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다시 사는 재벌의 삶!-67화 (67/244)
  • 67- 이리저리 와서 도와달라고 하네요.

    재환은 혜성백화점 강남점에 찾아온 손님을 맞이했다.

    “지난번 KRT 발표 이후로 얼마 만인지 모르겠네요.”

    재환을 찾아온 인물은 아성그룹 정목균 회장의 장녀 정성희 실장이었다.

    “네, 저도 오랜만에 뵙니다. 정 이사님.”

    VVIP실에 따로 라운지를 차려서 정성희를 안내한 재환은 그녀에게 물었다.

    “음료는 어떤 것으로 하시겠습니까?”

    “그냥 커피로 주세요.”

    재환은 커피 한 잔과 홍차를 시킨 뒤에 이야기를 시작했다.

    “최근 언론에서 아성그룹에 대한 이야기는 많이 들으셨죠?”

    “네, 대략적으로는요.”

    아성그룹이 반으로 쪼개질 수 있는 초유의 사태에서 정성희는 아버지를 대신해 재환을 찾아와 말했다.

    “현재 혜성이 KRT를 포함해서 아성전자와 아성자동차에 대한 지분을 어느 정도 보유한 상태라고 알고 있습니다.”

    “말 그대로 어느 정도에요. 이 정도는 슈퍼 개미들에게 말하기도 부끄러울 정도에요.”

    재환이 말한 대로 이 정도는 혜성 말고 다른 재벌 그룹들도 상호 지분을 가지면서 웬만큼 가질 수 있는 양이었다.

    혜성가가 보유한 아성그룹의 주식은 외국 자본이나, 특정 기업에 대한 적대적 인수합병을 막기 위한 ‘백기사 지분’에 불과한 수준이었고, 그다지 큰 도움은 안 될 것이었다.

    “신재환 대표 개인도 상당수 소유하셨다고 알고 있습니다. 혜성가 외에 단독으로요.”

    “아, 그거는··· 훗날 정 회장님과 약속한 것이 있어서요.”

    “그 약속이 바로 지금이 아닙니까?”

    진중한 눈으로 재환에게 요청하는 정성희 이사를 보고서 재환은 차를 한 모금 마시면서 말했다.

    “이 일에 대해서 혜성그룹도, 저도 주주총회에 참가할 생각은 없습니다.”

    “신 대표님!”

    정성희 이사는 자신의 남동생뻘인 재환에게 다시금 말했다.

    “아버지, 아니 회장님과 미래 산업을 위해 약속하셨다고 들었어요. 그러니 지금 저희 쪽을 도와주시면···.”

    그때 재환이 손을 들어 올렸다.

    “한가지 정 이사님에게 여쭤보고 싶은 게 있습니다.”

    “뭐죠?”

    “지금 이 일을 정목균 회장님께서는 알고 계십니까?”

    “!”

    재환은 무거운 얼굴로 정 이사의 답을 기다렸고, 그녀는 잠시 생각하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회장님은 지금 다른 주주들에게 연락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신 대표님에게는···.”

    “더 확실히 말할 수 있겠군요. 이번 일에 저희 혜성가는 중립을 고수하겠습니다.”

    “···.”

    정 이사가 말을 잇지 못하자 재환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이사님. 정 회장님은 확실한 비전이 있으신 분입니다. 아버님이니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대답하지 못하는 정 이사를 향해 재환은 이 상황에 대해 말했다.

    “분명 잘 될 겁니다. 굳이 저희의 도움이 없어도 이길 수 있다는 확신을 하시고 그러신 것일 겁니다. 저도 정 회장님의 의사를 알고서 중립을 지키겠다고 한 겁니다.”

    “···무슨 말인지 잘 알겠어요.”

    정성희 이사는 마지못해 이 자리에서 물러나기로 했다.

    재계서열 1위 아성그룹의 장손녀가 와서 요청한 일을 재환이 딱 잘라서 거절한 일이었다.

    정성희로서도 상당히 기분 상할 일이었지만, 재환은 그 이야기를 끝냈다.

    “한 가지 확실하게 말할 수 있습니다. 저는 정목균 회장님의 제안뿐만 아니라, 정목헌 회장님의 제안 역시도 똑같이 사양할 것입니다.”

    “···좋습니다. 그렇다면 믿겠습니다.”

    “네, 이사님. 저는 아성가와 신의를 지킬 것입니다.”

    재환은 마지막 가는 길까지 정 이사를 배웅한 뒤에 그녀가 떠났을 때 길게 한숨을 쉬었다.

    “휘유- 얼마나 치열하게 싸우려고 주변에 이리 연락이 오는 거지?”

    재환은 설마 정목헌 회장에게도 연락이 올까 싶어서 일하면서도 전화기를 틈틈이 눈여겨보고 있었다.

    그때 퇴근 전에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다.

    “올 게 왔구만.”

    재환은 휴대폰을 들고서 번호를 확인했다.

    그런데 전혀 뜻밖에 인물의 연락이 오고 있었다.

    회장은 회장이었다.

    다만 아성그룹이 아니라 삼신그룹의 회장이었다.

    “네, 회장님.”

    [아, 신 대표. 오랜만이오. 요새 많이 바쁜 것 같더군.]

    이건호 회장의 목소리에 재환은 웃으면서 받았다.

    “네, 이현규 전무하고 전자 협력 문제로 이야기 많이 하고 있습니다.”

    [내가 부른 건 다름 아니라 자동차 때문이오. 그래서 말인데 내일모레 부산으로 출장 좀 와주시오.]

    “내일모레 말입니까?”

    [그렇소, 아침에 차 보낼 테니 부산으로 오시오.]

    재환은 캘린더를 보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그때 뵙겠습니다.”

    재환은 부산 출장을 준비하면서 만년필을 꺼내 표시를 했다.

    “이 회장님이 자동차 사업 문제로 나를 부산으로 부른 다라···.”

    삼신이 IMF 외환위기에도 자동차 사업을 유지하게 되자 상황이 재미있게 돌아가고 있는 것 같았다.

    퇴근 시간에 재환은 아버지가 밖에서 밥을 먹자는 말에 회현동으로 향했다.

    일전에 재환이 새 삶을 살게 됐을 때, 희경이 불렀던 바로 그 중국집이었다.

    “오랜만에 오네요.”

    “나는 매주 한 번씩은 먹는다.”

    ‘혜성그룹 회장님이 인정한 맛집’이라고 해도 될 것 같은 남경반점의 코스는 호텔에서 먹는 고급 중국요리와는 다른 매력이 있었다.

    “그래서 밖에 나가서 하실 이야기가 뭐에요?”

    “너 오늘 아성가 사람 만났다며?”

    재환은 희경이 알고 있다는 말에 대답했다.

    “정성희 이사가 왔다 갔어요. 정목균 회장 따님이죠.”

    “나는 정목헌이가 다녀갔다.”

    “!”

    재환은 그 말을 듣고서 잠시 흠칫했다가 눈이 서서히 가늘어졌다.

    “조건을 하나 걸었더구나. 현재 컴퓨터 사업인 아성 멀티캡을 우리에게 넘기고, 차량용 네비게이션에 대한 기술 제휴를 해 주겠다고.”

    “제법 센 제안이군요.”

    그만큼 정목헌 회장 쪽이 밀린다는 말이기도 했다.

    그리고 재환은 지난번 말했던 대로 ‘어디에도 낄 생각 없이 중립을 고수하겠다.’라는 말을 다시금 아버지에게 상기시켰다.

    “저는 그때 중립을 고수했는데, 혹시··· 아버지가 승낙하신 건 아니죠?”

    “정~말 혹했지만, 네 말 듣고 정중하게 거절했다.”

    “잘하셨어요.”

    재환은 희경에게 백주 한 잔을 따라드리고는 잔을 쭉 나눴다.

    “지금 혜성이 아성뿐만 아니라 삼신, KS와도 좋은 모습을 가졌는데, 그런 데 개입했다가는 그동안 관계가 싸그리 사라집니다.”

    “알아. 그래서 좋게 보내드렸어.”

    재환은 아성그룹의 경영권 분쟁을 보고서 생각이 복잡했다.

    그리고 어쩌면 이건호 회장이 부른 게 자리를 피하기에 안성맞춤이라 생각했다.

    “모레 부산 출장이 있어요. 삼신 회장의 요청입니다.”

    “아, 자동차 사업. 거기 배당금 짭짤하게 들어오더라.”

    8천억원을 투자해서 삼신전자와 삼신자동차에 대한 지분을 소유한 혜성그룹은 판매량이 올라갈수록 상당한 수익을 받고 있었다.

    그로 인해 재환의 자동차 사업 투자는 신의 한 수로 여겨졌다.

    “일전에 제안도 있었어요. 승용차 사업도 같이할 생각있냐고요.”

    “이 녀석아, 너 혜성의 직함도 많은데 그걸 어떻게 해?”

    혜성그룹 소속의 재환이 삼신가 일까지 한다니 희경이 고개를 저었다.

    “원래는 이 회장님이 삼신전자 등기임원 자리를 주고 싶다고 하셨지만, 그건 동종업계 겸직 불가로 법적으로 안 되죠. 하지만 자동차는 뭐, 어차피 때되면 저희도 지분 챙겨 독립하잖아요?”

    “흐으음.”

    “뭐, 그런 이야기가 있었다고요. 이 회장님도 그걸 아니까 정식 제안은 안 하신 거겠죠.”

    어차피 자동차는 트럭과 버스, 그리고 경차 사업부는 혜성의 소유로 언젠가는 분리될 것이니 지금부터 노하우를 아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근데 그거 견딜 수 있겠어?”

    “그래서 타협을 봐야겠죠.”

    지금 맡은 사업도 상당한데, 거기에서 추가로 삼신의 일까지 맡는다면 재환의 몸이 남아나지 못할 것 같았다.

    “자세한 건 부산 내려가 봐야 알 것 같아요.”

    대구에서 트럭, 버스를 맡기로 하고, 부산에서 세단의 승용차를 맡기로 했는데 그 경계도 어쩌면 사라질 것 같은 일이었다.

    어쨌건 이야기는 다 끝났고, 재환은 아버지와 술을 같이 하면서 코스 요리를 즐겼다.

    ***

    이틀 뒤 양재동 자택 앞으로 도착한 삼신그룹의 차량이 있었다.

    재환은 짐을 챙기고 나왔을 때, 차에 있던 직원들은 곧바로 나와 인사했다.

    “인사드리겠습니다. 삼신 미래전략실의 김욱이라고 합니다.”

    “삼신자동차 부산공장까지 안내할 황윤철이라고 합니다.”

    “아, 네. 반가워요.”

    두 직원은 곧바로 재환이 가진 짐을 받아 트렁크에 담고는 문을 열어 안내했다.

    “안전하게 모시겠습니다.”

    재환이 차에 타고 조수석과 운전석에 탄 두 직원이 출발했다.

    ‘일반 수행기사가 아니라 미전실 직원들이 날 모시러 왔어?’

    삼신 내에서 가장 엘리트들이 모인 집단이 재환을 부산까지 안내했다.

    부산으로 가는 동안 재환은 차 안에 네비게이션을 움직이는 모습을 지켜봤다.

    터치스크린이 아닌 다이얼을 돌려서 위치를 직접 찾는 구형 방식인 게 재환의 눈에 들어왔다.

    ‘저게 빨리 개발돼야 하는데, 풀 터치스크린이 참 연구가 힘들단 말이야.’

    앞으로 5, 6년 뒤에 활성화될 사업을 어떻게든 앞당겨서 연구하려고 하니 우여곡절이 많았다.

    재환은 중간마다 휴게실도 들리고 여유를 가지면서 부산으로 도착했다.

    부산 강서구에 있는 삼신자동차 공장에 도착했을 때, 그 안에는 이미 이건호 회장이 반갑게 맞이했다.

    “어서오시오. 신 대표.”

    “예, 오랜만에 뵙습니다. 회장님.”

    이건호는 평소와 다르게 미소를 지으면서 재환에게 다가가 두 팔을 잡았다.

    “요새 삼신전자의 브라운관과 D램은 전부 혜성이 쓸어간다는 말이 있더군.”

    “하하하, 좋은 제품을 쓰기 위해서는 역시 삼신제가 제일이죠.”

    “삼신전자는 현규하고 신대표가 잘 해줄 것 같소. 나는 이제 자동차 사업에 매진해야지.”

    “!”

    현규에게 삼신전자 맡긴다는 건 알았지만, 거기에 왜 자신도 ‘잘 해달라.’라는 말은 왜 했는지 모르겠다.

    ‘지금 얘기 현규가 들으면 엄청 서운해 하겠구만.’

    어쨌든 이건호 회장과 같이 삼신자동차 부산공장을 돌아보게 됐다.

    삼신의 주력 세단인 SSM-5가 한참 조립되고 있을 때, 완성품 차량을 본 이건호가 이런저런 부품에 대해 공장장에게 물었다.

    그리고는 재환에게도 넌지시 한마디 했다.

    “신 대표. 저번에 집에 차 보내줬던거 어떻소?”

    “어머니가 타고 계신 데 아주 만족하십니다. 정말 편하다고 하십니다. 또 클래식 음악 좋아하시는데 뒷좌석 A/V시스템도 아주 만족해 하십니다.”

    “하긴, 우리 마누라도 그 이야기는 하더군.”

    이건호 회장은 자신의 부인 홍 여사와 같은 반응을 보인 평가에 피식 웃었다.

    그리고 재환을 안내한 곳은 현재 연구 중인 준중형차 모델인 SSM-3였다.

    “중형세단에 이은 준중형 세단이군요.”

    “니혼자동차의 준중형 모델인 ‘블루버드’를 국내에 맞게 손보고 있소. 아마도 내후년쯤 나올 것 같소.”

    ‘그래, 블루버드··· 대신 지금은 삼신자동차가 재설계를 하고 있지.’

    재환은 그 모델에 대해 유심히 살펴봤다.

    뭐 역사대로 SSM-5 이후로 SSM-3가 나오는 것은 똑같았지만, 지금은 르노어-니혼 얼라이언스가 아닌 삼신자동차가 직접 연구하는 모델이었다.

    “네, 잘 봤습니다. 시판된다면 아성자동차의 AVT와 경쟁상대가 되겠군요.”

    재환은 자동차 스펙을 보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공장을 둘러본 뒤로 사장실에는 이건호 회장과 재환이 차를 마시며 이야기했다.

    “신 대표를 이곳에 부른 건 신차 개발도 있지만, 내가 한 가지 논의할 게 있소.”

    “회장님께서 저와 논의를요?”

    “그렇소. 신 대표도 지분을 가진 공동창업자이니 충분히 회의를 해봐야겠지.”

    이건호는 차를 쭉 마시면서 이야기를 했다.

    “지금 삼신자동차는 5년 동안의 기술 제휴로 니혼자동차의 차체와 엔진을 쓰고 있소. 그건 알고 있겠지?”

    “예, 알고 있습니다.”

    “현재 신 대표가 맡을 트럭과 버스, 그리고 추후 경차까지 맡으려면 니혼모터스와의 제휴가 언제까지 이어질지 모르겠소.”

    아성에 이어 삼신자동차도 자체 엔진을 개발준비를 시작했고, 이건호 회장이 현역이니 의욕적으로 밀어붙이면 분명 성과는 있을 것 같다.

    문제는 5년의 제휴기간 동안 니혼 모터스는 핵심기술 이전에 대해서는 최대한 시간을 끌며 피할 것이다.

    “내가 이번에 계약이 끝나면 엔진 제휴를 유럽 회사로 바꿀까 하는데 어떻게 생각하오?”

    “!”

    부산 출장으로 오라고 했을 때 핵심은 바로 이것인 것 같았다.

    삼신자동차의 엔진 개발 문제로 기존의 일본제로 이어가냐, 아니면 유럽제로 바꾸냐는 이야기에서 재환은 조심스럽게 물었다.

    “회장님. 엔진을 유럽제로 생각하신다면 어느 회사를 원하시는 겁니까?”

    “프랑스와 독일의 업체들.”

    둘 다 승용차 엔진으로는 상당한 노하우를 가지고 있었지만, 재환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사실 제휴 기간이 끝나면 트럭과 버스에 대한 엔진은 저도 유럽제로 생각했습니다.”

    “그렇군, 그럼 승용차는 어떻게 보시오?”

    “회장님의 의지가 그러시다면, 그러면 르노어로 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

    재환은 이건호 회장에게 자신에 대한 견해를 말했다.

    “현재 르노어-니혼 모터스라는 합작회사지만 지분 50:50에 서로의 엔진과 자동차는 따로 만들고 있지 않습니까?”

    “흐음~ 앞으로 니혼이 아닌 르노어의 편을 들어주자?”

    “그렇습니다. 어차피 통합한 두 회사에서 반대쪽으로 가는 것이지만, 내부에서는 수많은 사내정치가 있을테고, 그 속에서 니혼이 5년 제휴 이후 비협조적으로 나온다면 아예 르노어쪽 담당자들과 이야기를 하는 겁니다.”

    팽팽한 사이에서 삼신이 손 들어준 쪽에 무게추가 쏠릴 수 있는 결정이었다.

    게다가 삼신자동차가 르노어로 간다면 니혼 쪽에서도 놀라 재협상을 요구하며 좀 더 많은 걸 제안할 수 있을 것이다.

    재환의 이야기를 들은 이건호는 일리가 있다고 생각하며 한 번 검토해 보기로 했다.

    “좋소, 이건 내 다른 임원들하고 회의해서 고려해 봐야겠군. 그리고 신 대표에게 또 하나 부탁할게있소.”

    “무슨 부탁입니까?”

    “내가 신 대표를 삼신자동차 등기임원에 추천하고 싶소. 어차피 혜성이 자동차 사업을 할 것이니 같은 회사일 때 경영에 참여해주시오.”

    “···네?”

    “임원 하시오.”

    재환은 뜻밖에 삼신자동차 이사의 제안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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