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일본 출장(2)
재환은 삼신자동차 직원들과 헤어지고 카와사키의 호텔에서 옷을 갈아입고는 저녁 산책을 즐겼다.
어차피 한국에서도 퇴근 시간이니 백화점도 돌고, 오마카세도 먹어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비서 안 붙이길 정말 잘한 거 같다.”
보통 오너 일가 임원이라면 수행비서 두세 명을 대동했지만, 재환은 오히려 그게 신경 쓰여서 이렇게 홀로 다니는 게 편했다.
재환이 쇼핑을 마치고 왔을 때, 호텔에는 기환과 준호가 기다리고 있었다.
“대표님!”
“재환이 형!”
둘이 재환을 기다렸는지 다가오자 재환은 어깨를 으쓱거렸다.
“아니, 전화로 부르지 기다리고 있었어요?”
“형, 여기 밤거리 위험할 텐데?”
두 부하직원의 걱정에 재환은 뭐가 문제냐는 듯이 말했다.
“일본 밤거리도 혼자 못 걸으면 앞으로 출장은 어떻게 다니겠냐.”
재환은 그렇게 말하면서 자신이 예약한 스위트룸으로 둘을 불렀다.
가볍게 샤워를 하고 호텔 내에 비치된 잠옷을 입은 재환은 캔맥주를 꺼내 마시면서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게임 사업부는 어땠어?”
재환의 물음에 기환은 어깨를 으쓱거렸고, 준호가 천천히 대답했다.
“ITD하고는 좋은 이야기를 많이 나눴습니다. 특히 그쪽에서는 한국 시장을 크게 생각 못 했는데, 생각보다 장사가 잘 된다고 흡족해하더군요.”
“한글화에 사후지원 그렇게 해줬는데, 안 팔리면 이상한 거죠.”
긍정적인 반응이란 말에 재환은 맥주를 쭉 마시며 이야기를 들었다.
“형, ITD에서 그러는데 말이야. 매년 완전 한글화 게임을 5개씩 해줄 수 있냐고 하는데?”
기환의 말에 재환은 손가락으로 계산을 하면서 물었다.
“게임 하나 한글화하는 데 얼마나 걸리는데?”
“게임마다 다르긴 하지만 많은 인원이 필요하지. 옛날에는 나 혼자 패치로 만들어서 인터넷에··· 흠흠! 암튼 좀 걸려.”
재환은 그 말을 듣고서 쿨하게 결정했다.
“돈 되는 일이라면 마다할 게 있나? 게다가 네가 있는 자리니 열심히 해봐. 근데 말이야.”
재환은 한가지 이해가 안 가는 게 있어서 물었다.
“김 과장, 그리고 기환아. 내가 이해가 안 돼서 그러는 건데 어차피 한글화하려면 차라리 같은 게임에서 영문판을 들여와서 그걸 번역해서 정품 발행하는 게 낫지 않나?”
오히려 그쪽이 더 싸게 먹힐 거로 생각해서 한 말이었는데 기환이 정색하면서 고개를 저었다.
“완~전 달라.”
“어, 그래?”
“일단 일본판하고 북미판은 제목 자체가 다른 것도 있고, 표지 디자인도 이상하고··· 아무튼 그래! 스토리상 언어 유희 같은 것도 다 뺐고.”
“난 모르는 이야기지만, 그렇단 말이지?”
게임이라고 해야 유학 시절 펍에서 하던 아케이드 오락기나, 딱히 번역본 필요 없는 비디오 게임 정도만 해본지라 좀 더 아는 쪽에게 맡기기로 했다.
“그럼 돌아가는 대로 이번 공채에서는 일본어 전문 직원들을 우대 좀 해줘야겠다.”
재환은 기환을 보고 피식 웃었다.
그래도 집안 사업하라고 데려온 녀석인데 저렇게 진심으로 나오니 좀 더 도와줄 셈이었다.
“내일이나 모레는 아마 도쿄에 있을 것 같다. 나고야에서 손님이 올 것 같거든.”
재환은 두 직원을 보낸 뒤로 침대에 누우며 앞으로를 생각했다.
“내일이나 모레쯤 선동현하고 계약을 할 테고, 사흘 뒤에 다시 니혼자동차와 협상인데 말이지.”
기술제휴를 한 계약이면서 치사하게 일부 모델에 대해서는 저런 식으로 빼고 있으니 기술독립의 필요성이 절실했다.
과거 아성자동차도 자체 가솔린 엔진 개발하는데 8년이 걸렸다고 하는데, 삼신이 지금부터 시작한다 하더라도 최소 5,6년은 걸릴 것이다.
“이미 돈 문제가 아니라 니혼제 쿠페 개발때문에 포지셔닝이 겹치는 것 때문에 어깃장을 놓는 것 같으니 이걸 이야기해야겠지.”
재환은 그것을 두고 삼신 본사에 지금 연락할까, 내일 아침에 연락할까 생각했다.
하지만 먼저 휴대폰이 울렸다.
한국에서 일본으로 오는 국제전화로 말이다.
“여보세요?”
[신 이사. 잘 하고 있소?]
이건호 회장의 물음에 재환은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
다음날 재환은 새 정장으로 갈아입고 도쿄로 향했다.
“대표님, 선라이즈 신주쿠라고 하셨습니까?”
“네, 그리 가주세요.”
“알겠습니다.”
준호는 고용한 일본인 운전수에게 목적지를 말했고, 베테랑 기사는 곧바로 출발했다.
“오늘 게임유통팀 스케줄은 어떻게 돼요? 나 태워주고도 시간이 충분하려나?”
그것에 대한 대답은 기환이 했다.
“시부야에서 대형게임총판들 한 번 둘러볼 거고, 거기 노하우 좀 얻어보려고.”
“노하우를 얻는 거야? 겸사겸사 놀러 가는 거야?”
재환이 장난스럽게 말하자 기환이 시선을 회피했다.
“우선순위는 매출하고 수익이다. 네가 좋아하는 거 사들여서 엄한 거 말고 제대로 된 프랜차이즈 게임들로 들여와.”
“그건 걱정하지 마! 내가 요새 비디오랑 PC 게임 중에서 잘 나가는 거 위주로 추슬렀으니까!”
재환은 그 말을 믿어보기로 했다.
신주쿠 선라이즈 호텔에 도착한 재환은 차에서 내리면서 준호와 기환에게 먼저 가라고 손짓했다.
“안에 들어가서 커피를 마시자 얼마 안 있어서 같이 오는 덩치 큰 한국인 두 명이 있었다.”
둘 다 유니폼 대신 정장을 입고 온 모습이 어색하긴 했지만, 재환은 손뼉을 치며 맞이했다.
“아, 구단주님!”
김성환이 황급히 달려와 90도로 인사했고, 옆에 있던 선동현은 ‘이 사람이 구단주인가?’ 싶어 같이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선동현이라고 합니다.”
국보 투수 선동현
1985년 혜성 타이거즈에 입단 이후 10년 동안 한국프로야구를 초토화한 레전드 투수이자, 선수로서 받을 수 있는 모든 타이틀을 가졌고 국제대회 우승도 시켰던 ‘국보’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은 선수였다.
하지만 지금은 서른 일곱이라는 중년에 나이에 일본프로야구와의 계약이 끝나고, 미국 진출이 실패해서 은퇴를 준비하고 있는 몸이었다.
“이렇게 만나서 정말 반갑네요. 제가 어릴 때 선 선수의 경기 많이 봤습니다.”
“하하, 그렇습니까?”
“제가 어릴 때 우승 기념으로 딱 두 번 사진을 찍었는데, 처음이 김봉현 선수하고, 그다음이 선동현 선수였죠.”
새 구단주가 혜성그룹 회장 아들이라는 말에 선동현은 옛날 생각이 났다.
혜성 타이거즈의 두 번째 우승 시절 그룹 내에서 축하연을 하고 그 자리에서 고등학생이던 회장 아들이랑 같이 사진을 찍었던 순간을 말이다.
‘그때의 그 도련님이셨구나.’
선동현은 그것을 알고 웃으면서 이야기했다.
“저도 기억이 납니다.”
“아, 정말 추억이네요.”
재환은 크게 웃으면서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때의 영광을 제가 구단주가 된 뒤로 다시 이루고 싶습니다. 선 선수. 타이거즈로 돌아와 주세요.”
“으으음.”
고민되는 일이었다.
37세의 나이로 자신이 국내에 돌아와서 뭘 얼마나 도움이 될지 몰랐다.
게다가 이미 은퇴 기자회견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갑작스럽게 혜성 시절 선배가 단장이 되었다고 와서 계약하자고 해서 머릿속이 복잡한 상태였다.
“사실 최고의 순간에서 은퇴하는 것이 좋게 보인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제 제 나이도 있고 말입니다.”
선동현의 말에 재환은 고개를 저었다.
“아직 선 선수는 야구 팬들에게 더 보일 게 많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간다고 해서 타이거즈에 큰 도움이 될지 모르겠습니다.”
“충분히 됩니다. 왕조를 만든 핵심이 돌아와서 후배들을 이끌어나가는 일이니까요.”
재환은 곧바로 계약을 제안했다.
“2년 계약에 1년은 플레잉 코치를 맡기겠습니다. 이후 지도자로 타이거즈에서 성공하실 수 있게 연수를 보내드릴 것이고, 연봉은···.”
재환은 잠시 생각하다가 결심한 듯 말했다.
“아성 유니콘스의 정명헌이 1억 5천으로 연봉 1위라고 하는데, 저는 3억을 제안할까 합니다.”
“!”
아마도 2000년대 FA 시장 시절에도 역대급 연봉일 것이다.
“계약서는 김성환 단장이 가지고 있을 겁니다. 거기에 딱 3억 적고 2+1 계약에다가 사인 하시면 됩니다. 저희 조건은 이것입니다.”
“하, 하핫! 서른 일곱 노장에게는 큰돈이군요.”
“일본에서 연봉이 3억 엔이라고 들었습니다. 마음 같아서는 저희도 그만큼 드리고 싶습니다만, 먼저 진심을 듣고 싶습니다. 정말 이대로 끝내실 건가요?”
재환의 설득에 선동현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딱 하루만··· 시간을 주실 수 있겠습니까? 국내 복귀를 위해 가족들과 논의를 하고 싶습니다.”
“네, 그렇게 하세요.”
재환은 중대사는 가족과 논의하겠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고, 옆에서는 대선배 김성환이 혜성 타이거즈가 많이 달라졌다면서 3년 동안 같이 해보자고 후배를 계속 꼬드겼다.
선라이즈 호텔에 방을 잡아놓고 재환이 기다리는 동안 재환은 다시 서울에서 온 국제전화를 받았다.
“네, 신재환입니다.”
[신 이사, 나요.]
이건호 회장이었다.
지난밤 재환이 자신의 계획을 말한 것에 대해 이건호 회장이 직접 결정했는지 하루 만에 전화했다.
“네, 어떻게 결정하셨습니까?”
[그렇소. 신 이사가 원하는 대로 하시오.]
“정말입니까?”
[하시오.]
재환은 허락을 받았으니 그대로 하겠다고 이 회장에게 말했다.
그리고 남은 시간 동안 재환은 가와사키에 있는 혜성전자 일본공장을 한 번 더 방문했다.
앞으로 있을 상황에 대해서 다시금 한국 본사와 유기적인 연락을 통해 개발을 서두르기로 했다.
***
그리고 다음 삼신자동차 출근 시간이 되었을 때, 재환은 직원들과 만나 다시 요코하마로 향했다.
“사흘 동안 2.0 엔진과 2.7 엔진 협상 대금 계산은 끝났습니까?”
“네, 그렇습니다. 로열티에 대해서 좀 비싸게 나오긴 했지만, 그건 저희가 생각할 상황이긴 합니다.”
아직 제대로 된 엔진 개발을 못 해서 생기는 가슴 아픈 이야기.
재환은 그 이야기를 듣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요코하마의 니혼자동차 본사에 도착했을 때, 사토 이사는 반갑게 재환을 반겼다.
“오오, 신 상. 다시 뵙게 되는군요.”
“하하, 이사님 추천 덕분에 일본에서 좋은 관광 했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제가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군요.”
다시 이어지는 것은 서로의 잡담. 그 속에서 이번에도 재환은 웃으면서 사토 유우키와 대화를 하면서 엔진 이야기를 슬며시 꺼냈다.
“네, 그렇지 않아도 제가 임원진에게 많은 설득을 했으나 아직까지 그쪽에서 확신이 안 서는 것 같습니다.”
이건 100% ‘우린 2.7 엔진 라이센스 생각 없으니 계획 접어라.’라는 말을 에둘러 하는 것이었다.
“그렇군요. 아마도 같은 엔진에 스포츠카 사업을 하고 있다 보니 그렇겠죠.”
“유감입니다. 하지만 2.0 엔진에 대해서는 로열티 판매 허가가 나왔으니 먼저 그쪽부터 계약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 순간 재환은 조용히 검토해 보다가 말했다.
“흐음, 니혼제 엔진은 매우 우수하고, 2.0으로도 충분히 좋은 자동차가 나올 것 같군요.”
“그렇습니다.”
“좋습니다. 만족스러운 거래가 될 것 같네요.”
결국, 2.0만 거래하고 끝나나 싶어 삼신자동차 직원들의 얼굴에 수심이 드리워졌고, 사토 유우키 이사는 이 정도로 끝냈으니 이득이라면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그 순간 재환이 서류를 내려놓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네?”
재환은 미소를 지으며 사토 이사에게 말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건에 대해서는 저희 역시도 ‘본사에서 회의’를 통해 결정해야 될 것 같군요.”
“네, 넷!?”
갑자기 결정을 앞두고서 본사 이야기를 하며 임원 회의를 한다는 말에 사토의 눈썹이 흔들렸다.
“그래서 말인데, 사토 이사님이 말한대로 이 계약은 천~천히 진행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러니 며칠 뒤에 저희가 연락 드리겠습니다.”
“자, 잠깐만요. 신 이사님?”
하지만 재환은 이 말만 하고서 곧바로 니혼 자동차를 나섰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천천히 있다가 갈 것이니, 다음에 이사님이 한국에 오신다면 아주 좋은 관광지를 안내하겠습니다.”
재환은 사토 이사가 했던 그대로 ‘윗선이 우려하니 기다려 봐라’라는 말로 거절의 완곡 표현을 되돌려줬다.
그리고 당황한 삼신자동차 직원들을 이끌면서 니혼자동차를 빠져나갔다.
“이, 이사님!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아니 협상을 아예 파토내신다는 겁니까?”
잘못하면 출장팀 모두가 모가지 날아갈 일이었지만, 재환은 태연했다.
“그동안 이틀밖에 출근 안하는 임원 모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돌아가서 태평로 본관에서 봅시다.”
“이사님!”
“걱~정 안 하셔도 돼요!”
불안해하는 삼신 직원들을 보고 재환은 손가락을 까딱이며 말했다.
“다들 잘 들으세요. 이틀 전 이건호 회장님이 직접 전화 주셔서 상황을 그대로 이야기 했고, 이 거래 접기로 결정했습니다.”
“!”
“회장님이 다이렉트로 하신 전화였고, 일부러 여러분들에게 말씀 안 드린 건 니혼자동차가 언제까지 배짱부리나 기다려 본 겁니다. 혹여라도 라이선스비를 올린 계약을 요구하면 그것까지도 들어보라 했지만, 파토 난 거죠.”
재환은 일전에 말했던 엔진 로열티 구매에 대해서 예상보다 몇 년 빨리 결정했다.
[회장님, 그냥 쿠페부터 르노어제 엔진으로 협상해 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그날 밤 재환이 던져본 제안에 이건호는 서울에서 곧바로 프랑스에 연락해 르노어 모터스와 이야기를 했고, 그쪽에서는 ‘2.0과 2.7엔진 모델 모두 기술도입 생산 협상을 하자.’라는 연락이 왔다고 한다.
“이상입니다. 엔진 문제는 이미 다른 회사의 협상에 들어갔고, 저희가 더는 일본 회사와 기술도입 문제로 얼굴 붉힐 일 없을 것입니다.”
재환의 해답에 삼신자동차 출장팀원들은 순식간에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지 뒤늦게 알아차려 입이 떡 벌어졌다.
재환은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남은 시간 여유롭게 면세점 쇼핑 준비나 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