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 2대 회장, 신재환.
재환은 희경의 은퇴 의사에 놀랐지만, 그 단호한 의지에 한숨을 쉬면서 고개를 저었다.
“···농담 아니시란 말이네.”
“사실 작년부터 생각하고 있었어. 새천년에 맞춰서 늙은이는 물러나려고 했지.”
“그래도 이건 좀 그렇네요. 아직 그룹에는 아버지가 필요한데 말이죠.”
재환의 말에 희경은 크게 웃으면서 담배를 물었다.
“애, 임마! 이 애비를 언제까지 방패막이로 쓰려는 셈이냐?”
“그게 그런 뜻이 아니라요. 저는 정치권하고 쇼부 보는 걸 못하는 타입인거 잘 아시잖아요?”
“하하하하!”
희경은 크게 웃으면서 손뼉을 치고 재환에게 말했다.
“걱정할거 없어. 명예회장으로 몇 년 지내면서 어려운 일 있으면 움직여 주마.”
“정말로요?”
“나 아직 뒷방에만 있지는 않을 거다?”
결국, 전권을 가진 총괄사장에서 직함만 바뀌는 것이지 달라질 것은 없다고 말하는 희경이었다.
“재환이 너, 기대 이상으로 너무 잘해주고 있다. 그리고 지금이니까 상속세 문제도 쉽게 해결할 수 있을 거다.”
대기업에서 오너가 자식에게 물려줄 때 가장 큰 난관이라고 할 수 있는 상속세.
희경이 그동안 혜성그룹을 이끌고 가면서 수많은 지분을 가지고 개인 재산에서 적절히 이용했지만, 그래도 재벌이니만큼 막대한 금액이었다.
그것을 재환에게 물려주려면 상속세로 절반 이상은 국가가 징수해야 하는 상황이다.
하지만 재환은 이미 트루넷부터 시작해서 자신이 인수합병을 한 회사들의 1주주로 있으면서 그것들이 연쇄적으로 수십 루타를 쳐냈으니 자연스럽게 혜성그룹의 희경 지분을 사들여서 승계하면 그만이었다.
“세무법인 쪽에 연락해서 낼 건 다 내고 가볍게 가자. 원래 세금이란 건 마지막에 다 털어내야 해.”
“네, 그렇게 하시죠.”
“그럼 공식적으로 기자회견 할 테니 너도 준비해.”
희경이 먼저 전화기를 들었을 때, 재환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아버지를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였다.
평소와 다른 분위기 속에 희경은 놀랐지만, 피식 웃으면서 가 보라고 손짓했다.
회장실을 나선 재환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이 삶으로 돌아온 지 몇 년 만인가?”
97년에 말도 안 되는 일로 과거의 삶으로 돌아온 뒤로 2001년이 되어서 혜성그룹을 손안에 넣게 된 재환이었다.
이제 일인자에 오르게 되었으니 재환은 이제부터 제대로 움직여보겠다고 다짐했다.
***
[혜성그룹 회장에서 물러나겠습니다.]
혜성그룹 강남사옥에서 나온 신희경 회장의 폭탄 발언.
순간적으로 웅성거리는 소리와 함께 기자들의 카메라 플래시가 방 전체를 빛나게 했다.
“회장 자리를 그만두시겠다니. 무슨 일이신 겁니까?”
“신 회장님! 그러면 혜성그룹은 누가 경영하게 되는 겁니까?”
기자들의 외침 속에서 희경은 조용히, 그리고 차분하게 말했다.
“이제 늙은이는 물러나야 할 때가 온 것 같습니다. 내 나이도 있으니 혜성의 미래는 이제 신재환 사장에게 맡기려고 합니다.”
예순의 나이에 연로함을 이유로 물러나겠다고 선언한 희경, 그리고 후임은 신재환 총괄사장이라는 말에 기자들은 더욱 흥분했다.
“신재환 대표의 인터뷰를 할 수 있겠습니까?”
“회장 취임사는 언제입니까?”
그러자 희경이 기자들을 진정시켰다.
“자~ 자~ 오늘은 내 사임 선언이고, 2대 회장 임명식도 차차 이뤄질 겁니다.”
재환은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자신이 나갈까 생각했지만, 희경은 뒷짐을 진 손으로 흔들었다.
‘오지 말라고?’
결국, 재환은 희경의 인터뷰 속에서 끝이 났다.
그리고 언론에서는 9시 이후의 뉴스를 모두 혜성그룹이 도배했다.
그리고 집에 있던 재환 역시 여기저기서 오는 전화로 휴대폰에 불이 났다.
“네, 그래요. 저도 갑자기 아버지에게 들어서 당황스럽다니까요?”
육공회부터 시작해서 각종 대기업 회장, 사장들이 모두 재환에게 전화해서 축하 전화를 보냈다.
그동안 재환이 쌓아놨던 인맥 모두가 진심으로 달려들었고, 역시 사람은 모나지 않게 두루두루 지내야 한 다는 사실을 알았다.
“휘유~ 어째 더 힘들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구만.”
이제부터는 자신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오너리스크가 될 수도 있으니 긴장은 됐지만, 그냥 하던대로 해 보기로 했다.
그때 갑자기 노크 소리가 울렸다.
“아들, 좀 나와봐.”
어머니 명숙의 말에 재환은 통화를 마치고 곧바로 나갔다.
그리고 거실에서는 아타셰케이스 몇 개가 열려 있었다.
“이게··· 다 뭐에요?”
안에 든 것들은 무기명 채권과 통장과 인감도장, 그리고 각종 부동산 등기부등본 등이었다.
“이제 네가 회장 되면 다 맡을 재산 목록이다.”
“!”
“주식이야 네가 성장시킨 새 회사들을 가지고 내 지분을 사들이면 된다지만, 부동산이나 채권은 아니지. 전부 네 거다.”
“세상에··· 그때 다 털어낸 거 아니었어요?”
그동안 숨겨둔 비자금은 전부 재환이 꺼내서 양지로 돌려서 회사 재건하는데 써버렸는데, 그 외에도 아직 남은 재산은 엄청났다.
‘이건 이전의 삶에서도 못 겪은 금액인데···.’
희경은 그것들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이 애비는 퇴직금 수령한 거면 앞으로 먹고사는 데 충분해. 남은 건 죄다 네 몫이다.”
“퇴직금을 생각하셨어요?”
“왜? 물려주니까 그냥 쫒아내려고 했냐?”
“설마요. 아주 투명하게 조사해서 두둑히 드리겠습니다.”
재환은 그 많은 금액을 보고서 이게 전부 개인 재산으로 만들어진다는 것을 보고 입가에 미소가 지었다.
“그리고 상속세 말이다.”
이제 재벌가에서 가장 난코스인 상속세에 대해 국내 탑클래스의 세무사들이 모두 달라붙어서 계산한 결과 어느정도 가닥이 잡혔다.
“절세에 절세를 했어도 역시 규모가 좀 크다.”
“얼마나 나온답니까?”
“우수리 떼고 787억.”
“키야··· 2001년에 787억.”
재환은 그 말을 듣자마자 순간적으로 탄식이 흘러나왔다.
30억 초과하면 48.5% 정도 나오니까 그걸 산출해도 저 정도라는 양이었다.
“그 정도면 역대 2위네요.”
이전까지 상속세 납부의 최고 금액은 부산의 신광그룹 이 회장이 납부한 96년의 1050억이었다.
이후 KS, 구) 경선그룹에서 최 회장이 최대현에게 물려주는 98년 상속세 750억이 최고였다.
물론 이 이후로 수천억대의 상속세가 나오고 급기야는 조 단위 상속세도 나오겠지만, 다행히 지금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제가 다 내죠. 일시불로.”
“뭐?”
“지난번에 한국통운 사오면서, 남은 돈이 조금 있어요. 게다가 해외주식 투자한 것 중에서 이 참에 고점에서 털어낼 거 합치면 충분합니다.”
“야, 그래도 그거 일시불은···.”
“그래야 임팩트가 세죠.”
재환은 그러면서 하나하나 살펴보다가 한 상자를 보고 어머니를 바라봤다.
“그래, 그건 내 거야. 외가댁에서 물려줬던 땅들.”
보사부 장관님 양갓집 규수였던 어머니가 돌아가신 부모님에게 받은 선산과 농지 등이었다.
그것들 역시도 모아놓으면 상당한 금액이 되겠지만, 재환은 그 가방을 닫고 보냈다.
“이건 안 받겠습니다.”
“재환아.”
“이건 어머니, 아버지 노후로 쓰세요. 지금 물려주신것만 해도 충분합니다.”
“아들, 나도 이제는 돈 같은 거 크게 중요하지 않아. 오히려 네가 사업할 때 쓰인다면 그게 더 기쁜일일 거야.”
“제 기쁨은 앞으로 부모님의 안락한 노후입니다. 하고 싶은 것 마음대로 하시고, 그동안 못해보신 여행도 다니시고요.”
재환은 이건 부모님들을 위해서 쓰시라고 말하고서 나머지 채권과 부동산 등에 대해서만 받기로 했다.
“아, 그리고 재단에 대한 것은 어떻게 할 거냐?”
혜성교육재단이나 혜성문화재단 등 지금은 희경의 형제들이자 삼촌들인 희수나 희지가 운영하고 있지만, 실소유주는 모두 희경의 몫이었다.
“이것도 차차 진행해야지. 지금은 걔들도 그냥 전문경영인이야. 이 다음에 기환이나 미선이 같은 조카들에게는 물려주겠지만.”
“네, 알겠습니다. 그대로 진행할게요.”
***
그리고 혜성그룹 본사에서는 모든 고위 간부들이 모여 회장의 이, 취임식에 참석했다.
희경이 퇴임사를 발표하면서 무수한 박수 갈채를 받았고, 이제 재환의 차례가 되었다.
[안녕하십니까? 혜성그룹의 2대 회장에 오른 신재환입니다.]
재환은 이 자리에 오르면서 만감이 교차했다.
그리고 이제는 진짜로 제대로 된 혜성을 만들겠다는 생각으로 수많은 임,직원들에게 말했다.
[선대 회장님의 유지를 받아들여 혜성그룹을 더욱더 성장시킬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제가 먼저 앞장서 달릴 것이며, 모두 저만 믿고 따라와 주십시오. 이상입니다.]
재환은 짧은 취임사를 두고서 두 팔을 벌렸다.
사실 이 자리에 오르기까지 수많은 취임사를 말하고 싶었지만, 역시 짧고 굵은 것이 좋다고 생각한 그의 발언이었다.
그리고 기자회견 자리가 되었을 때, 방송국과 5대 일간지에서도 거물급 기자들이 모여서 인터뷰를 시작했다.
“회장님, 앞으로 혜성은 어떻게 운영됩니까?”
[하던 대로 계속할 겁니다. 성장을 위해 달리는 거요.]
“앞으로 또 다른 신사업이 있습니까? 있다면 어느쪽입니까?”
[신사업은 많습니다. 아주 많이요.]
“어떤 사업을 다시 시작하실지 알려주실수 있겠습니까?”
재환은 그 말을 듣고 그 기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거기 기자분. 대한일보에서 오셨죠?]
“네, 맞습니다.”
[대한일보 태평로 사옥에서 여기까지 오는데 얼마나 걸렸습니까?]
“사, 삼십분 정도 걸렸습니다만?”
[내년부터 그거 걸리는 시간 절반으로 줄여드리겠습니다. 이게 우리 혜성의 차기 프로젝트입니다.]
“!”
기자들이 깜짝 놀랄 수준의 재환의 폭탄 발언에 다른 기자들이 외쳤다.
“회장님, 혜성그룹이 자동차 사업을 하는 겁니까?”
“회장님! 시간을 단축한다는 게 무슨 말씀입니까? 자세히 알려주십시요!”
“회장님!”
재환은 인터뷰를 여기까지 마친 뒤 엄지를 올리면서 조용히 물러났다.
그 뒤로 몰려드는 기자들은 쓸 거리에 비해서 재환의 발언으로 인해 의문이 가득했다.
하지만 이 모든 건 재환의 의도였다.
임창훈 실장과 박찬우 이사를 대동한 채 복도를 걷는 재환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기자들이 얼마나 상상의 나래를 펼칠까요? ‘가는 길을 단축해주겠다.’ 라는 한 마디가요.”
“회장님, 그러면 그 발언이···?”
이미 수뇌부를 통해서만 알고 있는 혜성의 비밀 프로젝트에 대해 아는 임창훈이 조심스럽게 묻자 재환은 웃으며 물었다.
“임 실장님도 궁금하시죠.”
“아, 아닙니다. 회장님.”
처음 입사했을 때는 재환을 서포트 해줬던 평이사였는데, 지금은 회장님으로 모시면서 소통의 창구를 만드는게 그의 몫이었다.
재환은 그를 통해서 말했다.
“하던대로 합시다. 하던대로. 이미 결정된 것은 많고, 결과만 잘 나오면 돼요.”
“알겠습니다.”
재환은 미래를 생각하면서 미래에 대해 깊은 자신감을 가졌다.
***
그리고 얼마 후.
재환이 회장에 오른 뒤 공식적으로 움직일 기회가 왔다.
“네, 잘 됐습니까?”
[회장님, 드디어 성공입니다. 이제 최종 테스트까지 성공했고, 올해 출시 가능할 것 같습니다.]
“잘 해주셨어요. 이 전무님.”
재환은 전화를 마치고서 순간적으로 창밖을 보며 포효했다.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테헤란로를 향해 재환이 외쳤다.
“하던 대로 하니 이렇게 좋은 결과가 나온 게 아니냐? 성장 프로젝트는 끝나지 않는다!”
밖에 있던 기전실 직원들은 무슨 소리인가 어리둥절하면서도 ‘이번 회장도 소리치는 걸 보니 이 층은 시끌시끌하겠구나.’라고 한숨을 내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