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계약논의.
재환의 말에 정 회장이 응했다.
“자~ 그럼 어디서부터 말해야 하나?”
정목균 회장은 자신과 사업 이야기를 하자는 이 당돌한 친구를 두고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나는 여기 아성정공부터 건설, 자동차, 철강 이쪽에서만 일하던 사람이야. 이쪽도 결국은 내 소관일세.”
공동회장 체제에서 전자, 해운, 무역 쪽의 정목헌과 건설, 자동차, 철강의 정목균의 차이.
“일단 우리는 바퀴 달린 건 다 해볼걸세. 자동차말고도 군용 전차, 장갑차, 자주포부터 기차, 지하철까지 모두 아성이 맡고 있지.”
“네, 저희도 압니다. 현재 혜성중공업의 주력사업은 열차사업 하나. 그것이 전부죠.”
“그러니까 말이지. 내가 무슨 메리트를 느끼고 혜성과 손을 잡아야 할지 한번 말해보라고.”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뭐든 들어보겠다는 정 회장의 반응에 재환은 오늘 혜성중공업에서 본 내용들을 빠르게 머릿속에서 꺼냈다.
“현재 혜성중공업은 신형 여객차를 대만과 합작하여 준비한 상태입니다. 무궁화호 특실 신형사업에 입찰할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지방광역시의 도시철도 사업에도 참여할 수 있습니다.”
“음~ 우리도 참여하고 있네.”
고기를 먹으면서 그 정도는 우리도 기술력이 있으니 만들어서 얼마든지 만들 수 있다고 시큰둥하게 넘어갔다.
재환은 그렇다면 다른 이야기를 해 봤다.
“그럼 자사에서 만드신 기차 타보셨습니까?”
“···으음?”
“제가 여기까지 오면서 기차로 이용해 봤습니다. 아성에서 만든 차량과 혜성의 차량, 그리고 대윤의 차량까지 한 번 분석해봤습니다.”
“아성중공업 철도차량사업부··· 78년에 도입한 차량이었지.”
“네, 거기에 대해서 직접 비교를 해봤습니다만, 필름 현상을 못 해서 못 보이는 게 아쉽군요.”
“내가 그때 창원공장 맡았었어.”
정 회장에게는 엊그제 같은 일이어서 추억이 있었다.
“그래서 자네는 내가 사장했던 우리 기차가 잘못됐다고 계속 말하는건가?”
“단점은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야 이쪽의 장점도 말할 수 있고, 같이 손을 잡아 시너지 효과를 누릴 수 있지 않겠습니까?”
“···일리가 있군. 계속 말해보게.”
그 와중에 다시 소주가 담긴 컵을 기울이는 정 회장을 보고서 재환은 황당했다.
‘저 상태에서 계속 사업 이야기를 하겠다는 건가? 벌써 한 병 넘게 마신 것 같은데?’
아무리 철인이라도 맨정신은 아닐 텐데 말이다.
재환은 ‘차라리 취하게 해서 계약이라도 받아낼까?’ 생각했다가 그런 얄팍한 수에 넘어갈 아성가 사람이 아니라 생각하고 술잔을 들며 말했다.
“아성정공 객차에서 가장 큰 문제가 뭐인지 아십니까?”
“좌석이 좁다, 그리고 고정식이라 불편하다.”
“그거보다 더 심한게 하나 있죠.”
“말해보게.”
“전기 타는 냄새.”
“!?”
정 회장은 처음 듣는 말에 계속 귀를 기울였다.
“다른 객차들과 달리 아성의 객차는 발전차에서 전기를 공급받을 때, 상부에서 플라스틱 냄새가 솔솔 나더군요. 아마 그걸로 몇 번이나 클레임이 들어왔을 텐데 철도청이 조용히 넘어간 거 같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야? 그런 결함이 있다는 건 아직 아성정공 내에서 들은 적이 없는데?”
“있습니다. 직접 타본 제가 확인한 겁니다.”
“겨우 한 번 타본 거로 그걸 안다고? 허어, 자네 코가 아주 좋은가 보네?”
“저는 여객용으로 한 번 타봐서 불쾌한 느낌으로 끝났지만, 철도청 직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알 수 있지 않을까요?”
“으음.”
“그리고 혜성의 객차는 테스트 결과 그런 일이 전혀 없는 쾌적한 환경을 누리게 될 겁니다.”
재환은 그 말을 마치고는 자신의 탁자 위에 놓인 글라스 소주를 쭉 들이켰다.
“이상입니다. 회장님이 말해주신 대로 이 이상은 저도 술을 좀 마시고싶군요.”
“뭐라?”
재환은 여기서 한 번 더 던져보기로 했다.
“저는 여기 며칠간 묵을 계획입니다. 그러니 앞으로도 계속 뵐 것 같은데 오늘은 제가 회장님께 술 한 잔 올리는 자리로 하겠습니다.”
“···하하하하하!”
정 회장은 호탕하게 웃으면서 빈 술잔을 들었다.
“그래, 말 잘했어. 내일 한 번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하지. 한 잔 따라보겠나?”
재환은 빙긋 웃으면서 소주잔을 채워드렸다.
그렇게 둘이서 한우 생고기를 구우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읏차, 나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오겠네.”
“네, 회장님.”
얼굴이 벌개진 정 회장이 일어나서 밖으로 나갈 때, 재환은 조용히 기다렸다.
‘확인해보라는 전화 하시는거겠지.’
재환의 예상대로 정 회장은 나가면서 화장실을 찾다가 안에 있는 아성그룹 비서실 직원들에게 말했다.
“아까 저 신재환이라는 친구가 말한 거 확인해봐. 정말 그런 결함이 있었는지.”
“예, 회장님.”
정 회장은 그러면서 안에 있는 재환을 보며 피식 웃었다.
“그 녀석 야무지네? 나한테 꿀려 하는 것도 없고.”
남자답게 술 한잔 대작하면서 진솔한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는 정 회장에게 있어서 꽤 괜찮은 녀석으로 인정받은 재환이었다.
다시 돌아온 정 회장은 재환과 새벽까지 술을 마신 뒤에 자리를 파했다.
***
다음날 재환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일어났다.
“크으으, 영감님 술 한 번 정말 세시네.”
젊은 몸으로 술은 문제없다고 자부했지만, 정 회장은 상상 이상으로 퍼부었다.
아침 7시 10분에 겨우 일어난 재환은 호텔 룸서비스로 해장 음식을 주문한 다음 찬물로 샤워를 하고 나왔다.
***
재환이 혜성중공업에 출근한 뒤로 30분이 지나서 갑작스럽게 손님이 찾아왔다.
“여, 몸은 좀 괜찮나?”
“앗, 회장님.”
성 대표와 재환은 아침 일찍 찾아온 정몽균 회장을 맞이했다.
어쨌건 빅딜 사업을 위해 찾아온 손님이니 이야기를 해야됐다.
“커피랑 녹차중 어떤 거로 준비드릴까요?”
“커피.”
곧바로 커피가 나왔고, 정 회장은 후후 불며 커피를 마시면서 본론을 꺼냈다.
“자네 말이 맞았어. 철도청에 연락해보니 아성이 만든 객차의 노후화로 그것 때문에 몇 번이나 내부에서 이야기가 있었더구만.”
“!”
“내가 알았으면 곧바로 수습했을텐데, 철도청 내에서 자체적으로 땜질을 해서 올라갔다고 하더구만.”
재환은 자신이 하루 동안 기차 안에서 있었던 일이 정말로 먹혔다는 것에 대해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럴 것 같더라니···.’
“기존의 객차에 대해서 유지보수를 명했지. 그래서 말인데 혜성이 말한다는 그 혜성특실 객차를 좀 보고 싶은데 말이야.”
“아, 그건 안됩니다. 그 객차는 우리 중공업의 기술로 만든 제품입니다.”
“그렇지. 그냥 보여달라고 하면 내가 양심없는 놈이지.”
정 회장은 품 안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놨다.
“이게 뭡니까?”
“읽어 봐.”
재환은 그 봉투를 뜯어서 종이를 펼쳐봤고, 천천히 읽어나가던 재환의 눈이 점점 커졌다.
“상무님?”
“성 대표님도 한 번 읽어보시겠어요?”
재환이 그 서류를 내밀자 성 대표도 경악해서 바라봤다.
“왜 그래? 계약서 처음 봐?”
정 회장이 대뜸 찾아와서 공동경영 계약서를 내밀었다.
향후 아성정공과 혜성중공업이 합병한 뒤 경영권을 나눈다는 것이었다.
물론 거기에 따른 타 중공업의 철도차량사업부를 아성의 이름으로 인수하겠지만, 혜성은 독립경영권을 따로 가진다.
“이걸 바로 결정하신겁니까?”
“사실 어제도 생각은 했어. 자네가 어떤지 한 번 떠보려고 했던거고.”
‘그런 건 아니고, 어제는 그냥 놀자판으로 드신 것 같았는데···.’
어쨌건 삼신에 이어 아성과도 공동의 경영할 소재가 생겼다는 것은 아주 좋은 일이었다.
여기 와서 본 결과 그냥 팔기에는 아까운 감이 많았었는데, 아성의 자본에 혜성의 기술로 합작을 한다면 그럴듯한 회사가 나올 수 있었다.
‘공기업화 될 철도청, 지역 광역단체 지하철··· 거기에 고속철도 때 수출시장까지···.’
“그래서 예스인가 노인가?”
정 회장이 빙긋 웃으면서 물어보자 재환은 짧게 대답했다.
“저는 예스지만, 혜성중공업의 임직원 투표와 본사에 연락은 해야 될 것 같습니다.”
“자네가 전권 가진 것 아니었어?”
“계약 전 통보와 계약 후 통보는 다른 법이거든요.”
“하하하하!”
정 회장은 크게 웃으면서 커피를 마신뒤 말했다.
“이 친구 사업 이야기를 하면서 어디 하나 휘둘리는게 없네.”
정 회장은 데려온 임원들에게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자 그들의 사업계획서를 혜성중공업 성 대표에게 보내줬고 그것을 검토해줄 것을 요구했다.
“나가서 차 한 잔 더 할텐가?”
“좋습니다.”
재환이 자리에서 일어나 나갈 준비를 하면서 성 대표에게 말했다.
“협상은 제가 더 이끌어가볼게요. 이 건에 대해서 회의를 한 번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상무님.”
재환은 정 회장과 같이 밖으로 나갔다.
***
창원의 한 호텔의 커피숍을 잡은 둘은 이제 본격적인 이야기를 했다.
“내가 왜 자네에게 먼저 손을 내민지 알겠나?”
정몽균 회장의 말에 재환은 뺨을 긁적이며 대답했다.
“대충은··· 알 것 같습니다만, 함부로 제가 말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군요.”
“상관없어.”
쿨하게 말하는 정 회장을 보고 재환은 조용히 말했다.
“지난번 집으로 정목헌 부회장이 오셨죠. 아버지를 경제련 회장으로 돕겠다고 말입니다.”
“맞네.”
장남 정목균과 5남 정목헌의 공동대표 체제.
그것은 다음 해 엄청난 파국을 몰고 왔고 소위 ‘왕자의 난’이라 불린 형제간의 경영권 분쟁으로 인해 아성그룹은 둘로 나뉘게 된다.
그리고 정목헌 회장이 희경을 경제련 회장으로 밀어줬는데, 정목균 회장은 그 뒤로 혜성과 따로 협상하여 판을 바꾸려는 것 같았다.
“증권사도 없는 친구들이 우리 아성쪽 지분을 꽤 가지고 있더만?”
사실이었다.
재환뿐만 아니라 희경이나 다른 혜성가 사람들은 훗날 겹치는 사업을 위해서 삼신과 아성, 경선등의 지분을 재환의 추천으로 조금씩 사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회장님, 혹시 혜성을 백기사로 원하신다면 저흰 그 정도의 지분은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개인투자 수준이거든요.”
“물론 백기사 하나로 제휴하자는게 아니지. 난 그것을 넘어 미리 동맹을 맺자는 이야기야.”
동맹이란 말에 재환은 그 의도를 바로 파악했다.
‘···독립을 벌써 생각하시는건가?’
그걸 입 밖에 드러내면 불같이 화를 낼 것 같으니 조용히 미소만 지었다.
“공동대표 체제 끝나면 내가 올라갈 거니까.”
힘들 것이다.
장남이라고는 해도, 반도체 등의 전자, 무역, 상선등의 핵심계열사가 모두 5남 정목헌의 지분이 우세하고, 가장 핵심이 될 아성건설은 왕회장 정형주 명예회장이 꽉 잡고 있기 때문이었다.
“일단 그것을 위해선 이번에 대윤부터 잡을 거야.”
그것을 두고 재환은 어젯밤 술에 취한 상태로도 기전실에 연락해 알아온 정보를 말했다.
“네, 대윤이 자신쪽으로 빅딜을 만드려고 다른 중공업에 손 뻗친다는 이야기 말입니까?”
“그래서 저놈들 깨부술 동맹을 만들어보자고.”
“그런 큰 그림이라면 제가 찬성하겠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일도 협상할 것이고···.”
재환은 이 자리에서는 한 번 크게 인사를 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먼저 감사하다는 말을 하겠습니다. 그 동맹에 혜성을 선택해주셨으니 제대로 보여드리겠습니다.”
감사 표현은 돈이 아닌 진심을 보이는 것 만으로도 충분했다.
정 회장은 그 모습에 크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핫, 내가 아들이 하나 있는데 자네보다 한 살 어리거든? 같이 잘 지내보게나. 내년부터는 그 녀석도 경영을 시킬거니 말이야.”
마지막까지 호탕하게 웃어주는 정 회장과 이야기를 마친 재환은 밖으로 나가 바로 상황 계산을 했다.
‘이것으로 아성그룹의 분열은 피할수 없겠군, 당연히 우리는 아성자동차그룹의 정목균 회장님쪽에 서는 것이고.’
중공업 하나로 아성자동차와 동맹을 맺는다면 완전 남는 장사였다.
물론 그것 하나로 끝날 일은 아니고, 추후 네비게이션 사업과 카오디오 사업에서 삼신자동차와 더불어 아성자동차 역시도 납품할 수만 있다면 저쪽도 원가를 절감하고 이쪽도 장사가 될 테니 땡큐였다.
재환은 그것을 두고서 분주하게 준비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이번 정부의 빅딜 사업중 철도차량 중공업 인수합병에 대해 뉴스가 나왔다.
[다음 소식입니다. 정부에서 빅딜 사업을 주최한 가운데 대윤그룹과 대한그룹이 손을 잡고 공동전선으로 아성정공과 혜성중공업, 천리마 중공업에 대한 인수합병을 논하고 있다는 소식입니다.]
결국, 대윤이 먼저 선빵을 치게되고, 그 속에서 아성과 혜성이 막아서게 되는 상황이 되었다.
“상황 재밌네? 기어이 배가 터지려고 이 사업까지 모두 쳐드시겠다라.”
재환은 이번 기회에 끝을 모르고 배를 불리는 대윤그룹을 상대로 한 번 뒤집어 버릴 준비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