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작은 도시에서 큰 거래를.
재환은 상윤자동차에서 쿠페 팀과 협상을 하면서 자신이 개인적으로 지분을 사들였다.
그리고 태평로 삼신 본관으로 전화해서 실무팀을 불러 협상을 하게 했다.
재환이 상윤과 대략적인 인수 대금을 논의했고, 그 선에서 삼신의 실무진들이 호텔까지 서류를 가져와 검토하고 있었다.
그때 삼신자동차 재무팀장 황덕철이 물었다.
“이사님.”
“네, 말씀하세요.”
“이 인수 대금 말입니다. 한 달 정도만 기다리면 30%까지는 깎을 수 있을 것 같은데, 조금 더 시간을 끌어볼까요?”
이런 일에는 삼신그룹 전체가 참 냉정하게 움직였다.
재환은 그 말을 듣고서 고개를 저었다.
“그럴 필요 없습니다. 그냥 기존의 금액으로 속전속결 처리하세요.”
“네?”
재환은 그들의 일이 이런 식으로 비용 절감과 유리한 방식으로 움직이는 방식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이번에는 자신을 따라달라고 요청했다.
“팀 자체를 통째로 팔아야 할 상황입니다. 거기에서 더 깎는 건 도의에 어긋납니다.”
“이사님. 하지만···.”
재환은 황 팀장을 포함해 서류 검토를 하는 직원들에게 모두 말했다.
“다들 들어보세요. 지금 협상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어요.”
직원들은 재환의 말에 이목을 집중했다.
“하지만, 여기서 무리하게 대금을 깎는 행동은 하지 맙시다. 우리는 지금 필요한 물건을 합당한 가격에 사들이는 겁니다.”
“···.”
“우리가 필요한 것은 스포츠카에 대한 디자인과 설계 아이디어, 그리고 그걸 가진 게 상윤 아닙니까? 원하는 것을 사는데 제값을 치르는 것은 당연한 겁니다.”
“!!!!”
다른 직원들은 그 말에 ‘그런가 보다.’ 하는 반응이었다.
오히려 윗선에서 그리 말하니 백만원, 천만원 단위로 얼굴 붉히며 싸울 일이 없으니 더 편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방금 재환이 한 말에 하얗게 질려 있는 인물이 있었다.
‘아니, 저 말은 분명···.’
황덕철 팀장은 재환이 방금 말한 ‘우리가 필요한 것을 제값 주고 사는 것은 당연하다.’라는 말은 분명 ‘그분’이 하신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때 호텔에서 벨이 울렸다.
“음?”
“제가 나가보죠.”
재환은 직접 나가서 문을 열었다.
그러자 그 앞에는 한 노신사와 검은 정장의 일행이 여유 있는 미소로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작은 키에 다부진 체형, 기름을 발라 넘긴 검은 머리에 금테 안경 너머로 서글서글한 인상을 주고 있었다.
재환은 회장 집무실 ‘승지관’에서 본 것 같은 그 얼굴을 보고 혹시나 싶어 입을 열었다.
그 순간 내부의 직원들이 먼저 응답했다.
“아앗, 부회장님!”
“부회장님!”
황덕철을 포함해 안에 있던 삼신자동차 직원들은 황급히 달려왔다.
문 앞에 있는 이는 삼신물산의 대표이사 현영관 부회장이었다.
“여기에 삼신자동차 계열사 인원들이 있다 해서 왔어요. 신 이사가 고생이 많군요.”
조곤조곤한 말로 자신에게 말하는 현 부회장을 보고 재환은 미소로 화답했다.
“삼신물산 대표님께서 이 자리까지 와 주실지 몰랐습니다.”
“무역사업부가 평택항에 있는데 거기 시찰도 있고, 대규모 증축공사가 있어서요. 게다가 다른 일도 많은데···”
현영관은 그렇게 말하며 재환을 한번 보고 호텔 안에 있는 직원들을 둘러보다 반가운 얼굴을 바라봤다.
“거기 있는 게 황 팀장 맞지?”
“네, 부회장님.”
현영관은 비서에게 눈짓했고, 곧바로 그가 품 안에서 금일봉을 꺼내 황 팀장에게 건네줬다.
“가서 오늘 저녁 회식이라도 해요. 이 동네는 폐계닭이라는 요리가 유명하더구만.”
“아, 네. 부회장님.”
눈치빠른 황 팀장이 곧바로 직원들을 이끌고 저녁 회식 준비를 했고, 현영관은 재환에게 넌지시 물었다.
“신 이사는 잠깐 시간 좀 돼요?”
아무래도 현영관은 자신을 찾아서 온 것 같아서 승낙했다.
“네, 말씀하시죠.”
재환은 호텔에 연락해서 VIP 라운지를 이용하게 했다.
자리에 앉은 재환은 현영관과 독대하는 자리를 가졌다.
커피를 마시면서 무슨 이야기가 나올까 기다리는 와중에 현영관은 여유로운 얼굴로 말했다.
“삼신과 협력하며 혜성이 좋은 성과를 내고 있지요?”
“네, 상생이 잘 되고 있죠.”
현영관은 빙긋 웃으면서 본론으로 들어갔다.
“이현규 전무님이 그러시더군요. 현재 수원에 있는 삼신전자 종합연구소에서 연수가 끝난 직원들을 이끌고 혜성이 새 공장 부지를 찾는다고요.”
“아직 먼 미래지만, 저희도 스스로 만들어야 할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위치는 어디로 생각하십니까?”
“이 근처에 고덕면이라는 곳이 있더군요. 그곳을 노릴 겁니다.”
현영관은 재환의 대답에 안경을 고쳐 쓰며 물었다.
“왜 그곳을 생각하시는지 혹시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요?”
재환은 그 질문에 대해 쿨하게 대답했다.
“현재 화성공장을 증축하고 있지만, 한계가 보여서 바로 아랫동네인 평택을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곳은 수도권 공장 총량제에서 규제 완화가 가능한 도시이니까요.”
경기도권에서 공장을 지으며, 지자체와 지역구 의원의 의지에 따라 충분히 규제 완화를 할 수 있는 곳을 찾다 보면 여기만 한 곳이 없었다.
“그리고 경부선 철도로 교통이 편하면서 그 주변 일대에 산업단지가 있으니 완전 맨땅에서 시작할 것 같진 않습니다.”
“그렇군요. 충분히 납득할 계획이네요.”
현영관은 수첩을 꺼내서 뭔가를 적고는 종이를 찢어 재환에게 건네줬다.
“이게 뭡니까?”
“현재 삼신물산과 삼신중공업 건설부에서 그 일대에 땅을 사들여 아파트단지를 구상하고 있어요. 규모는 1500세대 정도지요.”
아무래도 현영관이 노리는 것은 그것 같았다.
‘그 일대를 혜성이 사들여서 대규모 산업단지를 만들어 달라는 건가? 제법 시너지가 있긴 하겠네.’
지금이야 1500세대라고 하지만, 절대 그 정도 규모에서 끝낼 생각은 아닌 것 같았다.
거기에 5년 뒤에 생길 수도권 전철 1호선이 이곳까지 내려온다면, 소유하고 있는 토지가는 천정부지로 솟을 것이다.
“무슨 말인지 잘 알겠습니다. 삼신의 신도시와 거기에 맞는 대규모 산업단지를 생각하시는 것이군요.”
“출퇴근 거리로 충분한 부지가 있는데 그 일대를 가진 토지 소유주가 한 명입니다.”
“아이고~ 지역 유지인가 보네요.”
십 수만 평이 넘는 땅인데 그게 단 한 사람의 소유라는 말에 재환은 이 사람하고 협상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동차 일은 실무진에게 맡기고, 혜성전자 이름으로 구매를 해야겠어.’
재환이 그것을 계획하고, 그 위치가 있는 땅의 주소를 확인했을 때, 그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약간 틀어진 위치긴 하지만, 이 일대는 재환이 반도체 공장건설을 지휘했던 현장이기 때문이었다.
‘좋아, 한 번 해봐야겠어.’
재환이 고개를 끄덕였을 때, 현영관이 조용히 말했다.
“그리고 자동차 사업에 대해서는 회장님이 직접 경영을 하시니, 제가 관여할 바는 아닌 것 같지만··· 이번에 상윤차의 기술팀을 통째로 영입하신다고 하더군요.”
“네, 1주일 안에 결착이 날 겁니다.”
“너무 비싸게 사시는 게 아닌가 싶네요.”
재환은 한 번 더 자신의 의사를 말했다.
“우리가 필요한 물건을 살 때는 아무리 비싼 값을 치러도 반드시 손에 넣어야 합니다.”
“!”
현영관은 그 말을 듣고 나서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리고는 커피를 마시면서도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옛날··· 생각이 나는군요.”
“예?”
“5년 전 일이었습니다. 삼신이 국가에 헌납했던 대한비료를 인수할 때였죠.”
재환은 그 이야기를 듣고 생각 나는 게 있어 말했다.
“아, 혹시 주당 10만원 하던 회사를 주당 33만원에 매입하셨던 그 일입니까?”
“허허, 신 이사도 그 일을 아는군요. 그때 제가 경쟁사들보다 300억이나 더 부어서 ‘오버슈팅’을 거하게 했습니다.”
“그렇군요.”
“그때 책임자가 저였고, 지금 삼신자동차에 있는 팀장 황덕철이가 당시에 과장이었죠.”
재환은 그제야 왜 그렇게 흠칫했는지 알 것 같았다.
“신 이사. ‘우리가 필요한 제값을 비싸게 산다는 건 문제없는 일이다.’라고 말한 게 바로 이건호 회장님이었습니다.”
“공교롭게도 제가 발언 표절을 했나 보군요.”
현영관은 빙긋 웃으면서 커피를 마시고 일어날 준비를 했다.
“그러고 보니 혜성시계는 잘 있습니까?”
“네? 아, 지금 신형 벽걸이 시계로 상당한 수익을 올리고 있습니다. 앤틱가구 품목으로도 강남 사모님들이 많이 사시고, 시보광고도 아주 만족스럽습니다.”
“그 회사 제가 처음 사장에 올랐을 때 경영한 곳입니다. 품질에 대해서는 아주 자부심을 품었죠.”
현영관은 그때의 일이 생각난 김에 재환에게 작은 도움을 하나 주고 간 것이다.
“한때 청춘을 부은 곳이었는데, 없어지지 않고 잘 운용해주신 것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시계사업 기대하겠습니다.”
“네, 과거의 명성에 누가 되지 않고, 새로운 신화를 만들어볼까 합니다.”
재환은 현영관 부회장과 악수하면서 자리를 나섰다.
그리고 현 부회장이 적어준 주소를 한 번 보면서 곧바로 본사에 연락했다.
***
이틀 뒤 재환은 김 기사를 불러 목적지로 향했다.
“대표님. 도착했습니다.”
평택에서 업무 시작을 하면서 오늘은 삼신 대신 원래 주 업무인 혜성그룹의 토지 매입을 위해 움직였다.
“고덕면 해창리···.”
원래 재환이 삼신전자 시절 개발을 했던 곳은 고덕면 좌교리라는 곳이었는데, 해창리는 바로 그 옆에 있는 행정구역이었다.
이 일대는 전형적인 시골이었다.
하천을 통해 수로를 만들고 주변에 보이는 것은 모두가 벼농사용 농지였다.
주변에 소규모로 목장이 있어서 퀴퀴한 소똥 냄새도 가득한 곳이었다.
“상전벽해를 만들 땅이 이곳이라···.”
재환은 그곳을 미리 조사해서 이 일대의 땅 소유주가 ‘임영준’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는 평택 토박이로 과거 미군부대를 중심으로 사업을 하다가 지금은 고향에 대규모로 땅을 사들여서 농사를 짓는다고 한다.
“이 사람이 600마지기나 땅이 있다고 하더군요.”
재환이 넌지시 말하자 김 기사는 곧바로 계산했다.
“어이구- 마기지 당 200평으로 친다면, 12만평 가량 되는 거군요.”
아무리 논밭이라고 해도 그 정도면 정말 엄청난 크기였다.
“이런 거 신문사에 알리면, 야구장 몇 개 크기, 축구장 몇 개 크기 하면서 대략적으로 알려줄텐데.”
재환은 그것을 생각하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
“안 팝니다.”
임영준은 혜성그룹 사장이 직접 찾아와 땅을 팔라는 말에 단호하게 거절했다.
“사장님, 한번 잘 생각해보시지요. 가격은 충분히 쳐 드리겠습니다.”
“나 사장 아니요. 그리고 여긴 내가 말년에 농사지으려고 산 곳인데, 여기에 공장을 짓는다고? 허락할 수 없소!”
임영준은 거부 의사를 밝혔지만, 유리병에 담긴 오렌지 주스를 가져온 그의 부인은 탁자에 올려놓고 연신 재환을 바라봤다.
시골에서 평화롭게 농사를 짓던 내외에 갑자기 재벌가 사람이 직접 와서 땅을 팔라고 하니 마음이 흔들렸다.
“기존 시가에 2배 이상까지 가능합니다. 만약 사장님의 600마지기가 전부 안 된다면 그 일부라도 사겠습니다.”
재환은 일부러 혜성쇼핑 명함을 준다음, 혜성전자와 혜성그룹의 명함을 또 꺼내서 건네줬다.
그리고 재환이 나가자마자 바가지 긁는 소리와 함께 자식들 불러서 이야기하라는 말이 나왔다.
차에 올라탄 재환은 느긋한 얼굴로 말했다.
“며칠 뒤에 연락 오겠네요.”
“대표님. 어디로 모시면 되겠습니까?”
김 기사의 질문에 재환은 생각난게 있어서 대답했다.
“김 기사님, 지난번에 제가 사 두라고 한 평택항 일대 부지는 어찌 됐나요?”
“아, 네. 그때 말씀 듣고 조금 구매하긴 했습니다만.”
“잘 됐군요. 그쪽 한 번 가 봅시다. 갑자기 바다가 보고 싶네요.”
오늘은 출장을 빙자한 드라이브나 해보려고 김 기사에게 명했다.
그리고 시간에 맞춰 올라갈 수 있었지만, 재환은 분명 연락이 올 거라 생각하고 일부러 평택에서 며칠 더 머물렀다.
그리고 정확히 사흘 만에 임영준의 연락이 왔다.
***
“양복이 아주 잘 어울리십니다.”
“고맙습니다.”
오늘의 거래에 맞춰 입고 온 것인지, 잘 다려진 정장 차림으로 나와 커피를 마셨다.
“신 사장님 덕분에 내 오랜만에 자식놈들 다 불러서 이야기해봤어요.”
“가족이 많으신 거군요.”
“아들 셋에 딸 둘이 있지. 막내가 딱 신 사장 만할거요.”
재환은 웃으면서 이야기를 했다.
“그래서 파시겠습니까?”
“10만 평.”
“!”
4만평 정도 규모를 생각했는데 역으로 상대가 세게 불렀다.
“남은 2만평은 내가 농사를 짓다가 아파트니 뭐니 들어오면 그때 가서 팔 거요. 아직 10년은 농사지을 수 있으니 나도 남겨는 놔야지.”
“좋습니다. 저희에게 양도하신다 해도 용지변경 이전까지는 그곳에서 농사를 짓게 하겠습니다.”
물론 계약서를 동봉하겠지만, 농지를 용도변경하고 그 뒤로 수도권 공장총량제 규제 완화까지 몇 년은 걸릴 테니 그때까지는 시간이 충분했다.
그럼 이제 중요한 건 가격이었다.
10만평의 규모라면 과거 삼신전자 평택공장의 2.5배였지만, 이 정도는 재환이 충분히 컨트롤 할 수 있었다.
“평당 2만원은 받아야겠소.”
“!”
그 금액에 재환은 실소가 나왔다.
그린벨트 규제 풀리고 첫 거래가 시작될 판교 땅값이 당시 평당 2만원대였는데, 고덕 땅을 그만큼 받겠다는 조건이었다.
참고로 신누리 쇼핑이 미래의 역세권을 생각하고 S마트를 지었을때가 평당 9천원 남짓이었다.
“그 가격 들어주면 바로 거래하지요. 하지만, 그만큼 돈 안되면··· 나 이거 없던 일로 하고 안 팔겠소.”
그렇게 계산하면 10만평의 농지를 사는데 드는 돈은 딱 20억원이었다.
‘본인 입장에선 최대한 불러본 금액이겠지. 뭐, 이 당시 20억이면 은마아파트가 10채 값이던가?’
어쨌건 재환에게 있어선 생각보다 ‘소박’한 금액이니 바로 결정할 수 있었다.
“바로 결제하겠습니다.”
“네, 넷!?”
재환은 지갑을 꺼내고 안에서 미리 인출했던 수표 2억원을 꺼내 올려놨다.
“선금입니다. 그리고 지금 당장 가까운 농협은행이 어디에 있습니까? 잔금 18억원 계약서 쓰시는대로 바로 진행하겠습니다.”
“아, 아니! 세상에···.”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진행한 사업이었고, 일시금으로 그 큰돈을 결제한다는 말에 임영준의 입이 떡 벌어졌다.
그렇게 혜성그룹은 재환의 결재로 10만평 규모의 고덕부지를 마련하게 되었다.
앞으로 용도변경과 차기 신도시 사업 등 규제를 두고 지역구 의원, 평택시장, 경기도지사하고 입씨름을 해야겠지만, 그건 훗날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