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2- 핀치로 몰아넣다.
제임스 리는 초면에 재환을 만난 뒤로 재벌에 대해 악감정을 드러냈다.
“기어이 한국 경제의 가장 큰 걸림돌이 되시겠다는 군요. 알겠습니다.”
“대체 무슨 자격으로 그런 말을 하냐니까? 모나코에서 레볼루숑이라도 배운건가?”
“···.”
“자네 말대로 대한민국의 재벌이 극도로 부패하고, 소수의 지분으로 수백조의 큰 회사들을 통제하고, 초법으로 계급화된 무리라고 치지.”
부패 빼고는 딱히 틀린 말도 아니었으니 재환은 쿨하게 넘겼다.
“근데 그건 너희같은 국제 금융쟁이들도 다른 바 없잖나?”
“!”
“남의 돈 수십, 수백조 달러 굴리면서, 그걸로 매수다 매도다 남의 불행을 주가로 올리는 게 너희들이잖아?”
“투자은행을 그런 식으로 매도하시면···.”
“아, 요새도 남의 돈으로 투자하기 전에 코케인 한번 빨고, 손장난도 하나?”
“···.”
“남의 돈으로 호의호식하는 건 오히려 네 놈들이 더 심한 편이지.”
재환의 언변에 제임스 리는 더 들을 것도 없다는 듯 일어났다.
“오늘은 그저 인사차 왔을 뿐입니다. 만나뵈어서 영광이고 이만 돌아가보겠습니다.”
“그러라고, 한국 관광 잘 하고.”
제임스 리가 돌아가자 재환은 피식 웃으면서 와인을 한 잔 따랐다.
***
이후 육공회 모임이 생겼을 때, 대현은 한결 나아진 얼굴로 말했다.
“후우, 어떻게 급한 불은 끈 것 같다. 너희들에게 정말 고맙다.”
대현은 육공회 형제들에게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며, 오늘은 자신이 뭐든 대접하겠다고 KS호텔의 일류 셰프들을 모아서 만찬회를 열었다.
“출장 다녀온 사이에 엄청난 일이 있었네? 우리도 뒤늦게 참여하면 되는건가?”
이번 소베날 사태에서 아직 대규모로 자금 투입을 하지 않은 정인이 넌지시 물었다.
정인의 회사 두성 뿐만 아니라 신누리와 아성차 역시도 움직이지 않았다.
재환은 조용히 와인을 마시다 현재 상황에 대해 말했다.
“자, 일단은 당사자인 대현 형님이 더 잘 아시겠지만, 대략 상황은 이래요.”
“그냥 네가 다 설명해.”
대현에게 전권을 받은 재환은 고개를 끄덕이고 노트로 그림을 그려가며 말했다.
“모나코에 있는 다국적 투자사 소베날이 1천500억에서 2천억 가량을 쏟아서 14%에 대한 지분을 올린건 다들 알테고요.”
“으음.”
대현을 포함해 현규, 정인, 문영, 진용, 선길이 모두 재환의 설명에 이목을 집중했다.
“일단 놈들이 15% 차지하려는 건 확실히 저지선을 잡았어요. 13.9%로 제 2주주지만, 대현형님 일가 지분 15%와 백기사로 나설 우리 지분을 합치면 25-6% 정도 될겁니다.”
“결국은 외인기관의 손이 문제인데.”
대현이 턱을 어루만지면서 이 판세를 볼 때 재환이 말했다.
“외인 막으려면 자사주 단단히 잡고 계시고, 노조하고 협의하세요.”
“뭐?”
갑자기 노조 이야기가 나오자 놀라는 대현과 다른 오너들이었다.
재벌과 노동조합은 상극인데 그들과 협의를 하라니?
“외인이 아무리 매수를 해도 노조를 대현 형님 편으로 끌어들이면 애들이 경영권 행사를 하려고 해도 다 드러누울게 아닙니까?”
“야, 그래도 이건 이독제독이야. 외인 지분이나 노조나···.”
“아, 이 참에 직원들 생활좀 편하게 해줘요. 야근수당도 좀 올리고, 근무시간도 줄여가고, 정규직 비율좀 높이면서요.”
일단 그 세 개만 하더라도 웬만한 노조들은 충분히 협의할 수 있었다.
“일단은··· 네 녀석이 이번 사태에 백기사 수장이자 브레인이니 들어는 주마.”
대현은 일단 노조 협의는 자신의 동생 최대원 부사장에게 맡기기로 했다.
“일단 그렇게 외인의 매수를 막는다 하더라도, 가장 큰 문제가 있죠. 놈들이 계속 가지고 있을 때.”
재환의 말에 그 다음은 현규가 확실히 상황파악을 빨리하고 말했다.
“현재 2천억 정도의 주식이 오를때까지 기다리다가 차액만 남기고 빠지는거지.”
“빙고! 어차피 놈들이 원한건 그거였어.”
실제 재환이 개입하지 않았던 과거의 삶에서 소베날 사태는 KS의 대참패였다.
백기사를 겨우 모집하고 사재까지 털어서 겨우 지분 방어를 했지만, 그 기간동안 4배가 오른 주식으로 인해, 소베날은 1500억에 사들여 1조원에 팔아넘기면서 세금 한 푼 안 내고 한탕 제대로 성공시켰다.
“결국 소베날이 버티는 건 이것일 겁니다. 어차피 주주총회로 경영권 뺏는다는건 쇼고 어떻게든 대중적으로 모습을 드러내 주가를 올리는거요.”
재환의 말에 대현은 머리를 긁적였다.
이제는 정말 기업의 단순 경영권 방어 문제가 아니다.
앞으로도 계속 생길 해외 금융자본 투기세력의 공격이니 앞으로 다른 육공회 멤버들도 지금의 싸움을 교보재로 삼아 대비해야 했다.
그래서 모두가 재환의 다음 수에 집중했다.
“확실히 미국 유학파라서 그런가? 금융쟁이들 움직임은 꿰고 있구만.”
“동감.”
비 미국 유학파인 정인이나 현규의 말에 재환은 피식 웃으며 다음 수를 말했다.
“그럼 이제 우리도 저 놈들한테 똑같이 갚아줘야죠. 투자를 좀 합시다.”
재환은 그렇게 말하면서 이번에 백기사로 참여안한 셋을 가리켰다.
“두성, 아성차, 신누리. 공교롭게도 셋은 계열사 내에 주식중계나 투자자문이 가능한 회사가 없죠?”
“어, 음. 우리는 쇼핑 그룹이니까.”
신누리의 진용은 뺨을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도 소비재에서 중공업 넘어가느라 증권사나 보험사같은 금융은 신경 안썼어.”
두성의 정인 역시도 재환의 말에 수긍했다.
“우린 최근에야 인수대상 찾아보고 있지만, 숙부님 댁이 아성증권을 소유하고 계시니···.”
재계서열 2위, 아성기어차그룹의 선길 역시 마찬가지였다.
훗날 아성차투자증권이라고 따로 금융사를 만들지만, 그건 훗날의 일이었다.
재환은 그 상황을 두고 말했다.
“자! 그럼 소베날이 대리인으로 쓰고 있는 홍콩의 증권사들 주식을 사들이는겁니다.”
“뭐?”
“엥?”
“음?”
“야!”
그게 지금 무슨말인가 싶을 때, 재환이 노트로 하나하나 그 이름들을 적어나갔다.
“크래프트 증권! 홍콩에 있는 주식 중개업 회사로 소베날의 자회사입니다. 그리고 현재 엄청난 거래량으로 수익을 올리면서 정작 자회사 주식은 50홍콩달러! 한화로 7500원 정도 됩니다.”
그 말을 들은 육공회 친구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하나둘씩 납득했다.
“오호라~ 놈들이 KS지주회사를 적대적으로 매수한 것처럼 우리도, 소베날의 창구를 매수하자?”
“수십억 달러대 거래를 하면서 정작 자회사의 경영권 방어는 얼마나 잘 하는지 알수 있겠습니다.”
현규와 선길이 빠르게 상황을 캐치했고, 진용은 ‘정말 이거 해야되나?’ 라는 얼굴로 아직 확신을 못했다.
“아니, 우리는 딱히 그쪽으로 거래하는 창구를 만들어봤자. 중국 본토도 아니고 홍콩이면···.”
“그러니까 진용이 너 같은 경우는 개인 자금으로 투자해.”
“뭐?”
“해외 자본거래는 비과세다! 그리고 훗날 경영권 방어에도 쓰일수 있지.”
“···오케이. 비과세라면 인정!”
재환은 다른 친구들도 설득시킨 다음 대현과 현규를 가리켰다.
“자~ 여러분? 이렇게 피는 물보다 진하다는 육공회의 상부상조를 할 시간입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둘을 가리킨 이유는 딱 적절한 금융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부터 해외주식으로 크래프트 증권을 매수하는 창구는 삼신증권과 KS증권으로 합시다!”
“!”
그건 정말로 절묘한 수였다.
이것으로 KS는 확실히 본전치기할 수 있고, 삼신 역시 이번에 참여하는 명분을 확실히 다질 수 있다.
그리고 금융사가 없는 육공회 멤버들은 이번 거래로 동맹은 더욱 견고해진다.
재환의 이 제안으로 순식간에 소베날과의 싸움은 판세가 완전히 뒤집혔다.
***
[우리 KS는 투기자본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제가 그것을 막아낼 것입니다.]
TV에서는 연신 KS그룹 회장 최대현이 강경하게 나가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재환은 그것을 보고 피식 웃었다.
‘대현 형님은 지금부터 언론플레이를 많이 하세요. 투기자본의 위험성, 그리고 KS를 지키겠다는 이야기와 기업비사같은 미담좀 뿌리시고요.’
재환의 말대로 충실히 해주는 대현.
그리고 삼신증권과 KS증권은 때아닌 해외주식 거래 호황으로 대기업들의 홍콩 투자에 풀 매수를 돌렸다.
크래프트 증권의 주가가 점점 올랐을 때, 그것이 국내에 크게 알려지는 일은 없었다.
아주 은밀하게 이뤄지고 있었고, 재환 역시 조아와 NH 두 거대은행을 중심으로 매수를 당겼다.
‘크래프트 하나 뿐만이 아니야. 미화 30달러 이하면서, 거래량 좋은 홍콩의 증권사들은 모조리 주식 사들이세요. 절대 떨어질리 없는 것들입니다.’
재환의 말에 모두가 합심해서 움직여주니 점점 그쪽에서도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있었다.
“자~ 어디 그 제임스 씨는 계속 케네디 호텔에 있는지 확인해 볼까?”
이제는 조롱할 목적으로 일부러 케네디 호텔 인근을 산책삼아 돌아다니는 재환이었다.
강남에서 일부러 여의도 까지 와서 점심을 먹고 차 한 잔의 여유를 즐긴다.
저녁이 되어서 저번에 못한 애인과의 데이트를 여의도 일대에서 벌인다.
대놓고 ‘나 여기 있다!’를 제대로 알리는 재환의 움직임은 분명 소베날과 크래프트 놈들에게 보일 것이다.
“휘유~”
그렇게 열흘 동안 계속 돌던 재환은 아예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갈아입고 저녁 운동삼아 런닝을 한 다음 케네디 호텔 커피숍에 앉았다.
땀을 닦으면서 2만원짜리 커피를 마시고, 느긋하게 기다릴 때 결국 양반은 못되는 그 존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제임스 리가 다시 재환을 찾아온 것이었다.
“올 줄 알았지.”
“···아주 엄청난 짓을 벌이시는 것 같군요? 신 회장님.”
처음 만났을때보다 더욱 상기되어 있는 얼굴로 다가온 제임스 리를 보고, 재환은 이번에도 앉으라고 손짓했다.
“···.”
“티 타임이야, 티 타임! 오늘은 그냥 이야기만 할 거니까.”
재환의 말에 제임스는 한숨을 내쉬며 차를 주문하고 대화를 시작했다.
“부질없는 짓입니다. 고작 크래프트 증권 하나의 주가를 올린다고, 저희 거래가 멈출 것 같습니까?”
“아닌 거 알지. 그래서 주당 100달러 이하인 증권사들 전부 들쑤시고 있다.”
사실은 30달러 밑의 저가 주식의 증권사만 골랐지만, 일부러 블러핑을 던졌다.
“KS 주식들 잘 가지고 오르면 팔 거지? 잘 해봐. 우리도 홍콩에 증권사들 알토란같이 굴려줄테니.”
지주회사 풀매수로 선빵을 친 소베날에 대한 완벽한 카운터였다.
제임스 리는 조용히 차를 마시면서 재환에게 물었다.
“원하시는게 뭡니까?”
“대승적으로 매각하고, 국내 재단에 기부 좀 한 다음에 조용히 떠나시게.”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할 증권맨은 없습니다.”
“그런 어리석은 짓도 안 하면 너 진짜 죽어.”
“물리적으로만 아니면 문제 없습니다.”
“그렇게 될걸? 내가 아닌 휴짓조각 된 소액주주들과 니 윗대가리들이 총칼을 들고 말이야.”
이미 수 억달러의 자금을 쏟아붓고 제대로 수익도 못 올린채 빠진다?
다시는 금융일은 꿈도 못꾸고 나가떨어질 일이었다.
하지만 재환의 말대로 계속 붙잡고 있는 순간 자신들의 주포인 증권사들도 점점 이 한국 재벌들에게 잠식된다.
그리고 저 놈들은 자신들이 수익을 올릴 시기가 되어 KS주식을 털어낸 순간, 홍콩 증권사들을 조종할 것이다.
어떻게 쌓은 [유럽 본사-홍콩 허브-미국 월가]의 인프라와 시스템인데 그걸 무너트리는 일은 용납할 수 없었다.
“확실히 감각이 좋으시다는 건 인정하겠습니다.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습니다.”
“호오~ 끝까지 버티시겠다?”
“고작 반년도 안 지난 시간입니다. 저희가 이렇게 단타로 끝날 것 같습니까? 2년이고, 3년이고 기다릴 겁니다.”
“킥! 그래 주식 노름은 장기적으로 봐야 하지.”
재환은 그 말을 듣고서 커피를 마신 다음 입을 열었다.
“너는 처음부터 머리를 들이밀면 안 되는 거였다.”
“무슨··· 말씀이시죠?”
“한국에 오자마자 당당하게 경제지에서 인터뷰를 하고, 보란 듯이 타겟이 되어서 드러냈어. 게다가 지난번 나를 찾아서 온 게 정말로 실수였다.”
“···.”
“덕분에 소베날과 크래프트의 고리를 알 수 있게 됐거든. 너는 처음부터 ‘보이지 않는 손’으로 조용히 움직여야 했어.”
“···.”
“소베날의 존재는 알아도 그 지휘자가 누구인지 몰랐다면, 투기자본의 공격패턴 분석하는데 시간이 걸렸을테니까.”
우는 아이의 뺨까지 때리는 재환의 조롱에 제임스 리는 책상 밑으로 주먹을 불끈쥐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마지막 말을 했다.
“···궁금했습니다.”
“뭐가?”
“저희의 움직임을 알아차리고 배후에서 조종한 그 실세의 존재를 말입니다.”
결국, 재환의 움직임만 아니었으면 땅짚고 헤엄치기였는데, 그것을 날려버린 존재를 꼭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었다.
“알았으면 앞으로 잘 기억해 둬라.”
이번에는 재환이 먼저 커피를 마시고 일어났다.
“아, 돈도 많이 벌었으니 계산은 내가 할게. 우리 사이에 커피 한 잔 정도는 사 줄 수 있어.”
“···!”
제임스 리가 입술을 짓씹고 있을 때, 재환은 웃으면서 신용카드를 꺼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