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 새로운 파트너
재환은 회장실에서 지난번 연화재단 모임에서 받은 명함들을 둘러보고 있었다.
대부분은 오다가다 볼 사람들이라서 그냥 예의상 받았지만, 그중에 한 명의 것은 신경이 쓰여서 담아두고 있었다.
“흐으음.”
재환이 인터넷으로 검색한 것은 조아은행이었다.
‘조선아태은행’이라는 이름으로 한반도 최초의 근대화 은행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는 조아은행.
조상제한서는 몰락했어도 그들은 정부의 공적자금을 80% 이상 메꿔내면서 다시 살아난 존재였다.
“좋은 곳이기는 한데, 생각해보니 이쪽하고는 진짜 교류가 없었단 말이지.”
혜성그룹의 주거래은행은 대한산업은행과 농협은행, 그리고 미금신용금고.
이 세 곳으로도 기업 융자는 충분히 돌아가고 있었다.
RRRRR-
인터넷 서핑을 하던 중 전화기가 울리자 재환이 수화기를 들었다.
“뭡니까?”
[회장님. 대한산업은행에 매각추진위원장 윤기철 부행장이라고 전화가 왔습니다.]
“흐음.”
윤기철 이 사람도 참 집요했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전화에 재환은 이쯤에서 한 번 만나주기로 했다.
“전화 돌려요.”
전화를 받자마자 차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예~ 윤 부행장님. 오랜만에 연락한 것 같습니다.”
그동안 재환이 먼저 피했지만, 통화가 됐으니 예의를 지키기로 했다.
[요즘 그룹 일로 바쁘실 텐데 자주 연락을 드려서 죄송합니다. 다름이 아니라 산업은행과 혜성그룹간의 문제로 이야기를 드리고 싶습니다.]
“네, 그렇지 않아도 한 번 만나뵈고는 싶었죠. 이따 저녁이라도 같이 하시겠습니까?”
[즉시 준비하겠습니다.]
내친김에 바로 만나자는 말에 윤기철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네, 그래요. 여의도에 한우정식 괜찮은데가 있다던데요? 금융위 간부들 만날 때, 회식하는 곳이라고.”
위치까지 넌지시 흘리자 윤기철은 빠르게 움직였다.
[네, 즉시 준비하겠습니다. 시간은 언제가 괜찮으십니까?]
재환은 오늘 저녁에 여의도에 한정식 집에서 약속을 잡고 통화를 끝냈다.
“자, 그러면 오늘 저녁은 소고기인가?”
고기도 굽고 술 한잔 하면서 그동안 거리를 뒀던 이야기를 슬쩍 흘리면 저쪽에서 분명 이야기가 나올거라 생각했다.
그리고 저녁 퇴근 전 재환은 기전실의 연락을 받았다.
“회장님, 임선아라고 혹시 아십니까?”
임창훈의 물음에 재환의 머리 위로 ‘!’가 올라왔다.
“조아은행의 그 임선아?”
“네, 맞습니다.”
“조아은행 영업부 이사라고 하길래 명함 하나 받은게 있긴 하죠. 근데 왜요?”
재환의 물음에 임창훈은 조심스럽게 자신이 받은 제안을 말했다.
“회장님. 대윤자동차 인수건으로 비공식적인 IB 알아봐달라고 하신 일 말입니다. 조아은행 산하에 조아금융투자의 제안이 왔습니다.”
“호오?”
“그걸 본사 영업부인 임선아 이사라는 사람이 알선한다고 합니다.”
임창훈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 재환은 그때 드레스까지 갖춰 입고 접근했던 그 여자가 의도했다는 것을 알았다.
‘사업 논의라고 하더니 그 모임에 가서 나한테 명함을 준거였군. 조아은행이라.’
재환은 잠시 생각하다가 그쪽도 곧 만나기는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좋아요. 그쪽도 제가 따로 만나보죠. 스케줄은 임 실장님이 맡아주세요.”
“알겠습니다. 회장님.”
“일단 오늘 저녁 산업은행이랑 이야기 하면서 정보좀 들어야겠어요.”
재환은 준비를 마치고서 떠날 준비를 했다.
***
여의도에 있는 고급 한정식집에서 방 한곳을 잡은 재환은 산업은행 부행장에게 극진한 대우를 받았다.
치이이익-
옆에서 식당 직원이 마블링이 아름다운 한우를 굽고 알맞게 잘라서 재환의 앞에 세팅해줬다.
“여의도도 확실히 맛집이 많군요.”
“하하하, 언제든 이쪽으로 오신다면 좋은 식당을 많이 알려드리겠습니다.”
첫 만남부터 훈훈한 분위기 속에서 이야기가 진행됐다.
잠시 후 요리를 만든 직원이 공손히 인사하며 물러났을 때, 재환은 도자기에 담긴 인삼주를 따르며 잔을 올렸다.
“한 잔 하시죠?”
“네, 회장님.”
잔을 부딪힌 뒤로 쭉 들이킨 재환은 술잔을 내려놓고 이야기를 꺼냈다.
“요새 대윤자동차 매각 건으로 힘드시죠?”
“···아, 그렇습니다.”
그게 힘든 이유는 바로 그 말을 한 사람이었으니 미묘했다.
안 그래도 은행장은 물론이고 재경부 관리들까지 자신을 닦달해서 ‘어떻게든 대윤자동차를 산업은행 산하에서 매각하여 국가의 투입자금을 회수해라!’라는 명을 들었다.
재환은 조용히 술을 마시다가 먼저 이야기를 꺼냈다.
“상황은 대략 아시죠? 요새 증권가에서 제가 대윤자동차 인수를 꺼려 한다고요.”
“회장님. 저는 진짜 회장님의 본심을 듣고 싶습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들이받아버리기로 작정한 윤기철이 고개숙여 말했다.
“부디 답변을 부탁드립니다.”
“흐으음.”
재환은 자신에게 술잔을 채워주는 윤기철을 향해 조심스럽게 말했다.
“지난 번 대윤자동차 1차 유찰 이후부터 틀어졌습니다.”
“네?”
“삼신자동차와 컨소시엄을 이루려는게 안됐고, 그 뒤로 삼신은 상윤을 인수했습니다.”
“네, 분명 그일은···.”
“그러니 삼신은 시큰둥하더군요. 제가 삼신그룹 임원도 겸하는 거 아시죠? 이건호 회장께서 별로 관심이 없으십니다.”
결국, 공동 컨소시엄 연합이 안되는 판이니 이번에는 그렇게 큰돈을 가지고 움직일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혜성그룹이라면 충분히 인수가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저희가 돕겠습니까?”
“어떻게 말이죠?”
“이번 매각 대금의 기업융자를 저희 산업은행이 제공하겠습니다.”
“!”
재환은 생각보다 세게 나오는 산업은행의 반응에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매각 담당자가 나와서 ‘우리가 급처를 해야되니 돈이 필요하면 우리가 돈을 대서라도 사가라’라는 상황이었다.
즉, 이걸 승낙하는 순간 혜성그룹은 ‘외상’으로 자동차 회사를 구입 할 수 있었다.
괜찮은 조건이었지만, 재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렇게까지는 안 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회장님···.”
“일단 저희가 이번에 신사옥 설립 때문에 추가 예산이 들어갔습니다. 아마도 하반기때는 다시 현금 조달이 가능하겠지만··· 글쎄요?”
여전히 할지 안할지에 대해서 애매한 모습을 보이는 재환은 한 가지는 약속했다.
“적어도 2차 유찰이 일어나는 일은 안 나오게 하겠습니다. 저를 조금만 믿고 기다려 주신다면 바로 응답하지요.”
“참여하신다는 말로 들어도 되겠습니까?”
“생각은 해 본다는 말이지요.”
윤기철은 그래도 윗선에 어떻게 이야기는 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고 안도했다.
지금 계속 간을 보고 있는 신 회장이 ‘일단 2차 유찰까지는 안 갈거다.’라고 이번 입찰에 승낙 의사를 밝혔다고 말하면 될 것으로 생각한 것이다.
“어떻게 이야기 좀 잘 해주세요. 저희 역시 현금 조달만 하면 어떻게 단독 입찰을 고려해 보겠습니다.”
아예 쐐기를 박아주는 재환의 말에 윤기철은 안도했다.
“자~ 그럼 이야기도 대충 끝냈으니 식사 계속 하실까요?”
“예, 예! 그렇지요. 회장님!”
재환은 다시 훈훈한 저녁 자리를 만들어서 시간을 보냈다.
***
얼마 뒤 재환은 회장실에서 손님을 맞이했다.
단아한 정장차림에 뒷머리를 땋고 짙은 화장으로 도도한 모습의 여성이었다.
“인사드리겠습니다. 조아은행 영업부의 임선아라고 합니다.”
“네, 앉으세요.”
재환은 그녀를 초대하고서 이야기를 나눴다.
“지난번 드레스 차림으로 사업 이야기 하신거 인상적이었습니다.”
“회장님이 저희 조아은행과 같이 하실 것을 생각하고 제가 적극적으로 움직였습니다.”
“하하하! 그래요. 영업은 그렇게 해야죠.”
다른 재벌 회장이었다면 몰라도 재환은 오히려 그런 움직임에 흥미를 느끼며 조아은행에 연락한 것이었다.
마흔의 나이에 메가뱅크의 임원에 올라간 여성이니 모르긴 몰라도 산전수전 다 겪은 인물일 것이다.
그리고 그 능력이 얼마나 되는지 지금부터 재환이 알아보기로 했다.
“여기까지 오신 것은 역시 대윤자동차 이야기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바로 이야기 드려도 되겠습니까?”
“하십시오.”
재환이 차를 대접하면서 말해보라고 제안하자 임선아는 조용히 심호흡을 하고 이야기를 꺼냈다.
“먼저 회장님께서 대윤자동차 입찰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못하시는 것은 지난번 1차 매각 유찰 때문이 아닙니까?”
“네~ 그 이야기는 금융전문가란 양반들이 전부 하던 말이에요.”
“1/6까지 매각대금을 깎으면 저희와 같이 거래하실 수 있겠습니까?”
“!?”
재환은 그 이야기를 듣고서 눈이 가늘어졌다.
“2차 유찰 될 소리 하는군요.”
“아닙니다. 가능합니다.”
임선아는 그렇게 말하면서 가방을 열어 서류를 재환에게 건넸다.
“이것은 자사의 IB 전문가들에게 내건 기획서입니다.”
재환은 그것을 받고서 손가락에 침을 발라 한 장씩 넘겨서 읽어봤다.
[대윤자동차 매각 실패이후 추락한 주가.]
[현 시가총액과 공장 헐값매각 시도, 예상가 15억 달러.]
[현재 참여시 20억달러 내외 인수 가능, 단 변수는 해외자동차 업체의 참여.]
“이것 참···.”
재환은 그것을 보고서 탁자 위에 올려놨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투자자문을 이런 식으로 쓰셨습니까? 핵심만 간추린건 괜찮지만, 너무 내용이 적잖아요?”
“그 핵심만 추슬러서 미리 가져온 것입니다.”
“쯧.”
말은 그렇게 했지만, 그래도 어느정도 조아은행이 머리는 돌아가는 것 같았다.
아직도 대외적으로는 대윤자동차의 그 ‘대윤’이라는 이름값으로 2차 매각에서 적어도 4-50억 달러는 받을 수 있다는 착각을 했다.
하지만 유찰 이후 주가 폭락에 기술력 부재로 인해서 그 가치는 반의 반값도 안 되는게 예전이었다.
뭐, 1차 입찰때만 하더라도 가솔린 엔진 신기술을 가지긴 했어도, 2년이 지났으니 쉰 떡밥이 되었고 말이다.
“이정도 값어치로 생각한 것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아직 저희가 조아은행과 손잡을 또 다른 매리트는 못 느꼈어요.”
재환의 말에 임선아는 가방 안에서 또 다른 서류를 꺼내 재환에게 건네줬다.
“사내 1급 기밀문서입니다. 이것은 오직 회장님만 열람 가능하십니다?”
“안에 뭐 그리 대단한게 담겨있다고.”
재환은 그것을 받아들고서 한 번 천천히 읽어봤다.
[제임스 모터스 대윤자동차 입찰전 참여.]
[재정경제부와 정부 요청, 대윤 R&D연구인력을 미국 본사로 옮긴다는 조건부로 참여결정]
[대윤자동차 인수대금은 제임스 모터스 산하 금융사업부.]
재환은 그것을 보고 생각했다.
‘뭔가 했더니만 JM사의 오프더 레코드 정보인가? 하긴 얘들이 정부 보조 받고서 그렇게 대윤 먹어치우긴 했지.’
그래도 이 정도까지 자체적으로 알아왔다는 걸 보면 인정할만 했다.
“어떻습니까?”
“이거 어떻게 알아오신 겁니까?”
“그것은···.”
“아, 알려주시면 거래하지요. 이번 대윤자동차 인수전의 투자자문은 조아은행과 같이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그럼 말하겠습니다.”
A급 정보를 가져다 바친 대가로 큰 거래를 만들어내자 임선아는 곧바로 말했다.
“현재 재정경제부 내에서 엘리트 간부들을 세계은행 파견과, 국비 박사과정을 받는 것은 아실 겁니다.”
“그쪽에 안테나를 꽂았다고요?”
“외환위기 이후 국제정보를 얻기 위해 움직이는 자사의 방침입니다.”
재환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 서류들을 건넸다.
“조만간 연락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조아은행의 행장님하고 한 번 식사를 마련해보고 싶군요.”
“바로 연락드리겠습니다.”
재환은 그녀와 악수를 하고 다음 투자자문에 대한 가닥을 잡았다.
얼마 후 대윤자동차의 매각 공고 기사가 점점 줄어들었을 때, 기습적인 보도가 있었다.
[속보입니다. 대윤자동차 매각건으로 과거 1차 입찰에 참여했던 미국 제임스 모터스가 참여한다고 합니다.]
[과거 대윤자동차와 기술교류를 했던 제임스 모터스는 수십억 달러가 들 수 있는 인수전에 다시 한 번 참여하겠다고 전했습니다.]
곧바로 맞아떨어진 시나리오였다.
그리고 재환은 느긋하게 그 기사를 보며 전화기를 들었다.
[예, 회장님.]
“때 됐어요. 딱 외국회사 들어올때네요.”
[어떻게 내일 바로 입찰서를 제출할까요?]
재환은 그 이야기를 듣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뇨. 입찰 기간이 앞으로 1주일 남았죠?”
[네, 그렇습니다.]
“마지막 날에 합시다. 내가 직접 가죠.”
재환은 그것에 대한 명령을 내린 다음 통화를 마치고 누웠다.
그리고는 날짜를 계산하다가 피식 웃었다.
“조만간 자동차 회사 인수전으로 재미난 꼴 많이 볼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