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재벌의 삶!-106화 (106/244)

106- 네? 뭘 맡으라고요?

“준비 다 됐냐?”

“네, 갈아입을 옷까지 챙겨서요.”

“정말 닷새 다 있게?”

“그래야죠.”

재환 일가는 검은 상복 차림으로 떠날 준비를 했다.

엄숙한 차림으로 나와 차에 올라타고 김 기사는 풍납동으로 향했다.

“후우, 정말 큰 어른 가셨구만.”

아성그룹의 창업주 정형주 명예회장의 장례식이었다.

한국 경제사에 큰 발자취를 남긴 거인의 장례식에는 수많은 정, 재계의 인물들이 모였다.

그리고 근조화환을 먼저 보낸 혜성그룹이 도착했을 때, 수많은 조문객 속에서 아성가 사람들의 안내를 받았다.

“어서오십시오. 신 회장님 오셨습니까.”

“아, 내가 좀 늦었구만.”

“아닙니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아성그룹 재단의 아성현대병원 장례식장 한 채를 대절한 장례식장에는 상복 베옷을 입은 아성가의 사람들이 있었다.

정목균 회장부터 정목현 회장까지 50이 넘은 아들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돌아가신 아버지 빈소에 있는 모습은 그분이 어떤 삶을 살아갔는지 알 수 있었다.

희경과 명숙, 재환 가족이 들어오자 그들은 모두 일어나서 인사를 올렸다.

아직 빈소에 입관하지 않아 가볍게 묵례만 한 다음 빈소 앞에서 화환을 올리고 절을 한다.

그리고 신 회장은 두 정 회장의 손을 잡아줬다.

“그것참, 이 나라에 큰 어른이 가셨소.”

“이렇게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신 회장님.”

“당연히 와야지요.”

희경은 활짝 웃고 있는 정형주의 영정사진을 보며 말했다.

“이 부족한 사람이 경제련 회장을 맡았을 때, 많은 도움을 주신 분이셨소.”

희경이 인사를 나누고 조용히 안으로 들어갔고, 재환은 그 속에 있는 선길을 보고 다가가 손을 잡았다.

“고생이 많구나.”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형님.”

“그렇게 딱딱하게 존대 안 해도 된다니까.”

“아, 예.”

재환 일가가 자리에 앉아 육개장을 받았을 때, 안내는 선길이 했다.

“이리 와서 정 이사도 한잔해.”

“아, 예. 회장님.”

희경은 소주 한 잔을 꺼내 선길에게 따라줬고, 재환에게도 한 잔 따랐다.

재환은 앞자리에 선길을 앉히고 이야기를 나눴다.

“다른 양반들은 천천히 오려나 보네.”

“이미 육공회라는 이름으로 근조 화환이 왔습니다.”

“육공회라는 이름으로?”

재환이 돌아보자 수많은 화환 속에서 정말 육공회[최대현]이라는 이름으로 KS그룹 옆에 있는 것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 형님도 참.”

재환은 식사하면서 선길에게 말했다.

“아버지는 가서 일하셔야 하지만, 나는 휴가 1주일 냈다.”

“네?”

“저번에 아버지가 휴가 내셔서 교대로 쓰는 거거든. 그래서 말인데 도울 일 있으면 뭐든 할 테니 맘껏 부려먹어라.”

자진해서 정 회장의 가족장에 일을 거들겠다는 말에 선길이 놀라 말했다.

“혀, 형님. 안 그러셔도 돼요. 장례업체 인원만 100명이나 됩니다.”

“그래도 경우가 아니지. 육공회라고 다 모였으면 이럴 때 같이 있어 줘야 하는 거 아니냐?”

재환의 말에 선길은 담담하게 고개를 숙였다.

“마음은 정말 감사히 받겠습니다. 하지만 일단 어른들께 여쭤볼게요.”

재환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차 트렁크에 있는 자신의 옷가지들을 김 기사에게 가져오도록 했다.

그렇게 재환은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로 아성가의 허락을 받아서 빈소 내에서 잡일을 도맡았다.

스스로 그릇을 치우고, 모자란 손을 대신해서 음식을 날랐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아성가의 상주들은 깊이 감동해서 재환을 바라봤다.

어수선한 저녁 타임도 지나고 밤이 되었을 때, 한 무리의 기업인들이 우루루 몰려왔다.

“아, 다들 오셨구만.”

삼신그룹과 KS그룹의 고위 임원단이 오면서 최대현과 이현규가 대표로 등장해 고개를 숙였다.

그들은 조문 이후 자리에 왔을 때, 육개장을 나르는 게 재환이라는 것을 보고 놀랐다.

“어? 야, 너 언제 와 있었냐?”

대현이 놀라 물었을 때 그 앞에 육개장을 놓은 재환은 맞은편에 앉았다.

“손이 부족한 거 같아서 며칠 도와주기로 했어요. 휴가 냈거든요.”

“정성이구나. 나도 할 수만 있으면 그래야 되는데.”

이후 두성그룹 사람들이 와서 박정인도 참여했고, 가장 늦게 참여한 신누리 쇼핑에서 일가가 같이온 진용도 모여 육공회가 모두 뭉치게 되었다.

“그래도 만들어 놓고 이런 자리가 되어서 다 모이게 되네.”

그동안 스위트룸에서 놀고먹기만 했지만, 이제는 제대로 된 행사에도 참여해서 하나의 이름을 알리게 되었다.

“아까 봤어? 육공회 이름으로 근조화환 보냈는데.”

“정말 감사드립니다.”

“아냐,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지.”

대현은 선길의 감사에 할 일을 한 거라면서 쿨하게 넘어갔다.

“장례 끝나면 푹 쉬어라. 나중에 다 같이 한 번 모이자고.”

“예, 형님.”

대현이 선길하고 이야기하고 있을 때, 재환은 현규에게 소주를 따라주며 말했다.

“요새 좀 어때?”

“그저 그렇지.”

지난번 게임cd 패키지로 잔뜩 선물해줬었는데, 그 이후로 조용했던 현규에게 재환이 슬쩍 떠봤다.

“뭔가 답이 보이는 게 있어?”

“답이라···.”

현규는 고개를 저으며 소주를 비운다음 말했다.

“한 가지 아이디어는 찾은 거 같다.”

“오, 다행이네.”

“잘 되면 그때 정식으로 감사를 표할게. 일단은 시도하는 영역이거든.”

현규는 그 말을 한 뒤로 빠르게 장례식장을 나섰다.

남은 육공회 멤버들이 술자리를 가졌을 때, 정인이 재환에게 말했다.

“현규가 요새 큰 프로젝트 하나 새로 하는 것 같더라.”

“네, E삼신 인터내셔널 문제로 그런 것 같죠.”

“나한테도 하나 도와달라고 하더라.”

“네?”

정인은 소주를 마시면서 그간 있었던 이야기를 했다.

“별안간에 나를 찾아와서 부탁을 하더라고, 우리 계열사 중에 백과사전하고 아동 학습지 있는거 인수를 하고 싶은데 넘겨주시면 정말 좋은 프로젝트를 할 수 있을거라고.”

“두성동아요?”

“음, 안 그래도 중공업 진출하는데 돈이 필요했는데, 값 제대로 쳐주길래 넘기기로 했어.”

“삼신이 아동교육 사업이라···.”

그게 IT 벤처 투자하고 무슨 상관이 있을지 재환이 머리를 굴려봤지만, 딱히 떠오르는 게 없었다.

벤처 열풍 때 IT 게임사 한번 알아보라고 내밀어 본 건데 뭔가 다른 쪽으로 각성을 한 것인지 나중에 한 번 결과 보고 물어봐야겠다.

밤 늦게까지 남아있던 육공회 멤버들이 하나둘씩 일어났지만, 재환과 선길은 남아서 장례식장을 지켰다.

그리고 이제 상주들의 조촐한 술자리가 새벽에 이어졌을 때 정목균 회장이 직접 재환을 불렀다.

“한 잔 받게.”

“예, 회장님.”

오늘 여러번 술 잔을 받은 재환은 고개를 돌려 쭉 마시고는 정 회장에게도 따라드렸다.

“내 아들 잘 부탁한다고 했는데, 이렇게까지 남아서 아버지 장례자리를 지켜드리니 참 고맙구만.”

“할 수 있으면 장지까지 뵙고 싶습니다.”

“하하하, 그건 괜찮아. 이렇게 도와준 것만 하더라도 혜성의 신의는 말로 다 못할 정도일세.”

정 회장을 넘어 아성가 전체가 재환을 보고 혜성그룹에 대한 호의를 느끼고 있었다.

그로 인해 방계 회사들까지 재환과 명함을 나누면서 장례식장 빈소에서 참으로 많은 이야기를 오갔다.

“그래도··· 이런 자리에서 마지막으로 저 녀석과 대화를 해 보는구만.”

정목균은 왕자의 난 이후로 갈라서서 아성그룹을 차지한 정목현을 보고서 쓴 웃음을 지었다.

결국, 형제가 어찌어찌 화해는 했는지 상주가 된 둘은 평범하게 대화를 나누면서 갈등은 어느정도 봉합된 듯 했다.

그리고 새벽이 되었을 때 마지막으로 오는 조문객이 한 명 있었다.

“!”

그 순간 재환은 그 모습을 보고서 일어났다.

‘아이고, 하필 저 양반이 지금 시간에 오셨네?’

대화그룹 김승열 회장이 세 아들을 데리고 와서 조문을 온 것이었다.

재환과는 야구부터 백화점 입찰까지 아주 껄끄러운 관계였다.

재환 덕분에 대화의 유통업에는 국산 농산물이 없다는 굴욕까지 겪었으니 실제로 만나면 정말 짤없다고까지 할 수 있는 관계였다.

하지만 재환은 과거 들었던 정보를 기억했다.

‘그런거에 뒤끝없는 사람이다. 나중에 경조사 같은 데 따로 만나면 술 한잔 마시고 다 털어낼 수 있어.’

그 말을 들은 재환은 조용히 음식을 챙겼다.

“지금이 그때인가···.”

대화가 사람들이 조문을 마치고 들어왔을 때 재환이 직접 쟁반에 소주와 육개장을 가지고 서빙했다.

그 모습을 본 김승열은 잠시 놀란 듯 바라보더니 조용히 아들들을 물러나게 했다.

“여기서 볼 줄은 몰랐구만.”

“정 회장님 장손과 친구여서 가족장 동안 일 돕기로 했습니다.”

“어찌됐건 앉게. 한 잔 받아.”

김승열은 지난 날에 대해 신경쓰지 않는다는 듯 재환과 소주를 나눠 마셨다.

벌써 몇 번째 재벌가 오너들의 소주잔을 받으면서 슬슬 속이 아플 정도였다.

“먼젓번 일은 다 잊자고. 이 나라에서 장사하면서 평생 안 볼 사이 아니잖아?”

“저 역시 같은 생각입니다.”

김승열이 먼저 화해를 요청하자 재환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대화그룹과 이제 화해하기로 했다.

“서울역하고 청량리역 운영 잘 해보라고. 명색이 관문인데 그럴듯하게 장사해야지.”

“예, 안 그래도 그렇게 할 셈입니다.”

“이번에 컴퓨터 부품 대규모로 OEM 받은 거 대단하더만. 깡도 좋아, 어떻게 시민단체가 드러눕는데 그걸 밀어붙일 생각을 했어? 허허허!”

“들고 일어난다고 다 들어주면, 나중에 질질 끌려다니는 법입니다. 협상은 신중히 해야죠.”

“흐음~ 우리 아들 녀석들이 자네의 그 패기를 본받았으면 좋겠구먼.”

김승열은 그 대화를 하면서 육개장을 먹었고, 재환은 희경이 떠나기 전 했던 말을 상기했다.

그리고 ‘어쩌면 이 사람이?’라는 생각으로 조용히 운을 띄워보기로 했다.

“회장님, 부탁드릴 게 하나 있습니다.”

“음?”

“들어주시겠습니까?”

김승열은 재환의 제안에 잠시 생각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혜성하고 화해도 했으니 거국적으로 뭐든 생각해보겠네. 그래, 무슨 일인가?”

“다름이 아니라··· 이제 저희 아버지께서 경제련 회장 임기가 끝나시면 새 회장을 추대하신다고 합니다.”

“그래서?”

“다음 경제련 회장··· 김 회장님께서 맡아주시겠습니까?”

“호오- 나를?”

한국경제인연합 회장 자리라는 말에 김승열은 흥미를 가지며 재환의 말을 들었다.

이미 신희경 현 회장이 정부와의 밀당을 잘해서 상당히 길을 잘 닦아 놨고, 이후 정,관계의 규제 논의를 하기에는 경제련 회장의 위상은 필요했다.

“이미 전임 경제련 회장으로 최 회장님이 계셨을 때 부회장을 맡아주시지 않았습니까? 다음에는 그 위의 자리가 어떨지 아버지의 의사가 있으셨습니다.”

“그거··· 내가 조만간 신 회장님하고 이야기를 좀 해봐야겠구만. 일단 고려해 보겠네.”

재환은 이것으로 혜성그룹 신희경 회장 다음의 경제련 회장은 대화그룹 김승열이 오를 것이라는 걸 거의 확신했다.

이후 김 회장을 마지막으로 첫 날의 조문이 끝나고, 그 뒤로 나흘을 더 일하면서 재환은 성실하게 왕회장의 장례식을 도왔다.

그리고 장지가 경기도 하남의 이름난 명당으로 떠난다고 했을 때, 재환은 아성가 사람들의 악수를 받으면서 떠났다.

“남은 시간 장례 잘 치르시고 다음에 뵙겠습니다.”

“고맙네. 정말 고마워.”

정목균 회장이 재환을 안아주고, 정목현 회장 역시도 어깨를 토닥이며 연신 고맙다고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영정을 들고 가야할 장손 선길은 고개숙여 재환에게 인사했다.

“형님, 그동안 도와주셔서 정말 감사했습니다.”

“아, 삼오제하고 49재 잘 끝나면 푹 쉬고 다음에 보자고.”

“네, 알겠습니다.”

재환은 두 번이나 옷을 갈아입고 찌뿌둥한 몸을 두들기면서 아성현대병원 장례식장을 나섰다.

“후우, 오늘 밤에는 사우나 좀 갈까?”

정말 절친 사이에서도 잘 없는 장례식 기간동안 같이 있어준 일을 했으니 그래도 보람은 찼다.

***

장례식을 마친 뒤 휴가 복귀를 하루 앞둔 재환은 본사의 부름을 받았다.

“휴가 아직 남았는데 이렇게 부르셔도 돼요?”

“거기 앉아라.”

희경은 아들의 푸념에도 담담하게 말했다.

평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 속에서 재환은 회사에 무슨 일이 생겼나 싶어서 조용히 물었다.

“아, 뭔데요? 대통령이 또 혜성 때린답니까?”

“너 이번 정 회장 장례식··· 거기 있으면서 뭐를 느꼈냐?”

“느낄게··· 있어야 하나요? 친구를 돕기 위해 움직여 준건데.”

“거기서 우리나라 정치인이나 기업인들은 다 만났지?”

“네, 못 본 사람이 없긴 했죠.”

“그럼 됐다.”

희경은 고개를 끄덕이고 이제 그동안 고민했던 것을 말하기로 했다.

몇 번이고 ‘아직은 부족하다.’ 혹은 ‘세 번의 시험만 더 통과해라.’ 라는 생각은 이제 필요없게 되었다.

“나 이제 물러날 셈이다.”

“네~ 그거 이미 김승열 회장하고 이야기 끝났습니다. 경제련 차기 회장 그 아저씨가 할 거라면서요.”

“혜성그룹 회장 자리도 말이다.”

“히야~ 아버지 없으시면 다음 사람이··· 네?”

재환은 순간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서 다시 물어봤다.

“뭐라고요?”

“혜성그룹 회장, 이제 물러날 때가 됐다. 칠순까지 해보고 싶었지만 그건 내 욕심이었고. 환갑 지났으니 여기서 끝내련다.”

“아버지!”

재환이 벌떡 일어나서 별안간 은퇴 선언을 한 희경을 말리려 했다.

하지만 이미 희경은 재환이 휴가 다녀올때부터 모든 절차를 끝낸 상황이었다.

“좀 이르긴 해도, 지금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재환이 네가 앞으로 혜성그룹을 맡아줘라.”

“!”

갑작스런 아버지의 은퇴.

그리고 후임자는 재환이 되어 이제 혜성그룹의 2대 회장은 그가 된다는 발표가 나왔다.

2001년.

재환의 나이 이제 서른 넷일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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