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먹었으면 소화해라.
인수합병을 마친 뒤로 재환은 차 안에서 전화를 했다.
“인수 성공했어. 현규 네 도움 컸다.”
[하하, 내가 뭘 한 게 있다고.]
재환은 너스레를 떠는 현규를 향해 말했다.
“국책은행에서 대윤그룹이 융자받을 때, 트로이카에 담당예산 300억 가량 배정했다는 거 어떻게 안 거야?”
재환이 그렇게 오버슈팅을 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자문사였던 삼신증권에서 ‘대윤이 주당 4배에 가까운 돈으로 올리려 하고, 그쪽은 너희를 200억에서 250억가량 쓸 거로 생각한다.’라는 첩보를 받은 것이었다.
[누설은 걸리면 큰일 나니 말 못 한다. 그냥 국책은행에 우릴 도와주는 분들이 있다고만 알아둬라.]
“아~ 국책은행에 명륜대나 영북대 장학생이 많나 보구만.”
[엇!?]
재환이 바로 말하자 당황한 현규를 보고 이 녀석은 진짜 블러핑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삼신의 선대 이인철 회장이 대구 사학인 영북대 재단과 과거 성균관 유생들이 설립한 명륜 대학 재단 두 곳을 인수하면서 행정고시나 사법시험에 올라갈 이들을 지원해주는 제도였다.
그래서 정부 내에서도 고위 관료들 중 그 출신들이 많다고 했는데, 국책은행의 융자의 쓰임처 정보 같은 걸 안다면 그곳뿐일 것이다.
“대한산업은행에도 그쪽 출신 많지?”
[야 임마, 그런 거 함부로 말하면 안 돼. 노코멘트 할 거다!]
“그래, 중요한 건 우리가 인수했다는 거지.”
재환은 통화를 마친 뒤로 트럭 문제에 대한 대가는 톡톡히 받았다고 생각하며 휴대폰 플립을 닫았다.
“자~ 이게 내일 발표될 테고, 내일은 가족 외식이나 해야겠다!”
***
[혜성그룹 트로이카 컴퓨터 인수, 미래 사업을 염두.]
[325억원 배팅! 승부사가 나섰다!]
신문사의 광고들을 보면서 재환은 크게 웃었다.
“최고의 크리스마스 선물이네요.”
“내 돈 주고 산 거잖아?”
“반은 제 돈이죠.”
재환의 가족은 크리스마스이브를 맞이해 그랜드 호텔에서 외식 자리를 가졌다.
평소 희경이 좋아하던 집의 스테이크를 썰면서 최고급 와인도 곁들였다.
“오랜만에 가족들 나와서 칼질하니 좋다.”
“거, 칼질이 뭐야, 칼질이?”
재벌 사모님이지만, 수수한 말투를 쓰는 명숙을 희경이 다그쳤지만 그러면서도 자신이 다 썰은 고기를 슬쩍 건네주며 그릇을 바꿨다.
“많이 드세요. 오늘 식사는 이 아들이 삽니다.”
“호호호, 그래. 아들 덕에 요즘 호강하네.”
재환이 과거의 삶으로 돌아온 지도 벌써 반년이 지났다.
두 부모님의 건강도 관리하고, 외식도 자주 하고 간간이 술도 마시면서 그동안 쳐다보지도 않았던 가족들과 오붓한 시간을 자주 보내게 되었다.
가끔 아버지 희경의 뭐 같은 성미가 폭발하긴 했지만, 이제는 핏대 올려 싸울 나이도 아니었다.
‘나도 속으로는 50이 넘었으니···.’
그때 희경이 재환을 향해 와인을 건넸다.
“재환이 한잔해라.”
“네.”
재환은 와인을 한 잔 받고는 가볍게 흔들고서는 한 모금 마셨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와인 사업을 한번 해보고 싶었지.”
“지금이라도 하시지 그래요?”
“아니야. 유통망은 그렇다 치고, 캘리포니아에 포도농장 알아봤다가 너무 오래 걸릴 것 같아서 포기했어. 돈도 돈이고.”
“아~ 수입이 아니라 아예 브랜드 와인을 만드시려고···.”
재환은 아버지한테 그런 취미가 있는 줄도 지금 알았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천천히 계획해 보세요. 미국 쪽이라면 제가 인맥도 동원할 수 있으니까요.”
“미국 유학 보냈더니 그쪽도 아는 사람이 있어? 핫!”
“호호, 너희 아버지 맨날 은퇴하고 농사짓는다고 하시더니, 그게 포도농장인줄 몰랐네.”
오붓하게 세 가족이 식사를 할 동안 지나가던 다른 손님이 재환 일가를 보고 반갑게 달려왔다.
“어이구, 신 회장님 아닙니까?”
“음? 아, 형님!”
희경은 그 손님과 반갑게 악수를 했다.
“하하하, 서울 언제 오셨어요? 아, 얘길 하지.”
짧은 머리에 날카로운 인상이 군인이나 고위 공무원으로 보이는 사람이었다.
“어머, 교수님 오랜만에 뵙네요.”
“제수씨는 점점 아름다워지는 것 같습니다. 하하하.”
교수님이라 불린 이는 명숙과도 반갑게 인사를 하면서 미소를 보였다.
그리고 희경이 재환을 그에게 소개했다.
“국방대의 김 교수님이야. 고향 형님이라서 나랑 오래 알고 지냈지.”
“아, 안녕하세요?”
“아드님이시구만, 반가워요. 김명진이라고 합니다.”
김명진 교수는 재환에게 명함을 건네주고, 가족과 인사를 마친 뒤 다음에 보자며 돌아갔다.
“혜성식품이 군납 입찰할 때 저 분이 담당이었지.”
“군인 기회란게 있었군요.”
“찬스는 무슨~ 근무지원대 소령 때부터 겁나 깐깐했어. 과자를 하나하나 뜯어보고 무게를 재지 않나, ‘안에 있는 성분 알려달라.’ ‘위생상태는 어떠냐?’ 무섭게 몰아붙였다니까.”
군납에 있어서 엄격한 모습을 보였다는 말에 재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지내면 좋은 분이겠네요.”
“그래서 별 못 달고 만년 대령으로 국방대 교수로 정년 기다린단다.”
“흐음~”
삼신 시절에는 군납 같은 일에 관심 없었지만, 지금 혜성은 사업 재편을 한다 해도 식품업은 꾸준히 할 것이니 머릿속에 담아두기로 했다.
‘복지시설에 마트 몇 개만 진입해도 퀄리티만 잘 지키면 수익은 꾸준한데.’
훗날 해군등의 일부 병과는 PX민영화로 민간 유통업체가 진출하여 상당한 수익을 올렸는데 그게 떠오른 것이었다.
재환은 연휴가 끝나면 기획실에서 군납쪽 거래에 대해 좀 알아보기로 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
“요새 주식으로 돈 많이 버나 보다?”
“네, 그걸 전부 혜성전자 주식으로 돌리고 있죠.”
“아주 좋아~”
재환은 해외 주식에 대해 투자하면서 거기서 오를 때마다 매각하고 즉시 혜성그룹에 있는 계열사들 주식을 사들였다.
훗날에 회사를 물려받을 대규모 지분을 받으려면 상속세 문제가 크니 지금부터 미리 움직이는 것이었다.
“종합기획실 이사 하면서, 다른 회사에도 좀 신경을 써야지. 특히 네가 인수한 회사들은 더욱더 말이야.”
“저 다른 곳으로 간다는 말인가요?”
“그래, 전자로 가라. 혜성전자 등기임원 자리를 겸하게 할 테니까 힘좀 써봐.”
“네, 그렇게 하죠.”
“그리고 승진 준비해라. 이사회에서 종기실 상무 자리로 올릴 테니.”
곧바로 상무로 올려준다는 말에 재환은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그럼 한 가지 더 부탁이 있습니다.”
“뭔데?”
“저는 인수합병이랑 타 계열사 오가느라고 정작 중요한 종합기획실 자리를 자주 비웠어요.”
“좀 그렇긴 하지?”
“제가 자리 비울때마다 박찬우 부장이라고, 계속 수습을 하던 분이 있습니다. 그분 이사로 올려주세요.”
“좋아, 종기실에 임원급 한 명 늘리는 건 문제 없지.”
희경은 재환이 요청한 것을 모두 수용해주기로 했다.
1998년.
새해가 밝은 뒤로 재환은 종합기획실 상무 겸, 혜성전자 등기임원에 오르게 됐다.
승진한 뒤로 축하를 받은 다음에는 신문에 올라온 인사이동 몇 줄을 제외하고는 조용했다.
“삼신에서 온 선물이라고요?”
“네, 그렇습니다.”
재환은 혜성건설 종합기획실에 온 선물 박스를 받고는 천천히 뜯어봤다.
손바닥만 한 사이즈였는데, 그것을 뜯어보자 나온 것은 반도체였다.
“엉? 이건 분명···.”
그건 삼신전자에서 최초로 개발했던 16메가 D램이었다.
“이야, 이거 추억이네···.”
재환이 과거 삼신에 있던 시절 전자 박물관에서 본 물건이었다.
다른 반도체 중에서도 16메가 D램을 전시했던 것은 이 물건이 일본 반도체 회사인 동경전기나 이바라키 공업보다 먼저 만들어내 상용화를 시킨 기념품이기 때문이다.
“이걸 현규가 승진선물로 줬단 말이지.”
재환은 피식 웃으면서 친구가 보내준 귀한 선물을 품 안에 넣고서 떠날 준비를 했다.
“자, 당분간은 전자와 종합기획실을 오갈 것 같습니다. 잘 부탁드릴게요.”
“걱정하지 마십시오. 상무님.”
재환은 자신의 부재 시 박찬우에게 맡긴 뒤로 움직이기로 했다.
***
혜성전자는 화성에 공장이 있었는데, 본사 또한 남영동 그룹 본사에서 공장 옆으로 이전된 상황이었다.
“잘 부탁해요. 신 상무님.”
혜성전자의 대표 장진욱 부사장은 화성공장 옆에 마련된 본사에서 재환에게 혜성전자의 재무재표를 같이 검토했다.
“확실히 생각이 많이 드네요.”
“그렇습니까?”
“현재 혜성전자의 재무상태를 보면 적게나마 꾸준히 매출 증가는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매출 대비 수익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이유는 오디오 스피커와 라디오 사업이 점점 사양길이 되면서 판매 대수를 올리기 위해 가격을 인하하고 그만큼 판매량은 늘어나도 수익이 적었다.
“이건 확실히 개선이 필요해요.”
“네, 그래서 트로이카 컴퓨터 인수 건에 대해서는 신성장 동력으로 저 역시 기대하고 있습니다.”
재환은 장진욱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임원회의를 준비했다.
“1주일 뒤 이 자리에서 트로이카와 혜성전자의 임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한번 논의를 해 봅시다. 그동안 사업계획서를 준비할게요.”
“알겠습니다. 그럼 제가 준비하지요.”
재환은 이후 1주일 동안 화성공장과 안산공장을 수시로 시찰했다.
그러면서 현재 혜성전자와 트로이카에서 생산하는 제품들에 대해 하나하나 분석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대표이사가 불렀지만, 실질적으로 재환이 주최한 혜성전자와 트로이카 컴퓨터의 통합 임원회의가 열렸다.
“1주일간 혜성전자의 화성과 안산공장을 다녀오고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첫 마디는 혜성전자에 대한 칭찬이었다.
“BQ시스템 도입 이후 가장 우수한 성과를 보이는 곳은 혜성식품과 혜성전자입니다. 둘 다 위생이 무엇보다도 중요한데 잘 지켜주셨습니다.”
임원들은 오너 2세의 칭찬에 흡족한 듯 미소를 지었다.
“자, 그럼 다음 이야기 시작해볼까요?”
재환은 두 회사의 임원들을 한 번씩 둘러보면서 입을 열었다.
“먼저 안산공장과 화성공장에 대한 유기적인 소통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재환은 그렇게 말하면서 임원들에게 돌린 기획서에 첫 장을 읽었다.
“지금부터 안산과 화성 사이에 셔틀 버스를 운행할 겁니다. 하루에 6대씩 운용할 겁니다.”
“주 인원은 연구팀하고, 임원들이 이용하는 겁니까?”
임용태의 물음에 재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가 이용할 수 있지만, 가장 많이 타실 분들은 연구원분들과 임원 여러분일 겁니다.”
각기 다른 곳에서 다른 사업을 하는 두 공장을 오가는 것은 납득할만 했다.
하지만 재환이 다음에 말한 것은 충격적이었다.
“그리고 사업 재편을 위해 스테레오 라디오를 올해 안에 단종시키려고 합니다.”
“네?”
혜성전자 임원들은 그 말에 거세게 반대했다.
“상무님!”
혜성전자 임원 중 한 명인 이기남 상무의 말에 재환이 답했다.
“말씀하세요.”
“정말 스테레오 라디오를 단종시키신단 말입니까?”
“네~ 이미 매출 대비 수익으로 안나오는 제품이라서요.”
재환의 말에 성수가 핏대를 세우며 말했다.
“상무님, 혜성전자는 전신이 라디오와 스피커 사업부여서 이곳으로 수익이 나오는 구조입니다. 그런데 그 제품을 단종시키면 대안은 무엇입니까?”
재환은 그 물음에 대해 답했다.
“그래서 지금부터 신사업을 말하겠다고 한 겁니다. 앞으로는 컴팩트 카세트 플레이어나 소형화된 라디오 위주로 갈 겁니다.”
대형제품에서 갑자기 소형 휴대용 제품으로 전환하겠다고 선언한 재환이었다.
“이미 본사에서도 이야기가 나온 거고요. 스테레오 라디오의 가격을 줄여서 잔뜩 팔지만, 수익은 점점 줄어드는 것 때문에 판단한 겁니다.”
재환은 그런 다음 트로이카 컴퓨터 임원들을 보며 말했다.
“스피커는 어디에나 쓰입니다. 하지만 라디오로만 한정하면 안 되죠. 앞으로는 팀을 쪼갤 겁니다.”
재환의 말에 임원들의 입은 점점 크게 벌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