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 나한테 들러붙을 생각을 하지 마.
양재동 사옥에서는 오붓하게 혜성그룹 가족들이 모이는 아침 자리가 있었다.
“재환아. 그 얘기 들었어?”
“무슨 얘기요?”
명숙은 웃으면서 아들에게 말했다.
“세상에 기환이가 연애를 다 한다지 뭐니? 그것도 마이다스건설 회장 조카래.”
“아, 그거요? 예전에 걔가 이야기하더라고요.”
어느새 그 이야기가 부모님에게 퍼졌다는 걸 보니 슬슬 그 녀석 장가가겠다고 생각한 재환이었다.
“옛날에 기억하시죠? 급안되는 회사라고.”
과거 구조조정으로 혜성건설을 매각한다고 하자 ‘그런 급안되는 중소기업에 계열사 팔수 없다.’라고 했다가 대판 싸웠던게 벌써 5년전이었다.
“흠, 흠! 이 녀석아! 그땐 진짜 별거 아닌 녀석들이었어. 요새는 혜성건설 가지고 좀 잘 나가는거 같지만···.”
“사람 일 모르는 거라니까요. 그 사람이 예비 사돈이 될 수도 있는거잖아요.”
“그래, 기환이도 일을 하니까 어떻게 여자는 만나는구나.”
희경은 그 말을 하면서 자신의 못난 아들을 도끼눈으로 노려봤다.
갑자기 또 타겟이 자신이 되었다는 것을 안 재환은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어떤 놈은 서른다섯 먹고도 여자 하나 애비에게 소개 못 시켜주는데 말이야.”
“여보!”
명숙이 한마디 했지만, 희경은 계속 재환을 갈궜다.
“어떻게, 내가 죽기 전에 조카 말고 아들의 상견례는 볼 수 있는 거냐?”
“아~ 거 참. 왜 그렇게 아들 연애사를 캐내려고 하세요? 벌써 할아버지 되시려고 합니까?”
“야 임마! 내가 환갑 넘고서 아직도 장가 못간 자식놈이 있는데 더 이상한 거 아니냐?”
또 장가 이야기를 하자 재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만 좀 하세요. 마흔 전에는 여자 만날테니까.”
“퍽이나 그러겠다!”
결국, 이번에도 결혼 이야기가 나오자 이쯤 되면 그냥 웃음만 나오는 재환이었다.
“그러니까 손주 보시려면 건강 신경 쓰시고 술,담배 좀 줄이세요. 이번에 신흥한방병원 원장님이 지어주신 두 분 보약 꼭 챙겨 드시고요.”
“그래! 아주 그거 먹고 백 살 까지 사마!”
결혼 이야기에서 마지막엔 보약 선물로 훈훈하게 아침 식사를 끝낸 재환이었다.
식사 이후 강남 본사로 출근한 재환은 아침 회의를 가볍게 끝내고 임창훈의 기전실 보고를 받았다.
“썽동회관에서 모임이요?”
“네, 혜성그룹에 정식으로 초대장이 왔습니다.”
재환은 그것을 받아들고 한 번 열어서 카드를 확인했다.
“연화재단의 후원회의 밤이라.”
연화는 GH그룹의 창업주 구인수 회장의 호였다.
즉 GH그룹이 창업주 선대 회장님의 이름을 건 장학재단의 후원회를 여의도 GH그룹의 본사 쌍동빌딩 회관에서 연다는 것이고, 혜성에게 정식 초대장을 보낸 거다.
“흐음.”
말이 후원회지 기부 행사는 약식으로 진행될 것이고 상위 0.1%가 움직이는 친목의 자리일 것이다.
재계뿐만 아니라 정치계에서도 방귀 께나 뀌는 인간들이 참여할 것이고, 가십거리를 찾는 언론계 거물들도 올 것이다.
“회장님,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뭐, 딱히 문제없으면 참가하지요.”
그런 자리라면 자신뿐만 아니라 육공회의 멤버들도 대거 참여할테니 한 번 가 보기로 했다.
“산업은행은 계속 연락합니까?”
“그렇지 않아도 회장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삼신의 도움이 없고 IB(투자자문)을 따로 구하지 못해서 입찰 참여가 어렵다고 연락드렸습니다.”
“좋아요. 그렇게만 말해도 이해할 겁니다.”
재환은 분명 다음에는 외국계 자동차 회사에게 손을 내밀 거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간을 보면서 입찰가를 최대한 낮춰야 했다.
‘변수가 하나 생기겠지만···.’
재환은 머릿속으로 하나 생각나는 게 있었지만, 지금의 정권이 ‘그 짓’을 할 리는 없다면서 피식 웃었다.
“임 실장님. 그럼 앞으로 투자자문을 비공개로 알아봐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회장님.”
재환은 그것을 명한 뒤로 각 계열사의 서류를 검토했다.
“시멘트랑 레미콘은 진짜 꾸준하네. 대구쪽에 요새 건설이 많은가?”
그동안 별로 신경 쓰지 못했는데, 알아서 잘 크고 있는 두 계열사를 보고서 재환은 흡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뭐, 조만간 그룹 내에 있는 그린벨트 수십만평 규제만 풀리면 제대로 키워줘야겠지.”
과거 혜성건설을 매각했을 때, 그린벨트라 소유해봤자 그다지 가치가 없는 땅을 재환의 명으로 대규모 가지고 있었다.
그 위치는 성남 분당구 그린벨트, 서울 은평구, 그리고 경기도 김포시였다.
훗날 혜성그룹 최고의 보물이 될 금싸라기들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 뒤로 다른 계열사들을 돌아보면서 연일 주가가 오르고 있는 곳들을 확인했다.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훗날 혜성전자도 액면분할을 준비해야 될 것이고 각종 계열사들의 통폐합도 준비해야됐다.
“할 일은 많은데, 좀은 쑤시고.”
하던대로 나가서 현장좀 돌고 싶었지만, 지금은 그냥 본사에서 눈에 안 띄게 있어야 했다.
얼마 후 혜성그룹에는 반가운 손님이 찾아왔다.
“어따~ 이게 대체 얼마 만인지 모르것구먼! 신 회장님께 인사 드리겠소잉!”
“어서오십시오. 오 회장님!”
“신 회장님앞에서 회장이란 칭호가 거시기 하네요잉.”
걸걸한 전라도 사투리로 반갑게 인사하는 마이더스 그룹 오현우 회장이었다.
지난번 현재의 본사 맞은편에 신형 건축물을 짓고서 신사옥을 만드는데 마이다스 건설을 선택한 재환이었다.
“그동안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서해안고속도로 2구간하고, 광주에 호텔도 크게 지으셨다죠?”
“하하하, 그게 다 기술력 좋은 건설사를 제게 맡기셔서 그런 거 아닙니까?”
껄껄 웃는 오현우에게 재환은 차를 대접하고 이야기꽃을 피웠다.
“요새 조카분에게 봄이 오셨다면서요.”
“잉, 그러게 말이요. 저한테도 딸 같은 아이인데, 공교롭게도 혜성가 사람이랑 연애를 다 하는구먼.”
오현우의 동생 오승우 마이다스 용접봉 사장의 딸은 사진으로만 봤을때 아주 예쁘지는 않아도 그럭저럭 기환과 어울리는 여성이었다.
“저도 제 사촌 동생이랑 회장님 조카분이 잘 이어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면 자주 더 사업교류가 되겠죠?”
“하하하, 이를 말이겠소?”
집안 간의 훈훈한 이야기는 이쯤하고, 이제 여기 온 본론에 들어가기로 했다.
“연면적 25층에 6400평이라···.”
짓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이곳이 강남이라는게 문제였다.
“조망권 문제도 있고, 그래서 외벽 유리로 하면 주변에서 뭐라고 할 겁니다. 디자인부터 이 일대하고 위화감 없이 설계해야되겠어요.”
“이잉- 무슨 말인지 잘 알것소잉.”
오현우는 내친김에 회장실에서 보이는 혜성그룹 소유의 공백지를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대치동인 현재 사옥에서 저 멀리 보이는 거대한 주상복합을 보고 혀를 내둘렀다.
“히야- 역시 삼신은 삼신이네요. 63빌딩보다 더 큰 주상복합이라니.”
요새는 사옥에서도 잘 보이는 삼신T팰리스를 보고서 재환이 미소를 지었다.
‘현규 부탁으로 저거 10채 넘게 사놨는데. 나중에 써먹을 때가 오겠지?’
어쨌건 재환은 큰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오현우와 악수를 나눴다.
“곧 저희 기전실 직원들이 갈 것입니다. 이제 조율을 하고 설계도가 완성되는 대로 곧바로 인허가 준비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나가 아주 강남에서 제일 튼튼한 건물로 만들어드리겠소잉.”
“네~ 믿습니다.”
재환은 오현우를 보낸 뒤로 올해의 큰 프로젝트도 하나하나 이어지는 것을 느꼈다.
***
얼마 후 여의도 쌍동빌딩에 도착한 재환은 새로 맞춘 정장을 갖춰입고서 모습을 드러냈다.
스타일링에 한껏 신경을 쓴 모습은 주변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연화재단 직원들의 공손한 안내를 받으며 회장으로 향했다.
“초대장을 보여주시겠습니까?”
“여기요.”
품 안에서 초대장을 꺼내자 확인한 뒤로 다시 한번 고풍스러운 내부로 안내를 받았다.
‘그러고보니 GH랑 교류는 처음인가?’
경제련에 소속되지 않은 대기업이었고, 집안 내에서도 큰 교류가 없어서 만날 일이 없었다.
회관의 내부는 그때보다 더 화려한 장식이 가득했고, 오케스트라의 클래식음악이 은은하게 퍼지면서, 수많은 얼음 조각상들 중앙으로 벽에는 명화들이 가득했다.
하나 하나가 수억대는 되는 그림들을 보고서 재환은 GH가 돈좀 썼다는 생각이 들었다.
“혜성그룹 회장님이 오셨군요.”
“!”
반갑게 다가와 인사하는 중년의 남성은 GH전자 부회장인 구영준이었다.
그룹 회장인 구영균의 동생으로 전자산업을 맡고있는 인물이었다.
“아, 안녕하십니까? 부회장님.”
“하하, 그래요.”
“제가 늦지는 않았죠?”
“아닙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좋은 음식을 많이 준비했습니다.”
특급 호텔의 셰프들이 만드는 요리는 보는것만 해도 행복할 정도였다.
그리고 안에서 화려한 드레스와 정장을 입은 사람들 속에서 재환을 반갑게 부르는 이가 있었다.
“여어! 이제 왔냐?”
대현이었다.
“아, 형님!”
역시나 이런 자리에는 절대 안 빠지는 KS의 최대현이 재환을 만나고 반갑게 안았다.
“연락하지 그랬냐?”
“안 그래도 이 자리에 육공회 형제들 있을 줄 알았어요.”
“나도 왔다. 재환아.”
옆에 정인과 진용이 같이 인사하자 재환은 모두와 악수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그때 와인잔을 들면서 재환을 향해 패션쇼를 하듯 걸어가는 여성들이 있었다.
하나같이 오늘을 위해 굉장한 스타일링을 했고, 연예인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의 미모들이었다.
“여기 여자분들 빡세게 가꿨네?”
재환의 중얼거림에 옆자리에 있던 대현이 키득거리며 말했다.
“왜 그러겠냐?”
“음?”
“슬슬 시선이 안느껴지냐? 너를 노리는 간택처녀들이 말이야.”
“···?”
그러고 보니 드레스 차림의 젊은 여성들은 돌아다니거나 자리에 앉아있으면서도 계속 재환을 힐끗거리고 있었고, 일부는 눈이 마주칠때마다 색기있는 웃음을 보였다.
“저기~ 저 빨간 드레스에 몸매 좋은 애가 건욱대학교 이사장 딸이야. 너에대해 엄청 묻더라.”
“아이고.”
“그리고 저쪽에 보라색 드레스 입고 와인 잔 만지는 애는 국제일보 사주 손녀, 맞선 다 차고 여길 왔다더라.”
그 외에 이름난 집안의 여식들에 대해 하나하나 설명해주자 재환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결혼도 하신 양반이 남의 집 귀한 딸들은 줄줄 꿰고 있어요?”
“야, 신재환이. 너 오기 전부터 저 아가씨들이 대현 형님한테 니 얘기 엄청 꺼낸거 아냐?”
진용이 장난스럽게 말하자 재환은 신경 안쓰고 빈 잔을 들어 와인을 채웠다.
“스펙 최고잖아? 10대 기업에 젊은 회장님인데 싱글이야.”
“시끄럽다.”
“설마 아예 연애 안 해본 건 아니지? 어시스트좀 해 줘?”
“아, 진짜.”
옆에서 계속 놀리는 진용에게 한 마디 하려다가 만 재환은 뒤이어 연화재단에 행사가 시작되자 집중했다.
[자, 모두 착석해주시길 바랍니다. 이제 행사 시작하겠습니다.]
재환은 이런 자리에서 여자 만날 생각은 추호도 없었고, 행사 끝나면 대충 밥먹다 갈 생각이었다.
[에, 지난날 1931년 경남 진주에서 시작한 금화상회를 시작으로 저희 GH는···]
회사의 역사를 말하고 그 뒤로 돌아가신 창업주의 흉상이 스크린에 나오면서 이야기가 계속됐다.
재환은 그것을 쭉 본 뒤에 품 안에서 수표를 꺼내 사인을 했다.
이런 자선재단에 초대를 받았으니 개인 사비로 조금 마련한 것이었다.
명품 몽블랑 만년필로 멋드러진 사인이 그려지고, 기부식이 있을 때 넣고 가면 될 일이었다.
이후 행사가 끝이 나고 본격적인 디너쇼가 벌어지고 있을 때, 재환은 미모의 영애들의 끈적한 눈길을 피해 잠시 나갈 준비를 했다.
“야, 벌써 가게?”
진용의 말에 재환은 품 안에서 담배를 꺼내 흔들었다.
칙- 치익-
밖으로 나와서 끽연을 즐기고 있을 때 재환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후우, 소문이 어떻게 퍼지길래···.”
재환은 이러다간 진짜 음기에 눌릴 것 같아서 휴대폰을 들었다.
저장된 번호중에서 몇 안되는 여성의 연락처중 미연이 보였다.
“···아니다. 아직 제대로 감정도 없는데.”
재환은 휴대폰을 집어넣고 담배 연기를 뿜었다.
그때 하이힐 소리가 재환의 귓가에 들렸다.
“?”
고개를 돌리자 드레스 차림에 여성이 웃으면서 재환에게 다가왔다.
나이는 조금 있어보이지만, 그만큼 기품 또한 충분한 미인이었다.
“혜성그룹 회장님께 인사드립니다.”
“아, 네. 저기 지금은 따로 이야기 할 말이 없는데.”
그러자 그 여성은 잔잔한 미소와 함께 품 안에 핸드백을 열어 조심스럽게 명함 하나를 건네줬다.
“···.”
재환은 이 여자도 자기 꼬시려고 디너쇼에 나왔나 싶어서 거리를 뒀다.
“저기, 제가 지금 연애 같은 걸 신경 쓸 상황이 아니거든요? 초면에 실례인건 알지만 말이죠.”
“네, 알겠습니다. 회장님. 하지만 저는 사업 이야기로 꼭 이 명함을 건네드리고 싶습니다.”
“?!”
사업 이야기로 명함을 받아달라는 말에 재환은 담배를 끄고 다가와 그것을 받아 읽었다.
[조아은행 영업부 이사 임선아.]
“···은행 분이셨어요? 그것도 이사?”
“재벌가 영애가 아니어서 죄송합니다.”
재환은 그것을 받아들고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명함을 건네줬다.
“뭐, 조아은행과 거래는 없지만, 일단은 가지고 있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회장님.”
재환은 공손히 인사하는 임선아를 뒤로한채 연회장으로 가면서 명함을 들고 중얼거렸다.
“조아은행 영업부, 영업부··· 영업이라···.”
5대 시중은행 조상제한서가 외환위기로 사라진지 오래였지만, 아직도 조아은행은 국내 1위의 은행으로 건재할때였다.
“알아둬서 나쁠 건 없겠지.”
재환은 품 안에 명함을 넣고서 다시 육공회 멤버들의 자리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