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재벌의 삶!-91화 (91/244)
  • 91- 토사구팽을 피할 개구멍.

    양재동 자택은 갑작스럽게 찾아온 손님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아이고, 늦은 새벽에 와서 준비한 찬거리가 없는데.”

    명숙은 국물 안주라도 만들기 위해 새벽에 냉장고를 찾았고, 희경은 술취해서 정목헌 데려온 자식 놈을 때려 죽일뻔하다가 참았다.

    ‘뭔가 있긴 있군.’

    “늦은 밤에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회장님.”

    정목헌이 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숙이자 희경이 부축했다.

    “아~ 아~ 아니에요. 안으로 들어오시죠.”

    나이는 어려도 그 역시 한 그룹의 총수이자 경제련 회장으로 밀어준 은인이었다.

    지금 시간에는 가정부들도 모두 자리를 비우고 밖에 있던 경호팀 직원들이 와서 상을 펼쳤다.

    그들이 희경의 서재를 정리하고 자리를 만들었을 때, 명숙은 급하게 끓여온 국과 데운 포장음식으로 술상을 차려왔다.

    “제가 손맛이 부족해서 입에 잘 맞으실지 모르겠네요.”

    “하하, 아닙니다. 이 새벽에 민폐를 끼쳐서 죄송할 뿐입니다.”

    자리를 옮겨서 이제 남북평화회담 이전에서 폭탄이 터질만한 이야기를 털어놓는 정목헌이었다.

    “회장님, 신 사장이 정말로 큰 그림을 잘 그리는 것 같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요?”

    “지금 정부의 대북사업에 대해서 정확하게 문제점을 꿰고 있었습니다.”

    “네에?”

    희경이 순간 재환을 노려봤다.

    하지만 재환은 태연하게 소주를 따라 마시면서 아버지의 잔을 채워드렸다.

    “으음.”

    차마 손님 앞에서 큰 소리는 못하겠고, 한 잔 들이켰다.

    “신 회장님이··· 정말 대단한 아드님을 두신 겁니다.”

    그 반응에 희경은 난처한 얼굴로 물었다.

    “정 회장, 거··· 말하기 힘든 일이라면 술 깨고서 이야기해도 되지 않겠소?”

    “아니, 아닙니다!”

    정목헌은 언제나 평상심을 다루던 것과 다르게 오늘만큼은 몸도 마음도 무너져내려 뭐든 말할 수 있는 상태였다.

    “이 자리에서 제가 털어놓으려고 합니다.”

    그러면서 소주잔을 툭 털어 넣은 정목헌은 명숙이 끓여준 콩나물국을 마시며 속을 풀고 말했다.

    “네, 신 사장 말이 맞아요. 정부가 대북송금 분납을··· 제안했습니다.”

    “그, 그게 사실입니까?”

    “말이 제안이지 헌납을 요구한 거지요.”

    “세상에··· 아니 어떻게 정부가 국책사업의 예산을 기업에게···.”

    희경은 그 말에 깜짝 놀랐고, 재환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역시나···.’

    무슨 일이 있어도 대북지원사업에 재벌 대기업 중 총대 메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여겼는데, 바로 이 이유였다.

    희경은 심상치 않은 이야기라 생각하고 정목헌과 담배를 나눠 피며 물었다.

    “허어, 얼마나 요구한 겁니까?”

    “정부에서 총 3억 달러를 준비했는데, 그중 2억 달러가 아성그룹에서···.”

    “2, 2억··· 그것도 달러로 말입니까?”

    생각 이상의 규모에 희경이 깜짝 놀라면서 외쳤다.

    그리고 재환은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지금이야 2억이지 최종적으로는 5억 5천만 달러지.’

    웬만한 대기업 계열사 하나 살 돈이 전부 북한으로 가는 일이었다.

    물론 당시에는 진정한 평화라고 생각하고 모두가 선의로 각출한 것이었다.

    그리고 민간 교류와 앞으로의 외교를 위해서는 필요한 일이었지만, 문제는 주석궁의 마왕이 그렇게 호의적이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겨우 외환위기를 벗어나고 아성자동차의 독립에서 겨우 살아나려는 아성그룹을 완전히 파탄 내 버린 사건이었고, 그로 인해 정목헌 회장은··· 3년 뒤 대북송금 특검 수사로 인해 극단적인 선택을 한다.

    “뭐, 저희 아버지 때부터 추진해온 사업입니다. 금강산 개발, 남북철도 교류, 추후 올림픽이나 월드컵 등의 대규모 주최 스포츠 경기에 북한 참여 등을 말입니다.”

    실향민 출신인 정형주 회장의 마지막 바램이었고, 궁극적으로는 남북통일을 꿈꾸며 추진한 일이었다.

    재환은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희경을 바라봤다.

    ‘제 말이 맞죠?’

    그때 대통령의 제안을 넙죽 받아들였으면, 2억 달러 선금을 바칠 것은 아성이 아니라 혜성그룹이었을 것이다.

    희경은 식겁했지만, 짐짓 차분하게 이야기를 했다.

    “너무 과한 거 아니요? 우리는 돈 이야기는 없이 사양하긴 했지만.”

    “별수 없습니다. 이미 상공회의소까지 가서 북한 일대에 대규모 공업단지를 만들 준비까지 되어있어요.”

    “허어, 나라에서 하는 일이라 응원은 했다만, 이거 별 이야기를 다 듣는구만.”

    “처음부터 정해졌고, 이미 세부 조율만이 남은 상태였습니다.”

    이미 윗선에서 그 정도의 정보는 퍼졌을 거다.

    그 이야기를 듣자 재환은 자신이 총대 메고 아버지 대신 거절 의사를 밝혔던 게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허어, 이렇게 된 이상 뭐라도 움직임을 보여야 할 텐데. 으음.”

    희경은 혀를 차면서 목헌과 재환에게 말했다.

    “그렇지 않아도 우리가 사정상 경제련까지 움직이기는 힘들 것 같다는 이야기는 했지만, 그래도 남북정상회담에서 사업 하나는 맡기로 했소. 그런데 이 이야기를 들으니 이거야 원.”

    재환은 그 이야기를 듣고서 생각했다.

    일단 혜성의 피해는 최소한, 아니 아예 국민들에게 좋은 이미지를 심으면서도 손해 볼 것 없는 파트를 맡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머리를 빠르게 굴려야 했다.

    “뭐 이번 일은 선대의 의지를 이어 감수하겠습니다. 별일이야 있겠습니까? 이렇게까지 했는데 저희를 뒤통수를 칠 일은 없겠죠.”

    말은 그렇게 해도 반쯤은 체념한 목소리에 재환은 곧바로 입을 열었다.

    “사냥개가 사냥을 끝내면 그다음은 솥에 삶길 수도 있겠죠.”

    “야!”

    희경이 제지하려 했지만, 정목헌은 그 말을 듣고 고개를 저었다.

    “설마 그러기야 할라고?”

    “정 회장님. 정치인을 믿으세요?”

    그 옛날 군부정권 시절에도 아버지를 도와 아성그룹을 일궈낸 정목헌이었다.

    그런 그가 재환의 말에 다시금 생각했다.

    “토사구팽··· 역시 ‘설마’로 끝내면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하나?”

    “네.”

    재환은 고개를 끄덕이며 정목헌에게 말했다.

    “토사구팽을 피하려면 저희도 개구멍을 만들어야죠. 그래도 이빨을 내밀 수는 없으니까요.”

    “어떻게?”

    재환은 자신이 생각한 안전하게 피하는 법에 대해 말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들은 정목헌과 희경은 술이 확 깨면서 입이 떡 벌어졌다.

    ***

    다음날 재환은 업무를 시작하면서 아버지에게 한 가지를 부탁했다.

    ‘알겠죠? 다른 것 중에서도 꼭 그걸 저희가 맡게 해달라고 해야 합니다.’

    ‘음, 대북사업 중에서 그걸 맡으라고?’

    ‘네, 맞아요.’

    재환은 일단 혜성부터 피한 다음 아성그룹에 관한 일도 도와주기로 했다.

    그리고 오늘 재환이 출장을 가며 찾아간 곳은 집 근처에 있는 양재동에 있는 아성자동차그룹이었다.

    “어이구야. 신 사장이 다 왔어?”

    정목균 회장은 오랜만에 만나는 재환을 환대해줬다.

    “커피랑 홍차중 어떤걸로 줄까?”

    “홍차로 하겠습니다.”

    재환은 큰 정 회장의 환대를 받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양재동 사옥도 아주 좋군요.”

    “그렇지? 계동만큼은 아니어도 이곳도 규모가 상당해.”

    과거 농협이 쓰려던 쌍둥이 사옥을 사들여서 A동은 아성자동차, B동은 기어모터스에 관한 계열사들이 입주해 있었다.

    “혜성제 카오디오가 아주 품질이 좋아?”

    “감사합니다. 회장님. 언제나 최고의 품질로 납품하겠습니다.”

    “뭐, 그 외에 또 일이 있어서 날 찾아왔나?”

    재환은 곧바로 말을 꺼냈다.

    “회장님. 저희 공동사업으로 진행하는 기차 사업 있지 않습니까?”

    “아! 그렇지. 이번에 화물열차 이후로 기존 디젤동차들 대체하는 프로젝트?”

    정목균은 거기에 대해서는 전문 경영인들에게 맡겨놓고 그냥 알아서 보고만 받았다.

    재환 역시도 지분을 가지고 행사를 몇 번 하긴 했지만, 창원공장에서 큰 그림만 오더를 내렸다.

    하지만 이제는 좀 바뀌어야 했다.

    “회장님. 이번에 디젤동차 말고 그냥 모두 전기동차로 바꾸는 게 어떻겠습니까?”

    “음?”

    “철도청이 공사화된다는 이야기는 들으셨죠?”

    “어, 그래. 그렇지 않아도 자네가 서울역하고 청량리역, 창동역 거기 민자역사 사업권 다 따내지 않았나?”

    “창동은 샤를로트하고 위탁하기로 했습니다.”

    “그런가? 그런데 철도청 공사화하고, 그 전기동차하고는 무슨 상관인가?”

    재환은 그것을 설명하기 위해 자신이 준비한 사업계획서를 가져왔다.

    이 계획서는 재환이 일전에 KRT 팀에 준비하게 한 것인데 재환이 잘 가지고 있었다가 시기적절하게 터진 대북 이슈에 꺼내기로 한 것이었다.

    “철도 전철화? 고속선 말고 기존 철로를 말이야?”

    “네, 말씀하신 대로 곧 들어올 고속철도선 말고, 이후 전국적으로 전철화가 될 것입니다.”

    “흐음. 시간이 꽤 걸리긴 하겠는데.”

    “기존에는 고속철도 전용구간만 전철화겠지만, 앞으로는 기름으로 움직이는 선로들도 모두 전철화로 바뀔 겁니다.”

    “그래, 그건 알지. 하지만 아직도 디젤동차 수요가 있는데 사업이 되겠어?”

    “지금 당장 진행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신기술을 앞두고 기존의 라인업을 포기하는 것은 어떤 경영자나 고민할 일이었다.

    정목균 역시 이왕 힘들게 정부 주관으로 빅딜사업으로 만들어낸 회사니 잘 되기를 바라면서 이왕이면 좋은 쪽으로 진행하길 원했다.

    “앞으로는 화물철도 역시도 기름 대신 전기로 움직이는 시대가 올 겁니다. 그때를 위해서 지금 당장 연구개발에 예산을 쏟아부어야 할 겁니다.”

    “좋아, 나쁘지 않은 제안이군. 타당성 조사를 한번 해 봐야겠어.”

    정 회장은 무릎을 탁! 치면서 재환이 또 좋은 아이디어를 가져왔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신 사장이 올 때마다 좋은 일이 생기는 것 같아?”

    “하하하, 성공해야 좋은 일이 될 게 아닙니까? 그리고 우리 회사잖아요?”

    “그래, 우리 회사지. 하하하!”

    정목균은 호탕하게 웃으면서 재환에게 차를 대접하고 말했다.

    “아, 참. 그렇지 않아도 자네에게 말하려고 한 게 있었는데 말이야.”

    “네? 저에게요?”

    “이번에 내 아들 녀석이 회사 일을 시작하게 됐거든? 다음번에 소개해 줄테니 좀 친하게들 지내라고.”

    “아, 네.”

    정목균 회장의 아들이라는 말에 재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잘 됐구만, 그 녀석 지금 출장 보냈거든? 돌아올 때 내가 따로 연락하라고 할게.”

    재환은 할 말을 마치고, 배웅을 받으면서 생각했다.

    ‘남북정상회담에서 교류할 때 분명 철도 교류도 나올 텐데 말이야. 이럴 때 딱 물러나야겠어. 더는 디젤동차 개발 안 한다고 말이야.’

    아직도 증기기관차가 현역으로 돌아다니는 북한 철도 환경상 앞으로 KRT가 복선전철화에 맞춰 친환경 전기동차를 만든다고 선언하면 정부가 뭐라 할 수도 없을 거다.

    설마하니 북한 철도 전체를 복선전철화 시킬 지원이라도 해주지 않는 이상은 말이다.

    그 외에도 재환은 자신이 지분을 가지고 있는 회사들을 돌면서 하나하나 손보기로 했다.

    ‘남북경제협력에서 혹여라도 혜성한테 기술 교류할 거 있으면 미리 손을 써 둬야지. 죽 쒀서 뭐 주는 일 없게 말이야.’

    재환은 그러면서 정부에서 아직 혜성그룹의 ‘종자 라이센스’에 대해서 농산물 지원으로 그 이야기가 안 나온다는 건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만약 그런 지원 이야기가 나온다면, 차라리 같은 값의 쌀을 그대로 보내겠다는 식으로 퉁칠 것이다.

    ‘군대에서 못 쓰게 도정처리 시켜서 유통기한을 확 줄여서 말이지.’

    이 아이디어는 모두 1차와 2차 남북정상회담 이후 2000년대 후반이나 되어서 나온 아이디어들이었다.

    하지만 재환은 미래의 기억을 살려서 남북관계는 첫판부터 ‘아낌없이 주는 나무’ 시스템에 재를 뿌리기로 했다.

    “배웅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만 가 보겠습니다.”

    “그래, 좋은 아이디어 있으면 다음에 꼭 오라고.”

    재환은 정 회장의 인사를 받으며 차에 탔다.

    ***

    “앞으로는 사업 준비만 하려고 합니다. 대북사업이나 정부에 대한 협상은 모두 아버지가 해 주세요.”

    “좋아, 염려마라! 내가 그 상황 파악했으니 앞으로 문제없을 거다.”

    재환은 희경과 분담하여 움직이기로 했다.

    앞으로 정부의 대북사업이나 규제안 문제에 대해서는 전부 신희경 회장이 맡게 된다.

    그리고 재환은 2분기 인사이동으로 ‘혜성그룹 대표이사 총괄사장’을 맡아서 전 계열사를 컨트롤 할수 있게 되었다.

    이제 공식적으로 혜성의 2인자가 된 것이었고, 실질적으로는 재환이 그룹 전체를 운영할 수 있다고 할 수 있었다.

    “꼭 이산가족상봉 후원 위주로 가신다고 하는 겁니다. 그 외에는 사실 별 가치가 없어요.”

    “그래 잘 알겠다.”

    재환은 그것을 아버지께 다시 한번 확인시켜드리고, 힘차게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옥상 흡연실에서 담배 한 대를 태울 때, 문자가 왔다.

    [신 사장이 하자는 대로 준비해야겠소. by.정목헌]

    재환은 그것을 보고 피식 웃었다.

    “탁월한 선택! 이것으로 아성은 살았네요.”

    지금 당장은 꺼내지 못해도 3,4년만 지나면 정치권 하나는 날려버릴 파급력의 ‘블랙박스’를 준비한 재환은 적어도 자신의 주변인들이 토사구팽은 없을 거라는 것을 확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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