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 너무 소홀했다.
재환은 혜성그룹의 일본 키무라 증권 대주주가 된 것에 대한 인터뷰를 진행했다.
“다각도로 사업을 위해서 준비한 겁니다. 그리고 일본 시장은 아직도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죠.”
“네, 일본 최고의 증권사에 한국이 대주주가 되었다는 것이 어떻게 보면 미묘한 상황일 수도 있는데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하하하, 대주주 중 하나이죠. 자사주하고, 일본 내 지분 보면 저희는 미미한 편이에요.”
일부 오글거리는 기사로 ‘일본 금융가 심장에 태극기를 꽂았다.’등의 기사도 왔지만, 어디까지나 홍콩에 투자했던 금액을 일본으로 돌린 정도였다.
다만 그래도 ‘일본’이라는 단어가 굉장히 국민들에게는 많은 감정으로 다가와서인지 그런 식으로 이야기가 많이 돌긴 했다.
재환은 그것을 두고서 향후 분기별로 일본 내에 있는 회사들의 주식을 사들일 때는 키무라증권을 애용하기로 하고 배당금도 기대했다.
“인터뷰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응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10대 그룹의 오너가 이렇게 편하게 인터뷰에 응해주고, 그러면서 지난날 혜성에 대해 ‘자그만한 의혹’을 제기했어도 그다지 신경을 안 썼다.
혜성 사옥 밖으로 나온 국장급 인사 기자는 차에 타면서 혀를 내둘렀다.
“확실히 예전하고는 다르네.”
“네? 예전이요?”
부사수인 기자가 차 시동을 걸면서 물을 때 그가 말했다.
“옛날에 신회장은 말이지, 혜성에 기사 하나 잘못 썼다고 경제지 하나 문 닫게 해 버릴 뻔한 사람이야.”
“진짜요? 와, 그래보이진 않는데.”
“너는 모를꺼다. 하긴 혜성이 그때는 지금처럼 엄청난 공룡이 아니었긴 했어도···.”
기자들 사이에서는 친절한 사람이면서도 한 번 핀트 상하면 지옥을 보게 되어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공포의 존재처럼 각인이 되고 있었다.
***
“그래서 합병은 확정된 겁니까?”
“네, 재경부 조사결과 대등합병으로 간다는 것이 합의됐고, 법인과 이름은 조아금융지주냐, 조아SH금융지주냐의 이야기가 나오는 정도입니다.”
임선아의 이야기를 듣자 재환은 이 일도 잘 처리돼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전부 회장님 덕분입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아니요. 제가 뭘 한게 있다고요?”
“일본에 증권사들, 회장님께서 붙잡아주시지 않았습니까?”
재환이 키무라 증권의 대주주가 된 이후로 갑자기 일본자본은 갈피를 잃고 홍콩에 투자를 끊어버렸다.
트라이앵글 만드려고 한국과 홍콩의 금융사 지분을 늘려나갔는데, 본진이 털린 꼴이니 말이다.
“엄밀히 말해 그게 본진이 아니더군요.”
“네?”
“키무라는 관동 지역의 중심지입니다. 그리고 이번에 공격한건 도요타 증권이지요. 관서에 있는.”
“하지만 그것 역시도 유효했습니다. 관서 증권사들이 전부 멈춘다음 민단의 자본도 SH에서 발을 빼기 시작했으니까요.”
그래도 이럴땐 같은 나라라고 생각한건지 관서/관동 사이에 경쟁 중에서 라이벌 관동지역 증권사들이 한국 자본을 받아들이자 황급히 발을 뺀 관서 증권사들이었다.
사실 재환은 역으로 관서 금융사를 노렸지만, 어떻게 눈치를 챘는지 전부 주가방어에 들어갔었다.
그들은 곧바로 주가 방어를 위해 내실 다지기에 들어갔고, 키무라 증권이 1300엔일 때, 도요타증권은 주당 4천엔이라는 4배에 가까운 가격이었다.
“뭐, 하지만 나도 짭짤하게 번 거고, 댁들은 은행을 지켜냈으니 됐어요.”
여기엔 없지만 현규도 기어이 GH카드를 인수해서 삼신카드가 업계 1위에 오른 공을 세웠으니 모두가 윈윈한 일이었다.
“앞으로도 좋은 거래 부탁드려요.”
“저희 조아은행은 앞으로도 혜성그룹 회장님과 함께 할 것입니다.”
임선아의 정중한 인사를 받은 재환은 그를 배웅해주고 이제 다른 업무를 시작했다.
최근 회사가 안팍으로 시끌시끌했던지라 그것들 전부 수습하기 위해 잦은 야근에 집에까지 서류를 가져가서 처리하곤 했다.
게다가 가끔씩 술 먹자고 부르는 다른 육공회 멤버들의 연락까지 받으면 새벽까지 들어올 때가 부지기수였다.
오늘 또한 그런 상황이어서 재환이 들어왔을 때, 집 안은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뭐야 이건?”
어디서 사 왔는지 책상 위에 한입만 먹다 남긴 과일들이 가득했고, 어항까지 사서 열대어를 풀어놨다.
그 당사자인 미연은 소파에서 웅크리고 잠들어 있었는데 바들바들 떠는 것이 몸이 안좋아 보였다.
“얘, 왜 이래 진짜?”
얼굴에 손을 대봤는데, 미열이 있는 것 같아서 일단 번쩍 들어올려 침대로 데려갔다.
다음날 가정부들이 들어와서 난장이 된 거실을 전부 치우고 식사를 차렸을 때, 미연은 퀭해진 얼굴로 말했다.
“나, 친정에 좀 다녀와도 되요?”
“왜? 무슨 일 있어?”
“요새 몸도 안 좋고, 입맛도 없고··· 어제는 하루 종일 과일만 먹었어요. 집에서 요양 좀 할게요.”
“어디 안 좋은 거야? 장모님하고 같이 건강 검진 한 번 받지 그래?”
재환은 삼신의료원에 말해둘 테니까 같이 다녀오라고 말했다.
“같이 가주지. 요새 술 많이 먹고 늦게 들어오잖아요?”
“나, 오늘 저녁부터 또 출장 가. 일본으로.”
“···.”
“3일이면 돼. 올 때 필요한 거 있으면 사올게.”
재환은 식사를 마치고 출근 준비를 했다.
요새 통 기운이 없던 미연은 조용히 배웅해주고, 한숨 자러 돌아갔고 재환은 보약이라도 지어줘야 되나 생각했다.
***
“제임스 리요?”
“그래. 일본 내에서 픽서를 움직인 녀석 중에 하나인데. 혹시 아나 해서 물어봤다네.”
일본에 도착해서 전 민단 간부인 김희철을 만난 재환은 그 이름을 듣고서 생각하다가 피식 웃었다.
“검은머리 금융쟁이 하나 있죠. 겁도 없이 국내 기업 순환출자 깨겠다고 덤볐다가 본진 털렸던 녀석이.”
재환은 그 녀석을 언급하면서 키득거렸다.
그러자 김희철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뒷방 늙은이의 말이겠지만, 그런 녀석을 남겨 놓는다면 계속 지분 방어에 대해 힘들지 않겠소?”
“우습지도 않은 녀석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덤벼대도 혜성은 끄떡없죠. 투기세력이 덤빈다면 일은포대신 혜성포가 나갈 겁니다.”
일은포는 과거 2003년에 헤지펀드등의 국제금융자본이 일본의 외환보유고를 노리고 엔화를 풀 매수해서 수백 조에 가까운 돈을 쏟아냈지만, 매시간 단위로 600억엔 대의 엔화를 매수/매도를 반복해서 철통같이 방어해낸 사례였다.
소베날에 이어 일은포까지 서양 국제 자본이 된통 깨진 사례로 남았으니 함부로 공격한다는 게 자살행위라는 것을 이제 그들도 잘 알 것이다.
“관동에도 많은 민단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당연하지. 본사가 마나토구에 있으니 말이야.”
“여러모로 잘 부탁드립니다. SH말고 조아를요.”
“이야기 들어보니 어차피 동지들은 다 뺐다고 하더만, 사실 80년대부터 20년은 묵혀뒀으니 지금 팔아도 빌딩이나 아파트 하나씩은 올릴 정도지. 하하핫.”
민단은 재환의 개입으로 인해 깔끔하게 SH은행의 지분을 정리했고, 조아은행을 중심으로 합병이 되어서 모양새도 좋게 끝났다.
비록 그래서 일본 자본이라는 흑색선전이 있었지만, 오히려 그랬기 때문에 20년 묵혀둔 자본들을 수십- 수백 배의 차익을 남기고 털어버렸기 때문에 돈방석에 오른 자들도 수두룩했다.
재환은 김희철과 좋은 대화를 마치고서 일본 일대에 주재원들과 식사를 하고 돌아갈 준비를 했다.
그러면서 키무라 증권의 담당자와 인사도 하고, 그들을 통해서 자동차 부품회사나 반도체 부품회사들에 대해서 유망한 강소기업들 인수를 이들이 제공해줄 것이다.
재환은 그렇게 알찬 시간을 보내고 일본 출장을 마치고 돌아왔다.
그때 인천공항에서는 기전실 임직원들 외에 아내가 안 보였다.
“안 나왔네? 선물도 잔뜩 준비했는데.”
재환이 서운하다는 듯 말하자 임창훈은 조용히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회장님 저기···.”
“뭐죠?”
“서울로 돌아가시는 대로 바로 사모님을 뵈셔야겠습니다. 지금 삼신의료원에 입원해 계십니다.”
“뭐요? 입원? 진짜 어디가 아프대요?”
“저기, 그게 저···”
“그럼 차를 그냥 삼신의료원으로 가죠. 김 기사!”
“네, 회장님.”
재환은 인천공항에서 본사 대신 삼신의료원으로 향했다.
병실로 들어갔을 때, VIP실에 누워있는 미연과 더불어 장모님이 있었다.
그런데 반대쪽에는 재환의 부모님까지 같이 있었다.
“어? 어떻게 다들 여기 계시···.”
“야이 미친 노···”
“여보!”
명숙이 황급히 희경의 옆구리를 꼬집으며 말하자 헛기침을 하는 아버지다.
그 폭군이 며느리 앞에서 큰 소리나 쌍욕을 못하고 쩔쩔매는 것도 참으로 신박한 광경이었다.
재환은 누워있는 미연에게 다가가 말했다.
“어떻게 된 거야? 그렇지 않아도 몸 안 좋은 거 같아서 영양제 잔뜩 사왔는데.”
“아이고, 사위! 그런 게 아니야. 입덧이 얼마나 심했는데.”
“네? 입··· 뭐요?”
재환은 장모의 말에 설마 자신이 생각한 그거인가 싶어 아내를 봤을 때, 그녀는 웃으면서 그의 손을 꼭 잡았다.
“6주··· 됐대요. 열이 너무 심했는데, 임신 초기 호르몬 이상이라고.”
“아, 진짜··· 6주라면···.”
와이프 임신 소리를 들은 재환은 뭔가 말을 하려다가도 입을 떼지 못하고 난처해하다가 일단 그녀의 두 손을 꼭 잡아줬다.
“앞으로 잘 챙길게. 고마워.”
양가가 모두 훈훈하게 웃는 자리였다.
희경과 명숙은 손주가 생긴다는 말에 완전히 입이 귀에 걸려있었고, 장모는 당분간 아내를 천호동 처가로 데려가서 태교를 돕겠다고 요청했다.
“뭐 먹고 싶은 건 없어?”
“참치, 대뱃살로 초밥해서···.”
“아이고! 며늘아가! 그건 내가 사오마. 당장 전화 돌릴게!”
희경의 말에 재환은 곧바로 자신이 휴대폰을 들었다.
“아버지 가만 계세요, 제가 할 테니.”
재환은 곧바로 현규한테 전화해서 자신의 2세가 생겨 너희 병원에 입원해있고, 지금 임산부가 참치를 먹고 싶어한다니 바로 신누리호텔에 지배인이 연락이 온 것이다.
재환과 가족들은 담당의에게 초음파 사진을 확인했고, 그 모습을 보고 눈물까지 보이는 어머니 명숙이었다.
“그래도 우리 아들이 드디어 손주까지 보고···흑.”
재환은 말없이 부모님을 안아드리고, 앞으로 할 일이 더 많아질거라 생각했다.
***
“회장님, 이번 군산공장의 순방을···.”
“취소하세요. 아니면, 임 실장님이 다녀오시고요.”
“알겠습니다.”
집무실에서 웬만한 지방 순방이나 출장은 당분간 스톱 시켰다.
육공회 모임 내에서도 재환의 2세 이야기에 모두가 축하해줬고, 덕분에 술 진탕 마시는 자리는 점점 자제하는 분위기가 되었다.
그 분위기 속에서 혜성가는 또 다른 웨딩 마치가 준비되어 있었다.
“하필이면 타이밍이 말이야.”
“그 점에서는 굉장히 미안하게 생각한다.”
재환은 사촌동생 기환을 불러 놓고 사과하면서 서랍에서 봉투를 꺼내 건네줬다.
“신혼 집하고 혼수는 내가 다 대줄테니까 뭐든 말만 해라.”
“휴우우, 일단 오락기 전용 방 하나 만들고··· 평 수는 150평에···.”
“이 새끼 이거 디테일한거 봐?”
말은 그렇게 해도 사촌 동생 녀석에게는 미안한 게 많았다.
연애를 오래하고 결혼을 준비하려 했는데, 집안 장남이 먼저라고 강제로 날짜를 미뤘고, 거기에 다시 준비를 하니 형수의 임신으로 인해서 하객 때 와 줄지도 미지수다.
집안 차례라는 것 때문에 계속 후순위로 밀려서 서운해하는 동생에게 재환은 또다른 선물을 주기로 했다.
“이제 차장 자리 뗄 때도 됐지? 너 결혼하고 임원해라.”
“엉?”
“혜성게임즈 좀 더 규모 좀 키워주마. 임원 올라갈 준비하고, 등기이사직에 네 자리 하나 만들어놓을게.”
입사 이후로 자신이 좋아하는 분야만 계속 파고 들다보니 이제는 제법 준수한 계열사의 핵심 인원이 되었다.
재환 역시도 그동안 일에 치여서 와이프 임신 사실도 모르고, 사촌 결혼식 날짜도 까먹을 정도였지만, 이제는 하나하나 손을 써보기로 했다.
그래서 당분간은 아주 가정적인 혜성가 가주로써 움직이려고 하는 재환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