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큰 스케치만 할게요.
재환은 집에 돌아가서도 아버지와 같이 토론을 했다.
“그러니까 곧 있으면 전국적으로 금을 모으자는 붐이 분다?”
“네, 어떻게 보실 줄은 몰라도 지금 달러랑 금 모으는 데 혈안이 된 정부는 이런 캠페인으로 어떻게든 부채를 줄이려 할 겁니다.”
재환의 이야기를 들은 희경은 줄담배를 태우면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제가 몇 번 이야기 드렸지만, 정권은 바뀌어요.”
“흐으음.”
현재 여당인 새한국당 대선후보 이현찬이 야당인 국민회의당의 대선후보 김대준과 대립할 때였다.
아직까지 여론 조사는 이현찬이 압도적이고, 거기에서 김대준은 의리상 희경이 후원해준 정치인중 하나였다.
“만약에 그 사람이 된다면 우리는 나쁠 것 없긴한데···.”
“네, 그래서 새정권이 되면 가장 먼저 할 게 뭐겠어요? 재벌 대기업에 대한 구조조정을 요구할 겁니다.”
이미 IMF가 요청한 금리조정과 고강도의 구조조정 제안으로 인해 20대 기업들을 뼈를 깎는 심정으로 돌아간다.
거기에 대해 재환은 새 정권에 대한 호의적으로 사업구상을 하기위해 생각한 것이었다.
“사실 대기업 이름으로 8억을 기부하건 10억을 기부하건 와닿는 거 적은 거 알죠. 하지만 그걸 가지고 딱 기자들 보는 앞에서 높으신 분과 사진 한 방 찍으면?”
여론은 물론이거니와 앞으로 5년간은 좋은 관계로 이어나가면서 규제 문제에 대해 논의할수 있을거고 더 큰 사업의 파이가 생길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외환위기가 생기며 금융감독원이 생기기 전의 상황이고, 비상경제대책위원장이 나오기 1년 전이니 그 전에 미리 나라에 좋은 이미지 좀 심어주자는 재환의 제안.
희경은 생각을 정리하고 재환에게 말했다.
“무슨 말인지 알겠다. 하지만 이 일은 애비에게 맡겨라.”
“네?”
“너는 그냥 신사업 계획하고, 착실하게 활동해. 이런 일은 회장인 내가 알아서 할 테니 말이야.”
기업 외적인 일에 대해서 처리하는 것도 오너의 일이라는 마인드를 가진 희경은 재환이 제의했던 ‘기증 퍼포먼스’와는 다른 방법으로 움직이려고 했다.
“처음에 금딱지 8억 원 기부한다고 했을 때 재떨이로 머리 날리려 했는데, 무슨 상황인지 알았으니 됐어.”
“앞으로 회사에 가장 중요한 걸 생각하면,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새 정부가 은행 돈줄 말릴까 봐 그런 거지?”
“네, 지금 시국에 밉보여서 은행 대출규제 같은거 잘못 걸리면 큰일이니까요.”
재환이 그것에 대해 말했지만, 희경은 자신만의 생각이 있다는 듯 말했다.
“확실히 알아두거라. 정부 관련은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거기에 대해선 독단적으로 움직이지 말고 따로 논할 생각도 말거라.”
“뭐,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죠.”
재환은 아버지가 저렇게까지 말하니 믿고 맡기기로 했다.
그리고 희경이 원하는 대로 신사업에 대한 계획서를 준비하기로 했다.
그리고 재환이 돌아갔을 때, 집무실에 남은 희경은 어디론가 급히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아, 잘 지내셨어요? 저 신희경입니다.”
그리고는 긴 통화를 마치면서 근처에 보이는 종이에 뭔가를 다급하게 적기 시작했다.
***
며칠 뒤 회장실에서는 고위 임원진들이 모인 자리에서 이사회에 올라갈 사업계획서를 두고 토론했다.
이것을 내놓은 것은 역시 재환이었고, 모두가 읽어나가면서 하나하나 검토했다.
“컴퓨터 사업이라?”
“지금 딱 좋은 회사가 있습니다.”
재환은 종이를 넘기면서 말했다.
“TA컴?”
“그건 브랜드 이름이고 정식명칭은 트로이카 컴퓨터, 다들 들어보셨을 거예요. 우리 혜성과도 몇 번 교류했었죠?”
“사무용 컴퓨터와 복사기기 등을 납품하는 회사이죠. 현재 매출 8천억 원이고, 내년이나 내후년쯤에는 매출 1조 찍을 알짜기업입니다.”
“와~ 세네. 컴퓨터 팔아서 그 정도면.”
희경은 나쁘지 않은 곳이라고 생각하며 유심히 회사정보를 살펴봤다.
“그리고 미국의 IT 대기업 휴이스&타일러...즉 HT사와 ODM 위탁생산을 하고 있습니다.”
재환의 설명을 들은 임원 중 범준도 손을 들어 말했다.
“회장님, 이거 괜찮은 것 같습니다. 현재 주가도 보니 올해 초 1만2천 원대까지 갔던 기업인데 외환위기 충격을 받았는지 주당 4천 원대를 오가고 있습니다. 게다가 프린터나 복사기, 컴퓨터는 앞으로 수요가 무궁무진하지 않습니까?”
범준의 말에 희경 역시도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재환은 그것을 보면서 앞으로 있을 일에 대해 계산하고 있었다.
‘처음은 국민컴퓨터 사업으로 물꼬를 틀 테고, 그다음이 복사기, 프린터 사업, 마지막으로 초고속인터넷이야.’
그 세 가지가 98년 한꺼번에 터져 트로이카 컴퓨터는 이후 4천원 하던 주가가 10만 원대까지 치솟게 된다.
물론 그 뒤로 2000년대에는 순식간에 몰락하지만, 그건 재환이 손을 써서 막을 수 있었다.
“혜성전자의 이름으로 인수하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이제 라디오보다는 컴퓨터 사업이 더 주목 받겠군요. 게다가 현재 스피커 사업과도 시너지 효과가 클 겁니다.”
재무이사인 임창훈 전무 역시도 수긍하자 재환은 이 건은 이사회에서는 프리패스로 통과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럼 인수합병을 준비할 회계법인과 투자은행은 어디로 할까요?”
창훈의 말에 재환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회계법인은 그대로 가도 이번에 투자은행은 삼신증권으로 합시다.”
“네?” 범준과 창훈 두 임원이 재환을 바라보며 다시 물었고, 희경 역시도 별안간 삼신을 통해 M&A를 진행하냐고 쳐다봤지만, 번복은 없었다.
“적대적 M&A의 가능성도 있으니 아예 그쪽 전문가로 하려고 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것을 염두에 두고 이사회에 안건을 올리겠습니다.”
재환은 그것에 대해 당부한 뒤로 이사회에 올릴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하기로 했다.
앞으로 1997년에 남은 시간은 한 달.
재환은 마지막까지 알차게 보낼 준비를 했다.
***
이후 12월은 놀라운 일들이 연속으로 일어났다.
1997년 12월에 이뤄진 15대 대통령선거에서는 만년 대선후보였던 김대준이 일흔이 넘은 나이로 당선됐다.
그 덕분에 재환의 명을 듣고 그동안 야당이었던 국민회의당에 계속 후원을 해왔던 희경과 혜성그룹은 새 정권의 주역들과 밤새 축하 통화를 나눴다.
그리고 12월의 다른 사건은 시민단체가 모여서 금 1445돈을 국가에 기증하고 국무총리가 주재하는 ‘금 모으기 운동’의 첫 불씨가 당겨졌다.
“세상에··· 저걸 진짜 하네?”
TV에서 관련 뉴스를 보고 있던 희경이 탄식을 내뱉자, 재환이 옆에서 거들었다.
“다음 달이면 전국적으로 저 운동이 퍼지겠죠.”
재환이 다시금 언급하자 희경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이 애비가 말했지? 내가 해결할 테니까 너는 인수합병 문제나 신경 써라.”
“네, 그쪽은 잘 되고 있어요.”
회계법인과 삼신증권이 일을 잘해줘서 인수합병 논의는 스무스하게 흘러갔다.
트로이카의 사장인 임용태 역시 긍정적인 반응이었고, 재무이사인 창훈이 가서 대략 회의를 나눈 뒤, 이번에는 재환의 차례였다.
“오늘 저녁, 거기 사장님과 이야기를 나눠 보기로 했어요. 늦어도 다음 달까지는 끝낼 겁니다.”
“달을 넘기면 내년인데? 흐음, 뭐 알겠다. 재촉하지 않을 테니 잘 해봐라.”
“감사합니다~”
이사회에서는 전자 산업 확장을 위해 통과된 안건이었고, 재환이 올린 프레젠테이션은 양 사에 경영진들을 이해시키기 충분했다.
이제 세부 조율만 잘 치루면 끝난다는 생각에 재환은 집 안에서 가장 좋은 정장을 갖춰 입었다.
“아들, 나가게?”
“네, 오늘 호텔에서 식사하고 올 거예요.”
“이거 먹고 가.”
명숙이 건넨 것은 쓴 내가 확 나는 약이었다.
“뭐에요?”
“우리 가족 모두 보약 한 첩 했어.”
지난번 건강검진 이후로 보약을 지었다는 명숙의 말에 재환은 고맙게 받아들고 쭉 마셨다.
“지난번에 평택에서 사 온 영양제는 어땠어요?”
“호호, 그거 너무 좋더라. 얼굴에 기름기가 쭉 빠지고, 잠도 잘 오는 거 있지?”
미군부대를 통해서 구매한 수입 영양제가 잘 맞았다는 말에 재환은 다음에도 몇 박스 더 주문하기로 했다.
“그럼 다녀올게요.”
“그래~ 잘 다녀와. 엄마가 믿고 있어.”
재환은 어머니를 한 번 안아주고 협상을 위해 집을 나섰다.
***
그랜드 호텔은 한산했다.
그리고 트로이카 컴퓨터의 임용태 사장이 오기를 기다렸다.
“시간이··· 늦네?”
약속한 시각인 오후 7시가 막 된 상태인데, 주변을 둘러봐도 임 사장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이런 자리에서 늦을 사람이 아니라고 들었는데, 무슨 일이 있나 싶어 재환이 휴대폰을 들었다.
그때 재환의 앞을 막아서는 이가 있었다.
“음?”
“아이고, 여기 계셨군요.”
30대 초중반에 빳빳한 수트 차림의 청년은 재환을 보고 반갑게 인사하며 대뜸 손을 내밀었다.
“누구신지···?”
“소개가 늦었군요. 대윤증권의 김선규라고 합니다.”
“!”
분명 트로이카 컴퓨터 사장과 만나기로 했는데 뜬금없이 대윤그룹의 사람이 오니 재환이 흠칫했다.
현재 재계서열 1위인 아성의 자리를 노리는 삼신과 대윤의 그 대윤이었다.
‘일 났군.’
트로이카 사장 대신 대윤의 사람이 왔다는 건 절대 좋은 일이 아니었다.
그는 자리에 앉으면서 자신의 명함을 꺼내 재환에게 건넸다.
“제가 초대한 분은 아닌 것 같은데요?”
“네, 하지만 전달할 말이 있어서 왔습니다.”
김선규는 자리에서 커피를 시키면서 여유있는 미소를 보였다.
재환은 그를 보면서 조용히 물었다.
“대윤도 트로이카 컴퓨터 인수 논의로 오신 건가요?”
“네~ 맞습니다. 그리고 대윤전자와 트로이카 컴퓨터 인수로 저희 대윤증권이 M&A자문으로 있습니다.”
느긋하게 말하니까 더 빡칠 일이었지만, 재환은 차분하게 말했다.
“이미 대윤전자는 컴퓨터 시장에서 회사 하나 먹었잖아요?”
21세기를 앞두고 컴퓨터 사업은 삼신, 대윤, GH(금화), 경선등이 나섰고, 그중에서도 삼신과 대윤이 앞서나가는 상황이었다.
거기에 중견업체이자 전국에 컴퓨터매장을 두고 있는 SJ컴퓨터에 200억 출자를 해서 자회사로 포섭한 일이 불과 한 달 전이었다.
“사업은 크게 벌릴수록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희 대윤이 트로이카도 인수할 겁니다. 이미 임용태 대표와도 협상 중입니다.”
“유감이군요. 저희 역시도 이번에는 물러날 생각이 없어서 말이죠.”
재환의 단호한 의지에 선규는 입꼬리를 말며 비웃음을 보였다.
“재계서열 2위와 25위의 싸움인데, 이걸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혜성이 얼마를 투자해도 우리 웃돈이 더 넘칠 텐데요?”
‘니네 우리한테 돈 싸움으로 안 돼.’라는 말이었지만 재환은 믿는 곳이 충분했다.
“현재 외환위기로 인해 주거래은행인 제중은행이 큰 위기라고 하던데요? 너무 크게 먹으면 배가 터져요.”
“기업이 은행을 걱정하는 그 상황은 기특하게 봐 드리죠. 근데 한 5대 그룹쯤 돼서 생각해보세요. 사는 곳이 달라서 돈의 길이 달라 보일 겁니다.”
‘벌써 갈아탔군···.’
이미 제중은행이 대윤, 기어, 코아빌등의 대기업들의 부채 때문에 엄청난 대출을 해주다가 간당간당한 것은 알고 있었다.
이후 대윤이 중앙산업은행과 제휴하고 판을 더 크게 벌렸다가 21세기가 되는 순간··· ‘와장창!’이라는 것은 이미 재환의 기억 속에 있었다.
재환은 커피를 쭉 마시면서 선규에게 선언했다.
“분명히 말씀드리죠. 저희 혜성은 트로이카 컴퓨터 인수전 포기 안 합니다.”
“오~ 정면으로 해 보겠다고요? 좋습니다. 사내 현금 외화로 짭짤하게 챙기셨다더니 보이는 게 없나 봅니다?”
“네, 맘대로 생각하세요. 남의 돈 빌려서 어디까지 회사 쳐드실지 기대되네요.”
순간 김선규의 이마에 실핏줄이 살짝 돋았다.
‘주제를 모르고···.’
선규는 협상을 통해서 큰아버지인 김우준 대윤 회장에게 ‘적당히 싸워주다 놈들이 가진 달러나 금을 노려 협상해봐라’라는 말을 들었지만, 생각을 바꿨다.
대윤그룹의 이름으로 놈들의 인수는 물만 먹게 해주겠다고 말이다.
“커피값은 제가 내겠습니다. 있는 쪽이 베풀어야죠.”
일어나면서 마지막까지 속을 긁는 선규를 향해 재환이 맞대응했다.
“네~ 그것도 은행대출이라면 고맙게 대접받죠.”
“···나중에 봅시다.”
재환은 선규가 떠난 자리를 두고서 혀를 찼다.
“대윤이 백색가전 안되니 컴퓨터랑 매장 인프라를 노리는거군.”
역사대로 이 시국에 상윤자동차와 경상토건등의 건설과 자동차를 닥치는 대로 처먹더니 결국 전자도 그 마수가 뻗쳤다.
재환이 이 일에 대해서 임원 회의를 생각하고 있을 때 갑자기 휴대폰이 울렸다.
“여보세요?”
[아, 재환아. 나 현규야.]
“!”
삼신증권을 대윤에게 언급했는데, 타이밍 적절하게 연락이 온 이현규였다.
“어, 무슨 일이야?”
[재환이 너 저번에 우리집 오고 싶다고 했지? 연말에 친척들이 모여서 식사하는 자리가 있는데 거기 올래?]
삼신가 사람들을 모두 만날 수 있다는 자리에 재환은 미소를 지었다.
“언제야?”
[아마 이번주 금요일쯤?]
“알겠어. 준비할게.”
재환은 통화를 마치고서는 미소를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