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 움직여주세요. 모두!
재환과 현규는 그날 저녁 성북동에 위치한 조문영의 자택에서 저녁 식사를 했다.
화르르륵-
고급 벽돌 저택 앞에 있는 잔디밭에서 바비큐 그릴에 불이 붙고, 질 좋은 소고기가 올라갔다.
“식당이 아니라 집까지 직접 초대할 줄은 몰랐네요.”
재환의 말에 문영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여기까지 오셨는데, 절대 후회 안 하실 겁니다. 미국에서도 저거에 맛들려서 매주 한 번씩은 이렇게 먹습니다.”
문영이 박수를 치자 그릴에서 고기를 굽던 요리사들은 안심 한 덩이를 그 자리에서 주사위 모양으로 썰고 불을 붙여서 살짝 그슬린 다음 가져왔다.
그리고 옆에서는 다른 요리사가 와인을 능숙하게 따면서 잔을 채웠다.
“드시죠? 큐브 스테이크에 캘리포니아 와인인데, 입맛에 잘 맞으실 겁니다.”
“신대륙 와인이라··· 한 번 먹어보겠습니다.”
재환은 고기 한 점을 먹고, 디캔팅된 와인을 마셨다.
“하하, 와인이라면 매번 구대륙산을 가져오는 회장님이 계셔서 자주 먹었는데, 캘리포니아제도 제법 좋군요.”
“앞으로는 캘리포니아나 칠레의 신대륙제 와인이 국내에서도 부각될 겁니다. 이쪽 기술이 엄청나요.”
와인과 고급 쇠고기를 먹으면서 푸짐한 저녁을 즐길 때, 자택 안에서도 갖가지 음식들이 나왔다.
그 요리사들을 이끄는 미모의 여성은 재환과 현규에게 공손히 인사했다.
“저희 집에 찾아오신 손님분들인데, 음식이 입에 잘 맞으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녀는 조문영의 부인이자 대한식품 회장의 딸인 이연희였다.
“아이고, 아닙니다. 제수씨. 오랜만에 만난 친구에 이렇게까지 대접을 받으니 아주 흡족합니다.”
그녀는 손님들이 만족하자 미소를 지으며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얼마든지 말하라 하고 조용히 물러났다.
“집안에서 매일 이렇게 먹으면 살만 찌겠어?”
“그래도 사람은 고기를 먹어야 돼.”
“고기반찬 좋아하는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구나!”
현규와 문영이 서로 웃으면서 말할 때 재환은 조용히 와인을 마시며 생각했다.
‘단순히 미국에서 돌아온 뒤로 한 턱 내겠다고 부른 건 아닌 것 같고, 현규 부르는데 나는 덤으로 데려온건가?’
아무래도 그런 건 아닌 것 같은데, 본론을 쉽게 꺼내지 않고 1시간동안 음식 이야기와 과거 둘의 추억 이야기만 듣고 있자니 슬슬 좀이 쑤셨다.
“요새도 기타 쳐?”
“난 피아노였다니까!”
“아, 그렇지! 재환아. 이 친구가 옛날에 대학가요제 나간거 알아? 입상도 했어.”
“크으- 정말 청춘을 즐기셨군요.”
“하하하, 아닙니다.”
현규가 눈치껏 셋이 공감할 만한 이야기를 어떻게든 꺼내 화제를 키웠지만, 재환은 다시 말수가 적어졌다.
그렇게 시간이 좀 더 지나자 문영은 조용히 말했다.
“한국에 돌아온 뒤로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삼신을 키워나간 현규나 혜성그룹을 성장시킨 신회장님을 보고 정말 감명받았습니다.”
“별 말씀을요. 그런데 저희랑 동갑이라 하시니 말 편하게 하셔도 됩니다.”
“아, 하지만···.”
“초면이 신경 쓰인다면, 한두번 보고 끝날 사이도 아닌데 그냥 지금 하세요.”
“어, 그러면··· 말을 놓을···께.”
말을 놓는 것을 시작으로 셋은 와인을 나눠 마셨고, 이제야 제대로 초대한 목적을 들을 수 있었다.
“사실 말이지. 한국 돌아올 때 현규는 꼭 보고 싶었고, 재환이 너도 만나고 싶었어.”
“흐음, 무슨 이유로?”
“큰 그림을 그리기 위해서지.”
“!”
큰 그림을 말하는 문영을 보고서 이 친구가 무슨 말을 할지 유심히 귀를 기울인 재환이었다.
“사실 말이야. 나도 집안 경영에 참여하고 회사를 운용하면서 많은 것을 느꼈어. 너희 둘 같이 새 프로젝트를 만들고, 좀 대외적으로 알리고 싶은데 말이야.”
“그게 잘 안 되지?”
“하하하, 그러게 말이야. 그래서 말인데···.”
문영은 진중한 눈으로 두 친구를 바라보며 말했다.
“어떻게 우리들이 모이는 자리 같은 걸 만들면 어떨까?”
“!”
“···뭉치자고? 경제련처럼?”
재환이 일부러 ‘경제련’으로 언급하면서 운을 띄우자 문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사실 그렇잖아? 경제련은 우리 같은 젊은 사람들 보다는 아버지 세대의 분들의 입김이 더 센 자리야.”
“으음, 그래서?”
어디 계속 말해보라는 식으로 느긋한 재환의 입가에 미소가 슬슬 올라왔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2.3세대의 경영인들이잖아? 그래서 생각했어. 우리만의 연합을 만들고 향후 3-40년을 같이 할 굳건한 동맹 체계를 만들자고 말이야.”
“어, 그게···.”
현규도 뭔가 말하고 싶었고, 재환은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하하하하.”
“아니, 왜? 이게 그렇게 나쁜 제안이 아닐텐데?”
“아니야, 아니야! 나쁘기는, 오히려 아~주 좋은 아이디어야.”
“그렇지? 이제 혼맥도 있지만, 아들들끼리 인맥의 연합체제도 중요하다고 생각해.”
“어엉, 알았어.”
“이해가 된 거지? 내가 무슨 계획을 짜고 있냐면 말이야.”
문영은 말이 잘 통한다고 생각하고 신이나서 재환과 현규에게 자신의 큰 그림을 말해줬다.
그리고 웃음을 참지 못한 두 친구는 결국 그를 다음 육공회 정기 모임에 초대해줬다.
뒤늦게서야 그가 뒷북을 거하게 쳤다는 것을 알았을 때, 육공회의 멤버들은 신고식으로 생각하고, 효령그룹의 자제 조문영을 일곱 번째 멤버로 받아들여줬다.
***
“예, 예. 아이고, 그렇게 된 겁니까?”
[협회에서 외부의 협회장을 모시는 것은 이 경우가 처음입니다. 월드컵의 열기 이후로 부탁드리겠습니다. 회장님.]
“네, 무슨 말인지 잘 알겠습니다. 한국 축구를 위해서 제가 노력하지요.”
[감사합니다. 회장님.]
환갑이 넘은 전 협회장의 깍듯한 인사를 받으면서 통화를 마친 재환이었다.
“흐으음. 지난번 연평해전 추모 이후로 정부가 화 좀 냈다고 하더니만··· 약속은 지켰네?”
재환은 통화를 마치고서 방에서 나와 아버지를 불렀다.
그리고 내년 2003년부터 생길 일에 대해 모든 것을 말하고, 상의해서 뜻한대로 결정하기로 했다.
얼마 후, 혜성그룹 회장의 양재동 자택에 숙부님들이 찾아왔다.
혜성문화재단의 이사장 신희수와, 막내숙부 신희지 혜성 코퍼레이션 사장이었다.
“아이고, 오랜만에들 오셨어.”
“형님,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나야 뒷방 늙은이지. 뭐.”
회장 자리에서 물러난 뒤로는 급 인자한 분이 되셔서 숙부들과 골프도 치면서 잘 지낸다고 들었다.
반면 재환이 회장에 오른 뒤로 두 숙부와 그렇게 큰 교류는 없었다.
이제부터는 생길거지만 말이다.
“자, 일단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 하자고. 여보! 아주머니들 시켜서 술상 거하게 준비해!”
“네, 네~”
명숙이 가정부 아주머니들에게 술상을 주문했고, 잠시 후 떡 벌어진 막걸리 한 상이 도착했다.
세 형제와 재환은 그렇게 술자리를 가지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이제 본격적으로 사업 이야기를 논할때가 되었다.
“사실 오늘 이 자리는 내가 불렀지만, 우리 회장님께서 너희들에게 할 말이 있어서다.”
“호오, 그래요?”
“재환이··· 아니, 신 회장님. 뭡니까? 그게.”
숙부들이 가지고 있는 혜성의 재단들도 사실은 모두 재환의 소유였다.
어떻게 보면 그들 역시 전문경영인이라 할 수 있었다.
고등학교부터 대학교 재단을 운영하는 첫째숙부 신희수.
그리고 혜성 코퍼레이션이란 이름으로 혜성의 자선재단과 부동산을 소유한 둘째숙부 신희지.
재환은 그분들에게 말했다.
“이번에 첫째 숙부님께서 이사장 자리에서 잠시 물러나주셨으면 합니다.”
“뭐, 뭐?!”
별안간에 이사장 자리에서 손 떼 달라는 말에 당황한 희수였다.
“이유가 뭐야? 내가 갑자기 왜 학교재단을?”
“아, 더 잠시 맡아주셔야 할 다른 자리가 있습니다.”
“으음?”
“사실은 국가에서 제안 받은 게 있는데, 거기에 첫째 숙부님을 추천드리고 싶습니다.”
“거기가 어딘데?”
“한국프로축구연맹입니다. 연맹회장을 좀 맡아주실 수 있습니까?”
“뭐, 뭐라?”
재환은 기존에 정부에서 있었던 딜에 대해 모든 것을 말했다.
처음에는 황당했지만, 이야기를 들을수록 점점 납득을 하며 고개를 끄덕인 희수였다.
“어떻습니까?”
“으으음,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그 자리가 나쁘지도 않은데··· 왜 내가 맡아야 하는 거야? 희지도 있잖아?”
“네, 저요? 어유~ 제가 축구에 대해 뭘 안다고요.”
“이 녀석아! 나는 그럼 뭘 아냐?”
희지가 손사래를 치고, 희수는 이사장 자리가 못내 아쉬운 듯 말했지만, 재환이 말했다.
“아니요. 외부 영입으로 연맹회장을 추대하는 거니 첫째 숙부님이 해주셔야 하는겁니다.”
“그러니까, 왜?”
“그야 혜성문화재단은 고등학교에서도 축구부와 야구부를 구비했고, 경한대 역시도 이름난 선수를 많이 배출했죠?”
“···.”
“그러니 첫째 숙부님은 아마추어 축구인들을 양성하시고, 한국 축구에 한 획을 그으신 분으로 추대받는 그림이 그려지는 겁니다.”
그렇게 말하니 결국 자신의 자리 때문에 그 연맹회장 자리를 받아야겠다는 걸 납득했다.
“···아니, 근데 왜 우리야? 원래 축구계는 아성가가 꽉 잡고 있지 않나?”
“프로축구연맹의 아성그룹 출신 경영인들이 전부 그 위에 대한축구협회로 간다고 합니다. 공백이 생긴 걸 우리 혜성이 채우는 겁니다.”
“그게 또··· 그렇게 되는거구만.”
막걸리를 한 사발 쭉 들이킨 희수가 생각하자 희경이 말했다.
“희수야. 한 번 해봐라. 재환이가 뒤에서 전력으로 도울 거고, 까짓것 우리도 이럴 때 프로축구팀 하나 만들지. 뭐.”
‘야구팀도 굴렸는데, 축구팀 그까짓 거 얼마나 하겠냐?’하는 희경의 마인드였다.
“막말로 전국에 있는 운동장 하나 잡고 팀 만들어서 관객 끌어모으면 끝 아니야? 그게 뭐가 어려워?”
‘뭐··· 그런 안이한 마인드로 팀만 잔뜩 채우다가 질적 저하가 나왔던 게 프로축구였죠.’
뭐 그건 추후 재환이 만들어나가기로 했다.
어차피 숙부인 희수가 연맹회장을 맡는다 하더라도 스폰서는 혜성이 해 줄 것이니 재환의 입김이 굉장히 들어갈 것이다.
“그리고 첫째 숙부가 잠시 자리를 비우실 때, 혜성재단 이사장 자리는 둘째 숙부께서 맡아주시길 바랍니다.”
“내, 내가?”
“유학파시잖아요? 이참에 한 번 교육재단 경영도 한번 해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래, 이참에 희지가 한 번 이사장 맡아봐.”
뒤에서 희경이 전적으로 서포트를 해주자 두 숙부는 그 말을 따르기로 했다.
“후우, 내가 프로축구연맹 회장··· 잘 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잘 하실 겁니다. 월드컵 이후로 한 번 제대로 그 열기를 이어나가 보자고요.”
재환의 머릿속에는 이미 K-리그에 대한 대대적인 개혁과 프로야구 이상으로 성장시킬 그림이 그려졌다.
시대도 2002 월드컵 다음이고, 거기에 인프라와 자본은 아주 넘쳐났다.
그야말로 경영만 제대로 한다면 충분히 매력적인 자리였고, 희수 역시도 그것을 알기에 한 번 그 자리를 맡아 보기로 했다.
‘그리고 내 사전에 불법 연고이전은 없을 거고.’
재환은 자신의 큰 그림을 생각하면서, 숙부를 설득해 내년 신임 연맹회장의 자리를 결정했다.
그리고 2003년.
혜성그룹은 일가 사람의 프로축구연맹 회장, 혜성교육재단의 이사장 교체, 그리고 프로축구 컵대회의 후원 등의 사업을 추진했다.
이제는 그룹 내의 경영도 있지만, 외적으로 인지도를 올리기 위한 프로젝트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