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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사는 재벌의 삶!-18화 (18/244)
  • 18- 네? 어디라고요?

    재환이 움직이고 있을 때, 건설과 해운 매각을 진행하는 또 다른 중역인 김범준 역시도 바쁘게 달렸다.

    “하, 이게 참 뭐라고 해야 하나···.”

    범준은 재계에서 유명한 기어 모터스 그룹을 만나고 있었다.

    기어 모터스의 회장 김철우는 대학 동창인 범준을 보고서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그룹의 창업자 일가가 아닌 기술자 출신으로 회장까지 올라간 인물이라 이런 위기에서 언제나 승부사의 경영을 해 왔던 사람이다.

    그래서 이번에 혹시나 했지만, 대답은 정중한 거절이었다.

    “우리가 건설업을 좀 더 키우려는 건 사실이야. 자사에 공장과 지방의 숙소 짓는 데만 하더라도 필요한 게 많으니까.”

    “네, 그래서 혹시 기어 모터스라면 혜성건설 인수가 어떨까 했습니다.”

    “포트폴리오도 좋았고, 우리에게 건설업이 필요한 상황이긴 하지만···미안하네. 지금은 상황이 너무 안 좋아.”

    이미 재계서열 6위의 상윤까지 망했는데, 기어 모터스도 어떻게 될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알겠습니다. 부디 이 시국을 잘 넘기고 다음에도 또 사업 논의로 뵙기를 원합니다.”

    “그래, 부디 혜성도 회사 잘 되길 비네.”

    짧은 인사만 마친 뒤 물러난 범준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이거 힘들겠네.”

    이미 마이다스와 대한산업은행이 있었지만, 제3의 길로 대기업의 인수를 노렸지만, 그게 잘 안됐다.

    이대로 가다간 안 될 것 같아 다른 기업에도 연락하려 했다.

    삘리리리리리리-

    그때 범준의 휴대폰이 울렸다.

    “누구지?”

    전화를 받은 순간 거기에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이고~ 형님, 잘 계셨죠?]

    “···성윤규?”

    뜻밖의 인물이었다.

    이미 계열사 문제에 거기에 은닉한 비자금 열쇠까지 들킨 뒤로 쫓겨난 사람이 별안간 자신에게 전화했다.

    “무슨 일인가?”

    [오랜만에 형님을 좀 보고 싶어서요. 요새 혜성건설 많이 힘들죠?]

    “그건 이미 떠난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매각문제로 논의 드릴 게 있습니다.]

    “!”

    악마의 속삭임과도 같은 소리였다.

    ***

    “대충 완성은 돼 가는데, 그 상황에서 또 해야 될 게···.”

    재환은 서류를 보면서 혜성건설 다음 해운에 관련된 매각준비도 시작했다.

    현규에게 부탁하긴 했는데, 그 녀석의 연락이 조금 늦었다.

    “하긴 거기도 지금 바쁘겠지. 지금쯤이면 D램 특허 협상으로 디스램이랑 겁나게 싸우면서 인수 아직 노릴 테니까.”

    그 상황에서 재환은 매각에 대해 움직였다.

    그러면서 회사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던 자료들을 다시금 검토했다.

    그리고는 기획실에서 사람들을 불렀다.

    “자, 다들 모이셨죠?”

    “네, 실장님.”

    박찬우 부장을 중심으로 혜성 내에서 가장 엘리트 인물들인 기획실 사람들을 두고 재환은 오더를 내렸다.

    “혜성해운에 대한 프레젠테이션을 다시 만들어야겠습니다.”

    “네?”

    이미 만들어진 프레젠테이션 말고 새로 만든다는 말에 그걸 또 언제 다 완성할지 다들 걱정스러운 얼굴들이었다.

    “네~ 기획실도 같이 진행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물론 저도 참가할 겁니다.”

    “!?”

    와이셔츠의 소매 단추를 풀고 팔을 걷어붙인 재환은 직접 움직이기로 했다.

    “시키기만 하면 됩니까? 당연히 저도 도와야죠.”

    재환의 반응에 밑에 직원들은 도련님이 얼마나 도움이 될지 불안한 마음으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하지만 이후 그들은 재환이 없으면 프레젠테이션 준비가 안 될 정도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

    며칠이 지나고, 밤새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하느라 혜성그룹 기획실과 혜성해운의 사무실은 언제나 불이 켜져 있었다.

    “자~ 여러분. 야식이 왔습니다.”

    재환은 양손에 가득 든 도시락과 음료수를 가지고 반갑게 외쳤다.

    “감사합니다. 실장님!”

    재환이 직접 도시락과 음료수를 다른 직원들에게 나눠줬고, 그들은 피로 속에서 조금의 쉴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밑에 직원들이 야식을 먹을 때 재환은 직원 중 하나의 컴퓨터로 다가가 CRT 모니터로 비치는 프레젠테이션 문서를 바라봤다.

    그리고는 천천히 읽어나가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거 누구 자리입니까?”

    “네? 아, 그거 제 자리입니다!”

    올라온 것은 바로 준호였다.

    일전에 BQ시스템에서 원활한 감사를 위해 날짜와 시간이 찍힌 필름카메라를 배치하자는 아이디어를 내줘서 기억하고 있는 사원이었다.

    “아니, 천천히 드세요. 잠깐 둘러보는 겁니다.”

    “아, 네. 실장님.”

    다시 준호가 도시락을 먹고 있을 때 재환은 표정을 감추면서 문서를 보며 생각했다.

    ‘에이~ 이건 아니지. 콕 집어서 컨테이너선과 벌크선 위주라고 할 필요 뭐 있나? 해운 새로 시작하는 업체가 무슨 사업 할 줄 알고.’

    재환은 그것을 지우고 자신이 쓰려다가 뭔가 아닌 것 같아서 키보드를 두들겼다.

    그리고는 문서에 빨간색 글씨로 남겨놨다.

    [+ 너무 컨테이너선만 부각하지 마세요. 이럴 때는 추후 LNG선이나 유조선 같은 사업도 준비하고 있다면서 페이퍼 플랜을 같이 삽입해도 됩니다. 최근 부도난 회사들에서 중고선박 인수해오면 돼요.]

    ‘···미래사업 내용이니 각종 밝은 미래만 적어둬도 문제없고요.’

    재환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다른 단어에 대해서도 오·탈자를 슬쩍 고쳐주고, 지적할 만한 곳을 빨간펜 글씨로 조언을 삽입했다.

    식사를 마친 다음에 본다면 신경을 써서 거기에 대해 수정할 것이다.

    끼익- 끼익- 끼이이이이잉-

    프린터에서 나오는 문서를 보고 재환은 그것을 천천히 읽어봤다.

    현재 혜성해운의 재무제표에 대한 내용이었다.

    “이거는 인수 협상이 확실할 때 말해도 되는데··· 아니다, 지금 써야 바로 팔 수 있으려나?”

    재환이 그것을 두고 생각하자 황급히 달려오는 여직원 한 명이 있었다.

    “아, 실장님. 죄송합니다.”

    “아뇨, 뭐가 죄송해요? 자요.”

    재환이 프린터 옆에 있던 파일에 출력물들을 담아줘서 건네주자 그 여직원은 얼굴을 붉히면서 황급히 달려갔다.

    그렇게 식사 이후 잠시 휴식을 하고 있을 때 재환은 흡연실로 가려다가 전화 한 통을 받았다.

    “여보세요?”

    [···.]

    “누구십니까?”

    말이 없던 상대방의 긴 한숨 소리가 먼저 들리고 있었다.

    재환은 그 말에 기다려봤다.

    [···기조실장님. 저 김범준입니다.]

    “아, 대표님?”

    김범준 사장의 연락에 재환은 당황하면서 시계를 봤다.

    현재 시각 밤 11시 20분.

    임원들에게 있어 그렇게 늦은 시간은 아니었지만, 수화기 너머에서까지 술 냄새가 나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설마 술 드셨어요?”

    [네··· 한잔했습니다.]

    “다른 임원들도 계십니까? 이왕이면 매각문제로 다른 거래처와 마시는 거라면 좋겠는데 말이죠.”

    [···저 혼자입니다.]

    ‘뭐야 이 양반?’

    그룹 사장이라는 양반이 별안간에 혼자 술 마시다 취해서 재환에게 전화를 건다? 뭐가 이상한 일이었다.

    취했으면 택시 불러서 어서 집으로 들어가라고 하고 싶었지만, 재환은 혹시 무슨 일이 있나 싶어서 조용히 물었다.

    “혹시 술같이 마실 사람 필요해서 저한테 전화 거신 겁니까?”

    [···제가 지금 무례를 저지르는 것을 잘 알지만, 긴히 논의 드릴 이야기가 있어서 그런데 잠깐 뵐 수 있습니까?]

    “!”

    역시 뭔가 있다.

    재환은 곧바로 나갈 준비를 했다.

    “어디입니까? 바로 택시 잡고 그리로 가죠.”

    [고맙습니다. 실장님.]

    재환은 위치를 들은 다음 통화를 마치고서 길게 숨을 내쉬었다.

    “후우~ 분명 매각 건 이야기일 텐데 술기운 빌어서 나를 부른단 말이지···.”

    나이로 보나 연륜으로 보나 전생을 합쳐도 조금 더 김범준이 베테랑 경영자겠지만, 관계가 관계였다.

    재환은 사무실에서 재킷과 가방을 챙기고 프레젠테이션을 준비하는 기획조정실로 향했다.

    “다들 죄송합니다. 일이 생겨서 먼저 가봐야 할 것 같네요.”

    “아, 네. 실장님!”

    찬우가 달려와 인사를 하고 말했다.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아뇨, 저 퇴근하면 10분 있다가 알아서 다들 보내세요. 너무 오래 일했어요.”

    “아니, 아직 남은 일이 좀···.”

    “내일 아침 하면 되죠. 우리 아무리 오래 일해도 자정은 넘기지 맙시다.”

    “알겠습니다.”

    재환은 그것을 당부한 다음 모두에게 인사하며 남영동 혜성그룹 사옥을 나섰다.

    ***

    야밤에 택시를 타고 도착한 곳은 동서울터미널 인근의 포장마차 거리였다.

    “혜성의 2인자가 이런 곳을 다 찾네?”

    포장마차에 소주야 재환도 나이 먹고 나서 몇 번 먹어보긴 했지만 자주 갈 곳은 아니라 생각했다.

    일렬로 늘어선 포장마차 중에서 가장 허름하고 작은 곳이 있었고, 재환은 그곳의 문을 열었다.

    “어서오슈~”

    순대를 썰고 있던 아주머니가 맞이했고, 그 앞의 테이블에서는 돼지 껍데기 볶음에 소주잔을 기울이는 범준이 있었다.

    “읏차, 이런 데를 즐기시는 취미가 있는 줄은 몰랐습니다?”

    재환이 옆자리에 앉자 재환은 곧바로 옷매무새를 다듬고 인사했다.

    “실장님, 오셨습니까?”

    “편하게 이야기하세요. 편하게.”

    극존칭으로 하니 더 어색해지는 분위기여서 재환은 빈 잔 하나 꺼내서 자신도 한 잔 따라달라고 했다.

    “이모님, 여기 소주 한 병 더 주세요.”

    “아, 동행이었어요? 그럼 더 드려야지.”

    인상 좋은 포장마차 주인은 손가락 만한 크기지만 순대 하나를 더 썰어서 소주와 같이 건네줬다.

    그렇게 두 번째 잔 때도 소주를 나눠마신 재환은 곧바로 입을 열었다.

    “임원 생활 오래 하시면서 암묵의 룰 잘 아시죠?”

    “···잘 알고 있습니다.”

    “뭐, 룰이라고 해야 기본적으로 인간의 도리만 지키면 되는 거지만 말이죠.”

    “···.”

    범준은 말없이 소주를 쭉 들이켰다.

    벌써 몇 병째 마셨는지 몰라도 술 냄새가 확 풍겨오는 게 만취한 상태가 아닌게 다행일 정도였다.

    “그래서, 무슨 일입니까? 인수자가 나오지 않아서 그런 겁니까?”

    “아니요.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이 왔습니다.”

    범준은 품 안에서 명함을 하나 꺼내 재환에게 보냈다.

    “아니 얼마나 대단한 사람이길··· 어이구야.”

    재환은 그 명함을 보고서 순간적으로 탄식이 나왔다.

    [경선그룹 종합기획실 대표이사 부사장: 최대현]

    현 재계서열 5위이자 훗날 삼신, 아성, 금화와 더불어 재계 4대천왕이라 불리는 KS그룹 오너의 명함이었다.

    “KS··· 이때는 아직 경선이란 이름 그대로 썼지.”

    경선그룹 내에도 건설 부문이 있긴 하지만, 도급순위로는 혜성보다 한 끗발 낮았다.

    “적절하네요. 해외에서 석유화학이랑 플랜트 공사 전문으로 하는 곳이고··· 이 시국에 아파트 전문 건설사 하나 가지면 내수에서도 돈 좀 굴릴 수 있으니.”

    거기에 경선의 이름이라면 만족스러운 제안이어서 신희경 회장도 흔쾌히 승낙할 것이다.

    “그럼 이거로 기념주 하자는 겁니까?”

    “아닙니다. 차마 제가 받아들일 수 없는 제안입니다.”

    “음? 왜요. 그쪽에서 인수대금 후려치기라도 합니까?”

    김범준은 뭔가 말을 하려다가 다시 한번 소주를 따르고 쭉 따른 다음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무슨 일이십니까?”

    “···그 배후에 성윤규가 있었습니다.”

    “!”

    재환은 그 말을 듣고서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리고 왜 이렇게 밤에 불러서 술에 취한 채 재환에게 조심스럽게 말한 건지 이제 알 수 있었다.

    “여기 소주 한 병이요.”

    재환은 소주를 시키고 김범준의 빈 잔을 채워주며, 자신도 한 잔 들이켰다.

    속이 알싸한 감각을 느꼈을 때, 안주로 순대 한 점을 먹고는 생각에 잠긴 재환이 말했다.

    “성윤규 그 양반에게 찌라시 퍼트리게 하고 혜성 인수를 노린 그룹이 경선이었군요.”

    “그러면서 저도 포섭하더군요. 지금 자신이 차기 회장을 보좌하는 비서실 이사니, 인수되면 저도 부른다고요.”

    “거기가 전무급만 해도, 지금 혜성 대표이사 자리보다 연봉이 세죠? 두 배는 될 텐데.”

    “전 혜성의 사람입니다. 그래서 실장님에게 이야기 드리는 겁니다.”

    “회장님에게도 알리셨나요?”

    “지금 건설사와 해운 매각준비는 저와 이사님의 선에서 끝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재환은 김범준을 다시 보게 됐다.

    ‘분명 혜성 특검 때만 하더라도 모든 걸 그만두고 실토했던 양반인데··· 조직이 건재하다면 절대 배신할 리가 없다는 건가?’

    어쨌건 이런 이야기를 희경 말고 자신에게 말해줬다는 건 고마운 일이었다.

    “좋은 정보였습니다. 써먹기도 좋고요.”

    “어떻게 하실 겁니까?”

    “제가 부딪혀 봐야죠. 경선의 대현 형님하고 자리 마련해봐야겠습니다.”

    “직접 움직이신다고요?”

    “네~ 사실상 최대현이 경선 차기 회장이니 제가 가는 게 도리에 맞을 거 같네요.”

    재환은 야근하다 불려와 이런 정보를 듣게 되자 머릿속에 또 다른 시나리오가 돌아갔다.

    “자~ 이것까지만 먹고 일어나시죠? 택시는 제가 부르겠습니다.”

    그리고는 김범준 사장에 대해서도 생각을 바꾸기로 하고 잔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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