대꾸할 가치도 없지만, 그녀가 저러는 게 이해는 갔다. 아마 웬만한 남자라면 그런 생각을 떠올렸으리라.

    “자, 그 이불 내리고 몸을 보여줘. 벗으라는 말 아니니까 오해는 말고.”

    몸을 보여 달라는 말에 류지혜가 발끈하려다가 뒤이어진 현석의 말에 입을 다물고 얼굴을 붉혔다.

    왠지 자신만 계속 나쁜 여자가 되는 것 같아서 기분이 묘했다. 현석은 정말로 류혜연을 보면서도 아무 욕망이 일어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마력중독의 부작용일 수도 있어.”

    “예?”

    류지혜와 류혜연이 동시에 눈을 동그랗게 뜨고 현석을 바라봤다.

    “널 보고 있으면 남자들이 맥을 못 추지? 그거 꼭 예뻐서 그런 건 아니라고.”

    류혜연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하지만 자신에 대한 얘기를 하니 확실하게 알고 싶었다.

    “그럼요?”

    “일단 이불부터 내려 봐. 이거 특수한 소재로 만든 이불인 모양이네?”

    류지혜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대체 그걸 어떻게 알았단 말인가.

    “맞아요. 모양은 평범하지만 이거 무지개거미한테 뽑은 실로 짠 이불이에요.”

    현석은 류지혜를 쳐다봤다. 그러자 류지혜가 아차하며 얼른 자신이 나서서 이불을 걷어냈다.

    “어, 언니!”

    던전에서 나온 물품에는 마력이 담겨 있다. 당연히 마력중독에는 악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그럼 나도 최대한 떨어져 있어야 하는 건가?’

    류지혜는 복잡한 눈으로 류혜연을 바라봤다. 만일 플레이어인 자신이 류혜연에게 악영향을 미치는 거라면 접촉을 최대한 줄일 생각이었다.

    “이제 됐나요?”

    그녀의 물음에 현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불을 걷고 나자, 마력 흐름을 훨씬 정확히 파악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 저 정도면 덮고 있어도 별 문제는 없었다.

    하지만 만에 하나라는 게 있으니 사소한 것 하나도 허투루 하고 싶지 않았다. 이건 사람의 목숨이 걸린 문제였으니까.

    사실 현석은 마력중독에 대해 제법 잘 알고 있었다. 류지혜의 설명을 들었을 때, 류혜연이 마력중독이라는 걸 확신했다.

    그리고 직접 만나지 않아도 치료할 수 있었다. 중독 증세가 심각하지 않으면 간단한 약으로도 충분히 치료가 가능했으니까.

    그런데도 굳이 이렇게 찾아온 것은 한 가지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어서였다.

    이제 그것을 확인할 차례였다. 현석은 이불이 사라져 가벼운 옷차림으로 침대에 누워 몸을 파르르 떨고 있는 류혜연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그리고 자신의 눈에 마력을 살짝 흘렸다.

    ‘보인다!’

    그녀의 머리 위로 이름이 떠올랐다.

    [류혜연]

    < 류혜연 2 > 끝

    ⓒ 김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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