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재벌의 삶!-166화 (166/244)
  • 166- 할아버지의 낡은시계.

    요르단 경제사절단이 인천공항에 돌아왔을 때, 수많은 기자가 구름처럼 몰려있었다.

    재환은 외교부와 재경부 양반들이 인터뷰를 치르는 동안 빨리 나가려고 했지만, 혜성 회장을 기다리는 이들 또한 많았다.

    “회장님! 이번에는 15억 불 규모의 사업인데요.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회장님, 원래 요르단은 가지 않으려고 하셨다는게 사실입니까?”

    “회담 내용에 대해서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꼬치꼬치 캐물어대는 기자들을 보고 재환은 웃으면서 말했다.

    “회담은 잘 됐고, 시계,철도,트럭에 대한 수출 사업 건입니다. 이미 주재원에게 1차 보도를 한 그대로에요. 그냥 지켜보시면 될 거 같습니다.”

    자세한 얘기는 공식적인 브리핑 자리에서 하겠다는 말을 알린 뒤로 재환은 황급히 차에 올라탔다.

    “휴우-”

    공항 빠져나와 차 타는데도 한 나절이었다.

    “다음에는 경호인력을 두배로 늘리겠습니다.”

    “됐어요. 지난번에도 너무 삭막해보인다고 내가 줄이라 한 건데.”

    날이 갈수록 늘어나는 기자들과 그동안 언론 친화적이었던 재환이어서 어떻게든 한마디 더 들으려고 마이크를 들이대던 상황이었다.

    “본사로 바로 가시겠습니까?”

    “병원이 먼저죠.”

    “아, 알겠습니다. 묵정동으로 가겠습니다.”

    묵정동은 미연이 산후조리로 쉬고, 아들 승윤이가 있는 제일병원이 있었다.

    재벌가, 정치인, 톱스타들만 간다는 삼신그룹 내의 또 다른 호화 산부인과로 현규가 고맙게도 전액 병원비를 대준 곳이기도 했다.

    재환은 그곳에 오자마자 카리스마 넘치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아들을 보고 헤벌레 했다.

    “아빠가 왔다! 선물로 15억불 계약서 가지고 말이야!”

    MOU증서지만, 국왕이 인증한 계약서를 어린 아기 앞에서 팔랑이는 재환을 보고 임원들은 저분이 저런 모습도 보이나 싶어 웃음을 참지 못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재환은 안으로 들어와 아내를 만나고 그동안 못다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오늘 하루 회사 일을 쨌다.

    ***

    다음날 돌아온 재환은 혜성시계 사장 양민국을 불렀다.

    “어떻게, 야구에 비해 시계사업 할 만하십니까?”

    “회장님과 김 대표님께서 워낙 길을 잘 닦아주셔서 아주 좋은 사업체가 되었습니다.”

    김명진 대표를 군 인맥 동원으로 인해 혜성대윤자동차 군용차량사업부장으로 보낸 뒤로 후임으로 양민국 전 혜성 타이거즈 사장을 앉혔다.

    그동안 임기내에 우승은 못했지만, 적어도 강팀이라는 위상은 유지해준 사람이니 이제 다른 일을 시키기 위해서였다.

    “이번에 요르단에 혜성시계 공장을 짓기로 했어요.”

    “예, 저도 사업 계획서 준비 중입니다.”

    “근데, 제가 요르단 왕 앞에서 냅다 지른게 하나 있거든요?”

    “네?”

    “우리 회중시계를 좀 만들어야 겠습니다.”

    “!”

    갑작스러운 회장의 오더에 양민국이 당황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회중시계요? 저희가 그런 모델을 만든단 말입니까?”

    “네, 그렇게 됐어요.”

    당장에 설계도부터 작성하고, 거기에 맞는 기계를 공장에 배치해야 되고, 단가나 디자인 같은걸 신경쓰면 어디서부터 시작할지 까마득한 일이었다.

    “그런 이유에서 일단 가 봅시다. 혜성시계 공장으로요.”

    재환은 지금 당장 양민국과 함께 성남 혜성시계 공장으로 가자고 했다.

    ***

    쿼츠형 손목시계부터 디지털 손목시계, 뻐꾸기시계와 괘종시계등 많은 제품들이 제작되고 있었다.

    “야, 이거 진짜 디자인은 좋은데 말이야.”

    그중에서도 잘 팔리는 뻐꾸기 시계 모델은 수출로도 효자 상품이고, 디자인으로 엄청난 호평을 받았다.

    ‘시계는 가구다.’ 라는 슬로건으로 웬만한 집이라면 앤틱 장식품으로 하나 구비하는 문화가 만들어져서 그 수요는 늘면 늘었지, 조금도 줄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재환은 공장장 외 기술자들을 모아 회중시계 이야기를 꺼내자 모두가 어이없다는 표정이었다.

    “회장님, 그거 지금 당장 만든다면···.”

    나이 지긋한 엔지니어가 한 마디 하려고 할 때, 양 대표가 눈짓을 줬다.

    하지만 재환이 손을 들어 양 대표를 제지하고 말해보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제품 허투루 만들 생각이 아니라면, 지금부터 설계를 해도 5년은 걸립니다.”

    “네, 당장은 그렇겠죠.”

    재환은 그래서 일단 그들에게 물었다.

    “여기계신 분들은 과거 삼신시계, 그 이전부터 시계공으로 수십년간 일하신 분들로 알고 있어요. 아마 국내에서 굉장한 네트워크를 가졌다고 생각합니다.”

    기술자라는 존재들은 나이를 먹을수록 더욱 더 한 곳에 몰두하는 것으로 끝나는게 아니라 주변에도 발을 걸치고 있다.

    그러니 이 중에서 회중시계를 만들 장인을 아는 자가 있을거라고 생각했다.

    회장이 찾아와서 ‘한 번 해봐.’라고 명을 내린 것이니 일단 그들의 머리가 바쁘게 돌아갔다.

    재환은 품 안에서 두툼한 노란 봉투를 꺼내 사무실 책상에 올려놨다.

    툭-

    “100만원짜리 백 장. 1억입니다. 숙련된 기술공, 혹은 회사를 알려준다면 이거 성과금으로 가져가십시오.”

    재환이 수표 뭉치를 열어놓자 양민국을 포함한 수많은 시계공들은 식은 땀을 흘리면서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

    재환은 얼마 후 동생 기환의 집들이에 참여했다.

    자신이 구해주겠다고 약속한 집은 공교롭게도 재환이 과거의 삶에서 직접 구매했던 그 논현동 저택이었다.

    ‘아이러니하구만.’

    내부 인테리어는 확 바뀌어 있었지만, 그래도 과거의 삶에 거주했던 곳을 다시 오니 만감이 교차했다.

    이제는 천천히 잊으려고 했지만, 아직도 그때의 삶이 지금보다 더 오래됐고, 기억도 많았다.

    가정부들이 분주하게 요리 준비를 했고, 떡 벌어진 술상이 왔을 때 재환은 앉아서 오랜만에 사촌동생하고 많은 이야기를 했다.

    그러다 문득 재환이 요르단 국왕 만난 썰을 풀면서 시계 이야기가 다시 나왔다.

    “형, 회중시계?”

    “그래. 이런 거 말이야.”

    재환이 희경에게 받은 것을 꺼내자 기환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일어났다.

    “그거 나도 집에 많이 있지.”

    그러더니 방 한곳으로 가서 문을 여는데 그곳에는 웬 로봇 프라모델부터 포스터가 잔뜩 붙은 방이었다.

    ‘거 취향 하고는···.’

    방 하나를 장식했는데 저걸 와이프가 용케도 넘어가준 것 같았다.

    “제수씨가 고생이 많겠네요?”

    “호호호, 아니에요. 회장님. 차라리 저런 건전한 취미가 낫죠.”

    그저 착하다는 인상의 기환의 부인은 내조를 착실히 하면서 남편의 취미생활에 대해서는 일체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고 한다.

    인연은 인연이라 생각하며 재환이 피식 웃었고, 잠시후 기환은 방안에서 상자 하나를 들고왔다.

    “어이구, 그게 다 뭐냐?”

    “시계. 이제껏 모은것들.”

    상자 안에 한가득 담겨있는 것을 보고 재환은 별천지가 바로 여기구나, 라고 생각했다.

    그중에서 재환이 디자인이 맘에 들어 꺼낸 것은 무광 금속으로 처리된 건데, 우스꽝 스러운 용의그림이 그려지고 안에를 열자 뚜껑 안쪽에 웬 글귀가 있었다.

    “Don't forget 3.Oct.11··· 10월 11일을 잊지 마라?”

    “크으~ 다시 생각해도 멋진 말이지.”

    “너 무슨 기념일로 이거 만든거냐?”

    “아, 형! 그 명작을 모른단 말이야? 강철의 연금술사!”

    “?”

    재환의 머리 위로 물음표가 생기자 기환은 현재 일본에서 가장 잘나가는 작품이라고 구구절절히 설명하면서 내친김에 만화책 전권 다 있으니 그걸 빌려주겠다고 했다.

    “형, 이 컬렉션을 봐바! 이거 진짜 정교하게 만들었잖아? 롤렌스? 비쉬론? 나한텐 이게 최고야!”

    “별걸 다 쓰네··· 그래서 이거 얼마 주고 산 건데.”

    “5만원. 이 퀄리티면 거저지!”

    “···아, 그래. 이것도 그 아키하바라 같은 데서 산 거냐?”

    “아니, 그거 국산인데?”

    “!?”

    재환은 곧바로 기환에게 물었다.

    “국내에 이런거 만드는 제조업체가 다 있어?”

    넌지시 묻는 재환에게 기환은 어리둥절하다가 피식 웃으면서 다른 회중 시계를 꺼냈다.

    금색에 클래식한 디자인, 거기에 인위적으로 낡게 만든 감성이 느껴졌다.

    “18k금으로 만든 이것도 있지. 형, 옛날에 그 드라마 야인시대 알아? 거기서 김좌진 장군이 김두한에게 준 시계 있잖아?”

    그러면서 그 작품의 명대사 ‘일어나라 두한아! 너는 장군의 아들이다!’를 내뱉는 기환의 팔을 잡으며 재환이 다급하게 외쳤다.

    “그러니까 이거 어서 만들었냐고? 빨리 말 안 하냐!?”

    “어, 어? 잠깐만! 내가 이거 분명히 거기 업체 명함을 가지고 있었는데···.”

    ***

    “KC인터내셔널이라···.”

    기환에게 얻어낸 정보로 알아내니 상당한 회사였다.

    무려 90년대에 미국 대통령의 백악관 기념품 시계를 납품한 곳이고, 그 외에 테마파크 샤를로트 파크나 삼신의 S랜드의 기념품 시계등도 제조했다.

    특히 유명 캐릭터의 브랜드 시계들을 제조하는데, 퀄리티도 좋고 판촉물 홍보용으로 해외에서 많은 제품을 생산했다.

    “허, 세상에! 내가 왜 이런 곳을 몰랐지?”

    납품 이력만 보면 이게 소기업이라고는 생각 못할 정도의 알짜 회사였다.

    게다가 사이트를 들어가보니 장인급 시계공들도 많아 보였고, 기환이 말했던 그 ‘강철의 연금술사’시계로 서브컬쳐에서는 엄청난 인기를 구가한다고 한다.

    하지만 그에 비해서 좋지 않은 기사도 많았다.

    재환은 그것을 보고서 뭔가 길을 찾은 것 같았다.

    그때 성남의 시계공장에 돈을 뿌리고 간 뒤로 양민국이 들어와 재환에게 보고했다.

    “회장님 알아왔습니다.”

    “아, 그래요.”

    “종로 시계거리부터 돌아다니면서 이런 회중시계를 전문으로 만드는 제작공방이 있더군요?”

    “호오.”

    재환은 그 사람에 대한 이력과 공방에 대해 물었다.

    “김무연 제작소?”

    “수제 회중시계를 만드는 공장이라고 합니다. 경력도 높고, 저희 기술자들 중에서도 이름이 알려진 분이라고 합니다.”

    “소규모 제작공방이라···.”

    재환은 그 김무연 제작소라는 곳에 대한 것이 적힌 서류들을 읽어나갔다가 흥미로운 사실을 발견했다.

    “음? KC인터내셔널?”

    김무연의 이력에 그 이름을 본 재환이 중얼거렸고, 양민국이 대답했다.

    “아, 네 판촉상품 제조업체인데, 구로디지털단지쪽에 있는 곳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곳은 회장님의 유니콘 기술재단에서도 후원을 몇 차례 받았던 곳입니다.”

    “등잔밑이 어두운 법이라더니!”

    재환은 자신이 운영하는 재단에 지원을 몇 차례나 해줬던 곳인데, 거기에 대해서 몰랐다는 것을 깊게 후회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죠. 지금 당장 종로로.”

    “네? 바로 말입니까?”

    “길게 끌게 뭐 있습니까?”

    재환은 차를 준비해서 곧바로 종로로 향했다.

    수많은 시계 공방들이 가득하고, 이곳에서 못 고치는 제품은 없다고 자부할 정도로 시계공들이 넘쳐나는 곳이었다.

    재환은 차로 들어가지 못하는 골목에서 약도를 보고 김무연 제작소라는 것을 물어물어 찾아갔다.

    낡은 건물에 2층에 있는 곳이었고, 내부에서는 구리스 칠 냄새가 가득했다.

    재환이 노크를 하자 안에서는 노인 한 명이 문을 열었다.

    “누구십니까?”

    “김무연 제작소 맞죠? 시계를 보러 왔습니다.”

    “이곳은 예약제로만 움직이는 곳입니다. 불시에 찾아오셔도 당장 팔 물건이 없어요.”

    “네, 그럼 이거 만드신 시계공이라도 보겠습니다.”

    “?”

    재환이 그곳에서 만든 회중시계 제품을 보이자 그는 어리둥절하면서 문을 열었다.

    “사장님, 나와보시지요. 손님인거 같은데.”

    재환이 안을 둘러보자 각종 시계가 가득했고, 몇몇 쿼츠 부품과 돋보기로 기울여보는 미세 부품이 한 가득인 장인의 숨결이 느껴졌다.

    ‘할아버지의 낡은 시계라는 노래가 이럴 때 떠오르는 구만.’

    재환이 주변을 둘러볼 때 안에서 다른 노인이 나왔다.

    작은 체구에 눈이 침침한지 두꺼운 돋보기를 쓰고 있었는데 그 손은 수십년간 정밀기계를 만져온 흔적이 느껴졌다.

    “누구신데, 나를 찾으시우?”

    “아, 조그만한 시계공장 하는 사람입니다. 사장님을 보고 싶어서 왔죠.”

    “허, 나같은 늙은이를 뭣 하러?”

    퉁명스럽게 말하며 앉으라고 손짓한 노인에게 재환은 자신의 명함을 건넸다.

    대수롭지 않게 받은 김무연은 돋보기를 기울여서 그 이름을 확인했고, 순간 처진 눈매가 들썩이면서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혜성···그룹의···?”

    “네~ 거기 운영하는 사람입니다.”

    “아이고, 귀하신 분이 어찌 이런 누추한 공방에···.”

    김무연은 곧바로 일어나 황급히 인사했다.

    “회장님이 다 와주셨군요.”

    “아, 아닙니다. 편히 앉으시지요.”

    “이봐 박기사! 빨랑 가서 차 내와!”

    무연은 같이 일하는 기사에게 말하고 주변을 정리했다.

    “어찌 이곳까지 오셨소이까?”

    “시계 때문에 왔습니다.”

    “제가··· 회장님 전용 시계라도 하나 제작해야 되는겁니까?”

    “아니요. 전국민의 시계를 제작해주셔야 할 겁니다. KC랑 같이 말이죠.”

    “케, 케이씨···.”

    “거기서 오랜 경력을 가지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거기 분들을 하나하나 좀 뵈려고 합니다.”

    수출, 국왕, 약속, 회중시계, 공방, 장인, 캐릭터 굿즈, 선물용품 제작, 그리고 협찬.

    재환은 한 단어, 한 단어씩 조합하면서 뭉친 이 만남에서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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