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프롤로그 >
앞이 캄캄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당연하다, 난 시력을 잃었으니까. 그래서 항상 눈을 감고 있었으니까.
뭔가에 충격을 받았는지 온몸이 부서질 것 같이 아팠다. 아, 맞다. 나 죽었지.
한데 갑자기 들려오는 소리가 있었다.
“숨은 쉬는 거 같은데?”
“정신도 돌아오고 있는 것 같아.”
“야, 눈 좀 떠봐!”
눈을 뜨라고? 지금 그 말 나한테 하는 건가? 내가 눈을 어떻게 떠?
라는 생각과 동시에 눈을 번쩍 떴다.
“헉!”
눈을 통해 세상이 들어왔다. 보인다. 눈이 보여.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조금 떨어진 곳에서 날 내려다보고 있는 사람들을 슥 둘러봤다.
눈빛만 봐도 알겠다. 저들의 감정을 말이다. 저건 절대 호의나 염려가 담긴 눈이 아니었다.
한심함, 비웃음, 경멸.
“괜찮나?”
한 발 다가온 사내가 물었다. 그를 쳐다봤다. 왠지 낯이 익은 것 같으면서도 낯선 느낌이 들었다.
그러니까 아주 먼 기억 속에 있는 뭔가를 억지로 끄집어내는 듯한 느낌?
그리고 사내의 머리 위에 보이는 생소한 것.
“최창수?”
사내, 최창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뭐? 최창수? 내가 니 친구냐? 이 새끼가 정신 한 번 잃더니 감을 상실했네?”
난 아무 잘못 없다. 그저 네 머리 위에 반투명하게 쓰여 있는 글을 읽었을 뿐이니까.
그제야 난 주위를 다시 둘러봤다.
날 둘러싸고 있는 여섯 남녀의 머리 위에 각자의 이름이 보였다.
난 그들을 차분히 둘러보며 내가 처한 상황을 정리해 봤다.
첫째, 사람들 머리 위에 이름이 보인다.
둘째, 난 원래 눈이 멀었는데, 갑자기 눈이 보인다.
셋째, 난 원래 죽었다.
넷째,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다. 천국인가? 아니면 지옥인가?
“그냥 두고 갑시다. 저런 놈 달고 다니면 다 죽어요. 던전이 무슨 애들 장난도 아니고. 알아서 살라고 하고 우린 갑시다.”
난 그제야 여기가 어딘지 알 수 있었다.
던전이었다.
던전에서 죽었더니 다시 던전에서 살아난 것이다. 물론 내가 죽은 던전이랑은 좀 많이 달라 보였지만.
최창수가 잠시 고민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다시 날 보며 물었다.
“계속 따라올 수 있겠나?”
당연히 난 대답하지 않았다. 널 뭘 믿고 따라가? 게다가 다른 놈들이 날 보는 눈빛을 보니 더 못 믿겠다.
내가 대답하지 않자, 최창수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직 깊이 들어오지 않았으니 조심해서 돌아가면 나갈 수는 있을 거다. 할 수 있겠지?”
날 버리기로 한 모양이다. 난 거기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아직 내가 뭘 어떻게 할지 결정한 게 하나도 없었으니까.
하지만 내 의사와 상관없이 저쪽은 이미 결론을 내린 모양이었다.
다들 천천히 물러나고 있었다.
그렇게 모두가 사라진 다음, 난 잠시 상황을 파악했다. 그리고 잠시 후, 더 당황스러운 일이 닥쳐왔다.
< 프롤로그 > 끝
ⓒ 김강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