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재벌의 삶!-208화 (208/244)
  • 208- 빅딜은 그만한 이유가 필요하다.

    재환은 종로의 한정식집에 도착하고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여기 진짜 오랜만에 오네?”

    5-6년 전만 하더라도 웬만해서 기업인간의 회담은 종로, 여의도 일대였지만 지금은 재환이 불러서 강남에서 만나곤 했다.

    한남동이나 성북, 평창, 이태원 등에 거주하는 구 재벌들과 청담동, 내곡동, 양재동 일대에 사는 신 재벌들의 지역에서 재환은 이제 후자 쪽에 속했다.

    어쨌든 오랜만에 큰 건을 준비하고서 들어온 재환은 요릿집 전체를 대절한 정목헌의 초대에 응했다.

    “어서오십시오. 오랜만에 뵙습니다. 회장님.”

    한정식집의 여주인이 한복을 곱게 갖춰입고 재환에게 인사하자 재환은 웃으면서 안내를 받았다.

    드르르륵-

    문이 열리면서 안에 있던 정목헌이 일어났다.

    “아, 신 회장!”

    “아이고, 정 회장님.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재환은 반갑게 인사하면서 악수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옆에서는 요릿집 여사장이 직접 전통 화로에 석쇠로 최상급 한우를 구워 식탁 위에 올려줬다.

    “자, 오랜만에 만났는데 먼저 한 잔 해야지?”

    도자기에 담긴 증류소주를 한 잔 따라주고, 재환도 똑같이 채워주며 한 잔 쭉 들이켰다.

    “요새 신 회장 같은 경영자 찾기 힘들지? 세계구로 노는 양반이잖아?”

    “아이고, 전 아직 멀었습니다. 적어도 왕회장님 정도는 되야죠.”

    정목헌의 아버지 왕회장 정형주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그는 착잡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나는 아버지 발밑에도 못 따라가니까.”

    “에이~ 회장님도 지금의 아성그룹을 훌륭하게 이끌어가시지 않습니까?”

    “훌륭하게라··· 그렇게 생각하나?”

    재환은 정목헌의 그런 반응을 유심히 살펴봤다.

    그동안 수많은 재벌가 오너들을 만나왔지만, 이 분 만큼 센치한 감정때 확 드러나는 경우는 없었다.

    포커페이스가 잘 안 되는 타입이라고 할까? 그러니 저 상황에서는 분명 뭐가 있다는 거다.

    재환은 친구와 같이 아성그룹과 오늘 자리에서 무슨 빅딜이 나올지 여러 가지 시나리오를 구상하고 온 상황이었다.

    질 좋은 한우를 먹고, 소주를 마시면서 재환은 차분히 그 이야기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드디어 정목헌이 입을 열었다.

    “최근에 전자 사업에서 많은 성과를 냈지요.”

    “네, 어느정도는 실적이 올라오고 있습니다.”

    “그중에서 반도체가 특히 유명하고요.”

    재환은 여기서 터져나오는 웃음을 겨우 참아내면서 조용히 이야기를 들었다.

    “반도체는 아성도 유명하지 않습니까?”

    “?”

    정목헌은 이제야 할 수 있는 만남의 목적에 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담배 한 대를 꺼내고 불을 붙인다음 만감이 교차하는 얼굴로 아성전자의 옛 이야기를 시작했다.

    “삼신이 하는 것은 우리도 한다, 물론 이건 반대 상황으로도 똑같았죠. 그 친구들이 자동차를 하니 우리가 전자를 시작했고.”

    그러면서 태생적으로 문제가 있었던 아성전자의 아킬레스건을 유감없이 말했다.

    “이천에 30만평 규모의 반도체 공장, 그 이후로 PCS폰··· 하지만 궤도에 오르기 전에 IMF가 와 버렸죠.”

    “네, 저희도 그때 포기한게 많았죠.”

    “GH의 반도체 사업부와 빅딜을 해서 얻어낸 규모였으나 순간의 선택으로 인해서 적자가 점점 커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신형 장비들을 언제나 한 발씩 늦게 도입했어요.”

    현재 아성전자의 시가총액이 9조인데, 그 중 반도체 사업부만 해도 절반은 될 것이다.

    문제는 한 세대 이전의 기술력, 그리고 완제품인 휴대폰과 컴퓨터를 각각의 브랜드로 독립시킨 이후로 자급자족만 근근이 하는 상태였다.

    “잘 되실 겁니다. 그래도 반도체는 계속 뜨게 돼 있어요.”

    “반도체는 뜨겠지만, 아성은 못 뜨겠지.”

    “네?”

    정목헌은 소주 한 잔을 들이키고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신 회장, 내 그냥 터 놓고 말하겠소. 아성전자 반도체 사업부··· 인수해갈 수 있겠소?”

    “!”

    아성전자 반도체, 그 옛날 하이렉스라 불렸던 그곳이 자신의 소유가 된다.

    물론 과거의 삶의 그 위상이 아니라 조 단위로 비싸면서, 엄청나게 투자를 해야겠지만, 일단은 확실하다.

    “갑작스럽게 이렇게 말하시니 당황스럽군요.”

    속으로는 그렇게 말하지만, 재환은 나가서 만세삼창을 외치고 싶었다.

    “이번에 반도체 사업을 접은 다음, 원래 아버지께서 시작하신 근본으로 돌아가려고 하오.”

    “네?”

    “대한산업은행이 아직도 아성건설을 소유하고 있어요. 반도체사업부가 팔리면 그곳으로 갈 겁니다.”

    “아!”

    생각해보니 왕자의 난 이후로 공중분해된 아성그룹의 엑스칼리버, 아성건설은 아직도 32%의 산업은행 지분이 있었다.

    지금 아성전자 반도체를 인수한다면 3조 5천억은 될 텐데, 그 돈은 바로 아성건설의 산업은행 지분을 인수하는데 간다.

    그렇게 해서 아성그룹은 전자대신 해운과 건설, 엘리베이터, 금융 쪽으로 재편이 될 것이고 재환은 혜성전자를 더욱 더 강화 시킬 수 있었다.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지는 빅딜.

    단순히 아성의 위기여서 사가라는게 아니라 나름의 빅 딜이었다.

    “저에게는 충분히 생각해볼만한 제안이지만··· 갑작스럽게 이런 제안의 이유라도 혹 있으신 겁니까?”

    “후우, 내가 신 회장 앞에서 뭐를 속일까?”

    정목헌은 답답한 속을 소주로 달래면서 말했다.

    “먼젓번에 북한하고 냉전이 더욱 오래갈 거라 했지.”

    “아, 그건 술자리에서 조카분에게 농담으로 한 말이···.”

    “농담이 아니던데? 금강산 관광 중단부터 해서 더 이상의 남북관계 화해는 없을거요.”

    “···.”

    “내가 이상명 대통령 바짓가랑이를 붙잡아도 어쩔수 없는 상황이 온 것이고··· 아성재단은 수 조원을 허공에 뿌린 꼴이 된 거지.”

    재환은 톱니바퀴가 이렇게 맞물려 돌아간다는 게 묘한 기분이었다.

    작두 타는 것 같다고 뭐라도 한 마디 하라는걸 술먹고서 ‘앞으로 다음정권까지 남북관계는 고러울 것이다.’ 라고 말했는데, 실제로 재계에서는 청와대를 통해 앞으로 남북간의 협의는 없을거라 선언했다.

    덕분에 금강산 관광과 이산가족 상봉을 하던 아성재단은 90년대부터 투자한 돈을 절반도 회수하지 못하고 허공으로 날아갔다.

    그 상황에서 적자가 누적되는 아성전자의 위기, 때마침 산업은행에서 IMF 시절 법정 관리하는 기업들을 공개 매각 선언.

    모든 게 하나씩 이어져서 톱니바퀴로 돌아가는 형국에 재환은 일단 그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알겠습니다. 저희가 투자자문을 구해서 적당한 가격을 제시하겠습니다.”

    “고맙소! 정말 고마워!”

    정목헌 회장은 활짝 웃으면서 이번에도 혜성에게 신세를 입게 되었다.

    ***

    “그렇게 돼서 말인데, 너희 회사 자문 정말 짜더라?”

    아무래도 삼신에서 기술이전을 받은 반도체니 현규에게는 이야기를 했는데 그쪽은 의외로 쿨했다.

    “나도 들었어. 너 정말 힘든길 갈 것 같더라.”

    이천과 청주에 대규모 공장이 있는 아성전자 반도체는 일단 수 조원을 들여 인수해도 그 이후가 문제였다.

    “노광공정 기기 새로 들어오는 것도 문제인데··· 일본은 안 판다지?”

    “천상 유럽 가야 하는데, 그 기술은 그곳도 얼마 없어.”

    재환은 현규의 이야기를 듣고는 쿨하게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노광장비는 니들 걸로 쓰자.”

    “뭐?”

    “아성전자 반도체 인수한다면, 앞으로 둘 다 파운드리(위탁생산) 위주로 가려고 한다.”

    “어, 그러면···?”

    “너희는 계속 IDM(생산설계)쪽으로 가고, 우리는 거기서 파운드리로 가려고 한다. D램은 넘쳐날거야.”

    재환은 거기에서 삼신하고도 딜을 걸었다.

    “내가 미쳤다고 아성반도체까지 먹었으니 너희하고 자웅을 겨루자고 할까? 이대로 각자의 준비를 하자고.”

    낸드플래시 등의 롬과 D램 사업은 여전히 삼신의 우위.

    그리고 혜성전자는 혜성 아메리카의 연구소를 적극적으로 이용해 그래픽카드와 CPU쪽으로 갈 것이다.

    “이번에 우리가 레이니온까지 대주주가 되면, 스마트폰하고 PC에서 그래픽으로 갈거다.”

    어차피 그쪽은 삼신이 몇 번이나 시도했다가 D램과 낸드플래시 등으로 집중하여 전혀 상관이 없는 곳이었다.

    “아성반도체를 인수한 다음에는 우리도 슬슬 준비해야겠어.”

    “음?”

    “액면분할. 우리도 1/50으로 해서 만원대 주식으로 가야 될 것 같아서.”

    삼신에 이어 혜성 역시도 치솟는 주가에 주당 100을 앞두고 있으니 슬슬 액면분할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것도 삼신증권에게 맡겨라. 너는 VVIP니까 말이야.”

    “오케이.”

    ***

    얼마 후 재환은 혜성그룹과 아성그룹 사이의 빅딜을 진행시켰다.

    [혜성전자는 오는 15일. 아성전자의 반도체 사업부를 3조 4870억에 인수하였습니다.]

    [이후 아성그룹은 선대 정형주 회장의 아성건설 인수를 위해 대한 산업은행과 협상을 준비한다고 합니다.]

    반도체를 내놓고, 건설을 준비하는 아성그룹.

    그리고 얼마 안 있어 재환은 우연히 재미난 이야기를 들었다.

    ***

    “나 이제 슬슬 이것도 정리하려고요.”

    “네?”

    혜성백화점 청량리점에 왔다가 오랜만에 온 미금저축은행에서 뜻밖에 이야기를 들은 재환이었다.

    “내 나이가 일흔이 넘었는데, 이제는 그만 할 때가 됐어요.”

    김미금 사장은 그렇게 말하면서 전국에 있는 자신들의 지점을 하나하나 정리하려고 한다 말했다.

    “내가 대구에서 딸라 환전 스무살 때 시작해서 반백년 넘게 했으면 오래 한 거야.”

    “여러모로 재계에 큰 손이셨던 분이 양지로 올라오신뒤로 떠나신다니 서운해 하실 분 많겠군요.”

    “그래서 말인데, 내 마지막으로 신 회장님에게 부탁좀 드리겠소. 어떻게 좋은 회사가 없을까?”

    “혜성은 금융사를 운영안한다는게 제 철칙이긴 합니다만··· 사장님 부탁이시니 한 번 알아는 봐야겠군요.”

    전국 지점만 17개에 자산 규모가 10조에 육박하는지라 웬만한 1금융권의 지역은행들도 함부로 대하기 힘든 슈퍼 2금융권이다.

    게다가 이 분이 사업 정리하신다는게 공교롭게도 2년 뒤에 생길 ‘저축은행 대규모 파산사태’ 이전이니 타이밍 또한 적절했다.

    재환은 사업 정리를 하실 때 알토란같이 키운 저축은행들을 인수할 곳을 한 번 알아보겠다고 약속하고는 자리를 나섰다.

    “생각해보니 저 분 덕을 많이 보긴 했지.”

    처음 만남만 하더라도 ‘아 쩐주 안 만나요!’라고 하고 자신과 사업 논의를 하고 싶으면 정식으로 양지에 올라와서 사업하라고 했는데, 정말로 올라와 그동안 혜성유통하고 혜성전자 부지와 지점 사들이는데 1조원 가까이 지원해줬던 재환의 스폰서였다.

    마지막 가는길 편안한 은퇴가 되도록 재환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

    “아성그룹하고요?”

    “리엔이 한 번에 다 먹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데? 내가 너무 매튜 사장을 과소평가 한 건가?”

    재환은 서울에 잠깐 온 제임스 리를 불러서 리엔 코퍼레이션의 이름으로 미금저축은행 인수를 추진하고, 거기에 아성그룹 내 아성증권하고 협업을 제안했다.

    “어차피 아성그룹이 금융업 키운다고 했으니 이 참에 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대신 재환은 후방에서 리엔에게 투자해서 어느 정도 중계료는 챙기기로 했다.

    반도체라는 선물을 줬는데, 본인들의 근본이라 해도 건설사 하나 인수하는 거 도와주고 입 닦기에는 그동안 쌓아놓은 인맥이 아깝기도 했다.

    “어떻게 잘 정리해서 한 번 매튜에게 진행해 보라고.”

    “알겠습니다. 곧바로 미국에 연락하겠습니다.”

    제임스 리가 떠난 뒤로 재환은 기지개를 켜면서 코멧폰2 개발과 전기 경차 프로젝트나 빨리 완성되면 좋겠다며 좀이 쑤셔 있었다.

    “올해도 어떻게 방방곳곳 다니면서 끝내긴 했지만 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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