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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눈 뜨고 레벨업-17화 (17/326)
  • < 류혜연 1 >

    “대체 뭔 개수작이야?”

    “아니, 자그마치 아티팩트를 선물로 준다는데 그걸 개수작이라니요. 그저 고맙다는 말 한 마디면 됩니다.”

    노인이 피식 웃었다.

    “줘도 못 쓸 쓰레기 하나 던져주고 생색은.”

    “쓰레기라뇨. 레벨 낮은 탱커들 쓰기 딱 좋은 물건이라고 생각하는데. 아닙니까?”

    노인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감돌았다.

    “보는 눈은 좀 있는 모양이군. 한데 그런 물건을 아무 대가도 바라지 않고 내게 넘기겠다? 그런 찜찜한 짓을 하는데 내가 넙죽 받아먹을 줄 알았어?”

    현석은 그 말에 빙긋 웃었다. 역시 황노인다웠다.

    “정 마음에 걸리시면 가벼운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죠.”

    “가벼운 부탁?”

    황노인은 피식 웃었다. 그리고 같잖다는 눈으로 현석을 위아래로 훑었다.

    “어디서 되도 않는 수작이야? 퍽도 가볍기나 하겠다.”

    “아직 말씀도 안 드렸는데요?”

    “척 보니 내가 누군지 다 알고 온 거 같은데 개수작 그만 하고 용건이나 말해. 가격에 맞으면 해주고 아니면 마는 거니까.”

    “세탁이 좀 필요합니다.”

    “세탁이 필요하면 세탁기를 사.”

    황노인의 말장난에 현석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 그의 진짜 답을 기다렸다.

    잠시 후, 황노인의 표정이 달라졌다. 그는 번득이는 눈으로 현석을 다시 한 번 유심히 살폈다.

    “이놈 봐라? 아주 제대로 휘젓고 다녔네? 그러니까 펑펑 싸질러 놓은 똥을 좀 치워 달라 이거렷다?”

    “사정이 좀 급해서 약간 부주의했죠.”

    “약간? 그게 약간이냐? 게다가 가볍지도 않아.”

    황노인의 시선이 잠시 방패에 닿았다가 떨어졌다. 계산은 냉정해야 한다. 한데 왠지 오늘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재밌는 놈일세.”

    그 말과 함께 황노인이 방패를 집어서 탁자 아래에 있는 상자에 툭 던져 넣었다.

    “가 봐.”

    현석의 눈이 살짝 커졌다. 사실 마정석 하나쯤은 더 지불할 용의가 있었다. 황노인이 분명히 그런 요구를 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한데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갔다. 이건 황노인의 스타일이 아니었다.

    황노인은 더없이 냉정하게 계산한다. 그리고 그것이 오히려 그와 거래하는 사람들에게 믿음을 준다.

    그것이 황노인의 방식이었다. 현석은 그가 손해 보는 장사를 하는 걸 지금 처음 봤다.

    “정말 그걸로 충분합니까?”

    하도 예상외라서 그렇게까지 물었다. 원래는 아무리 이런 식이라도 그냥 돌아서야 한다. 그런데 그러지 못했다.

    만일 이게 황노인의 실수였다 하더라도 돌아서면 그만이다. 어쨌든 자신의 실수를 남에게 전가시킬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이게 실수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황노인은 고작 이런 실수를 할 정도로 어설픈 사람이 아니었다.

    “왜? 마정석이라도 하나 껴주게? 작은 놈으로?”

    그 말을 했다는 건 황노인이 방금 현석에 대해 모든 걸 파악했다는 뜻이다.

    아마 현석이 암시장에 들어와 어떤 경로를 통해 마정석을 팔았고, 또 어떤 방식으로 거래를 했으며 누구의 추적을 받는지도 모두 알아냈을 것이다.

    종로 암시장의 대단한 점은 바로 이것이었다. 이곳의 모든 정보는 황노인에게로 통한다.

    어쨌든 황노인이 방금 현석이 제시한 일의 대가로 원래 책정하려던 금액은 방패와 작은 마정석 하나였다는 것을 알아냈다.

    현석이 책정한 금액과 같았다.

    그렇다는 건 현석이 생각한 것처럼 일부러 가격을 깎아주었다는 뜻이다. 절대 그런 일 없던 황노인이 말이다.

    “사람을 뭘 그리 빤히 보고 있어? 볼일 끝났으면 가지 않고!”

    황노인은 손을 휘휘 내저었다.

    현석은 그 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고개를 꾸벅 숙이고 돌아섰다.

    ‘황노인한테 저런 면도 있었네.’

    현석의 입가가 슬며시 올라갔다. 원래 괜찮은 사람이란 건 알고 있었지만, 어쩌면 그보다 더 괜찮은 사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황노인의 부스에서 멀어지자, 그때까지 묵묵히 따라오던 류지혜가 참았던 것을 터트리듯 물었다.

    “대체 저 할아버지 정체가 뭐죠? 그리고 왜 방패를 준 거예요? 세탁은 또 뭐고요? 설마 과거에 범죄자였거나 그런 건 아니죠?”

    현석은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물론 말한다고 해서 걸음을 늦추거나 하진 않았다.

    아마 현석을 쫓아온 감시자는 이제 다시 현석을 찾기 어려울 것이다. 방해자까지 등장할 테니까. 그것은 황노인에게 아티팩트를 넘긴 대가 중 하나였다.

    “숨넘어가겠네. 하나씩 물어봐요. 하나씩. 우선 첫 번째. 가장 중요한 건데, 저 범죄자 아니에요.”

    류지혜가 황당한 눈으로 현석을 바라봤다. 누가 그걸 몰라서 물었나, 그냥 덧붙인 말이지. 현석에 대한 뒷조사는 이미 임무에 들어가기 전에 철저히 했다.

    그래서 묻는 거였다. 대체 뭐가 어떻게 되어 가는지는 알아야 옆에 붙어있기라도 할 것 아닌가.

    “자, 다음 뭐가 궁금하다고 했죠?”

    “저 할아버지 정체요!”

    현석이 빙긋 웃으며 대답했다.

    “여기 종로 암시장의 주인이에요.”

    “예? 종로 암시장에 주인이 따로 있었어요?”

    “그럼 이런 거대한 공간을 지하에 만들었는데, 그걸 공짜로 이용하게 두겠어요?”

    류지혜는 그 말에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면 그렇다. 종로 암시장은 사실 다른 암시장과는 여러모로 좀 달랐다.

    일단 위치부터가 그랬다.

    종로 한복판 지하에 이런 거대한 규모의 시장이 있을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이걸 만드는 데에만도 어마어마한 시간과 돈이 들어갔을 것이다.

    “그럼 이 암시장이 모두 저 할아버지 소유라는 거예요?”

    “그럴 리가요. 몇 가지 조건을 걸고 부스를 하나씩 받아서 장사 하는 거죠.”

    “어쩐지…….”

    류지혜는 이해했다는 듯 또 한 번 고개를 끄덕였다.

    종로 암시장은 다른 암시장과는 좀 달랐다. 생각보다 사기꾼이 적은 편이고, 또 강도도 많지 않다.

    다른 암시장에 가서 제대로 거래를 트고 판매나 구매를 하려면, 사기꾼에 강도에 별의 별 놈들을 다 겪어야 한다.

    한데 여긴 분위기가 달랐다. 그래서 다른 암시장에 비해 성장세가 급격했다.

    아마 이 빈 부스들도 조만간 꽉꽉 채워질 것이다. 손님이 많으면 장사꾼도 많은 게 만고불변의 이치니까.

    여기 종로 암시장은 주인이 따로 있어서 직접 관리를 하는 것이다. 그러니 다른 곳에 비해 사고가 날 확률이 줄어들고 안정적으로 운영이 가능한 것이고 말이다.

    “그럼 방패는 왜 주셨어요?”

    류지혜는 궁금한 얼굴로 물었다. 사실 무언가의 대가로 주었다는 건 알겠다. 그리고 그 무언가가 세탁이라는 것도 알겠고 말이다.

    그녀가 알고 싶은 건 좀 더 깊은 이야기였다. 그걸 알아야 현석에 대해 좀 더 잘 알 수 있게 될 테니까 말이다.

    현석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저 할아버지의 또 다른 직업 때문이죠. 정보상이에요.”

    “예? 저 할아버지가 정보상이라고요?”

    이곳에 있는 정보상이라면 보통 정보상과는 다르다. 플레이어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정보상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아티팩트 장사를 할 수 있는 거구나.’

    아티팩트를 사고 팔려면 세밀한 정보가 필수였다. 아티팩트 장사는 아차하는 순간 사기 당하기 딱 좋다.

    그 아티팩트에 대해 빠삭하게 파악하고 있어야 제대로 된 가격에 거래할 수 있다.

    “원래 이쪽 정보상들이 생각보다 힘이 좀 있어요. 원래부터 힘 좀 있는 사람들이 정보상을 하거든요. 사실 저분처럼 본인이 직접 나서는 경우도 많지 않아요.”

    류지혜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현석의 얘기를 경청했다. 이런 얘기는 쉽게 들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녀는 새삼 감탄스러운 눈으로 현석의 옆모습을 바라봤다. 정말 대단한 사람이었다.

    ‘아마…… 원래 플레이어가 되기 전부터 뭔가 대단한 직업이나 배경을 갖고 있는 사람이었을 거야.’

    그것이 그녀가 현석에 대해 판단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현석은 거기까지만 얘기해주고 더 이상 얘기하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현석의 더 깊은 부분에 대해서는 알아내지 못했다.

    ‘조금만 더 얘기해주면 어떻게 되나? 쳇.’

    류지혜는 살짝 토라진 표정으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하지만 이어진 현석의 말에 다시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가야 했다.

    “이제 볼일 진짜 다 끝났으니까 어디 가서 동생 얘기를 마무리하죠.”

    류지혜가 긴장감과 기대감이 뒤섞인 복잡한 표정으로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황노인은 느긋하게 앉아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러자 그의 뒤쪽에 있던 검은색 커튼에서 사내 한 명이 불쑥 튀어나와 그 옆에 공손히 섰다.

    “좀 알아봤어?”

    “예. 생각보다 어렵지는 않을 거 같습니다. 다만 걸리는 부분이 하나 있습니다.”

    황노인이 피식 웃으며 물었다.

    “최창수랑 레드독?”

    사내가 놀란 표정으로 황노인을 바라봤다.

    “그걸 어찌 아셨습니까?”

    황노인은 그에게 손가락 사이에 끼워진 쪽지 한 장을 내밀었다.

    “읽어 봐.”

    사내가 쪽지를 받아 펼쳤다. 그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최창수와 레드독은 건드릴 필요가 없다?”

    “방패 탁자에 놓을 때 같이 올려둔 모양이더라고. 말로 알려주기 싫었던 모양이지.”

    황노인이 현석과 함께 온 류지혜를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사내는 잠시 굳은 표정으로 쪽지를 몇 번이고 읽다가 공손히 말했다.

    “이걸 빼면 나머지 일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약간의 기름칠만으로 충분할 것 같습니다.”

    “정말 쉬운 일이지. 저놈이 싸질러 놓은 일들 보면서 뭐 느낀 거 없어?”

    황노인의 물음에 사내의 표정이 또 한 번 굳었다.

    “아무래도…… 일을 벌이면서 나름대로 계산을 한 것 같습니다. 아무생각 없이 벌인 일 같은데 막상 파고들어 보면 최대한 처리하기 쉬운 방향으로 일을 마무리 했습니다.”

    “그렇지? 그 얘기는…….”

    황노인은 다시 받아든 쪽지를 손가락 사이에 끼워 팔랑팔랑 흔들었다.

    “이놈들한테 아직 남은 볼일이 있다는 뜻이지.”

    사내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충분한 가능성이 있다는 건 그도 인정했다.

    “아주 은밀하고 조심스럽게 이쪽도 알아봐.”

    “관계만 빼냅니까?”

    황노인이 고개를 저었다.

    “그냥 지켜보기만 해. 그러다가 혹시 저놈이 놓치는 게 있으면 조용히 처리해 줘.”

    사내의 눈에 놀람이 어렸다. 그의 주인인 황노인이 이렇게까지 관심을 둔 사람도 처음이었거니와, 이렇게까지 호의를 보인 사람도 처음이었다.

    아니, 황노인이 누군가를 몰래 도와준다는 일 자체가 놀라운 일이었다.

    “왜? 안 하던 짓을 하니까 노망이라도 난 것 같아?”

    “아, 아닙니다.”

    “아니긴.”

    황노인은 피식 웃었다. 하긴 자신이 생각해도 이번 일은 좀 심하긴 했다.

    “나랑 같이 일한 지 얼마나 됐지? 한 20년 됐나?”

    “정확히는 23년입니다.”

    사내의 대답에 황노인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까탈스러운 늙은이 아래에서 오래도 버텼네. 그 정도면 나랑 대화를 나눌 만하지.”

    황노인은 그렇게 말한 다음 사내를 보며 물었다.

    “내가 이렇게 돈을 많이 벌고 성공한 이유가 무엇일 것 같나?”

    “그야…… 어르신께서 가지신 상재가 남다르기 때문 아니겠습니까?”

    “상재. 그래, 그거 중요하지. 장사에도 나름 재능이라는 게 필요하거든.”

    황노인의 눈에서 날카로운 빛이 번득였다.

    “한데 그건 그저 기본일 뿐이야. 그조차 없으면 애초에 장사를 시작하면 안 되지. 그럼 또 뭐가 있을 것 같나?”

    사내는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자 황노인이 빙긋 웃으며 자신의 머리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사내는 황노인이 머리라고 말할 줄 알았다. 한데 그게 아니었다.

    “감이야 감.”

    “예?”

    “내가 아주 촉이 죽여주거든. 중요한 순간에 기다렸다는 듯이 발동한단 말이지.”

    “하면…….”

    황노인은 고개를 돌려 현석이 사라진 방향을 바라봤다.

    “이번에 아주 강렬한 놈이 하나 오더라고. 이놈은 무조건 잡아라. 돈이 아닌 마음으로. 그렇게 말이야. 그래서 미친 척 하고 투자 좀 해봤지.”

    사내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황노인을 바라봤다.

    황노인의 얼굴에는 지금까지 그가 한 번도 본 적 없을 정도로 만족스럽고 행복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 류혜연 1 > 끝

    ⓒ 김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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