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재벌의 삶!-133화 (133/244)
  • 133- 월드컵 열기 속 물밑작업.

    2002년.

    전국민을 들썩이게 만든 한일월드컵이 드디어 개막식을 올렸다.

    첫 경기부터 지난 대회 우승국이자, 피파랭킹 1위의 프랑스가 아프리카의 소국 세네갈에게 1:0으로 진 쇼크부터 시작해서 별별 경기가 다 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KS호텔 스위트 룸에서 대형 스크린 TV를 벽 한 곳에 설치하고 육공회 멤버 전원이 모여 폴란드전을 시청했다.

    전반전 첫 골 때 모두가 날뛰면서 환호했고, 추가 골까지 터져서 드디어 역사적인 한국 축구 대표팀의 월드컵 1승때는 모두가 어깨동무하고 방방 뛰었다.

    재벌 총수 일가라는 한 커플만 벗기면 술 좋아하고, 같이 축구 보면서 날뛰는 30대 아재들의 모임이었다.

    재환은 결과를 알아도 다시 한번 이 열기를 알 수 있다는 생각에 그저 가슴이 뛰었다.

    “자~ 이대로 16강 가고, 8강 가고, 4강 가고~ 그러면 내가 이기는 건가?”

    “야, 우승 가야지. 우승!”

    그날 밤 축배를 들고 다음 날 어질어질한 날에 출근한 재환은 회사 내에 자신 같은 케이스가 많다는 걸 보고 피식 웃었다.

    국제적인 행사이니 이런 상황에 대해서 딱히 뭐라고는 하지 않기로 했다.

    다만 회장실에서 있던 재환은 기전실에 연락했다.

    “어우~ 어제 술을 좀 먹었더니 뻐근하네. 가서 물냉면 한 그릇 가져다 줘요.”

    [네, 회장님.]

    “겨자랑 식초 팍팍 쳐서.”

    혜성그룹 기전실이 졸지에 회장님의 해장음식까지 배달하게 되었고, 잠시 후 강남의 이름난 면옥에서 포장해온 냉면을 받은 재환은 한 그릇 비운 다음에 말했다.

    “10분 있다가 기전실장이랑 김 고문 들어오라고 하세요.”

    “알겠습니다. 회장님.”

    직원들이 빈 그릇을 치우고 나가자 재환은 재떨이를 꺼내 식후 연초를 하면서 크게 숨을 내쉬었다.

    “월드컵은 월드컵이고, 이렇게 된거 내기 이후에 움직일 재단 운용을 생각해 봐야겠어.”

    재환은 담배를 끄고 금고를 따서 그 안에 있는 서류를 꺼냈다.

    지난번 월드컵 이전 내기 이후로 재밌는 프로젝트를 생각한 것이었다.

    잠시 후 노크 소리와 함께 기전실장 임창훈과 김범준이 도착했다.

    “회장님. 저희 왔습니다.”

    “네, 앉으세요.”

    재환은 둘을 소파에 앉힌 다음 이야기를 시작했다.

    “고문님은 요새 재미난 일 있으십니까?”

    김범준에게 넌지시 묻자 그는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하, 앉아서 월급만 받아먹자니 좀이 쑤시긴 합니다.”

    3년 고문에 위촉되고 최근에는 재환대신 사장단 모임 등에서 차나 마시면서 그룹 돌아가는 사정을 들으며 보고하는 게 전부였다.

    “다름이 아니라 김 고문님과 기전실장님을 두고서 새로운 프로젝트를 좀 진행해보려고 합니다.”

    “새로운 프로젝트···.”

    회장님이 또 엄청난 사업을 하신다는 말에 두 고위임원은 긴장하며 경청했다.

    재환은 대략적으로 자신이 작성한 계획서를 책상 위에 올려놨다.

    “이번 사업은 회사의 매출에도 도움이 되겠지만, 미래를 위한 큰 그림으로 꼭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말이죠.”

    서류를 쭉 읽어본 김범준과 임창훈의 눈이 점점 커졌다.

    “이게···?”

    “회, 회장님. 이건?”

    “뭘 그렇게 놀라십니까? 좋은 일 좀 해보겠다는 프로젝트인데 말이죠.”

    재환의 말에 범준이 입을 열었다.

    “기술문화재단이라니··· 혜성의 이름으로 교육재단 말고 다른 재단을 운영하신다는 겁니까?”

    “네, 맞습니다. 초대 이사장은 제가 될 거지만 실무는 김 고문님이 좀 맡아주세요.”

    “네!?”

    고문직 맡느라고 좀이 쑤신다고 우스갯소리로는 말한 김범준은, 재환의 후진 양성을 위해서 일 하나 맡아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기술문화재단··· 그러니까 정확히는···.”

    “재단 만들면 죄다 문화라는 단어 붙여서 그냥 쓴 거죠. 실제로는 기술재단입니다.”

    재환은 심플하게 이름을 짓고서 상세하게 설명해줬다.

    “외환위기에 IT버블을 겪으면서 수많은 실업자가 나왔고, 거기서 재기한 양반들은 새로운 아이디어 사업 아니면 식당이나 차렸죠.”

    “그거야 정부의 잘못된 정책으로 인한 경제위기 때문에···.”

    “네, 뭐 그런것도 있겠지만, 결론은 그거에요. 넘쳐나는 젊은 인력들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그리고 그들의 아이디어를 사고 싶은 겁니다.”

    재환의 말을 들은 임창훈과 김범준은 그다지 와닿지 않았다.

    오히려 그 둘의 표정은 ‘우리가 일자리 담당하는 정부 기관도 아니고 그런 걸 왜 합니까?’라는 반응이었다.

    “이 재단은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어려운 사람을 도울 겁니다. 그리고 자활을 지원하고 성공할수 있게 만들어줄 거죠.”

    “예, 기술적 지원이라는 것을 보면 확실히···.”

    “일을 할 수 있게 해주는거죠. 기능사를 하건 기사를 하건, 기술사를 하건 일단 도우면서 새로운 업체에 취직을 돕는 겁니다.”

    “회장님. 여기 있는 특허 지원은 뭡니까?”

    “추후 만들 미래의 유니콘 기업 등의 아이디어 투자요.”

    이제 벤처기업이란 단어는 IT버블 이후 서서히 사라지는 단어고 그렇다고 이때는 있지도 않은 단어인 ‘스타트업’이나 쓰기도 뭐해 유니콘이라 퉁쳤다.

    “그리고 이 재단은 다른 기업의 후원도 있을 겁니다. 일단 제가 맡기는 하지만 말이죠.”

    “아, 경제련의 도움도 있는 것입니까?”

    “경제련··· 소속된 사람들이 있긴 하죠.”

    육공회라는 존재는 아직 아는 사람이 극소수이니 대충 그런 식으로는 넘기기로 했다.

    어차피 육공회에서 시작할 사업이니 후원자로 그들이 모습을 드러내도 특별할게 없긴 했다.

    그냥 ‘친분있는 회장님, 사장님들이 큰 손으로 나섰구나.’ 생각 정도로 끝날 것이다.

    “그래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흐으음. 잘만 된다면 향후 혜성그룹의 미래에 아주 큰 힘이 될 것입니다.”

    재환은 김범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게 어떻게 보면, 유망한 인재에 대한 투자를 하고, 그러면서 새로 일어날 기업들을 후원해서 모두 우리 편으로 끌어들인다는게 아닙니까?”

    “물론이죠.”

    “한국의 실리콘 밸리 투자자들 같은 일을 혜성이 할 수 있는 거군요.”

    재환은 이해한 김범준에게 엄지를 보냈다.

    유학 시절에도 많이 들었던 이야기였다.

    IT에 대한 지식은 부족해도, 비전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는 ‘월가의 큰 손’들이 위험을 마다하지 않고 기술력 하나로 차고에서 뚝딱거리는 이들을 수백억- 수천억의 자산가로 만들어주고 거기에 대한 투자 수익을 몇백배까지 끌어들이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런 프로젝트라면 결국 훗날에는 정부와의 협의가 필요하지 않겠습니까?”

    “낙하산이랑 세금도둑 양성할 일 있어요?”

    재환의 말에 범준은 입을 다물었다.

    “정부랑 손잡고 이런 사업 하면요. 유망한 아이디어가 아니라 누구 소개로 온 어디 집 아들, 누구 친구 아들 등이 적당한 팀 만들어서 지원금만 빨아먹고 튄다고요.”

    물론 기업이 재단을 운영한다 하더라도 지원금 빨아먹으러 달려드는 낙하산 문제는 있을 수 있지만, 적어도 감사는 더 엄격할 것이라 자부했다.

    재환 하나만 하더라도 그런 약파는 놈들은 걸러낼 수 있는데, 삼신,KS,아성, 신누리, 두성 등의 기업의 눈까지 피하는 놈이 나온다면 그건 정치판에 보내야 할 인재가 될 테니 말이다.

    “암튼 이런 계획을 준비하고 있고, 올해 하반기에 본격적으로 궤도에 올릴 거니 준비들 해 주세요. 씨 좀 뿌리고 미래 인재 농사 좀 지어 봅시다.”

    “알겠습니다. 회장님.”

    굵직굵직한 M&A나 신제품 프로젝트 등이 아닌 재단 일이라는 것에 대해 점점 회장으로써 만능으로 뛰려는 재환이었고, 임원들은 따르기로 했다.

    ***

    월드컵은 계속 진행됐고, 미국전 무승부에 탄식하고, 포르투갈전 승리에 환호하며 한국이 16강에 진출하자 너나할 것 없이 길거리 응원으로 전 국민이 들떠있을 때였다.

    오늘은 16강 이탈리아전이 있을때였고, 거기에 따라 관람 장소가 혜썽 본사 옆인 혜성백화점 최상층이 되었다.

    그 이유는 다름이 아닌 삼신그룹의 산하인 시네박스에서 현규의 요청으로 영화관을 경기 관람용으로 하루 대절을 한 것이었다.

    그래서 재환도 백화점을 돌면서 식품매장에서 맥주다 치킨이다 준비할때였다.

    “자, 다 합해서 얼마입니까?”

    “저, 저기 그게···.”

    “빨리 계산해주세요. 회장이라고 돈 안 받습니까?”

    “네, 네!”

    강남본점 캐셔는 그룹 회장이 직접 와서 음식 쓸어가는 것에 대해 떨리는 손으로 가격을 말했다.

    “시, 십일만 칠천원입니다.”

    “카드로 해주시고, 영수증은 버려주세요.”

    “네, 네!”

    주변에서 따르는 기전실과 보안팀 직원들도 몇 번이나 이런 거 직접 하지 마시고, 자신들에게 시켜달라고 요청했지만, 재환은 쿨하게 직접 움직였다.

    “이따 위에 극장으로 손님들 많이 오는 거 알죠?”

    “네! 회장님.”

    내로라 하는 재벌가 사람들이 단체관람하러 온다고 하니 경호팀은 한층 더 분주하게 움직였다.

    “저기 회장님. 그거 주시지요. 저희가 위로 올라가서 세팅하겠습니다.”

    “별로 안 무거운데, 그냥 가지고 올라가죠.”

    “회장님 제발···.”

    기전실과 경호팀 체면이 말이 아닌 상황인지라 울 것 같은 얼굴로 ‘제발 저희에게 시켜주십쇼!’라는 모습의 직원들을 본 재환은 그제야 짐을 맡겼다.

    “그럼 A관에 세팅하시고, 오늘 거기 청소 좀 깔끔하게 해 주세요.”

    “네, 네! 회장님!”

    드디어 본연의 일을 할 수 있어 분주하게 움직이는 직원들이었다.

    한편 재환의 등장으로 백화점 고객들은 회장님의 실물에 수군거리면서도 은근히 호감도를 가졌다.

    ‘세상에 혜성 회장 실제로 보니 엄청 젊네?’

    ‘이 동네에서 잘 보이잖아? 지난번 얘기 못 들었어?’

    ‘어머머, 여기 자주 와야겠다. 우리 아들 기라도 받아야 겠어.’

    대치동 부인들의 웅성거림 속에서 재환은 오더했던대로 1층 매장이 전부 월드컵 상품으로 팔리고 있을 때, 응원 도구와 티셔츠를 골랐다.

    그때, 재환의 눈에서 익숙한 이가 보였다.

    “음?”

    세일을 하느라 박스에 담겨있는 응원 유니폼을 뒤적거리면서 자신에게 맞는 사이즈가 있나 찾아보는 두 여성이었다.

    재환은 조용히 다가가서 그 중 긴 생머리의 여성에게 말했다.

    “여기서 뭐해?”

    “어··· 흐앗!?”

    “뭘 그렇게 놀라고.”

    제환은 자신을 보고 놀라는 미연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면서 티셔츠들을 들었다.

    “응원 도구 사는거야?”

    “네, 네! 거리응원 나가보려고요.”

    “더운데 밖에서 경기 보게?”

    그때 옆에 있던 친구가 황급히 미연에게 누구냐고 속삭였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친구의 입을 틀어막았고, 말했다.

    “그게··· 집에서 시끄럽다고 해서 적당히 볼 곳 찾고 있는데, 호프집이고 고깃집이고 다 꽉차서요.”

    “그럼 여기 위에서 볼래? 오늘 극장 문 닫고 스크린 단관장으로 만들었다.”

    “아, 아니 그렇게까지 안 하셔도···.”

    “괜찮아. 친구들 전부 불러와도 충분히 남는다. 영화관 자리 하나 통째로 줄게.”

    재환은 지갑을 꺼내 자신의 명함을 몇장 꺼내 뒷부분에 싸인을 해서 미연에게 건네줬다.

    “이따가 보러 와. 나는 A관에서 친구들하고 보니까 부담되면 다른관에서 봐도 되고.”

    “고, 고맙습니다···.”

    재환은 손을 흔들면서 떠났고, 그제야 대체 누군데 그렇게 쩔쩔매냐는 친구는 [혜성그룹 회장 신재환]이라는 명함을 보고 기겁했다.

    그렇게 월드컵 열풍 속에서 훈훈한 분위기가 혜성백화점 내에서 돌고 있을때였다.

    “저 사람이 맞죠?”

    “그래, 실물로는 처음 보지? 뉴스에선 많이 나왔지만.”

    정장을 입은 의문의 두 남성은 재환을 보고서 속삭였다.

    “생각보다 더 소탈한 사람 같군요? 딱히 뭐 걸릴 행동을 하지도 않고.”

    “대외적으로 인기가 좋은 양반이야. 원장님도 그래서 저분을 선택하신 거다.”

    정장을 입은 남성들은 재환을 유심히 지켜본 뒤 ‘원장’님에게 보고 하기 위해 움직였다.

    재환은 누가 자신을 지켜 보고 있다는 것을 모른 채, 월드컵 관람 준비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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