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 일본 출장(1)
“그런 일이 있었어?”
혜성그룹 남영동 사옥에서는 신희경 회장이 KBA 망년회에서 있었던 일을 재환에게 들었다.
“어이가 없더라고요, 야구팀으로 기 싸움을 하려고 그러나.”
“하긴··· 거기가 옛날 빙글 때부터 그랬어.”
“네?”
대화 이글스의 전신은 대화그룹의 식품사업부였던 빙글식품의 이름을 따서 ‘빙글 이글스’라고 불렸었다.
삼신 라이온즈와 더불어 한국시리즈에서 가장 많이 만났던 팀 빙글 이글스 혜성과 결승에서 3번이나 만났지만, 3번 모두 깨졌었다.
“그래서 대화가 우리 혜성에 악감정 심했었지. 그거 기 싸움하다가 옛날에 술자리에서 구단 사장들끼리 술잔 집어 던지고 멱살잡이한 적도 있었어.”
“공놀이 하나에 참···.”
“원래 야구라는 스포츠가 그랬어. 프로야구 출범 이후에도 각종 대학재단하고 선수 빼 오는 경쟁도 많이 했고 말이야.”
일종의 기업가들이 벌이는 아바타 싸움 같은 것이 당시의 프로야구였다.
그래서 자회사 야구팀의 한국시리즈 우승 여하에 따라 경제련에서 울고 웃는 회장들 얼굴이 다 보인다는 말까지 있었다.
“공교롭게도 대화하고는 청량리 민자역사 유통권으로 싸울 것 같아요.”
“어, 그거 비쌀 것 같은데 자본은 충분해?”
“아버지. 이번에는 혜성쇼핑 예산만으로도 충분히 돼요.”
유통업이라는 게 결국은 그 자리에서 돈을 쓰기 때문에 현금을 쌓아놓고 하는 장사였다.
그러다 보니 현재 재환의 산하에서 전자나 컴퓨터, 인터넷 등이 첨단사업으로 수익을 올려도 당기 현금을 끌어당기는 데는 혜성쇼핑이 엄청난 힘이 돼 주었다.
이미 그룹 핵심이었다는 혜성제과 매출은 진작에 넘었고, 카 오디오 사업을 독점에 가깝게 움직이는 혜성전자와 더불어 그룹 내 투톱이라고 할 수 있는 사업이었다.
“대규모 융자를 벌일 일도 없습니다. 오히려 지금은 지난번에 미금상호금고에서 빌린 돈이나 천천히 갚아나가면서 새 사업 준비할 겁니다.”
“흐음, 일단 내가 김승열이를 틀어막아야겠구만.”
김승열 역시도 재계에서 다혈질적인 성격으로 희경 못지않은 무대포로 유명했으니 둘이 붙는다면 아주 볼만 할 거다.
“네, 알겠습니다. 제가 일본 출장 다녀올 동안 부탁드릴게요.”
“걱정하지 마. 이 애비가 늙었어도 아직 현역이다.”
재환은 청량리역 민자역사 입찰을 준비하는 동안 희경에게 모든 것을 서포트 해줄 것을 부탁했다.
그리고 곧바로 일본으로 떠날 준비를 했다.
재환은 강남 사무실로 가서 같이 출장을 갈 인원들을 모았다.
“다들 준비됐죠?”
이번 일본 출장은 며칠 걸릴 것 같아서 미리 준비해둔 참이었다.
혜성그룹의 계열사인 혜성전자 오디어사업부가 일본 카와사키시에 있었다.
일단 주재원을 만나 숙소는 그곳에서 준비하고, 혜성그룹이 움직일 곳은 요코하마에 있는 니혼자동차 본사, 도쿄에 있는 ITD도쿄지점, 그 외에 일본 게임 유통총판출장, 혜성전자 오디오, CD플레이어 공장 시찰, 마지막으로 일본 나고야에 있는 ‘주니치 드래곤스’ 구단과 한국 선수영입에 대한 협상이었다.
재환은 이 사업을 위해서 각 계열사에서 인원들을 추슬렀다.
“이번에 일본에서도 카 오디오 사업을 위해 움직여 볼까 합니다.”
혜성전자 이기남 전무는 MP3 플레이어 연구를 하다가 카 오디오 사업으로 인해 같이 일본으로 향했다.
가는 김에 일본에 있는 주재원들도 한 번 격려해주고, 수출을 위해서는 품질 개발도 살펴야 했다.
“선동현이는 제가 무슨 일이 있어도 데려오겠습니다. 가는 김에 종만이도 데려오면 좋겠지만, 그 친구가 부상 재활 중이라···.”
다른 인원과 다르게 김성환 단장은 관서 나고야 쪽으로 따로 움직여서 도쿄에서 만나기로 했다.
“대표님, 도쿄로 출장 보내준 거 정말 감사드려요! 제가 협상 야무지게 할께요!”
기환이는 이 출장이 노는 것보다 더 신나는지 아주 얼굴이 폈다.
이번에 ITD 게임 중에서 푸키먼 말고도 정식 수입할 프랜차이즈 시리즈들을 협상하는 것이었고, 일본어도 수준급으로 하는지라 김 과장과 같이 보내는 것이었다.
재환은 그것을 알고 김 과장에게 슬쩍 귀뜸했다.
“김준호 과장이 쟤 잘 좀 봐주세요. 게임 쪽은 잘 알아도, 협상을 뭐 하겠어요?”
“염려하지 마십시오. 대표님.”
그리고 재환과 같이 갈 인원들은 삼신 내에 있는 주재원들도 만나기로 했다.
“자~ 그럼 내일 공항에서 뵈는 겁니다.”
각 계열사가 간부들이 모인 대규모 출장이 시작됐다.
***
비행기 안에 있는 혜성그룹 사람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숙면에 들어갔다.
도착까지 2시간 반 정도 걸리는 동안 기환은 옆자리에서 기내식으로 아침을 챙기는 재환에게 물었다.
“형, 궁금한 게 있는데.”
“일 이야기야?”
“저기, 그··· 자동차 있잖아. 삼신거인데, 형이 직접 하는 거야?”
“어, 맞아.”
재환은 별거 아니라는 듯이 쿨하게 대답했다.
“와~ 삼신에서도 형이 중역인 거구나. 근데 그거 하면 우리한테도 좋은 거는 아니지 않아?”
그 순간 재환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기환이 너는 우리가 삼신하고 자동차 사업하는 이유 모르는구나?”
“으, 응.”
“애초에 삼신자동차랑 삼신반도체가 자금난으로 위기일 때 현금 투입해서 대주주가 된 게 우리 혜성이야. 그래서 내가 비등기가 아니라 등기임원으로 올라간 거고.”
“비등기임원하고··· 등기임원하고 차이가 심한 거야?”
“완전 다르지. 사실상 동업자라 봐야 하는 거야. 이사라고 다 같은 이사가 아니다.”
그러면서 재환은 요코하마 공장에서 W쿠페용 엔진 구매를 생각하면서 피식 웃었다.
‘그게 다~ 때 되면 우리 차 만들 때도 기술력 나눠 가질 수 있는 거고.’
사실 상용차와 경차를 가지고 독립하려고 했는데, 승용차 사업부로 끌어들였을 때 조금 뜬금없긴 했지만, 재환이 생각하는 것처럼 이건호 회장 역시도 ‘자신을 칼잡이로 쓴다.’라고 여기고 있을 것이다.
이것은 사업이자 동맹.
그리고 재환은 손잡은 상대에 대해서 서로 기분 상할 일은 없게 윈윈을 노릴 것이다.
일본 하네다 공항에 도착했을 때, 각자의 사람들이 움직였다.
김성환은 나고야까지 환승하기 위해 먼저 움직였고, 준호와 기환 역시도 차를 준비하고 먼저 ITD도쿄 지점이 있는 시부야로 떠났다.
“안녕하십니까 대표님!”
주재원이 직접 차를 끌고 와 인사하자 이기남이 먼저 반갑게 맞이했다.
“아니, 안 과장!”
이기남은 재환에게 안 과장을 설명했다.
“혜성전자 일본지점의 안승철 과장입니다. 저 친구도 스피커 연구로 15년 지낸 베테랑입니다.”
“그렇군요. 일단 공장으로 가 봅시다.”
안 과장은 곧바로 차를 운전하고 카와사키시로 향했다.
“공장까지는 한 10km 정도 걸립니다.”
“그 정도면 얼마 안 걸리네요. 저는 저녁 약속을 잡아놨으니까 천천히 갑시다.”
재환은 출장으로 온 일본에서 주변을 둘러봤다.
한일 대중문화 개방협정을 한 지 1년이 지난 뒤로 일본에 대한 이미지가 국내에서 서서히 알려진다.
물론 지금은 게임, 애니메이션, 잡지만화, J-pop음악 등의 이야기지만, 앞으로는 좀 더 많은 사업이 진행될 것이다.
특히 혜성쇼핑의 경우 게임 유통과 비디오 게임기까지 손대고 있으니 훗날 전자와 협상해서 게임기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얼마 되지 않아 혜성전자 일본공장에 도착했을 때 모든 직원이 재환을 맞이했다.
재환이 현지 주재원들을 격려해주고, 일본어의 경우 이기남이 직접 해주면서 상황을 살필 수 있었다.
‘일본어도 전문적으로 배워야겠구만.’
영어라면 자신이 있어도 이쪽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었다.
간단한 의사소통은 해도 전문적인 영역에 대해서는 김준호나 이기남 같은 일본어로 능숙하게 대화할 수 있는 간부가 필요했다.
그리고 재환이 공장에서 본 것은 ‘일본은 일본이다.’라는 감상평이었다.
BQ 시스템 이전부터 철저한 제품검수와 위생으로 인해 먼지 한 톨 없는 깔끔함에 수시로 청소를 해서 바닥에 드러누워도 묻어나는 게 하나 없을 정도였다.
“훌륭합니다. 거기에 재무제표도 좋고요.”
“감사합니다. 대표님.”
현지 지점장인 이석훈 이사는 재환이 연신 칭찬을 하자 자신이 다 흡족해서 미소를 보였다.
“일본에서 가장 잘 나가는 상품은 뭡니까?”
“CD플레이어가 판매가 준수한 편이지만··· 그것도 요새는 힘듭니다.”
“이유가 뭐죠?”
재환이 묻자 이석훈은 많은 이유가 있지만, 그중에서 일본에서 장사가 안되는 이유에 대해 결정적인 이유를 말했다.
“독자규격 문제입니다. 현재 일본 소니아를 포함해서 기존의 CD플레이어보다 작은 CD인 미니 디스크(MD)로 휴대용 음향기기를 만들고 있습니다.”
“어이구야. MD···.”
90년대 세계시장에서 절대적인 인기를 누리는 소니아가 단독으로 독자규격을 만들면서 준비한 프로젝트였는데, 공교롭게도 그때 나올 제품은 MP3 플레이어였다.
“이번에 본사에서 MP3 플레이어 개발하는 거 아시죠? 기술 교류하면서 잘 진행되길 바랍니다.”
“네, 알겠습니다. 대표님.”
“일본에서도 장사 잘 해봅시다. 제품 좋고, 마케팅 잘 하면 고객은 그 진심을 알아주게 돼 있어요.”
“명심하겠습니다!”
재환은 환전한 엔화를 봉투에 담아 금일봉으로 건네줬고, 공장 시찰을 마친 뒤에 요코하마로 향했다.
***
“어서오십시오. 니혼자동차의 해외영업본부 사토 유우키라고 합니다.”
능숙한 한국어로 말하는 사토 이사와 악수를 한 재환은 그를 유심히 살펴봤다.
100kg는 넘어 보이는 비만 체형에 눈꼬리가 처져 푸근한 이미지의 사토 이사는 니혼자동차 내에서 삼신과 가장 많이 부딪친 인물이라고 했다.
삼신자동차의 직원들도 그를 보자마자 ‘잘못 걸렸구나.’ 싶은 눈길이 보였다.
하지만 재환은 누가 됐던 협상은 자신이 한다는 생각으로 먼저 앉아서 말했다.
“제가 일본어가 조금 서툴러서 걱정 많이 했는데, 이쪽에서 한국어를 잘 해주시니 다행입니다.”
“하하하, 제가 국제 비즈니스 팀이라 한국어, 중국어, 광동어 모두 구사할 수 있습니다.”
“아, 그렇군요.”
“저도 1년에 다섯 번 정도는 한국에 갑니다. 특히 잘 먹는 음식이 그 소갈비인데, 일본의 갈비와는 확실히 다른 맛이더군요.”
“아, 그렇습니까?”
“한 번은 제가 서울에서 정말 맛있는 갈비집을 찾았는데, 혼자서는 못 먹는다고 하더군요. 제가 3명분 먹을 테니 달라고 하니 이상한 눈을 하면서 주덥니다. 하하하-”
“아, 네.”
“그리고 있지 않습니까···.”
사설이 꽤 긴 것을 보고 재환은 조용히 듣고 있다가 어느 순간 바로 직구를 던졌다.
“자~ 한국 여행 이야기는 이쯤에서 하고, 일본 이야기를 해 볼까요.”
“아, 그렇습니까?”
“제가 하네다에서 여기까지 오면서 일만 하다 보니 얼른 협상을 끝내고 조금 관광을 해보려고 합니다.”
“하하하, 요코하마에는 먹거리와 볼거리가 많습니다.”
이러면서 다시 자동차 엔진 협상 이야기는 나오지 않고 계속 이야기를 딴 쪽으로 새자 다른 삼신직원들은 역시나 싶은 표정이었다.
‘어떤 타입의 사람인지 알겠군.’
재환은 곧바로 사토 이사에 대해 간파하고는 태연하게 그 이야기를 따랐다.
“요코하마에는 랜드마크도 많고, 먹거리도 많습니다.”
“아, 그러면 역시 차를 이용해서 투어를 다니는게 좋겠군요. 이왕이면 멋진 쿠페형으로 말입니다.”
“하하, 쿠페요?”
“네~ 그렇습니다. 니혼자동차 역시도 그런 멋진 차량이 많다죠?”
재환은 본격적으로 자동차 이야기를 꺼내 사토 이사를 살살 긁기 시작했다.
“저희 혜성도 언젠가는 좋은 쿠페 차량을 만들어야 하는데, 지금은 니혼자동차가 많이 돕지 않습니까?”
“아, 네 그렇습니다. 그래서 2.0엔진과 2.7 엔진을 원하신다고 하셨죠?”
“바로 그렇습니다. 저희도 ‘니혼 스카이라인GT’ 같은 희대의 예술품을 만드는 게 꿈입니다. 하하하.”
“삼신은 잘 할 수 있을 겁니다.”
자연스럽게 재환이 여행 이야기에서 자동차 이야기로 화제를 넘기고, 거기에서 협상을 이끌어냈다.
“삼신은 정말 대단합니다. 반도체사업에서 1인자에 오른 뒤로 자동차까지도 오른다니요?”
“네~ 그렇습니다.”
“하지만, 저희가 이번에 회의하면서 한 가지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
“2.0 엔진에 대해서는 공급할 수 있지만, 2.7 엔진에 대해서는 저희도 아직 개발이 불안정한지라 좀 더 회의를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이건 어깃장이었다.
재환은 그것을 눈치채고서 뭔가 더 말을 해 보려고 했지만, 시간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그러면 일단 2.0 엔진에 대한 협상을 하고, 천천히 이야기를 해봐야겠군요.”
“오래 계실 거라면 제가 좋은 관광 코스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재환이 별안간 반쪽짜리 협상만 하고 일어나자 삼신 직원들은 놀라면서 악수하고 니혼자동차 본사에서 떠날 준비를 하는 그를 따라갔다.
“이사님! 어쩌시려고 협상을···”
“이미 본사에서는 두 엔진 협상을 위해서 움직이라 하셨잖습니까.”
하지만 재환은 태연했다.
“네~ 그래요.”
그리고는 숙소로 향하면서 차 안에서 이야기를 했다.
“사토 상이라는 분은 어떤 사람인지 딱 나오는군요.”
“···.”
“생긴 것처럼 느긋한 사람 같습니다. 게다가 저쪽도 알 거예요. ‘칼자루는 우리가 쥐고 있다. 우린 이 협상 빨리 처리할 생각 없으니 삼신이 알아서 생각해라.’ 라는 식으로요.”
“하, 하지만 이사님! 스포츠카를 위해서는 엔진 모델 두 개가 꼭 필요하지 않습니까?”
재환이 이건호 회장에게 한 말이 있는데, 그것을 두고서 반쪽 협상만 하고 나간게 아무래도 걸리는 직원들이었다.
“최근에 니혼자동차의 프리미엄 모델인 ‘인피니트’가 쿠페형으로 나온다죠? 그거 엔진이 딱 2.7이던데요.”
“!”
아직 국내에서는 접하지 않은 정보였지만, 재환은 일본에 있는 기사들을 찾아보면서 빠르게 계산하고 있었다.
“그래서 일부로 저런 거겠죠. 자기들 밑에서 기술제휴 받는 애들이 같은 엔진 스펙의 쿠페를 만든다고 하니까요.”
“그, 그럼 어떻게 해야 됩니까?”
삼신자동차 직원들에 비해 재환은 태연했다.
“사토 상말대로 관광이나 하죠. 내일 출근할 때 뵙시다. 아, 나는 일주일 이틀 출근이니 사흘 뒤에 움직여야지?”
이 상황에서 협상자가 그걸 따지고 있으니 삼신 직원들은 속이 터질 지경이었지만, 재환은 그들에게 말했다.
“저를 믿으시고 사흘동안 그냥 기존 서류 검토만 하세요. 2.0 엔진은 일단 받을 거 같으니 그걸 W쿠페 연구팀에 팩스로 보내시고요.”
“알겠···습니다.”
재환은 호텔 숙소에 도착한 뒤로 일본 야식이나 먹어보자면서 한 바퀴 돌아보기로 했다.
그리고 밖에 있는 수많은 니혼자동차 택시 모델들을 보고 피식 웃었다.
“지금도 잘나가면서 이런데서 장난질을 다 하고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