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재벌의 삶!-102화 (102/244)
  • 102- 또 연말은 다가오고.

    광주 그랜드 호텔에서 모인 혜성 타이거즈 선수단의 종무식이 열렸다.

    재환은 구단주로 참여하여 이번 시즌을 둘러보고 축사를 했다.

    [그동안 내우외환이 많았고, 새 감독님 체제에서 여러분들 모두 수고해 주셨습니다. 내년에는 10번째 우승을 위해 우리 모두 노력합시다. 이상입니다.]

    1.2군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박수갈채가 이어졌고 재환은 조용히 인사하며 나섰다.

    “아, 감독님.”

    재환은 자신이 임명했던 신임감독 김봉현을 보고 반갑게 인사했다.

    “올 시즌 정말 수고해주셨습니다.”

    “죄송합니다. 믿어주셨는데 성적이···.”

    재환이 구단주로 임명된 첫 시즌.

    혜성 타이거즈는 일본으로 떠났던 선동현까지 거액으로 영입하고, 프런트와 스태프를 대대적으로 교대했으며, 구단 시설까지 돈들여서 싹 갈아엎은 첫 해였다.

    이후 혜성은 작년의 폐허가 된 시즌을 딛고 4위로 포스트시즌까지 진출했지만, 아쉽게도 준플레이오프에서 탈락해 아성 유니콘스의 우승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첫 시즌은 뭐든지 과도기인 법입니다. 이대로만 쭉 가시면 10번째 우승은 곧 따라올 겁니다.”

    “감사합니다. 구단주님.”

    재환은 그 뒤로 올 시즌 합류한 선동현을 향해 술잔을 나눴다.

    “선 선수. 올해 수고해주셨어요.”

    “아, 구단주님.”

    선동현은 38세의 나이에 한국 무대에 복귀해서 [4승 1패 29세이브에 방어율 1.97]이라는 준수한 성적으로 KBA 통산 150승 축하연도 만들어줬다.

    재환은 그날 밤 타이거즈 선수단과 어울려서 밤새도록 파티를 벌였다.

    다음날 일어난 재환은 양 사장과 김성환 단장과 함께 무등야구장 주변을 돌았다.

    그 옆에는 무등종합운동장이 있었는데, 매우 낡은 데다가 2002월드컵을 앞두고 광주월드컵경기장이 지어지고 있었다.

    “월드컵 끝나면 광주축구장이 종합운동장으로 개조된다죠?”

    “그렇습니다. 이미 시의회에서 통과가 된 공사계획이라고 합니다.”

    재환의 머릿속에는 이미 타이거즈를 위한 신구장의 건립 계획이 돌고 있었다.

    “양 사장님. 월드컵 이전까지 신구장 계획 추진합시다.”

    “네? 아, 그렇다면 부지는 어느 쪽이 좋으시겠습니까?”

    “딱 두 개죠. 광주월드컵경기장 옆, 아니면 여기 무등운동장 헐어서 신구장이요.”

    재환이 직접 신구장 부지 양자택일을 하도록 명하자 타이거즈 임원들은 곧바로 준비하기로 했다.

    “정 안된다면 임시 연고지로 전주나 군산의 구장을 쓰면서 완공될 때까지 기존 구장을 완전히 갈아엎어야 할 겁니다.”

    그런 일까지는 벌어지지 않게 힘내달라는 뜻이었다.

    “뭐, 그리고 여기까지 왔는데 쇼핑몰 한 번 돌아봐야겠네요.”

    재환은 지난번 혜성백화점 광주점과 혜성마트와 슈퍼마켓 5개 지점을 한 번 돌기로 했다.

    지난번에 왔을 때 6개월이 걸린 증축공사가 최근에 완공됐고, 볼거리가 많이 늘어난 백화점 쇼핑을 해 봤다.

    규모도 커지고, 재환이 그렇게 당부했던 문화센터가 새로 만들어져서 커피 한 잔의 여유를 즐기기 좋았다.

    “데이트 코스로 각광이라니까.”

    재환은 그 안에서 차 한잔을 마시려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 순간 재환은 서울에서 보고 있던 반가운 친구가 그 안에서 에스프레소 한 잔을 마시고 있었다.

    “어?”

    “여어!”

    “···네가 여기 왜 있냐?”

    광주 혜성백화점 커피숍에 있는 정진용을 보고 재환은 놀라 물었다.

    재환은 주변에 있는 백화점 임원들을 물리고서 자리에 앉아 카페라떼 한 잔을 시켰다.

    “우리 신누리백화점 광주법인 보다가 이쪽에 증축공사 끝나고 요새 핫하다길래 와 봤다. 커피 맛 좋더라.”

    “남의 사업장 참 자연스럽게 오가네.”

    “경쟁사에서도 좋은 것은 받아들여야지. 안 좋은 거는 반면교사 삼고.”

    “아, 그래? 그럼 나도 서울 가면 신누리 본점부터 쇼핑 한번 해봐야겠다.”

    두 재벌가 친구는 커피를 마시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내친김에 저녁 약속까지 잡고 광주에 이름난 한정식집을 예약했다.

    오랜만에 한우 갈비를 굽는 자리에서 진용은 소주를 마시며 이야기했다.

    “요새 현규 상태가 말이 아니더라.”

    “삼신에 뭔 일 있는 거냐?”

    “뭐, 내가 상관할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같은 집안 식구인데 안타까운 일이지.”

    재환은 베스트프렌드가 뭔가 난처한 일이 생겼다는 이야기를 듣고 진용을 추궁했다.

    “아, 뭔 일인데? 얘기 좀 해봐.”

    “현규 신사업 때문에 애가 죽으려고 한다.”

    신사업이라는 이야기를 듣자 지난번에 한국통운 인수하러 갔다가 자신을 집무실에 초대해서 들었던 그 이야기를 떠올린 재환이었다.

    “E삼신 인터내셔널?”

    “잘 아네.”

    “그거 설립한 지 3개월밖에 안 됐는데, 죽을상이고 뭐고가 어딨어.”

    “그게··· 그렇지가 않나 봐.”

    미래산업에 대한 벤처 투자회사라면 선구안만 적절히 갖춰져 있으면 제법 해 볼만 한 일이었다.

    게다가 자신의 사재 60%에 나머지 지분은 각각 삼신그룹 내에서 각출했다고 했는데 뭐가 문제인지 몰랐다.

    “그 자식 혹시 엉뚱한 회사에 몰빵했다가 자본금이라도 날렸다냐?”

    “그런 거 아니야! 임마!”

    재환의 물음에 강한 부정을 하면서 소주를 쭉 들이키던 진용은 잘 익은 소고기를 먹으면서 혀를 찼다.

    그리고 음식을 먹다가 다시 진용이 입을 열었다.

    “이거저거 난관이 많나 봐. 대기업이 벤처 투자한다고 하니까 규제도 심하고 첫 후원업체 고르는데만 아직까지 답보상태라잖냐.”

    “허어-”

    법인을 만들고 새 계열사를 만들면서 초반에 이것저것 손 쓸일이 많다는건 재환이나 진용이나 잘 알고 있었다.

    “내가 트루넷이나 코멧닷컴을 만들고, 진용이 네가 SE마트 사업을 진행하는 것처럼 말이지.”

    “그래, 하지만 현규 입장에서는 이게 자신이 처음 맡아보는 창업이거든.”

    이전까지 삼신 내에 있는 계열사를 맡아서 잘 진행한 경우는 많아도 신사업을 해본 적은 없는 녀석이었다.

    “그래도 잘 하겠지. 첫 사업부터 수월하게 하는 사람이 어딨겠어?”

    “글쎄, 내 사촌이지만 이번에 정말 힘들어하는 게 보이더라.”

    진용은 이런 이야기를 해도 되나 싶었지만, 육공회 친구들 사이의 우정으로 괴로워하는 사촌의 이야기를 해줬다.

    “사실 나도 거기 사재 투자했었다. IT쪽으로 투자를 알아보고 있는데, 몇 번이나 반려가 됐어.”

    ‘그것 때문이구만.’

    자신이 투자한 것도 있으니 계속 대표인 현규가 일 못 한다고 말하는 진용의 속내였다.

    “사공이 너무 많은 거지. 삼신전관이고, 삼신전자고, 삼신 디스플레이고 전부 IT에 관련된 테마 벤처회사 추천은 받는데 심사만 주구장창 하다가 나가리 된 게 벌써 5번째다.”

    “어이구야.”

    재환은 그 이야기를 듣고서 뭔 상황인지 확실히 알 것 같았다.

    “근데 그렇게 걱정되면 좀 도와주지그래? 어차피 네 돈도 들어갔다면 사촌끼리 동업이라고 해도 넘어갈 일 아니야?”

    “안 된단다. 외삼촌··· 그러니까 회장님이 당신 아들 사업에 함부로 훈수 두면 죽인대.”

    “후계자 강하게 키우시는구나.”

    재환은 그 이야기를 듣고 뭔가 옆에서 도와주려다가 말았다.

    뭐, 친구 자존심도 챙겨줄 겸 자신도 투자해서 조금 참여해줄까 하다가 말기로 했다.

    ***

    얼마 후 서울에 돌아온 재환은 2000년도 이제는 한 달밖에 남지 않아 크리스마스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번 크리스마스때는 가족들과의 외식을 준비해서 코스요리를 같이 먹기로 했다.

    “암튼 올해도 혜성그룹은 계속 성장세입니다.”

    “그래, 총괄사장 네 덕이 아주 크다!”

    희경은 아들을 수없이 칭찬해주면서 입이 귀에 걸려 있었다.

    “내가 장담할 수 있어. 지금 재계에서 너만 한 후계자는 없어. 없는 사업도 만들어나가지 않냐. 하하하하!”

    완전히 아들 바보가 된 아버지를 보고서 재환은 참으로 달라진 삶이라고 생각했다.

    이제는 집에 평화가 찾아와 고성대신 웃음이 오가는 양재동 집이었고, 재환은 혜성그룹에서 충실하게 후계자 테크트리를 밟아나갔다.

    “그래서 말인데···.”

    “네? 뭐 하실 말씀 있으세요?”

    “아, 아니다! 지금 말할 일은 아닌 것 같구나.”

    희경은 하려던 말을 멈추고서는 아들에게 나가 보라고 손짓했다.

    어리둥절한 재환이 나간 뒤로 희경은 서재 안에서 담배를 물고 피식 웃었다.

    “딱 세 가지만 더해라. 그러면 오늘 말하려던 거 바로 해줄 테니까.”

    희경은 혜성그룹의 회장 승계에 관한 이야기를 생각하면서 자식이 좀 더 성장해주기를 바랬다.

    그날 밤 재환은 해외 주식을 보면서 현재 흐름을 확인하던 중 전화를 받았다.

    “음? 현규가?”

    밤 12시가 넘었는데 전화를 한 것을 보고 재환은 이 녀석이 무슨 일인가 싶어 받았다.

    “어, 무슨 일이야?”

    [···아직 안 잤어?]

    “난 좀 늦게 자는 편이라서. 그래서 뭐 할 말 있어?”

    [잠깐 얼굴 좀 볼 수 있을까?]

    “어딘데?”

    재환은 결국 올 것이 온 것 같아서 새벽에 나갈 준비를 했다.

    ***

    “이런 곳이 다 있었어?”

    청담동에 있는 와인 바에 도착한 재환은 밖의 간판 조명도 꺼져있는데, 내부는 현규 혼자서 전세 내고 술을 먹는 모습에 어깨를 으쓱거렸다.

    “감성있는 밤이다.”

    “어··· 왔어?”

    현규는 재환을 보자 일어나서 그를 확 끌어안았다.

    재환은 술 냄새가 강하게 풍기는 친구를 보고서 쓴웃음을 지었다.

    ‘거하게 센치해지셨구만. 사업 스트레스가 이래서 안 좋은 거야.’

    아무리 화나는 일이 있어도 속으로 삭히던 녀석이 취해서 사람 부를 정도였으니 말이다.

    “홀몸도 아닌데 이렇게 술 막 마셔도 되는 거냐? 아기 태어나는 예정일도 받았다며?”

    “괜찮아~ 와이프 지금 친정 고향에 있다.”

    “태교로 좋은 동네 보냈나 보다. 아기 태어나면 내가 배냇저고리 좋은걸로 만들어 보내주마.”

    “임마, 10벌 만들어 보내라!”

    “오케이!”

    재환은 예비 아빠 현규를 보고 일단 술부터 한 잔 따랐다.

    “그래서 왜 부른 거야? 뭐든 들어줄 테니 말 해봐라.”

    “그냥 좀 답답해서···.”

    재환은 친구의 푸념을 모두 들어주기로 했다.

    자고로 이럴 때 이야기를 해야 사나이 의리라는 게 더 끈끈해지는 법이었다.

    재환을 불러놓고 술잔만 몇 번 부딪히던 현규는 벌게진 얼굴에 삐뚤어진 안경 너머로 눈을 날카롭게 떴다.

    “재환아, 나랑 너랑 차이가 뭐냐?”

    “음, 고향부터 사업영역까지?”

    “그럼 나랑 진용이의 차이는 뭐인 것 같냐?”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건데~”

    쾅!

    그 순간 현규가 술잔을 바닥에 크게 내리치면서 울분을 토했다.

    “백화점 사업 하나 받았던 진용이는 대형마트다, 레스토랑이다, 호텔이다, 하면서 신사업 만들어나가고! 너는 과자 회사에서 시작해 컴퓨터다! 쇼핑몰이다! 자동차다! 새로 만들어나가고 있잖아!”

    ‘어이구, 제대로 취하셨군.’

    현규는 그러면서 독한 위스키를 물처럼 들이키면서 한탄했다.

    “근데 나는 왜··· 300억짜리 사업 하나를 못 이끌어나가서 이 꼴이 난 거냐고.”

    “네가 착해서 그래.”

    “?!”

    재환은 조용히 술을 마시면서 말했다.

    “삼우일보나 삼신증권이나 삼신카드 임원 거쳐 갔을 때 보면 굉장히 잘했잖아? 현규 너 아니었으면 혜성그룹이 M&A 하는 거 몇 개 물 먹었을 수도 있었다.”

    “···.”

    “단지 네가 새로운 사업을 창조하려니까 힘들어한 거야.”

    “그러니까~ 너희는 됐는데, 왜 난 안되냐고.”

    “말했잖아. 네가 너무 착해서 그런거라고.”

    모든 재벌가 후계자들이 겪는 ‘오너일가 병’이라는게 있다.

    우수한 성적으로 명문대를 졸업하고, 경영학을 이수하며 시작부터 고위 임원으로 시작해 통솔할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그들이 컨트롤해야 할 상대는 회사에서 수십년간 버텨오면서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들, 게다가 어떻게든 차기 오너의 눈에 띄기 위해 없는 아이디어도 만들어올 사람들이다.

    그 상황에서 오너 후계자가 사람 좋으면 ‘허허, 이 아이디어 좋네요.’, ‘허허 그 말도 옳네요.’, ‘이 또한 옳습니다.’ 하는 식으로 황희 정승같이 움직인다.

    그러다가 자신이 그렇게 밀어준 프로젝트가 실패하면? 책임이야 밑에 사람들 몇 자른다 하더라도 지켜보는 오너는 그걸 절대 곱게 안 본다.

    그러면서 혁신은 사라지고, 리스크를 두려워하며 보수적인 현상유지에 급급해진다.

    흔히 말하는 재벌2세, 3세들은 개혁도, 혁신도 없다는 게 바로 그런 이야기였다.

    현규는 기존 회사에 대해 현상유지는 그 어떤 재벌가 오너들 중에서도 기가 막히게 잘했지만, 정작 신사업의 혁신에 대해서는 사람 좋게 다 받아들여서 이런 사달이 났다.

    이게 재환이 생각한 E삼신 인터내셔널을 운영하는 문제였다.

    그날 재환은 새벽 2시까지 친구의 푸념을 들어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겨우 부축해서 와인바를 나섰을 때, 현규는 재환에게 어깨를 기대면서 물었다.

    “후우, 내일 또 가서 일해야지.”

    “그렇게 힘들면 조금 도와줘?”

    “···.”

    술김이니까 넌지시 던져볼 수 있는 말이었다.

    누구든 아들의 사업에 훈수두면 가만 안 둔다고 말한 이건호 회장의 불호령이 있었다지만, 어차피 혜성과 삼신의 파트너십을 생각하면 까짓거 재환이 여유 있을 때, 슬쩍 투자라도 해줄까 싶었다.

    “···아냐 됐어. 이건 내 능력의 검증을 두는 일이니까.”

    “대답 잘 했다. 그래, 열심히 좀 해봐!”

    재환은 비틀거리는 현규를 새벽에 달려온 삼신 경호팀 직원들에게 인계해줬다.

    차가 떠나는 모습을 봤을 때, 재환은 문득 생각나 담배를 꺼내 물고는 넌지시 중얼거렸다.

    “검증의 영역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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