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 비선? 파묻힐 비석이나 준비하시지.
재환은 그날 평소보다 그 이상으로 술을 들이켰다.
장인과 아버지, 거기에 아내까지 앞에 두고서도 멈추지를 않았다.
탁-
“사위, 술이 좀 과한 것 같네.”
“그래 이 녀석아, 좀 그만 마셔.”
하지만 재환은 아직도 눈에 살기가 등등한 상태로 말했다.
“97년···.”
“음?”
“다시 이 세상으로 돌아와서··· 혜성 일을 맡게 될 때였습니다.”
재환은 순간적으로 과거의 삶에서 지금 돌아온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한 의원과 미연은 ‘이 세상에 돌아왔다는게 뭐냐?’ 하는 얼굴이었다.
그때 희경도 담배를 꺼내 물다가 말했다.
“그래, 서울대도 싫고 멀리 떨어져 있고 싶다고 비싼돈 들여 미국 유학 갔다가 돌아왔을 때, 솔직히 나도 속이 쓰렸다.”
‘아, 유학 이야기구나.’
재환은 그런 수군거림도 모른채 눈을 부릅뜨며 말했다.
“그동안 집안에서 서로 사이 나빴던거 다 알고, 그래서 내가 일부러 미국까지 가서 혼자 지낸거고··· 돌아와서도 서로가 서로를 두고 치고박고 하던 집안 아닙니까?”
“···다 지난 이야기를 왜 지금 하는거냐?”
“다 지났으니까 하는거죠. 이제는 내가 이 가문을 지키고, 가족을 지키겠다고 다짐했으니까.”
재환의 말에 양가의 부모가 탄식했다.
사실 재능으로만 치면 이제껏 혜성가의 그 누구도 범접할수 없는 엄청난 능력에 이 자리로 그룹을 만든 재환을 거스를 수 없다.
하지만 그는 홀로 앞서기보다는 모두를 지키며 끝까지 안고 간다는 마인드로 한 사람도 버리지 않았다.
그런 재환에게 정치권의 알량한 간신배들이 자기 가족들을 건드린다?
용납할 수 없는 일이고 곧 이 일은 자신의 모든 것을 건드린다는 거다.
“이번 일 회장으로써, 기업인으로써··· 그리고 가족으로써 절대 안 넘어 갈 겁니다.”
재환의 기세등등한 반응에 한수호는 소주를 마시며 말했다.
“난 말했던 대로 지방으로 가려네. 중앙 정계에 있어봤자 피만 볼 것 같구만.”
도지사는 그분을 따르는 권력에 따라 결정됐고, 그에게 주어진 자리는 청주시장 정도였지만, 한수호는 개의치 않았다.
그리고 희경 역시도 그런 아들을 붙잡으며 말했다.
“이 애비가 도울 일이 있다면 뭐든지 하마.”
“아니요. 혼자 해결할 수 있어요.”
재환은 이 자리에서 모든 것을 끝내겠다고 선언했다.
***
다음 날.
그렇게 술을 진탕 마신 다음에도 누구보다 먼저 일어나 찬물로 목욕재개를 마친 재환은 눈을 감고서 생각에 잠겼다.
아침에 온 가정부 아주머니들에게 인사하고, 그들이 차려준 식사를 먹으면서 가족들에게 말했다.
“당신 짐 챙겨서 이사 준비해.”
“네?”
“당분간은 양재동 아버지 집에서 지내야겠어. 짐 정리할 거 있으면 지금 하고.”
“아니, 갑자기 그렇게 말하면··· 애들 학교랑 유치원은요?”
“차 보내주고, 내가 따로 수행비서들 고용해서 문제 없게 할게.”
재환의 말에 미연은 일단 짐 정리부터 해야 될게 많았지만, 고개를 끄덕이며 애들에게 말했다.
“승윤이, 승아! 앞으로 할아버지네로 이사갈건데 괜찮아요?”
“얼마나 거기 있어야 돼요?”
“다시 오라고 할때까지.”
재환은 그렇게 말하다가 지금 말은 너무 딱딱한 것 같아서 아들과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승윤이 하고 승아, 잘 들어. 아빠가 지금 회사 일이 너무 바빠서 여기서 일을 할거야. 그거 때문에 할아버지댁에 있는거니까 당분간 거기서 학교랑 유치원 잘 다닐수 있지?”
“네!”
재환은 빙긋 웃으면서 특히 딸의 교육을 두고 말했다.
“애들 주소 그쪽으로 옮겨서 입학을 아예 서초쪽으로 해 줘.”
“네? 그럼 돌아와서도···.”
“이사를 가거나 향후 그것도 준비할게.”
사실 지금 집에서 양재동 희경 내외의 집은 10km도 안 되는 곳이라 차로 엎어지면 닿을 곳이긴 했다.
어쨌든 재환은 그렇게 가족들을 잠시 피신 시켰다.
1주일이 걸려서 양재동으로 가족들이 다 이사를 가고, 재환은 부모님에게 부탁했다.
“앞으로 뉴스가 조금 시끄러울거예요.”
“그래 뭐, 정치권하고 얽히니 게이트까지만 안 된다면야···.”
“그럴수도 있고요.”
재환은 안주머니에서 통장과 도장 하나를 건넸다.
“양육비입니다. 전부 쓰셔도 되고요.”
“야 임마! 부모자식 사이에···.”
“받으세요. 지난번 양도 하시고, 필요하실겁니다.”
한때는 혜성그룹의 초대 회장이었지만, 자식을 그 자리에 앉히면서 집 하고, 최소한의 부동산 빼고는 모든 현금을 재환에게 물려줬던 희경 내외.
이제는 재환이 돌려줄 차례였다.
“안에 5천 들어있어요. 당분간 사시는데 문제 없을겁니다.”
재환은 그렇게 말하면서 아이들과 와이프하고 인사를 한다음 돌아갔다.
희경은 혀를 차면서 도장과 같이 들어있는 통장갑을 꺼냈다.
“짜슥이 누구를 무슨 뒷방 늙은이로 아···.”
희경은 금액을 보고서 움찔했다.
“여보, 왜 그래요?”
“이 새끼가 5천만원이 아니라 5천억을 넣었네.”
“넷!?”
그리고는 그 뒷장에 편지까지 하나 남겨놨다.
희경내외는 그것을 펼쳐봐 읽었고, 그들은 깊은 탄식을 내뱉었다.
***
그 뒤로 재환은 혼자 살게 될 타워팰리스 빈집에서 서류들을 모았다.
서재에 있던 컴퓨터와 프린트를 가져와서 수백 장의 갱지를 준비해서 출력하고, 제본으로 만들어 하나하나 자료를 모았다.
그리고는 자료를 전부 숙지해둔 다음 길게 한숨을 내쉬며 담배를 물었다.
“이미 한 번 지나가 봤던 일이고, 그러면서 어떻게 움직이는지도 알고 있어.”
재환은 달력을 보면서 아직 ‘그 때’에 대해서는 한참 전의 이야기였지만, 지금 터트려버리겠다고 다짐했다.
물론 거기에 대한 복안까지도 마련하고 말이다.
***
재환은 그렇게 자신을 찾아다니던 정은규를 불렀다.
신누리 호텔에서 가볍게 차나 하자는 말에 그는 드디어 신재환이 VIP와 함께할 거라는 기쁨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약속시간의 1시간 전 먼저 와서 그 동안 혜성그룹에게 후원을 요청할 재단, 그리고 인사이동에 대해서 후원을 해야 할 정치자금에 대해 요구를 할 셈이었다.
‘뭐, 거기에 대한 당근은 마련돼 있으니 이제부터 협상을 하면 되겠지. 그 양반도 결국은 사업가니까 거절 할 수 없는 제안으로.’
아성, KS, 대화··· 그리고 그 삼신까지도 포섭이 됐는데, 혜성그룹이 오래 걸리긴 했었다.
그리고 약속 시간 5분 전에 맞춰 재환이 모습을 드러냈다.
미리와서 기다리고 있던 정은규는 반갑게 재환을 맞이했다.
“어서오십시오. 회장님.”
“···.”
재환은 먼저 와 있는 정은규의 인사를 받으면서 조용히 차를 시키고 말했다.
“약속시간 5분 정도 남았으니, 본론은 그때 들어가기로 하지요.”
그러면서 차가 올때까지 기다리는 재환.
그리고 정확히 차가 오면서 약속시간이 되자 정은규가 먼저 입을 열었다.
“먼저, 이 자리에 저를 불러주신 것에 대해 감사 드립니다.”
“그래도 댁이 있어야지 그 사람에게 이야기를 할 수 있으니 말이죠.”
“하, 하하. 저 역시 직접적인 소통은 불가합니다. 그저 나랏일을 하시는 분들을 보좌할 뿐인 몸입니까요.”
그래도 본인이 비선이라는 것은 숨기고 있는 정은규, 그리고 이 인물을 이용해서 그 위엣놈의 목을 붙잡을 기회가 되었다.
“그래서 말인데, 그동안 내가 정 실장을 푸대접한 것도 있고, 그 위엣분과 이야기를 하고 싶소.”
“하하, 전달은 드리겠지만, 어떤 윗분을 말씀하시는지요?”
“창조한국재단 이사장.”
“!”
순간 정은규의 뒷골이 서늘해졌다.
그것은 아직 드러나지 않은 법인인데 그것을 재환이 먼저 알고 말했다.
“무, 무슨 말씀을 하시는건지?”
“최순혜.”
“···!”
그 존재까지 이름을 알게 되자 정은규는 다시 한 번 당황했다.
그리고 재환은 담담한 얼굴로 차를 마시면서 대화했다.
“이쪽은 회장이 직접 왔는데, 그쪽에서도 흔히 말하는 ‘그림자 실세’가 와야 정상 아닌가?”
“회장님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으나, 그 분의 경우는···.”
그 순간 재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대로 대화에 임할 생각이 없구만.”
그리고는 더 이상 볼 일 없을 거라는 투로 떠날 준비를 했다.
그 순간 정은규는 곧바로 재환을 붙잡았다.
“회장님! 제가 즉시 연락을 해 보겠습니다.”
“···.”
재환은 그 상황에서 한 번 고개를 돌려보며 말했다.
“사흘 주겠소. 그 사람 내 앞으로 데려와서 안전한 장소에서 이야기 할 수 있는 곳을 정하시오. 만약 내가 이곳에 파파라치의 사진 하나라도 엮이는 순간, 혜성은 아마 나라의 간신배들을 잡는 곳에 후원을 할 생각이니.”
재환의 제안에 정은규는 백기투항으로 무조껀 따르기로 했다.
그리고 제대로 된 이야기는 그때 진행하기로 했다.
정은규와 그 약속을 한 재환은 차에 올라타면서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미 배수진 까지 쳤어. 이게 마지막 싸움이 될 수도 있지···.”
모든 것을 다 걸고 여당이든, 야당이던 걸리는 놈이 있다면 다 쳐부술 것이다.
재환은 그것을 염두해 두고서 움직이기로 했다.
***
[뭐야? 나를 보자고?]
“그렇다는 구만, 최 이사장! 아무래도 직접 나서 줘야겠어.”
한때는 부부관계였지만, 지금은 권력의 실세와 행동대장 수준으로 위상 차이가 떨어진 둘의 사이였다.
[그 인간도 진짜 번거롭게 하네? 신 회장 문제는 당신 선에서 해결하겠다고 말하지 않았어?]
“그게 말이야. 자신이 직접 등장하는데, 그쪽에서도 실세가 나와서 대등하게 이야기 하는게 좋지 않겠냐고 하더라고.”
그 말에 변덕스런 최순혜의 감정이 조금 누그러진 것 같지만, 그래도 요구하는 내용은 많았다.
[확실하게 내가 오면 따를게 있어? 일단 마사회 삼신이 하기로 했는데, 혜성은 뭔데?]
“의료재단하고, 문화재단, 그리고 평창올림픽에 대한 공익광고와 우리쪽 사람들 고용 비용까지 전부 그쪽에 청구할 수 있어.”
그것만 하더라도 막대한 이권인데, 이들은 다른 기업에도 그랬듯이 혜성도 나라를 위해 이정도는 해 줘는게 당연하다 생각했다.
물론 그 나랏일과 기업의 기증 사이에서 벌어지는 떡고물을 얼마나 뜯어 먹을지는 상상이 안 가지만 말이다.
***
한편 재환은 재단의 사람들하고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나라에다가 그런거 지원해 주는거야 많이 있긴 했는데, 그걸 이제부터 끊는다고?”
“일시 보류라고 생각하세요.”
재환의 말에 의료재단과 학교를 운영하는 신희지 이사장이 걱정스럽게 말했다.
“조카, 아니 신 회장! 나도 이야기는 대략적으로 들었어. 하지만 이렇게 내는걸 뇌물이나 정권의 삥이라고만 생각은 말게.”
“무슨 말입니까?”
“어디까지나 의료재단과 대학재단은 교육부와 보건복지부의 국가지원이 있는 사업이네. 거기에 세금 문제도 있는걸 국가기증으로 딜을 보는거야.”
단순 뇌물이 아니라 복잡하게 얽혀있는 사람이 많으니 그것에 대해서는 알아달라는 숙부의 말.
재환 역시도 그건 숙지하고서 움직일 준비를 했다.
“망아지나 키우는 할마시한테 5억을 주는것과, 보건복지부의 진짜 고생하시는 외청 분들에게 5억 기증하는건 차이가 있죠.”
“음? 그게 무슨 소리냐? 망아지 키우는 할매라니?”
“숙부님께서 말하는 그 국가기증과 재단 속에서 빼먹는 놈들이 있으니 그것들 조질 때까지 잠시 기부 보류라는 겁니다.”
“!?”
재환은 자신이 준 사흘의 시간을 두고서 곧 초대를 하겠다는 ‘그 녀석’ 에 대해 맞이할 준비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