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 슈거 대디.
재환이 집무실에서 일하던 중 노크 소리가 들렸다.
똑똑-
“들어와요.”
문이 열리자 기환이 서류를 한가득 들고 왔다.
재환은 그 모습을 보고는 안경을 벗으면서 그를 맞이했다.
“인트라넷으로 보내면 내가 알아서 검토할 텐데. 뭘 직접 가져오냐?”
“내가 말한거니까, 기획서는 직접 확답을 받으려고 그러지.”
“그게 그 인수 안건이야?”
재환은 그것을 받아들고 서류봉투를 열어 내부의 기획서를 검토했다.
기환은 소파에 앉아 조마조마하게 형님이 검토하고 있는 기획안이 통과되기를 기다렸다.
이사회까지 안 가고 회장의 직권으로 요청한 건이었으니 여기서 신재환이 OK 싸인만 내리면 되는 일이었다.
그리고 재환은 그것을 하나하나 보면서 피식 웃었다.
“이걸 하루 만에 만들었을 리는 없고, 미리 준비하고 있었나보구만?”
어제 술자리 이후로 그러라고 했는데 이렇게까지 준비한 걸 보니 그 정성이 갸륵했다.
그리고 내용 자체도 나쁘지 않았다.
‘일단은 인력과 장비를 인수하고, 그걸로 방송국 법인을 만들고, 인터넷 방송과 IPTV로 나간 다라···.’
유튜브 시대였으면 떡상 각이었지만, 아직은 2-3년 정도 이른 순간.
그리고 지금의 인터넷 방송은 그다지 좋다고 할 수 없는 이미지였다.
크리에이티브나 스마트 리더라는 인방의 이미지를 지금 만들려면 여러모로 철저한 준비가 필요했다.
거기에 혜성게임즈 자체로만 인수하기에는 살짝 밀리니 본사의 지원은 필요한 상황.
재환은 시간이 걸려도 그 기획서를 천천히 읽고, 한 번 더 정독한 다음 덮었다.
“흠.”
“···.”
“차나 한잔하자.”
재환은 비서에 연락해 다즐링 두 잔 가져오게 한 다음 소파로 다가가 앉아서 티타임을 가졌다.
“나쁘지 않았어.”
“저, 정말?”
“뭐, 좋지도 않지만.”
“···.”
“내가 자세히는 몰라도, 그 게임 방송이라는 거 말이야. 스타크래프트 리그까지 하면서 잘나가다가 승부조작으로 시장 말아먹지 않았냐?”
아픈 곳을 찌르자 기환의 표정이 굳어갔다.
“거기에 게임 방송 대다수가 파프리카TV, 콘TV 같은 개인 인터넷방송으로 대세가 넘어가는데 거기에 대한 해결책은?”
재환이 무섭게 추궁했다.
이 정도의 복안은 가지고 있을거라 여겼고, 기환은 잠시 머릿속을 정리한 다음 바로 말했다.
“지난번에 피시방 게임 유통 사업 있잖아? 그거하고 이어서 같이 사업을 하면 돼.”
“음?”
“피시방 게임 유통으로 수수료가 고정 수익이 돼고, 게임방송 인력들하고 같이 대표 센터랑 대회 만들어서 키우면 시너지가 될거야.”
“그러니까~ 스타판 망했다면서 거기에 대한 새 캐쉬카우 말이야.”
“지금 그것 때문에 해외 게임사들을 통해서 스타크래프트만큼 국내 유통을 할 수 있는 게임들을 협상하고 있어. 그리고 앞으로도 리그전을 열어서 고정팬을 확보할 수 있고.”
“진짜?”
“지금 중국하고, 미국에서 협상을 하고 있는 게임이 있거든? 내가 봤을 때 이건 무조껀 떠! 5인 팟으로 10명이 하는 게임인데, 리그전으로도 대박이야!”
겜알못이니 일단 이 녀석이 하는 말에 투자하기로 했다.
‘믿었으면 의심 안 한다.’ 재환의 97년 혜성 입사때부터 지론이었고, 피붙이를 못 믿는 사람이 아닌 재환은 고개를 끄덕이며 차를 마시고 말했다.
“초기 예산으로 천억 챙겨주마.”
“!”
“5년 안에 수익 낼 수 있지?”
“고, 고마워. 아니, 감사합니다. 회장님!”
“감사는 재무재표로 보여주는 거다.”
재환은 차 다 마셨으면 어서 가서 새 사업 준비하라면서 기환을 밀어줬다.
그리고 얼마 안 있어서 CBM내에서 폐국 소식이 인터넷을 통해 알려졌다.
지상파 뉴스도 아니고, 공식계정 SNS로 짤막하게, 그것도 총괄프로듀서나 캐스터 등의 말로 빌어진··· 한 마디로 모양새 굉장히 안 좋은 폐국 소식이었다.
팬들이 들고일어났지만, 한국에서 케이블 게임 방송국의 팬들이라 해야 소규모.
거기에 제일그룹이 운영하는 라이벌 ‘게임온넷’과 양대 세력을 구축하고 있어서 라이트 팬층은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그리고 폐국 날짜가 내년 1월로 잡혔을 때, 기습적으로 혜성게임즈가 발표했다.
[혜성게임즈, CBM과 인수 논의.]
[신기환 대표 ‘한국 게임산업을 위해 원만한 합의가 됐으면 좋겠다.’]
재환은 관련 인터넷 기사를 회장실에서 보고 있었다.
‘이번에도 혜성이 나섰다.’,‘진짜 갓재환님이 다 해결해주신다!’, ‘한국 서브컬쳐의 수호신’이라는 낮간지러운 칭찬 릴레이가 가득했다.
재환은 기환이 하는 일을 도왔는데, 자신에게 다 좋은 일이 된거 같아 피식 웃었다.
성공하면 앞으로 혜성게임즈 관련 사업을 전부 계열 분리해서 독립된 그룹으로 모든 것을 기환이에게 증여해줄 생각이었다.
그리고 재환은 아내의 요청에 여의도로 향했다.
지난날 착공에 들어간 혜성백화점 여의도센터에 대한 공정률도 이미 50%를 넘었고, 그 옆에 있던 혜성아카데미 빌딩은 미래의 K-팝 스타들이 가득한 꿈의 무대가 되어 있었다.
회장님이 오신다는 말에 임원들이 전부 기다려서 대기하고 있었고, 재환이 내리자마자 인사를 올렸다.
“뭘 그렇게 다 나와 계시고.”
재환은 손사래를 치면서 신동협과 같이 안으로 들어갔다.
“요새 방송활동하랴, 혜성에서 일하랴 바쁘시죠?”
“하하하, 저는 실내 세트장 MC만 맡아서 상대적으로 조금 편하기는 합니다.”
“그래도 한번에 일 두 개하는 거 보통일이 아니에요.”
“이제 저보다는 유재현이 더 활동을 잘 할 겁니다. 국민MC가 있는데 저는 경영에 집중해도 돼죠.”
톱 MC를 여럿이나 모아놓고 정산도 잘 해주니 짭짤하게 수익이 올라왔다.
내부로 들어오자 ‘K-팝’을 홍보하면서 수많은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유재현과 신동협, 김영만 등이 탄 연예대상 사진들이 대문짝만하게 붙어있었고, 위로 올라가자 수많은 연습생들이 데뷔를 위해 준비하고 있었다.
재환은 혹시라도 방해가 될까 문 너머로 각자의 방을 지켜보기만 하고 쭉 걸었다.
그렇게 올라가다 보니 다음 층에는 녹음실.
그곳에서는 미연이 직접 원고를 들고 발성 연습을 시키고 있었다.
“자, 다시! 감정을 실어야 된다고, 우리는 표정연기가 안드러나지만, 캐릭터가 표정 연기를 대신한다 생각하고, 외쳐봐!”
대사를 읊는 수많은 성우 연습생들.
그리고 미연은 박수를 치면서 말했다.
“입 모양하고 싱크 잘 맞추자! 지금 잘하고 있어. 한 번 더 해보자고!”
“잘 가르치네?”
19살에 데뷔해서 지금 당장 업계 가도 나름 연차 있는 중견 성우라더니 남들 가르치는 것 역시도 괜찮아 보였다.
확실히 결혼 이후 활동을 접었지만, 후진 양성에 대해서 열의를 쏟는 아내를 보고 재환은 가만히 지켜보다 휴식시간이 되자 그때 들어왔다.
“어머! 회장님?”
재환이 들어오자 안에 있던 연습생들과 미연이 화들짝 놀랬다.
“미안해요. 잠깐 애들 가르치고 바로 내려오려 했는데, 하다보니···.”
“괜찮아. 이러는게 더 활기 있어 보인다.”
재환은 10여명의 연습생들에게 손을 들어 인사하고는 그들에게 열심히 하라고 격려해준 다음 안으로 들어왔다.
“지난 번에 말한거 어떻게 됐어?”
“게임 캐스터하고 성우 문제로 한 명 섭외했어요.”
“그래?”
“서아리라고 알아요? 게임 캐스터로 유명한데, 이번에 CBM게임즈 없어지면서 소속사도 붕 떴다던데.”
“음··· 이름은 들어봤어.”
사실 과거의 삶에서는 성우가 아니라 MC로 알고 있던 친구였는데, 인연이 닿아서 지금은 혜성의 소속사로 들어왔다는 말에 환영해 주기로 했다.
“아, 그리고 말이에요. 이것 좀 봐주세요.”
“음?”
재환은 노트를 하나 보여주는 아내를 보고서 하나하나 읽어봤다.
“이게 뭐야?”
“이번에 계약 만료나 소속사가 없어서 활동이 어려웠던 성우들이요.”
“음··· 말인즉슨.”
“다 영입하고 싶어요. 그래도 업계 사람들 밥그릇은 지켜야죠.”
기환이도 그랬는데, 미연 역시도 재환을 통해 뭔가 사정이 어려운 동종업계 사람들을 돕기 위해서 나서는 것 같았다.
“이 사람들 다 데리고 오는데 얼마나 드는데?”
“대다수는 자유계약인데, 일부 소속사랑 계약 꼬인 사람들 데리고 오는데 변호사 선임비 정도?”
“혜성그룹 법무팀 쓰게 해줄테니까 다 데려와.”
“저, 정말로요?”
“자유계약이라는데 내가 뭘 따져? 어차피 데려오면 강사로 쓰던, 외주를 주든 뭐든 할 수 있잖아?”
“고마워요! 여보!”
미연은 재환을 와락 끌어안고, 자신도 요새 힘들다는 업계에 도움을 줄 수 있어서 자부심을 느꼈다.
내친김에 재환은 다른 연예인들에 대해서도 알차게 써먹기 위해 모든 자료들을 살펴봤다.
“이 친구는 얼굴은 예쁜데··· 어이구, 7번이나 떨어졌어?”
아나운서 지망생으로 이곳에서 많은 교육을 받았는데, 계속되는 낙방에 결국 마지막 시험을 두고 포기한다는 사례.
“여러모로 아쉽죠. 최종까지 갔는데 꼭 거기서 한 단계를 못 올라가요. 실패하면 소속사 내에서 배우 데뷔라도 시키려고 하는데, 그걸 얘가 할지.”
“고시 같구나. 청춘을 바쳤는데 오래걸려서 실패하면 남는 게 없는···.”
재환은 씁쓸한 얼굴로 이력서들을 보다가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생각한게 있는데, 얘를 거기에 써야겠다.”
“네? 어디에 쓴다고요?”
“각 계열사마다 사내 방송국을 만들고, 본사 내에서도 프레젠테이션 용으로 진행 요원들이 필요하거든? 이 친구 다음에도 떨어지면 혜성그룹 사내방송 아나운서 제안해봐.”
“!”
“월급도 공채 직원들 만큼 줄 거고, 언제든지 다른 곳에서 제안 오면 갈 수 있게 해 준다고 해.”
그렇게 해서 아나운서 공채 중에서 아깝게 떨어졌지만, 그냥 떠날 필요 없이 재환이 받아준다고 선언했다.
“그리고 아이돌들 말이야. 데뷔 시키기 전까지 정산 문제라는거···.”
“저도 아낀다고 아끼는데··· 1인당 최고 3억은 들어요.”
“그럼 데뷔하자 죄다 빚이잖아?”
“선금 같은거죠. 그걸 음악활동과 행사 등으로 충당하는거고.”
재환은 머리를 긁적이다가 말했다.
“정산이야 혜성은 문제 없겠고, 그래도 최소한의 필요한 것은 만들어야겠지. 품위유지비는 필요하니 실비 청구하게 만들자.”
“음?”
“그러니까 월 50만원 정도 카드를 쓰고 연습생 중에서도 데뷔 앞두고 있는 친구들에게는 최소 생활비는 쓰게 하자고, 이건 빚이 아니라 데뷔 이전 용돈식으로.”
“여보! 그러면 한 사람당 600씩 해서 얼마가 나가는데요!”
“언제부터 혜성이 그런 걸 아까워 했어?”
게임계 사람들이다, 성우 지망생이다, 아나운서 후보생이다 전부 다 재환이 사재를 투입해서 유지하고 있는 혜성 아카데미인데, 거기서 몇 십억 올라간다고 그걸 아깝다고 생각할 사람 아무도 없다.
“내가 어린시절 배곪은 아이돌들 봐서 아는데, 적어도 최소한의 용돈은 가지고 다니게 하자고.”
“이, 일단 신 부사장에게 말해볼게요.”
“음.”
재환은 그렇게 혜성그룹의 이름으로 문화계에 있는 모든 배고픈 예술가들에게 일자리와 용돈을 제공했다.
‘누구는 땅파서 장사하냐?’라는 마인드로 제대로 된 기업이 아니라 난립하던 수많은 중소회사들 속에서 복잡하게 꼬인 계약, 선금 받고 한푼도 못받는 정산, 입사 실패하면 떨어지는 지망생, 회사 망해서 붕 떠 버린 사람들.
재환은 모두를 다 포용해줬다.
그에게 있어선 그동안 투자하는 배당금만으로도 충분히 제공할 수 있는 인건비였다.
그리고 이 소식이 들렸을 때, 재환은 TV를 통해 자신의 의지를 보게 됐다.
[혜성아카데미는 향후 소속사 분쟁이나, 계약 문제로 얽혀있는 연예인들을 구제할 수 있는 무료 법률센터를 운영하고, 연예계 종사자들에 대한 복지를 만들겠다고 선언했으며, 정산 문제 또한 손을 보겠다고 합니다.]
뉴스에 나오는 혜성그룹의 대대적인 예술인 지원 사업.
그리고 재환 대신 그 말을 알리는 것은 자신의 사랑스런 와이프였다.
“승윤아, 승아야! 엄마 나온다!”
“와 진짜! 엄마다!”
TV에 나오는 엄마를 보고서 방방 뛰는 아이들.
그리고 미연이 처녀시절 미모 그대로의 모습으로 기자들에게 말했다.
[한미연(혜성아카데미 원장): 회장님의 의지이자, 제 의지이기도 합니다. 앞으로 우리나라에 가난한 예술인이라는 마인드부터 바꿔나가고 지원을 아끼지 않겠습니다.]
[SBC기자: 아카데미 수익보다 높은 지출인데 그것을 혜성그룹이 모두 부담한다는 말인가요?]
[한미연: 우리 남편이 그러더군요. 나이가 들수록 입은 닫고, 지갑은 열라고요. 혜성은 아무 소리도 안합니다. 그리고 저희는 모두를 도울 겁니다.]
“야이씨~ 내가 언제 저런 말 했다고!”
‘나이 먹을수록 입은 닫고, 지갑은 열어라!’
틀린 말은 아니지만 재환이 그랬다고 금칠을 해주는 아내를 보고 재환은 웃음을 참았다.
그 사이 아이들은 아빠 스마트폰을 가지고, 그 뉴스 다시 본다고 비밀번호 패턴을 막 눌러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