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솔직히 좀 쫄리시죠?
경제련 회의가 끝난 뒤로 돌아갈 준비를 할 때 희경과 재환을 부르는 목소리가 있었다.
“회장님!”
“?”
밝게 웃으면서 오는 이는 경선그룹의 최대현이었다.
“아, 최 사장님.”
“말씀 편하게 하세요. 제가 한참 아래 연배입니다.”
대현은 38세의 나이에 차기 회장 자리를 앞둔 몸이었지만, 싹싹한 모습으로 다가와 말했다.
“혹시 지금 아드님 시간 되십니까?”
“재환이랑? 뭐, 못다 한 이야기라도 있나?”
희경이 아니라 재환만 딱 집어서 말하는 최대현의 요청이었다.
“그래도 친구라고 생각해서 회포 좀 풀려고 합니다. 부탁드립니다. 회장님.”
이렇게 정중하게 말하자 희경은 자신이 피해 주는 게 더 많은 이야기가 나올 것 같아 물러나기로 했다.
“회장님 어떻게 안 되겠습니까?”
최대현이 다시 한번 정중하게 말하자 희경은 피식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 경제련의 젊은 친구들 모인다는데 늙은이는 빠져야지. 재환아, 잘 다녀와라.”
“아, 네.”
평소 회포 풀 사이 정도는 아니라 생각했는데, 저렇게 정중하게 나오자 응하기로 했다.
“네, 그러면 잠깐 다녀올게요.”
재환은 먼저 자신에게 접근해 이야기 좀 하자는 말에 흔쾌히 승낙했다.
“최 사장님. 그러면 회담은 경선호텔에서 하는 겁니까?”
“아이고, 당연하죠. VIP석 마련해뒀는데.”
여기서 20분이면 충분히 갈 수 있는 거리니 재환은 승낙했다.
그렇게 재환과 희경은 대현의 안내를 받고 경제련 지하에 주차된 자신의 차를 불렀다.
그때 아들이 와서 같이 차에 타고 있던 이건호 회장이 그들을 봤다.
혜성그룹이 경선그룹 최대현과 이야기하면서 한 차로 같이 가려는 모습을 말이다.
이건호는 조용히 보다가 옆에 있는 아들 현규에게 말했다.
“최 사장하고, 신 상무가 따로 움직이는 거 같은데, 너도 가서 뭐 좀 들어야 하는 것 아니냐?”
현규는 그 말을 듣고 휴대폰을 들었다.
하지만 타이밍에 맞춰 바로 문자가 왔다.
현규는 그것을 확인하고서 길게 숨을 쉬고 아버지에게 말했다.
“회장님. 자택에 모셔다드리고 경선호텔로 오라고 메시지가 왔네요.”
“···.”
이건호는 그 말을 듣고서 생각하다가 피식 웃었다.
“그래, 가서 젊은 놈들끼리 재밌게 이야기하고 와라.”
이건호 역시 눈치를 채고 현규를 보내줬다.
***
차로 20분 정도 달려서 도착한 경선호텔은 이미 준비가 되어 있는지 VVIP 전담 호텔리어들이 나와 정중하게 재환 일행에게 인사했다.
“준비하던 거 바로 꺼내주고요.”
“알겠습니다. 사장님.”
대현은 재환을 데리고 호텔 최상층의 VVIP 회의실로 향했다.
과거 아버지 최성종 회장 때부터 있었던 호텔 내 그룹 회의실로 재환을 초대한 것이다.
하지만 최대현 체제에서 바뀐 것인지 회의실 안에 와인 보관함이 있었다.
‘회의실에 와인? 한 잔 하면서 이야기 하자는 건가?’
“어디 보자 뭐가 좋을까?”
느긋하게 한잔하면서 이야기하려는 건지 와인을 고르는 최대현을 보고 재환이 조용히 물었다.
“한 명 더 올 때까지 기다릴까요?”
“아, 이현규 전무도 온다고 했던가? 그래요. 좀 기다리죠.”
30분 뒤 현규까지 왔을 때, 대현은 준비했던 셰프들의 음식으로 보쌈과 경선표 김치를 가져와 테이블에 올렸다.
“와인에··· 김치요?”
현규가 처음 보는 조합에 어리둥절하자 대현은 구대륙산 와인 한 병을 들고 권했다.
“먹어보세요. 정말로 색다른 조합일걸요?”
겉보기엔 좀 괴상하긴 했지만, 의외로 궁합이 잘 맞았고, 와인 한 잔을 둔 다음 이제 본론으로 들어갔다.
“자~ 천천히 한번 말해보죠. 내가 경제련에서 못다 한 이야기가 있어서 좀 불렀어요.”
대현이 무슨 이야기를 할지 재환은 귀를 기울였다.
“경제련에서 신재환 상무 이야기 잘 들었어요. 공감도 많이 갔고, 현재 상황도 알겠고요.”
“네, 경선도 저희를 도와주셔서 감사해요.”
“우리가 왜 도와주는 줄 알아요? 자리는 비웠어도 우리 아버지가 경제련 회장이니까, 그리고··· 아씨 그냥 말할까?”
별안간 욕을 하던 대현은 한숨을 길게 쉬며 재환과 현규에게 말했다.
“내가 지금부터 두 분한테 말을 놔도 됩니까?”
저렇게 정중하게 말하니 재환은 받아들였다.
“네, 그러세요. 대현 형님.”
“그러시죠. 저희보다 선배이신데.”
재환과 현규의 말에 대현은 안도의 숨을 길게 쉬고 말했다.
“후, 좋아. 그럼 말할게. 솔직히 하나야. 경제련 내에서 정부 끄나풀 있다고 생각해서 얘기 좀 해 보련다.”
재환은 그 말을 듣고 최대현이 직감적으로 말한 거면 정말 대단하다고 칭찬하고 싶었다.
“끄나풀··· 이라고까진 뭐하고, 정부에 멱살은 잡혀 있는 것 같긴 하더군요.”
“오~ 재환 씨는 역시 이 상황에 중심이니 잘 아는구나?”
재환은 아까 있던 경제련 회의의 회장단중 일부를 보고 말했다.
“작년부터 지금까지 15대 기업중에서 몇 개 쓰러졌죠? 살기 위해서 사내현금 끌어올리거나 은행대출을 잔뜩 끌어모아 급한 불을 끄는 회사들이 많습니다.”
대현은 그것을 말하면서 분명 경제련 내에서도 목줄이 채워진 재벌이 있을거라 유추했다.
그리고 그 말에 재환이 거들었다.
“맞아요. 정부가 짱구도 아니고 세무조사를 홧김에 하는 경우가 어딨겠어요. 다만··· 다같이 세무조사 받는건 독약 아닙니까?”
“그러니까! 내가 다른 건 다 통박 굴려서 알아봐도, 이건 희한하단 말이야. 정권에 와이로 바쳐도 해결 안될거같은데.”
‘와이로’니 ‘통박’이니 재벌가치곤 상당히 저렴한 언변을 쓰는데, 오히려 이게 대현의 진짜 성격인 것 같았다.
“어떻게들 생각해?”
대현이 와인 한잔을 홀짝이자 재환은 거기에 대해 답을 했다.
“차라리 일을 크게 만드려고 한 걸겁니다. 자신들을 포함해서 모두 받아야 단체로 일어날테니까요.”
“그런다고 뭐가 달라지는데? 지들도 세무조사 받으면 죽는데?”
“모두가 일정하게 세무조사를 빡세게 받진 않겠죠. 어느 쪽은 ‘형식적으로’일테고 어느 쪽은 ‘털어서 먼지 나올 때까지’일 테고 말이죠.”
“!”
재환의 말에 대현과 현규의 눈이 번득였다.
“오호라? 그렇다면 분명.”
“가장 세무조사 빨리 끝나고 웃으면서 나올 기업이 끄나풀이라는거네?”
“저희가 안암대에 후원 빼자마자 누가 그 돈 채워줬는지도 조사해도 되고요.”
“확실히···.”
“인맥 통해서 정부에 손 내밀었으니 그쪽은 분명히 비 한 번 피했다고 생각할 것이고 말이죠.”
재환의 말에 현규는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럼 국책은행과 주거래를 하는 기업이 가장 유력하겠네.”
“그렇게 한 배 탄 기업··· 기업 하나 있지 않아?”
현규의 말에 재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그분’이 차기 경제련 회장 준비하고 있지?”
재환의 말에 대현도 거들었다.
“그리고 ‘그분’이 우리 아버지 다음으로 경제련 회장 되면 새 정부하고도 협력하겠다고 선언했고.”
“···.”
좀 더 일이 커졌다고 생각할 때 대현이 와인병을 들었다.
“한잔 더 하자.”
***
콰아앙!
같은 시간 경제련 회의에서 나온 뒤 그랜드힐슨호텔의 자기 집무실에 도착한 김우준은 손에 잡히는 물건을 닥치는 대로 집어 던지며 헐크가 되어있었다.
“아오! 진짜 일처리를 뭐 이딴 식으로 한 거냐!”
“죄, 죄송합니다 회장님!”
김선규는 사색이 된 얼굴로 쩔쩔맸다.
“경제련에서 이거 눈치챈 빠꿈이가 안 나올 것 같아? ‘내가 다 했소.’라고 광고한 거냐? 지금!”
김선규는 정말 죽을 것 같은 심정이었다.
“대, 대한산업은행에서 융자 조건에 재단 투자에 대한 건도 이··· 있어서···.”
좀 더 많은 양의 융자를 위해 쓴 것이었고, 약속대로 일부 안암대 재단에 보내긴 했는데 이게 더럽게 일이 꼬였다.
“내가 뭔 말도 안 되는 짓 때문에 경제련 들쑤신 혜성의 그 새끼 이야기 듣고 피가 거꾸로 솟았다!”
“죄, 죄송합니다! 제가 조치하겠습니다!”
김선규가 쩔쩔매면서 어떻게든 해결하기 위해 움직여야 했다.
그때 집무실 한 곳에 있는 전화가 울렸고, 김선규가 황급히 달려가서 받았다.
“여보세요? 네··· 아, 네!”
김선규의 얼굴이 완전히 하얘져서 입을 열었다.
“회장님··· 부총리 전화입니다.”
“!”
분노한 김우준은 그 이야기에 황급히 달려가서 전화를 받았다.
“아, 나 김우준이요.”
한때는 김우준 밑에서 일했던 상사맨이었던 인물이였으나, 지금은 정권 VIP의 신뢰하는 거물이 돼서 지금은 처지가 바뀐 상황이었다.
***
성북동의 고급 주점에서는 한 대학교의 동창들이 이야기하고 있었다.
“마실까?”
조성길은 미소를 지으면서 같이 잔을 부딪쳤다.
그리고 조성길을 보며 흐뭇한 동기가 말했다.
“친구야, 어쨌건 네 덕분에 일이 쉽게 풀렸다.”
박경준은 그렇지 않아도 그분의 오더로 인해서 경제련과 재벌 관련에 관한 조사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동창회에서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를 듣고 바로 윗선에 보고했었다.
그건 아주 좋은 꼬투리였고, 윗선에 이야기가 나왔을 때 혜성부터 쳐보라는 오더가 내려왔다.
“네가 아주 공익 제보자다!”
같이 있던 여당 국회의원 유상우 역시도 친구를 추켜세워줬다.
“하하하, 내가 뭘 했다고?”
“학교 내에서 이번 거 잡음 안 나오게 하면 여의도 콜도 문제없어.”
벌써 그 이후에 대한 보상까지도 이야기가 나오자 조성길은 흡족한 미소를 짓다가도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내가 총장까지는 올라가 봐야지.”
동창들도 빵빵하고, 좋게 보시는 ‘그분’이 재단 이사회에 살짝 이야기해주면 나머지는 고속도로였다.
“열심히 해봐. 지금 VIP께서 IT산업 키운다고 정보통신부쪽 엄청 키운다 하더라도.”
“캬- 그러면 총장까지 올라간 다음은 어디서 콜이 오나?”
“앞서가지마 이 친구들아!”
세 동창은 껄껄 웃으면서 다시 술잔을 기울였다.
***
다음날 재환은 점심 이후, 흡연실에서 담배 한 대 태우며 신문을 봤다.
[정식적인 세무조사인가, 기업 때리기인가?]
[국세청 “엄격하게 진행할 것.”]
[경제련은 비상사태? 향후 재계의 행방은?]
신문사들이 있는 대로 보도를 하고 있고, 정부를 비판하는 쪽 절반, 재계를 비판하는 쪽이 딱 절반이었다.
“판은 점점 커지고, 어쨌거나 4월 1일 혜성 세무조사는 강행될 것 같고.”
재환은 그것을 보고 고민하고 있었다.
“손볼 인간은 많고, 한 방 먹일 주먹은 어디로 갈지 모르겠고···.”
재환이 중얼거릴 때, 갑자기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어이~ 재환 동생!]
최대현 사장이었다.
“어, 형님.”
지난번 이후로 이쪽도 형님 동생 하자며 지냈는데 바로 이렇게 전화를 했다.
“부탁드린 그거 벌써 알아주신 겁니까?”
[하핫, 이런 건 전화 몇통에 떡을 치지!]
역시나 저렴한 언변이었지만, 확실하게 알아왔으니 곧바로 가기로 했다.
[경선호텔로 와라. 커피 한잔하면서 제대로 대화할 자리 생겼다.]
“오케이! 알겠습니다.”
재환은 통화를 마치고서 길게 숨을 내쉬었다.
“좋아! 그럼 이제부터 역공 들어간다.”
재환은 곧바로 경선호텔로 향했다.
“아, 여기야!”
재환이 도착하자 테라스가 있던 그때의 혜성해운 계약장소에서 대현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재환이 와서 인사를 하자 거기에는 초조한 얼굴의 두 중년 남성이 있었다.
“인사해. 안암대 재단 분들이다.”
대현이 소개하자 그들은 황급히 일어나서 재환에게 정중하게 인사했다.
“처, 처음뵙겠습니다. 안암중앙학원의 이사 권명진입니다.”
“재단 법인본부장 유영수입니다.”
‘교수회보다 더 위의 분들이 오셨군.’
법인 재단의 임원들이 나타나자 재환은 상황이 완전히 뒤집혔다고 쾌재를 불렀다.
인사를 나눈 뒤 자리에 앉았을 때, 재환은 여유 넘치는 얼굴로 초조해보이는 두 임원을 바라봤다.
‘솔직히 쫄리시죠?’
이미 이사장 선에까지 경제련의 항의를 받은 상태였다.
교수 갑질 하나로 따지기에는 이미 정도를 넘어서 학계, 재계, 정계가 전부 충돌하는 소용돌이가 된 것이다.
“자~ 겁 없이 학장님에게 막말한 장본인 왔으니 두 이사님도 뭔가 이야기를 해야하지 않겠어요?”
대현이 판을 깔아줬지만, 오히려 저자세로 나온 건 안암재단 쪽이었다.
“신 상무님. 이번 일에 대해서는 굉장히 유감입니다.”
“···유감이죠.”
재환 역시 칼자루를 아예 자기한테 건네주는데 그냥 뽑기로 했다.
“그래서 이쯤에서 묻으시러 온 겁니까?”
“조성길 학장 문제는 이사회 내에서 처리하겠습니다.”
“하나로 끝날 문제가 아닐텐데요?”
재환은 공과대학 내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 전부 말해줬다.
임원들의 표정이 점점 바뀌면서 ‘이거 잘못걸렸구나.’하는 한숨이 나올 정도였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재환의 말에 두 임원은 발밑 합의라도 해야겠단 생각으로 말했다.
“관계자들 해임 안건 올리고, 이번 일에 피해입은 분들에게 저희가 최대한 보상할 수 있게 협의하겠습니다.”
재환은 그 말을 듣고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네, 그러죠. 피해는 저 하나가 아니지만.”
이제 화려한 불꽃놀이가 시작될 상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