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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눈 뜨고 레벨업-12화 (12/326)
  • < 길드 1 >

    추경훈은 전화를 끊으며 굳은 표정을 지었다. 전화는 담담하게 받았지만 통화 내용은 담담하게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박근한이…… 실패했다고? 그것도 죽어서?”

    박근한은 무려 43레벨의 실력자였다. 한데 목표인 놈들은 고작 27레벨이었다.

    27레벨 열 명이 달려들어도 43레벨 하나를 당해내지 못한다.

    하물며 박근한은 장비도 훌륭하고, 43레벨 중에서도 비교적 강한 편이었다.

    그런 박근한이 던전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지 못했다.

    던전에 들어가는 모습은 CCTV에 찍혔는데, 나오는 모습은 없었으니 안에서 죽었다고 봐야 했다.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진 거지?”

    생각할만한 건 딱 하나였다. 던전에 있던 보스가 엄청나게 강했고, 공교롭게도 박근한이 보스와 맞붙게 되었을 것이다.

    “그래, 그러면 말이야 되지. 어마어마하게 낮은 확률이긴 하지만.”

    박근한이 들어간 던전은 브론즈 1등급이다. 그 수준의 던전에서 나올 보스야 뻔했다.

    만일 그 보스가 엄청나게 강하려면, 그것도 43레벨의 박근한을 죽일 수 있을 정도로 강하려면 변종이라야 한다.

    일반 마수의 경우 심심찮게 변종이 발견된다. 하지만 보스의 경우는 극히 드물다.

    어쨌든 박근한이 실패하는 바람에 일이 고약하게 꼬였다. 방금 추경훈이 받은 전화는 류지혜로부터 온 것이었다.

    류지혜의 강력한 항의가 떠오르자 골치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쯧,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믿고 기다릴 것을.”

    길드들이 움직일 낌새가 보여서 좀 서두른다는 것이 일을 이렇게 그르칠 줄이야.

    류지혜는 박근한 때문에 자신이 그간 들였던 공이 모두 허사가 되었다며 강력하게 항의했다.

    결국 그녀는 이번 임무를 포기하기로 했다. 박근한이 죽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간단히 포기하게 두지는 않았겠지만, 지금은 명분이 없었다.

    “제법 돈이 될지 모를 놈이었는데, 아쉽게 됐군.”

    던전관리센터는 국가기관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하는 건 말 그대로 던전을 관리하는 것뿐이었다.

    그들이 플레이어를 상대로 하는 건 등록뿐이었다.

    플레이어로 등록한다고 해서 딱히 지원을 해주거나 이득이 주어지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등록되지 않은 플레이어는 던전을 이용할 수 없으니 어쩔 수 없이 등록하는 것뿐이었다.

    다만, 레벨이 올라가면 그에 따른 특혜를 주기에 일단 등록한 플레이어는 주기적으로 레벨테스트를 한다.

    어쨌든 가장 큰 힘과 영향력을 가진 곳이 바로 던전관리센터였다.

    던전에 관계된 물건을 사고파는 시장을 그들이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합법적으로 마력이 깃든 물건을 사고 팔 수 있는 곳은 던전관리센터가 유일했다.

    그것이 국가가 던전 등장 이후에도 힘과 영향력을 잃지 않은 이유였다.

    하지만 세상이 꼭 그렇게만 돌아갈 수는 없는 법이다.

    실제로 관리센터의 눈을 피해 형성된 불법 암시장은 합법 시장의 네 배에 달한다는 보고가 있을 정도였다.

    물론 불법 시장을 이용하는 건 그만한 위험성을 감수해야 한다. 사기를 당할 수도 있었고, 또 폭력이나 살인을 동반한 강탈도 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국가가 경영하는 던전관리센터를 이용하는 것보다 금전적 이득이 훨씬 크기 때문에 끊임없이 성장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런 이득과 맞물려 나타난 것이 바로 플레이어 길드였다.

    던전관리센터는 대세를 유지하기 위해 모든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몇몇 수뇌부는 노력만 하고 힘만 키우면 끝까지 이 상황을 유지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추경훈은 조금 달리 생각했다.

    그는 이 흐름이 대세가 되어 결국은 국가기관이 길드들에 밀릴 수밖에 없을 거라 여겼다.

    그래서 그에 대한 대비를 꾸준히 해 오고 있었다.

    그 일환이 바로 새 인재의 영입이었다. 그가 영입한 인재들은 국가기관인 던전관리센터 소속이 되긴 하지만, 결국 그의 사람이나 다름없었다.

    관리센터의 구조 자체가 그런 식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현석은 그런 뛰어난 감을 지닌 추경훈이 찍은 인재였다.

    한데 그런 대단한 인재가 그의 손을 떠나기 일보직전이었다. 이게 다 박근한 때문이었다.

    “내가 투자한 게 얼마인데!”

    박근한이 가진 장비가 대체 어디서 났겠는가. 다 추경훈이 지원한 돈을 통해 마련한 것들이었다.

    때로 추경훈은 아티팩트나 마력이 담긴 재료도 지원해 주곤 했다.

    그런 지원을 받지 않았다면 박근한이 그렇게 빨리 레벨을 올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류지혜 역시 마찬가지였다. 게다가 그녀에게는 그를 떠날 수 없는 아주 중요한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사실 그걸 이용하면 그녀를 좀 더 강압적으로 다룰 수 있자만 추경훈은 굳이 그러지 않았다. 궁지에 몰리지 않은 이상 그럴 생각도 없었다.

    미래를 위해 그게 훨씬 좋은 투자가치가 있다고 믿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추경훈은 류지혜가 자신의 손아귀를 절대 떠나지 않을 거라 믿었다. 사실 그럴 이유도 없고 말이다.

    플레이어가 관리센터와 엮여서 손해 보는 건 딱 한 가지뿐이었다.

    특별한 임무가 있을 때, 무조건 수락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물론 그 특별한 임무라는 건 국가의 이익에 도움이 되는 것들이었다.

    또한 그렇기 때문에 관리센터 소속 플레이어는 제법 괜찮은 특혜를 몇 가지 갖고 있었다.

    예를 들어 던전 관련 물품을 사고팔 때 세금을 면제받는다거나 하는 것들 말이다.

    세상에 그렇지 않은 사람이 몇이나 되겠느냐만, 관리센터 소속 플레이어는 좀 더 강력한 속박을 받는다.

    그래서 생각보다 많은 플레이어들이 그런 특혜에도 불구하고 관리센터 대신 길드를 찾는다.

    플레이어 길드는 이제 슬슬 세계적인 추세가 되어가고 있었다.

    기업의 지원을 받아 길드를 설립하고 철저히 이득에 따라 움직이는 것이다.

    한국도 마찬가지였다. 수많은 기업이 플레이어를 영입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벌써 유명한 길드도 여럿 등장했다.

    추경훈은 머릿속으로 자신과 연결된 길드 리스트를 하나하나 짚어봤다.

    그리고 그 중 자신에게 가장 큰 이득을 안겨줄 이름을 골라냈다.

    결국 대세가 될 길드 중에서도 손꼽히는 곳과 관계를 잘 유지하는 건 중요한 일이었다.

    그리고 그럴 때 필요한 것이 유용한 정보였다. 추경훈은 생각을 정리한 후, 전화를 걸었다.

    * * *

    류지혜는 긴장한 눈으로 현석을 바라봤다. 현석의 표정은 담담하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더 차갑게 느껴졌다. 솔직히 지은 죄는 없었다. 박근한은 현석 일행이 던전에 들어간 다음 나타났고, 그녀는 그를 말릴 만한 힘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왠지 죄인이 된 것 같은 심정을 버릴 수 없었다.

    “하, 할 말 있으면 하세요.”

    “별로.”

    현석은 그렇게 말하고는 걸음을 옮겼다. 그녀를 스치듯 지나쳐 다음 던전으로 향했다.

    최창수 일행은 그런 현석을 쫓아가며 혀를 내둘렀다.

    방금 그런 일을 겪고도 바로 새로운 던전으로 들어간다는 건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현석은 오히려 그렇기에 더 열심히 던전을 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 같은 하위 능력자를 감시하기 위해 능력 있는 플레이어를 몇 명이나 투입하진 않을 거라 여긴 것이다.

    점점 멀어져가는 현석의 뒷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류지혜는 입술을 깨물며 그쪽으로 발을 뗐다.

    그녀는 빠르게 걸어 현석에게 다가가 소리치듯 말했다.

    “저, 포기했어요!”

    현석이 걸음을 멈추고 돌아서서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류지혜를 더 빠르게 다가가 현석 앞에 섰다.

    “처음부터 짐작하고 있었잖아요. 제가 어디서 나왔는지. 또, 무슨 임무를 받았는지. 이제 그거 포기했어요.”

    현석이 묘한 눈으로 그녀를 보며 물었다.

    “그렇게 함부로 얘기해도 괜찮아요?”

    류지혜가 허리에 손을 척 얹고 과장되게 오만한 표정을 지었다.

    “흥. 지들이 어쩔 건데요? 맘대로 하라고 해요. 뭐…….”

    그녀의 표정이 급격히 위축되었다.

    “맘에 걸리는 게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그녀는 이내 밝게 웃으며 현석을 바라봤다. 그야말로 변화무쌍한 표정이었다.

    “그러니 이제 그만 화 풀어요. 솔직히 이번 일은 나도 전혀 예상치 못했으니까.”

    현석은 잠시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그러는 사이 류지혜가 말을 이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꾸준히 공급 받아야 하는 게 있어서 붙어 있는 거지, 그게 아니었으면 벌써 거기서 나왔을 거예요.”

    그 말에 현석이 눈을 빛냈다.

    사실 처음부터 류지혜의 정체에 대해 알고 있었던 건, 그녀가 유명인이라는 이유도 한몫 했다.

    그녀는 15년쯤 후의 미래에 던전관리센터 한국 지부장이 된다.

    ‘뭐…… 그때의 센터야 거의 유명무실하긴 하지만…….’

    그래도 명색이 한국지부장이었다. 보통 실력과 노력으로 올라갈 수 있는 자리는 아니었다.

    그녀의 외모가 워낙 뛰어나니 당시에도 말이 많았다. 실력이 아닌 다른 걸 이용해 지부장이 된 게 아니냐는 뒷소문이 정말 무성했다.

    어쨌든 아름다운 여자 지부장이라는 타이틀 덕분에 그녀는 상당한 유명세를 치러야 했다.

    그러니 현석이 그녀를 알아보는 건 당연했다. 아무리 젊어졌다 하더라도 말이다. 아니, 현석이야 원래 눈이 안 보였으니 그녀의 얼굴이 젊건 늙건 상관없었다.

    류지혜는 상당히 특이한 마력패턴을 가졌기에 단숨에 알아봤다.

    현석은 그녀에 대한 기억을 잠시 더듬어봤다. 워낙 유명했기에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기본적인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물론 15년 후 미래에는 말이다.

    ‘생각나는 게 없네. 하긴, 그때는 딴 데 관심을 돌릴 여유가 없었으니까.’

    그녀의 마력패턴이 워낙 특별했기에 그나마 기억하는 거지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그조차 기억에서 지워버렸을 것이다.

    그때는 그 정도로 힘들게 살았다.

    “화 낸 적 없습니다.”

    현석이 상념을 털어내고 말했다. 그러자 류지혜가 배시시 웃었다.

    “저 촉 되게 좋거든요? 화났잖아요. 헤헤.”

    “화를 낼 이유가 없는데 왜 화를 냅니까. 몰래 들어온 사람이 있어서 적당히 응징했을 뿐인데.”

    류지혜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것 봐요. 화났네. 아무튼 이제 화 푸시는 거죠?”

    그녀가 애교 넘치는 미소를 지으며 현석을 바라봤다. 현석이 그 모습에 피식 웃자, 얼른 말을 이었다.

    “언젠가 센터에 붙어 있을 이유가 없으면 나올 건데, 그때 같이 일해 보는 거 어때요?”

    그녀는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좀 더 자신을 어필했다.

    “전에 말했죠? 저 생각보다 능력 있는 여자에요. 손만 내밀면 잡으려는 팀이 줄을 설 걸요?”

    그러니 어서 손을 내밀라는 뜻이다. 그녀는 기대감 어린 눈으로 현석의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현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럴 거 같군요.”

    그녀의 기대감이 더욱 높아졌다. 저 정도 긍정적인 반응을 이끌어 냈다면 원하는 결과가 나올 게 뻔했다.

    “그럼 부디 좋은 팀에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당연히 제가 힘이 되어 드려야…… 예?”

    그녀는 현석의 반응을 예상하고 준비한 대답을 꺼냈다가 멍청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지금…… 제가 뭔가 잘못 들은 거 같거든요?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시겠어요?”

    이번 대답은 옆에 서 있던 최창수에게서 나왔다. 그는 엄청 고소한 표정으로 능글능글 웃으며 말했다.

    “거 사람이 말하면 한 번에 딱딱 알아듣지 못하고. 부디 좋은 팀에 들어가라잖아.”

    류지혜가 고개를 돌려 최창수를 노려봤다. 그 눈빛이 어찌나 날카롭고 사나운지 최창수는 찔끔 놀라 시선을 얼른 돌렸다.

    “아니, 뭐…… 말이 그렇다는 거지. 아, 그리고 우리처럼 어설픈 팀에 있어봐야 뭐 얻어먹을 게 있다고…… 안 그래? 솔직히 너 레벨도 우리보다 훨씬 높지?”

    류지혜는 최창수의 말에 한 마디도 대꾸할 수 없었다. 다 옳은 말이었기 때문이다.

    굳이 그녀가 이 팀에 끼어들 이유가 없었다. 그녀는 레벨도 훨씬 높고, 또 능력도 있었으니까.

    “그게 뭐?”

    류지혜는 최창수를 노려보며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최창수가 뒤로 슬금슬금 물러났다.

    “내, 내가 뭐라고 했나? 그냥 그렇다는 거지. 아, 그리고 뭐, 내가 안 된다고 했나? 따질 거면 우리 대장한테 따지든가.”

    류지혜는 잘 말했다는 듯 다시 시선을 현석에게로 돌렸다. 그리고 그의 앞으로 바짝 다가가 고개를 들고 두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저, 정말 다른 팀으로 가요?”

    그녀는 정말 탐나는 인재였다. 하지만 그렇기에 지금 팀에 넣어선 안 된다.

    지금 팀은 어쨌든 오래 유지되지 않을 테니까.

    최창수 일행을 어떻게 믿고 오랫동안 함께 활동한단 말인가.

    하지만 그 사실을 지금 말해줄 수는 없었다. 최창수 일행과는 아직 해야 할 일들이 남았으니까.

    현석은 입을 꾹 다문 채 그녀의 눈을 가만히 내려다봤다. 그리고 이내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류지혜는 멍하니 서서 멀어져가는 현석의 등을 바라봤다.

    최창수 일행은 그녀의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현석의 뒤를 따라갔다.

    그렇게 다들 던전으로 사라졌다.

    류지혜는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봤다. 근처에 있던 시선을 자신이 모으고 있다는 걸 그제야 알아차렸다.

    “하아.”

    그녀는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몸을 돌려 던전생성지역에서 나가 버렸다.

    그렇게 가는 내내 그녀는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가 마음에 턱 걸렸다.

    “꼭…… 볼일 보고 밑 안 닦은 느낌이야.”

    < 길드 1 > 끝

    ⓒ 김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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