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시 살아나다 2 >
현석은 천천히 눈을 떴다. 낯설지만 낯익은 천장이 보였다.
지금 그는 젊었을 때 오랫동안 살던 원룸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눈을 잃기 직전까지 쓰다가, 눈을 잃은 후, 시력이 없어도 살기 편한 곳으로 이사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 자신을 물심양면으로 도와주던 사람이 떠올랐다.
현석이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눈을 빛냈다.
“아직 닥치지도 않은 일이잖아?”
그 사람은 끝내 던전에서 죽었다. 하지만 그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이다.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는 뜻이다.
인생을 살아가며 어떤 일이 있더라도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건 정말 축복 같은 일이었다.
그리고 현석은 이제 그런 사람을 한 명 얻었다. 얼마 남지 않은 미래에 그가 죽지 않는다면 말이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현석은 방안을 찬찬히 둘러봤다.
어제 집에 돌아왔을 때는 정말 만감이 교차하는 기분이었다.
자고 일어나니 왠지 그동안 긴 꿈을 꾼 듯했다. 하지만 그건 절대 꿈이 아니었다.
“일단…… 상황을 파악하고 정리하면서 할 일을 해야지.”
현석은 대충 씻고 옷을 차려입었다.
어제 새로 사귀게 된, 아니, 밑에 두게 된 자들을 보러 갈 시간이 되었다.
아마 그들은 약속을 지키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아니, 오히려 그러기를 은근히 바라고 있었다.
“몇 번 뜨거운 맛을 봐야 정신을 차릴 테니까.”
최창수에 대한 얘기는 과거에도 몇 번 들었다. 물론 워낙 오래전 일인지라 기억이 희미하긴 했지만.
어쨌든 들려온 얘기는 당연히 좋지 않았다. 똑같은 짓을 반복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소문조차 사라져 버렸다.
죽었을 것이다. 최창수는 그렇게 금세 세상에서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이번에는 좀 다를 것이다. 그것이 과연 재수가 좋은 건지 나쁜 건지는 몰라도 말이다.
현석은 집을 나섰다. 그리고 아련한 눈으로 원룸 건물을 돌아봤다.
추억이 제법 서린 집이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미련을 둘 필요가 없는 곳이기도 하다.
현석은 충분히 원룸을 눈에 담은 후, 냉정히 돌아섰다.
앞으로 이 집에 다시 오는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 * *
던전관리센터.
현석은 멀리 떨어진 곳에서부터 한눈에 들어오는 커다란 건물을 보며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이제 대충 감정이나 생각을 다 정리했다고 여겼는데, 막상 저 건물을 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던전에 관계된 모든 일을 처리할 수 있는 곳이었다. 모든 플레이어는 저기서 등록을 마쳐야 제대로 된 활동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말이 그렇지 실제로 모든 플레이어가 관리센터에 등록한 건 아니었다. 등록되지 않은 플레이어도 제법 있었다. 당연히 그들은 정당하지 않은 활동을 하는 플레이어였다.
현석은 건물 안으로 들어갔다.
오늘 이곳에 온 이유는 변종 천둥잠자리에게서 나온 마정석을 팔기 위함이었다.
변종답게 이번에 나온 마정석의 크기는 상당했다.
‘마정석 시세가 어느 정도였더라…….’
죽기 직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20년쯤 후에는 이 정도 크기의 마정석이라면 천만 원쯤 했다.
하지만 그때는 마정석이 워낙 흔하게 나돌아 다녔기에 시세가 낮은 거였고, 초기에는 절대 그렇지 않았다.
현재의 마정석은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해서 시세가 천정부지로 치솟는 중이었다.
‘1억쯤 하려나?’
마정석 시세는 높을 수밖에 없었다. 아직 마정석과 마수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제대로 된 연구가 이뤄지지 않은 상태였다.
그렇기에 마수의 사체로부터 마정석을 얻어낼 확률 자체가 상당히 낮았다.
마수로부터 마정석을 얻기 위해서는 잡는 방식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도축과정 자체가 중요했다.
도축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 마정석에 담긴 마력이 그냥 흩어져 버린다.
마정석이 평범한 마수의 장기 중 하나로 변해 버리는 것이다.
이런 것들이 제대로 연구가 되어 마정석 수급이 안정되는 건 최소 3년 후부터였다. 아직은 연구의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그렇기에 현석은 지금 이 시기가 정말로 중요했다.
‘누구보다 많은 돈을 벌어 기반을 제대로 세울 수 있는 시기지.’
그리고 현석이 세운 큰 계획을 제대로 차근차근 이뤄내기 위해선 정말로 막대한 돈이 필요했다.
건물 안으로 들어온 현석은 잠시 머뭇거렸다.
던전관리센터에는 헤아릴 수조차 없을 정도로 많이 들락거렸지만, 대부분이 시력을 상실한 이후의 일이었다.
이렇게 직접 눈으로 보고 안을 확인한 건 정말 오랜만이었다.
‘그리고…… 구조도 내가 알던 것과는 많이 다르고.’
무려 20년이 넘는 차이가 있었다. 당연히 내부 구조도 많이 달랐다.
더구나 현석이 주로 이용하던 관리센터는 아직 지어지지도 않았다.
이곳은 그야말로 초창기의 던전관리센터였다.
‘이 건물이 한…… 10년쯤 버티나?’
10년 후에는 이 건물 자체가 존재하지 않게 된다. 다른 건 몰라도 그건 아주 확실히 기억한다.
건물이 박살 날 때, 현석도 이곳 현장에 있었으니까.
현석은 기억을 흘려버리고는 주위를 슥 둘러봤다.
홀 안에는 굉장히 많은 수의 사람이 있었다. 몇몇은 바삐 움직였고, 몇몇은 느긋했다. 또 몇몇은 적당한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현석은 그 모든 광경을 다시 한 번 눈에 담은 다음, 홀의 오른쪽 끝에 있는 방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던전관리센터 내부는 아주 단순한 구조로 되어 있었다.
거대한 홀이 있고, 그 홀을 중심으로 반원을 그리듯이 문이 주르륵 달려 있었다.
모든 문 앞에는 기다리는 사람이 줄을 서 있었다.
각각의 방에 플레이어에 관한 모든 것을 도와주는 관리자가 있었다.
아무래도 던전에 관계된 일은 공개하기 싫어하는 플레이어가 많기에 이렇게 상담이나 관리조차 비밀스럽게 운영했다.
현석은 마침 줄이 줄어들어 기다리는 사람이 없는 방 앞에 섰다.
안에 상담하는 플레이어가 있는지 없는지는 문에 표시가 되기에 금세 알 수 있었다.
잠시 후, 방에서 플레이어가 나왔다. 현석은 그를 지나쳐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방은 아주 단순했다. 창구가 있었고, 그 앞에 의자가 놓여 있었다. 푹신한 소파였다.
현석은 능숙하게 소파에 몸을 묻듯이 앉았다.
창구에 앉은 관리자가 정중히 물었다.
“안녕하십니까.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현석은 품에서 마정석을 꺼내 창구 앞에 올려놓았다.
마정석을 확인한 관리자가 눈을 빛내며 돋보기를 꺼내 마정석을 이리저리 살폈다.
그가 쓰는 돋보기는 던전에서 나온 것들을 통해 만들어낸 양산형 아티팩트 중 하나로, 마력을 측정하는 장치였다.
“1253마력(魔力)짜리로군요. 정확한 건 따로 확인해 봐야 알겠지만, 현 시세로 환산하면 수수료를 제하고 1억이 좀 넘을 것 같습니다.”
현석은 카드 하나를 내밀었다. 미리 준비한 은행 카드였다.
“절반은 이리로. 나머지 절반은 재료로.”
재료라는 말에 관리자가 눈을 빛냈다. 재료를 구입해 가는 플레이어들은 아주 특별하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현석은 미리 준비한 쪽지를 내밀었다. 거기에는 재료의 이름과 정확한 수량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그걸 확인한 관리자의 눈이 더욱 묘하게 빛났다.
“이거…… 잘 안 쓰이면서도 재고량은 많은 재료들이로군요. 뭔가 새로운 실험이라도 하시는 겁니까?”
현석은 대답 대신 손을 휘휘 내저었다. 얼른 처리나 해달라는 뜻이었다.
관리자는 입맛을 한 번 다시고는 자리에서 일어나 안쪽으로 들어갔다.
상담실 안쪽은 거대한 창고로 이어져 있었다. 모든 창구와 연결되어 있고, 그곳을 관리하는 직원들이 따로 있기에 플레이어의 요구사항을 즉각 해결해 줄 수 있었다.
현석의 요구도 즉시 처리 되었다.
다시 나타난 관리자는 커다란 가죽 가방 하나를 들고 있었다. 그 가방 안에 현석이 원한 재료들이 가득했다.
현석은 가방 안의 재료를 모두 테이블 위에 쏟아 놓고, 꼼꼼히 확인했다.
확인이 끝나자 고개를 끄덕이며 재료를 다시 가방에 넣고는 카드를 챙겨 밖으로 나갔다.
현석이 나가자, 관리자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인적사항을 확인해 보면 초보 플레이어가 분명한데…… 꼭 전문가인 척하네. 겉멋 든 초짜들이 일찍 죽어나가는 법이지.”
그 말이 끝났을 때, 다시 문이 열리고 다음 손님이 들어왔다. 관리자는 표정을 지우고 사무적으로 손님을 맞이했다.
* * *
현석은 피식 웃었다.
“하긴, 그렇게 보였을 수도 있겠군.”
관리자는 혼잣말로 나직이 중얼거렸겠지만 현석의 귀에는 아주 똑똑히 들렸다.
자신에게 예민했던 모든 감각이 거의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다행스러웠다.
이것은 앞으로 큰 무기가 될 것이다.
“무기는 여기 또 있지.”
현석은 가방을 어깨에 걸치며 씨익 웃었다.
과거로 돌아왔다는 것은 미래를 알고 있다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아직은 개발되지 않았지만 미래에 세상을 뒤흔들 정도로 대단한 발견이나 발명이 될 것들을 현석은 빠삭하게 꿰고 있었다.
물론 그 모든 것을 만들어낼 수는 없다. 현석이 가진 지식에는 분명히 한계가 있으니까.
하지만 그 중에는 아주 간단하면서 유용한 것들도 엄청나게 많았다.
미래에는 누구나 다 아는 상식이지만, 지금은 세상을 앞질러 나갈 수 있는 열쇠가 되는 지식이 현석의 머릿속에는 무수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일단 시작은 이것부터.”
현석은 어깨에 걸친 가방을 슬쩍 쓰다듬었다. 이 재료들만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하지만 여기에 한 가지가 추가되면 엄청난 물건을 만들 수 있었다.
그 한 가지가 바로 변종 천둥잠자리의 눈이었다.
“그럼…… 천둥잠자리를 잡으러 가볼까?”
물론 지금 당장 혼자서 천둥잠자리를 잡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기에 조력자가 필요했다. 지금 현석은 그 조력자들을 만나러 가는 중이었다.
던전관리센터 앞은 엄청난 번화가였다. 이쪽에는 항상 사람이 득실거리니 상가도 잘 될 수밖에 없었다.
현석은 커피전문점에 들어가 자리를 잡았다. 아무 곳이나 막 들어온 게 아니라 미리 약속을 한 장소가 바로 여기였다.
“아직 안 왔네? 하긴, 오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지.”
현석은 씨익 웃었다. 아마 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물론 시간은 안 지키겠지만 말이다.
시간을 확인해 보니 약속 시간에서 세 시간이 지났다. 현석도 많이 늦은 셈이었다.
현석은 느긋하게 커피를 시켜 테이블에 놓고 머릿속으로 앞으로의 계획을 다시 한 번 점검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현석의 눈이 반짝 빛을 발했다.
“드디어 왔군.”
현석은 고개를 돌려 커피전문점 밖 거리를 쳐다봤다. 저 멀리서 최창수가 헐레벌떡 달려오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다급함과 간절함이 뒤섞여 있었다.
“그러니까 사람이 약속을 잘 지켜야지.”
현석은 그렇게 말하며 씨익 웃었다.
이내 문이 벌컥 열리고 최창수가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그리고 흔들리는 눈빛으로 사방을 둘러봤다.
현석과 눈이 마주친 최창수가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리고 터벅터벅 걸어 현석 앞에 털썩 앉았다.
최창수는 현석을 죽일 듯이 노려봤다.
둘 사이에 싸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 다시 살아나다 2 > 끝
ⓒ 김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