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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눈 뜨고 레벨업-10화 (10/326)
  • < 염탐 1 >

    평이한 날들이 이어졌다. 현석은 지난 한 달과 전혀 다르지 않은 새로운 한 달을 만들어 가고 있었다.

    최창수 일행은 그런 현석에게 점점 젖어가고 있었다. 이 평화로운 생활에서 벗어나기 싫어진 것이다.

    하지만 그런 평화를 위협하는 존재가 있었다. 최창수는 던전지역에 들어서며 눈살을 찌푸렸다.

    “저 여자는 질리지도 않나? 또 왔네. 대체 목적이 뭐야?”

    현석은 최창수의 투덜거림을 들으며 피식 웃었다. 목적이 너무 뻔했다. 그리고 류지혜 뒤에 누가 있을지도 대충 짐작이 갔다.

    “안녕하세요!”

    어느새 다가온 류지혜가 반갑게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 이로써 열흘 연속으로 류지혜를 만난 셈이었다.

    류지혜는 배시시 웃으며 현석 앞에 섰다. 그녀는 스물여섯이었는데, 다섯 살이나 어린 현석을 보면서도 왠지 동생같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참 신기하단 말이야.’

    보통 오빠 같은 느낌이고, 때때로 아저씨 같을 때도 있었다. 애늙은이라고 해도 될 법한데, 그런 느낌은 아니니 참으로 신기했다.

    “슬슬 포기할 때도 된 것 같은데…… 끈질기네.”

    최창수가 인상을 쓰며 현석 앞을 가로막았다. 요즘 배분율이 살짝 올라갔기에 더 놓치기 싫었다.

    예전과 달리 이제 가끔 마력이 좀 떨어지는 마정석을 현석이 내주곤 했다.

    1000마력이 안 되는 것들이라 비싸게 팔 수는 없지만, 그래도 잘 팔면 최소 수천만 원은 받아낼 수 있었다.

    또한 정당하게 팔지 않고 암시장을 이용하면 더 비싸게 값을 후려칠 수 있었다.

    그런 보물이 끊임없이 나오는 보물창고를 고작 저 얼굴만 반반한 여자 때문에 놓칠 수는 없었다.

    어느새 최창수는 자신이 처음 어떤 마음으로 현석을 끌어들였고, 또 무슨 짓을 했으며, 자신이 어떤 꼴을 당했는지 모두 잊어버렸다.

    그 정도로 지금 생활에 만족하며 젖어들었다는 뜻이었다.

    최창수는 경계어린 눈으로 류지혜를 바라봤다. 하지만 그녀 때문에 딱히 뭔가 큰 변화가 일어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하기에는 지난 열흘 동안 현석이 보여준 태도가 너무 시큰둥했다.

    류지혜는 지나가다 보면 계속해서 돌아보게 만들 정도로 아름다웠다.

    이 정도 미모면 사실 나이가 별 의미 없었다. 그냥 보고 있으면 예쁜데 나이가 무슨 상관인가.

    솔직히 말하면 최창수도 류지혜가 저렇게 환하게 웃으며 바라볼 때는 심장이 덜컥 덜컥 내려앉았다.

    한데 한창 혈기왕성할 나이, 본능이 이성을 지배할 나이인 현석이 보기엔 어떻겠는가. 아마 당장 덮치고 싶을지도 모른다.

    아니, 처음엔 분명히 그럴 거라고 여겼다. 한데 지난 열흘의 시간을 겪으며 세상에는 참으로 다양한, 그러니까 별의 별 사람이 다 있다는 걸 여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현석은 마치 이성에는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사실 최창수 일행 중에도 여자가 둘이나 있다. 외모도 어디 가서 꿀릴 정도는 아니었다. 그래도 현석은 그녀들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그녀들도 사람인지라 보물창고인 현석을 유혹하겠다는 마음으로 접근하기도 했다. 하지만 다들 보기 좋게 실패했다.

    하지만 류지혜는 그녀들과는 많이 달랐다. 그래서 최창수도 초반에는 상당히 긴장했다. 아무리 이성에 관심이 없어도 저 정도면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고 여긴 것이다.

    물론 지금은 그런 걱정을 거의 하지 않는다. 현석은 겉보기만 피 끓는 청춘이고, 속에는 뭐가 들었는지 알 수 없는 희한한 사람이었으니까.

    “오늘도 손 한 번 안 흔들어 줄 거예요? 벌써 열흘이나 매일 보는 거 같은데.”

    현석은 그 말에 빙긋 웃으며 손을 슬쩍 흔들어 주었다.

    그 모습에 최창수의 입이 쩍 벌어졌다.

    ‘내가 이래서 불안했구나!’

    절대 일어나지 않을 거라 믿었는데,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그러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을 뿐이었지만, 어쨌든 우려하던 일이 벌어졌다.

    ‘일단 마음을 열었으니 휩쓸려 가는 건 순식간일 거야.’

    현석이 웃으며 손을 흔든 순간, 최창수와 류지혜의 뇌리를 동시에 스친 생각이었다.

    “웬일이에요? 인사를 다 받아주고.”

    “열흘쯤 봤으면 오래 봤다 싶어서요. 이제 인사 정도는 주고받아도 되지 않을까 한 건데, 싫으면 관두죠.”

    현석의 말에 류지혜가 맹렬히 손사래를 쳤다.

    “그럴 리가요. 우리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친하게 지내요.”

    그녀가 예쁘게 생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솔직히 잡아줄 줄 알았다. 한데 현석은 그저 빙긋 웃으며 그녀를 지나쳤다.

    “아직 거기까지 친해진 거 같지는 않은데요?”

    현석은 그렇게 말하고는 던전 앞에 섰다. 다른 사람 모르게 미리 준비를 마친 던전이었다.

    이 짓도 이제 슬슬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열흘 정도 더 하면…….’

    변종 천둥잠자리를 사냥해 파워업 키트를 모으기 시작한 지 거의 50일쯤 되었다.

    하루 평균 5회의 던전을 돌았고, 그때마다 10개 이상의 마정석을 모았다.

    그리고 잘 뽑아내면 마정석 하나당 3개의 파워업 키트가 나온다.

    그렇게 모은 파워업 키트의 수는 무려 5천 개가 넘었다.

    산술적으로 계산하면 7500개여야 하지만, 잘 안 뽑히면 3개가 아니라 2개나 1개만 나오는 경우도 있었고, 또 사냥을 할 때마다 파워업 키트를 썼기 때문에 막상 모인 건 5천 개 정도였다.

    모든 마정석을 다 파워업 키트로 바꾼 것도 아니었고 말이다.

    현석이 막 던전에 들어가려는 순간 류지혜가 다급히 다가왔다.

    “잠깐만요.”

    그녀의 말에 현석은 걸음을 멈추고 돌아봤다.

    “오늘 저도 같이 던전에 들어가면 안 될까요? 진짜 큰 도움이 될 거라니까요? 저 이래봬도 제법 싸움 좀 해요.”

    현석은 그녀를 가만히 쳐다봤다. 그녀의 뒤에 서서 긴장한 눈으로 결과를 기다리는 최창수 일행의 모습이 보였다.

    “나중에.”

    현석은 그 말만 남기고 돌아서서 던전에 들어갔다.

    최창수 일행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현석을 따라갔다. 이번엔 지나가며 류지혜에게 도발적인 눈빛을 보내지도 못했다.

    정말 불안했으니까.

    류지혜는 던전 안으로 사라진 현석 일행을 보며 씨익 웃었다.

    “더럽게 오래 걸렸네. 이 정도면 거의 다 된 거나 다름없지.”

    그녀는 그렇게 중얼거리다가 문득 오늘 아침의 일이 떠올라 짜증이 났다.

    “이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생각도 안 하고 재촉하기는. 그렇게 답답하면 지가 와서 직접 하든가.”

    그녀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귓가에서 끈적끈적한 목소리가 와 닿았다.

    “그래서 이렇게 왔지.”

    “꺅!”

    류지혜가 기겁하며 후다닥 물어났다. 방금 그녀가 있던 곳 바로 뒤에 사내 한 명이 서서 음흉하게 웃고 있었다.

    “오랜만이야. 슬슬 마음의 준비는 되어가나?”

    사내의 말에 류지혜가 치를 떨었다.

    “그럴 일 절대 없을 테니까 말도 꺼내지 마시죠.”

    사내가 나직이 웃었다. 그 웃음소리와 표정이 어찌나 음흉하고 어두운지 류지혜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난 한 번 찍은 목표물은 절대 놓치는 법이 없지. 너도 잘 알잖아? 나한테 찍히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니까 영광으로 알아도 돼.”

    류지혜는 거기에 대꾸하는 대신 말을 돌렸다.

    “여긴 어쩐 일이죠?”

    “아까 말했잖아. 답답하니까 새 명령이 떨어진 거라고. 직접 오기에는 남들 보는 눈도 있으니 나처럼 유능하고 확실한 사람을 보내는 거지.”

    류지혜는 입을 다물고 사내를 가만히 쳐다봤다. 확실히 유능하긴 하다. 또 확실하기도 하다. 하지만 저 사내는 그런 걸 감안하더라도 너무 잔인하고 음흉했다.

    저 사내의 손에 더럽혀진 여자 플레이어의 수가 벌써 두 자리를 넘어섰다는 얘기도 있었다.

    사내는 한껏 굳은 류지혜를 보며 피식 웃고는 방금 현석 일행이 들어간 던전을 쳐다봤다.

    그걸 본 류지혜의 눈이 커다래졌다.

    “설마…… 여기 들어가려는 건가요?”

    “왜? 안 될 게 있나?”

    사내의 입가에 비웃음이 걸렸다.

    “그렇게 무르니까 열흘이 지나도록 아무것도 보고할 게 없지.”

    류지혜는 그의 말에 표정이 굳어졌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사내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어차피 뒤에 있는 건 추경훈이다. 던전관리센터 경기 지부장이 지시한 일인데 별다른 잡음이 생길 리 없었다.

    “그놈들 레벨을 어제 측정했더군. 다들 27이었어. 브론즈 치고는 제법이더라고.”

    물론 그래봤자다. 레벨 30을 넘느냐 못 넘느냐는 아주 중요한 기준이다.

    30레벨이 되면서 마력이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컨트롤 능력도 급격히 좋아지기 때문에 30레벨과 29레벨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하물며 사내의 레벨은 무려 43. 그가 마음먹고 몰래 숨어들면 현석 일행은 아무것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그나마 조금이라도 사내의 존재를 알아차릴 수 있는 순간은 코어가 부서질 때인데, 그 전에 던전에서 빠져나가면 감쪽같이 속일 수 있었다.

    ‘나도 그럴 걸 그랬나?’

    류지혜가 순간 그런 생각을 했다가 이내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굳이 그러지 않은 이유는 현석 때문이었다.

    ‘분명히 뭔가 있어. 그걸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저렇게 섣불리 움직여선 안 돼.’

    그것이 그녀의 생각이었다.

    사내는 그런 류지혜를 보며 또 한 번 씨익 웃었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아니, 비웃음과 음흉함이 뒤섞인 미소였다.

    “이번 일이 끝나면 아마 나와 같이 임무를 수행하게 될 거야.”

    “뭐라고요?”

    “내가 이번에 추 지부장한테 내건 조건이야. 흔쾌히 들어주더군.”

    류지혜의 표정이 대번에 굳었다.

    “그런 표정 지을 거 없어. 어차피 언젠가는 벌어질 일, 좀 더 일찍 겪는다고 생각하면 되잖아?”

    사내는 그렇게 말하고는 히죽 웃으며 던전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막 떠올랐다는 듯 아차하며 고개를 돌려 류지혜를 바라봤다.

    “허튼 수작 부릴 생각은 않는 게 좋을 거야. 그냥 거기 서서 내가 들어갔다가 나올 때까지 얌전히 기다리기나 해.”

    사내는 그렇게 말하며 손가락을 들어 근처에 수없이 세워진 기둥에 매달린 CCTV를 가리켰다.

    혹시라도 던전에 따라 들어와 현석 일행을 도울까봐 미리 경고한 것이다.

    사내는 류지혜의 표정이 더욱 심각하게 굳어가는 걸 보며 즐거운 미소를 지으며 던전에 들어갔다.

    류지혜는 그 뒤로 던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과연 어떻게 될지 정말 궁금하네.’

    그녀가 판단하기에 현석에게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었다. 그게 뭔지는 모르지만, 아마 저 사내는 그걸 간과한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될 것이다.

    ‘아예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어.’

    그녀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 * *

    막 세 번째 천둥잠자리를 사냥하고 도축까지 끝낸 현석의 눈이 순간적으로 번득였다.

    현석은 표정을 관리하고 평소와 다름없이 행동하려 애쓰며 근처 적당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오늘은 좀 일찍 쉬네?”

    최창수의 물음에 그저 고개를 몇 번 끄덕이는 걸로 대답을 대신한 현석은 자연스럽게 주위를 슥 둘러봤다.

    ‘누군가가 들어왔어.’

    누가 들어왔는지는 모르지만, 들어온 건 확실했다. 그리고 들어온 사람이 류지혜가 아니라는 것도 확실했다.

    아마 아직 아는 사람이 거의 없겠지만, 던전에 플레이어가 들어온 순간 그가 가진 특유의 마력패턴으로 이루어진 마력 파동이 퍼져 나간다.

    파동 자체가 미약하기 때문에 알아차리기가 어렵지만, 마력에 대해서라면 그 누구보다 예민한 현석에게는 마치 칼로 누군가 위협하는 것처럼 민감한 일이었다.

    던전 난입은 사실 종종 일어나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가 대부분 좋지 않은 법이다.

    그러니 던전에 들어갈 때면 항상 그 부분을 염두에 둘 수밖에 없었다.

    현석도 무수한 던전을 클리어하면서 항상 그 부분을 조심하고 또 조심했다.

    그러니 이렇게 대놓고 던전에 난입하는 자를 못 알아차릴 수가 없었다.

    현석의 태도가 좀 달라진 걸 느낀 최창수가 다가갔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현석은 최창수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최대한 숨긴다고 숨겼는데 티가 났던 모양이다. 아니, 이 경우는 최창수의 눈치가 상당히 빠르다고 해야 할까?

    “손님을 좀 맞이해야 할 것 같은데?”

    “손님?”

    최창수는 현석의 의미심장한 표정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 염탐 1 > 끝

    ⓒ 김강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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